토마스 뮌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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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뮌처 초상. 크리스토펠 반 시켐의 1608년 판화.
뮌처 생존 당대의 초상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혹자는 이 판화는 한스 홀바인바젤에서 뮌처를 그린 그림을 보고 베낀 것이라고도 하지만, 모든 증거는 홀바인이 뮌처가 1524년 말 바젤을 방문하기 전에 홀바인은 프랑스를 떠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가능성으로는 제발트 베함이 원래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 베함은 소위 누렘베르크의 신을 믿지 않는 세 화가 중 한 명이었는데, 뮌처는 1524년 뉘렘베르크를 방문했다.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 1489년? ~ 1525년 5월 27일)는 종교개혁 시기에 활동한 독일의 급진 개혁가, 재세례파 지도자이다. 민중이 압제자에게서 해방된 신정정치를 실현하려고 농민 반란을 이끌었다.

생애[편집]

뮌처는 슈톨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라이프치히 대학교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성직자이자 신학박사로서, 중세의 신비주의교부 철학에 정통했다. 1519년에 라이프치히에서 마르틴 루터를 만나, 루터와 에크의 라이프치히 논쟁에 참여했다. 여기서 루터의 영향을 받아 루터의 제자가 되었고, 루터의 추천으로 작센 동부 츠비카우의 목사로 부임하여 종교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1520년츠비카우에서 '츠비카우의 예언자들'이라는 급진 종교개혁 집단의 지도자 슈토르흐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위는 성서의 계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빛으로 드러난다는 과격한 주장을 했다. 1521년에 츠비카우에서 추방당한 뮌처는 비텐베르크프라하를 여행했고, 1523년에 알슈테트에서 공동체 목사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미사>를 비롯한 여러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곳에서 폭력에 의한 천년왕국의 건설을 설교하였다. 이러한 종말론 사상은 그리스도께서 속히 재림하여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멸할 것이라고 믿었던 중세 후기에 나타난 종말론에 기초한 것이다. 이들에게 적그리스도는 로마 교황이었다.

뮌처는 로마 가톨릭의 성례 제도를 반대하였고, 유아세례를 배격하고 성인 세례만 주장하는 등 기성교회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과격한 입장을 취함으로 루터로부터 멀어졌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오직 성경만을 주장하는 루터를 맹목적으로 성경 문자에 의존하여 내적인 말씀을 억누르고 있다고 비난하고, 교회는 성령이 중심이 되어야 하므로 루터의 성경중심적 개혁운동은 잘못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뮌처의 급진적인 사상은 보헤미아를 중심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1524년에 뮌처는 뮐하우젠으로 가서 재세례파 공동체의 목사가 되엇고, 1525년에는 그곳에서 파이퍼와 함께 농민반란을 이끌고, 일종의 민중 신정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시대를 준비하려면 민중이 압제자에게서 해방된 신정정치를 구현해야 하며, 이를 위해 종교·사회를 모두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뮌처는 민중이 내면의 계시를 깨닫고, 당면 문제보다는 크리스트교 세계 전체의 해방을 생각할 것을 바랐지만, 민중은 그렇지 못했다. 농민군의 지도자가 된 그는 프랑켈하우젠(Frankelhausen)전투에서 패한 후,생포되어 1525년 5월 27일에 사형당했고, 그의 시체는 네 토막으로 나뉘어졌다.

평가[편집]

뮌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를 농민반란의 지도자로 평가하며, 더 나아가 사회주의 혁명의 전통이 뮌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뮌처와 재세례파의 사상이 모두 신비주의 요소를 가지고 있고, 하층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뮌처를 재세례파의 창시자로 보기도 한다. 반면에 당시의 종교개혁가들은 뮌처의 신비주의, 영적 특성을 중시해서 그를 이단이라고 보았다. 오늘날의 역사가들도 뮌처를 프로테스탄트의 성령주의 시초로 본다.

독일계 종교개혁가들 중에는 논란이 아예 없었거나 논란이 현대까지 지속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이는 뮌처도 마찬가지이다.[1]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복잡한 유형의 인물인 뮌처는 오늘날 독일의 종교개혁의 초기단계 뿐 아니라 유럽의 혁명분자들의 역사에도 큰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2] 현대의 거의 모든 뮌처 연구자들은 뮌처의 혁명적 행동에 정치사회적 의도가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신학적 교리에 따른 행동이었음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뮌처는 말세가 임박했다고 믿었고, 새로운 시대의 개벽이 도래하기 전에 참된 신자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야 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했다.[3] 종교개혁사에서 그는 다양한 분야, 특히 예배 의례와 성경 주해에 관련된 기여를 남겼지만 과소평가 받고 있다.

각주[편집]

  1. Tom Scott: Thomas Müntzer (1989) (p. xvii)
  2. Günter Vogler: Thomas Müntzer und die Gesellschaft seiner Zeit (2003) (p. 27)
  3. R.W.Scribner: The German Reformation (1986) (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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