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의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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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의회주의(영어: councilism) 또는 평의회 공산주의(독일어: Rätekommunismus)는 1920년에 발생한 사회주의 조류이다. 독일 11월 혁명을 계기로 발생한 평의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 뿐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계급상태 해체를 위한 기반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를 보위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평의회주의는 독일네덜란드에서 유행했는데, 러시아의 레닌은 국가사회주의자로서 평의회주의자들을 "좌익소아병자"라고 비난하였다.

이념[편집]

평의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교리 중 하나는 레닌주의전위당론민주집중제에 반대하는 것이다.[1] 대신 각 작업장, 각 지자체별로 조직된 민주적인 노동자 평의회야말로 노동계급의 조직 및 권위의 자연적 형태라고 본다. 또한 평의회주의는 개량주의의회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와도 대조된다.[2]

평의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계급이 레닌식 전위당에 의존하거나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이 일어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평의회주의에 따르면 노동자들의 혁명은 "혁명적" 정당에 의해 지도되어서는 아니되는데, 왜냐하면 이런 정당들은 또다른 독재 집단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에서 전위당 구실을 한 볼셰비키가 그러한 예다. 혁명적 정당은 혁명을 요구하는 역할만 하면 된다. 그리고 투쟁의 시간을 지나며 형성될 노동자들의 평의회가 노동계급의 자연스러운 조직기구이다. 민주적인 노동자 평의회는 서로 도와가며 사회를 굴러가게 할 것이고 이는 국가사회주의 사회에서 발견되는 상명하복식 관료제와는 상이하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평의회주의자는 아나키스트생디칼리스트와 비교되기도 한다.[3]

역사[편집]

제2인터내셔널제1차 세계대전 개전으로 붕괴하면서 국민주의에 반대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이 헤쳐모였다. 독일에서는 두 개의 주요한 공산주의 경향이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극좌파 정치인 로자 룩셈부르크스파르타쿠스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 지도부의 결정에 불복하면서 1917년 말-1918년 초에 급진적 파업을 거듭하던 노조 평조합원들이었다. 이 중 후자가 독일의 좌파공산주의를 탄생시켰고 독일 11월 혁명 당시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으로 조직되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3인터내셔널이 형성되자 제3인터 중 독일, 네덜란드, 불가리아 사회주의자들이 좌파공산주의적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로는 안토니 파네쿡,[4] 오토 뤼흘, 헤르만 고르터 등이 있다. 한편 영국에서는 실비아 팽크허스트영국 공산당이 또한 좌파공산주의 경향을 표방했다.

상술한 공식적 좌파공산주의자들 외에도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이끄는 이탈리아인들도 흔히 좌파공산주의자로 인식된다. 다만 보르디가와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시각을 부정하며 자신들은 좌파공산주의와 분리된 별개의 정치세력이며 좌파공산주의보다 제3인터에 더 가깝다고 입장을 정리하게 된다. 보르디가 본인은 노조의 정치불개입을 옹호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의 이탈리아 좌파 경향은 "귀족노조"를 비판하며 노조의 대부분 또는 전부가 부르주아의 이해관계에 복종해 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했으며 더이상 계급투쟁의 유의미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 "보르디가주의자들"은 귀족노조와는 구분되는, 계급투쟁을 공공연히 지지하고 공산주의 과격파의 참여를 허용하는 "적색노조" 또는 "계급노조"의 출현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이상 다양한 좌파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블라디미르 레닌의 책 《좌파공산주의라는 소아병》에서 비판당한다.

공통된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레닌의 비판대상이라는 특성을 공유했음에도 좌파공산주의 경향들 서로 사이에는 공통점이 매우 적었다. 예컨대 이탈리아인들은 "민족자결권"을 지지했지만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는 이것을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일종으로 보고 거부했다. 어쨌든 좌파공산주의 경향들은 소위 "전선주의"에 반대했다는 하나의 명확한 공통점을 갖는다. 전선주의란 레닌이 제안한 혁명 전술로, 확고한 목적 추구를 위해 개량주의 정당들(즉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의 전술적 합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전선주의"에 반대를 표명한 네덜란드, 독일, 불가리아,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선거를 의회주의로 비난하며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독일 공산당(KPD)은 좌파공산주의자들을 제명시켰고, 좌파공산주의자들은 독일 공산주의 노동자당(KAPD)을 창당했다. 네덜란드, 불가리아, 영국에도 비슷한 정당들이 만들어졌다. KAPD는 당원 대부분을 빠르게 잃고 결국 해산되었다. 그러나 KAPD의 과격파 일부는 독일 일반노동자조합(AAUD), 일반노동자조합 – 통일기구(AAUD-E) 등 작업장 기반 노조의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중 AAUD-E는 별개의 정당조직에 반대했다.

KAPD의 이론가(파네쿡, 고르터, 뤼흘 등)들은 정당조직 반대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들을 고안해 냈고, 그 결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뤼흘은 나중에 KAPD를 탈당하고 AAUD-E의 설립자로 참여한다. 1933년 독일 국가의회 의사당 화재 사건 당시 방화범으로 붙잡혀 나치에게 죽은 마리누스 판 데어 루베도 네덜란드계 평의회주의자였다. 루베의 공개재판과 처형은 나치 독일의 좌파 탄압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그 뒤 평의회주의 운동으로는 국제 공산주의자 집단, 헨크 마이여, 카요 브렌델, 파울 마티크 등이 있다. 1960년대에 미국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뿌리와 가지, 프랑스의 사회주의가 아니면 야만미개, 영국의 솔리다리티 등을 통해 평의회주의가 재유행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과 평의회[편집]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평의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노동자 평의회가 정치력 면에서나 조직력 면에서나 큰 역할을 했다. 이 러시아의 노동자 평의회들을 소비에트라고 하며, 소비에트 자체가 러시아어로 "평의회"라는 뜻이다. 2월 혁명이 성공하자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들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지지도를 올리려는 꿍꿍이를 품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동을 주장하며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를 제2혁명으로써 붕괴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공화국이 붕괴되고 나자 볼셰비키들은 소비에트 대회를 만들고 노동자들의 소비에트 통제를 무력화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국호와 달리 국가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가 아닌 공산당이 독점하게 되었고, 볼셰비키들이 세운 새 정권은 일당제 독재국가가 되었다. 소비에트 회의의 후신인 최고 소비에트는 공산당에서 이미 결정한 사항에 도장이나 찍어주는 거수기 기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1년에 한 번 소집될 뿐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투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에 관한 평의회주의자들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된다. 2월 혁명과 그 이후 소비에트 시대는 그 성질이 프롤레타리아적이지만, 볼셰비키 정권과 그 최종 결과물인 공산당 관료제는 그 성질이 부르주아적이며 그것을 만들어낸 10월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에 가깝다. 국명부터 기만적인 소비에트 연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평의회주의자들은 소련 정부가 자본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그저 공산당 관료제가 개인 자본가들로부터 자본을 빼앗고 그 자리를 자신들이 대신 차지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런 맥락에서 혁명 이후 진행된 신경제정책이 자본주의적 관계를 방어하고 영속시켰음을 강조한다.

각주[편집]

  1. Pannekoek, Anton. State Capitalism and Dictatorship International Council Correspondence, Vol.III, No.1, January 1937.
  2. Ruhle, Otto. "The Revolution Is Not A Party Affair". 1920.
  3. “Council communism - an introduction”. libcom.org. 2016년 11월 5일에 확인함. 
  4. Anton Pannekoek (1936) Anton Pannekoek (1938) Lenin as philosopher -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philosophical basis of Leni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