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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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칭 구룬 / 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1616년1924년
문장
국새
국가 공금구
1911년 ~1912년
18세기 청 제국의 강역
18세기 청 제국의 강역
수도 허투 아라(만주어: ᡥᡝᡨᡠ ᠠᠯᠠ, 1583~1587)
퍼 아라(만주어: ᡶᡝ ᠠᠯᠠ, 1587~1603)
허투 아라(만주어: ᡥᡝᡨᡠ ᠠᠯᠠ,1603~1619)
자이퍈(만주어: ᠵᠠᡳᡶᡳᠶᠠᠨ, 1619~1620)
사르후(만주어: ᠰᠠᡵᡥᡡ, 1620~1621)
랴오 양(만주어: ᠯᡳᠶᠣᠣ ᠶᠠᠩ, 1621~1625)
묵던(만주어: ᠮᡠᡴᡩᡝᠨ, 1625~1644)
버깅(만주어: ᠪᡝᡤᡳᠩ, 1644~1912) 북위 39° 55′ 동경 116° 23′  / 북위 39.917° 동경 116.383°  / 39.917; 116.383
정치
공용어 만주어, 몽골어, 한어, 티베트어, 위구르어
정부 형태 전제 군주제, 입헌 군주제
황제 천명제 (1616 ~ 1626)
천총제 (1627 ~ 1636), 숭덕제 (1636 ~ 1643)
순치제 (1644 ~ 1661)
강희제 (1661 ~ 1722)
옹정제 (1722 ~ 1735)
건륭제 (1735 ~ 1796)
가경제 (1796 ~ 1820)
도광제 (1821 ~ 1850)
함풍제 (1851 ~ 1861)
동치제 (1862 ~ 1874)
광서제 (1875 ~ 1908)
선통제 (1908 ~ 1912)
역사
 • 누르가치, 겅옌 한 즉위
후금 성립
•국호 개칭
•북경 정복
신해혁명
황제 퇴위
•황실 해체
1616년
1618년
1636년
1644년
1911년
1912년
1924년
지리
면적 13,150,000km2
내수면 비율 2.8%
인구
1820년 어림 383,100,000명
기타
통화 위안 (1889년부터) ()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후금
명나라
중가르 칸국
겔룩파
북원
정씨왕국
중화민국 임시 정부 (1912년)
청나라 소조정
러시아 제국
복드 칸국
티베트 왕국
타이완 민주국
영국령 홍콩
인도 제국
현재 국가 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홍콩의 기 홍콩
마카오 마카오
러시아의 기 러시아
아프가니스탄의 기 아프가니스탄
인도의 기 인도
부탄의 기 부탄
몽골의 기 몽골
네팔의 기 네팔
파키스탄의 기 파키스탄
카자흐스탄의 기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미얀마 미얀마
베트남 베트남
라오스의 기 라오스
일본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신화 ~ 진의 통일 이전
선사 시대
황하·장강 문명기원전 4800?~기원전 3500?
신화·삼황오제기원전 4000?~기원전 2070?
기원전 207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046?~기원전 256
  서주 기원전 1046?~기원전 771
  동주 기원전 771~기원전 256
    춘추 시대 기원전 771~453
    전국 시대 기원전 453~221
고대 ~ 근대의 중국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2~서기 220
  전한 기원전 202~서기 8
  8~23
  후한 25~220

삼국 시대 220~280
  220~265
  촉한 221~263
  229~280
265~420
  서진 265~316
  동진 317~420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386~589
581~619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시대
907~979

916~1125

960~1279
  북송
 960~1127
서하
1038~1227
  남송
 1127~1279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16~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북양 정부, 국민정부) 1912~1949
  만주국 1931~1945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1949~현재

v  d  e  h

대청국(중국어 정체자: 大淸國, 병음: Dàqīngguó,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주 1], 몽골어: ᠳᠠᠶᠢᠴᠢᠩ
ᠤᠯᠤᠰ
Dayičing Ulus, 1587년 또는 1601년 또는 1616년[1] 또는 1636년 5월 15일[2] 또는 1644년 6월 5일[3][주 2] ~ 1912년 2월 12일[4] 또는 1924년 1월 5일)은 대청제국(大淸帝國)[5][6] 청조(淸朝)[7], 중화대청국(中华大清國)[8], 암바 다이칭 구룬(만주어: ᠠᠮᠪᠠ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Amba Daicing Gurun)[9][주 3], 만청(滿淸)[10], 중국(中國, 만주어: ᡩᡠᠯᡳᠮᠪᠠᡳ
ᡤᡠᡵᡠᠨ
Dulimbai Gurun)이라고도 한다.

청 제국은 현재 중국 본토 지역에 존재했던 왕조 가운데 가장 큰 정치적 실체였다. 청은 1644년에 멸망한 명나라보다 영토는 2배 이상 커졌고, 인구는 3배 이상 늘어나 청 말기에는 5억이 넘었다. 청 제국 안에는 스스로 '한족'이라 여겼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중화제국으로 편입되지 않았던 티베트족, 이슬람교도인 위구르족, 일부 몽골족, 남서쪽 변겅 지대를 따라 거주했던 버마족타이족, 대만과 그 밖의 변방과 내지의 고지대에서 새롭게 식민화된 지역의 원주민들, 그리고 청의 왕좌를 차지한 '만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11]

청은 중화제국의 2000년 역사를 마감하는 장이 됐지만,[12] 청의 통치자인 만주족은 그들의 영역을 전적으로 '중국화'하지는 않았다. 단지 수많은 종족-민족적 구성원들을 통치하기 위해 한족 세계에서는 진시황한 무제로부터 이어져온 중국의 '황제'이자 '천자', 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카안'(몽골어: ᠬᠠᠭᠠᠨ Qa'an),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쿠빌라이 카안의 전통을 이은, 불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1758/59년 이전의 지도자, 준가르 콩타이지를 대체한 이리장군(만주어: ᡳᠯᡳ
ᠵᡳᠶᠠᠩᡤᡳᠶᡡᠨ
Ili Jiyanggiyūn)을 통한 간접적인 지배자이자 '이슬람의 보호자'라는[13] 유가적 배역을 맡았을 뿐이다.[14] 따라서 청을 중화제국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틀린 관점이며, 중국은 청의 일부일 뿐이며, 한족 신민들은, 숫자가 절대 다수였음에도, 만주족 고유의 여러 가지 특성이 제도와 문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청 제국[15] 아래에서 정치·문화적으로 소수였다.[16] 《대청율례(大淸律例)》는 단지 한족 신민들만을 위한 것으로, 제국의 나머지 신민들은 체계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홍무제가 펴낸 《대명율(大明律)》에서 그 내용을 거의 따왔기 때문에 비한족 신민들에 적용된 사례가 없다. 청 제국의 각 종족은 각기 다른 법률을 적용받았다. 만주족은 《팔기칙례(八旗则例)》 티베트와 몽골족은 《이번원칙례(理藩院则例)》, 동투르키스탄의 무슬림은 《회동칙례(會同则例)》의 적용을 받았다.[17]

청사[편집]

최근 일부 청대사 연구자들이 이른바 “신청사”(New Qing History)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스스로 객체화시키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연구를 언급하기도 하면서 개별 연구자들의 다양한 주장을 분류한다.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대체로 만주족의 정체성이 청대에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그리고 그 정체성이 제국의 정책과 문화 및 군사활동의 성공과 실패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학파로서 신청사 연구자들은 청 제국을 단순히 중국사의 한 시기로 여기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있으며, 실제로 이들 모두가 만주족은 사실상 중국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중국을 지배한 다른 제국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신”청사에 속한다고 여기는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인종적 전통은 영속적이라는 낡은 생각이 역사적 담론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신청사 연구를 낭만화된, 그리고 사실로써 검증할 수 없는 역사적 이상으로 몰아가는 위험을 안고 있고, 신청사로 여겨지는 연구자들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구청사[편집]

신청사의 근원은 과거의 청사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12년 청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미국인과 영국인들은 청 제국에서 만주어와 만주족이 지닌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만주어를 공부했고 이들 중 몇몇은 한어를 배우는 수단으로 만주어를 이용하기도 했다. 청과 교류한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은 대부분 청을 “타타르” 왕조, 혹은 “만주” 왕조라 불렀고 만주족이 외래 정복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일부 미국인과 영국인들은 만주족과의 동질감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유럽인들과 비슷하게 중국을 성공적으로 정복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청 제국의 멸망 후, 19세기와 20세기 중국의 역사는 중국의 민족주의적 관점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蕭一山, 朱希祖, 錢穆 등의 저작이 유명했다. “만청(滿淸)”이라는 용어는 과거 제국의 무능력, 부패, 압제에 대한 비난과 함께 중국어 저술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20세기 초 중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청대사를 “왕조,” 즉 단순히 중국사의 한 시기로 규정했고 이러한 관점은 곧바로 영어권 학계에 전해졌다. 이 세대가 남긴 놀라운 학문적 유산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바로 청조의 시종(始終) 연도이다. 지금 학자들은 청대가 중원의 정복으로 시작하여 1911년 10월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로 끝났다는 견해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청대를 “1644년부터 1911년까지”로 보는 것은 중국의 강고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이다.

청 제국의 시종 연도는 다른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전제와 함께 1980년대까지 영어권에서 청사를 서술하는 데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는 또한 존 킹 페어뱅크가 미국 내 중국사 연구의 학술적 프레임을 구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시기였다. 페어뱅크와 그의 제자들의 영향 하에 청대는 중국사의 한 왕조로 간주되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어 학습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는데, 이는 제국의 모든 자료가 한문으로 작성되었거나 혹은 만주어에서 한문으로 번역되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주어와 만주족에 대해 페어뱅크가 갖고 있던 3대 전제 가운데 마지막은 늦어도 19세기 말까지 중국 내 모든 만주족은 동화, 혹은 페어뱅크의 표현대로 "한화"(漢化: sinicized 혹은 sinified)되었다는 것이다.

즉 만주족에게는 독자적인 문화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건륭제에 대한 페어뱅크의 관점은 해롤드 칸(Harold Kahn)의 《Monarchy in the Emperor’s Eyes: Image and Reality in the Ch’ien‐lung Reign》 (1971)에 잘 나타난다. 이 탁월하고 박식한 저작에서 칸은 유가적 강직함을 실현하려는 황제의 의식적 노력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점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가들 역시 이러한 관점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말 지핑(Ji Ping)이라는 필명을 쓴 사람과 멜리코프(G.V. Melikhov) 사이에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지핑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국경분쟁은 중국측 주장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그 근거는 이 분쟁지역을 과거에 청이 정복하고 통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만주족이 완전히 한화된 이상, 만주족의 정복은 곧 중국의 정복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속적인 영토권을 입증해 준다는 것이다.

이와 상반되는 경향도 있었다.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1943)와 《Dictionary of Ming Biography》(1976)라는 탁월한 두 연구서를 만든 역사가 팡짜오윙(房兆楹)과 그의 아내 뚜리엔쩌(杜聯喆)가 이에 속한다. 팡짜오윙은 역사가이자 도서관 사서로 미국에 이민하여 1957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명말-청대 역사에 대한 방조영의 서술을 보면 그도 청대 만주족이 한화, 혹은 적어도 동화되었으며 만주어는 청사 연구에 필수적이지 않다는 당시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는 보인다. 그러나 그가 저술한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는 만주족의 전통, 언어, 관습이 청대의 독특한 특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책은 청사를 서술하면서 만주어 용어와 만주족 풍습을 언급한 최초의 주류 저작이었다. 방조영과 아내 두련철은 이 거대한 공구서의 핵심 연구자이자 저술가였지만 팡짜오윙은 역사를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는 중국어 교수였다.

1960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조나단 스펜스를 만났을 당시 팡짜오윙은 중국어 교수였다. 팡짜오읭을 통해 스펜스는 만주족의 유산이 적어도 황실 가족에게는 중요한 것이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는 만주족의 전통이 황실가족의 취향, 가족생활, 역사인식, 중국에 대한 관점을 형성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첫 번째 책인 《Ts’ao Yin and the K’ang‐hsi Emperor》(1966)에서 스펜스는 만주어와 만주족의 관습이 황제와 만주족 귀족들의 개인적인 삶과 그 외양을 구성하였음을 생생하게 전했다.

'구'청사가 지닌 결함을 일깨우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학문적 영향력이 평가절하된 또 한사람은 로버트 리(Robert H.G. Lee)이다. 그의 The Manchurian Frontier in Ch’ing History 는 1970년에 출판되었다. 당시에 청 제국의 흥기를 지역적 맥락에서 검토한 저작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42년에 나온 프란쯔 마이클(Franz Michael)의 《The Origin of Manchu Rule in China》 이었다. 마이클은 이 책에서 만주족의 정치관습과 사회조직을 조심스럽게 소개했지만, 그의 주된 주제는 정치적으로 경험이 미숙한 만주귀족들이 중국의 사례를 연구함으로써 통치술을 학습했고 마침내 명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할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이었다.

로버트 리의 관점은 이와 달랐다. 마이클의 개괄에 따르면 변경지역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에너지가 만들어질 수는 있었지만 그 자체가 정치적 혁신이나 변화의 원천이 되지는 못했다. 반면 로버트 리는 변경지역을 지리환경, 정치지리, 경제구조 및 독자적인 정치사를 가진 하나의 완전한 세계로 설명했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는 페어뱅크 학파의 용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그가 주장한 내용은 후에 다른 사람들이 따르고 더욱 발전시킨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가 설명했듯이 청조를 탄생시킨 변경지역은 청의 경제, 황실가문의 정체성, 그리고 청 제국의 전략적 판단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로버트 리 역시 페어뱅크와 마찬가지로 만주족은 동화되었고 더 이상 누르하치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여겼지만, 그가 쓴 청조의 발상지에 대한 지역사는 이 지역이 지닌 지속적인 중요성과 만주족의 완전한 동화라는 두 주장이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구청사가 신청사로 변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세 번째 인물은 조세프 플레쳐(Joseph Francis Fletcher, Jr.)이다. 플레쳐가 만주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이미 중국어와 몽골어를 익히고 17세기 몽고의 역사학에 대해 학위논문을 쓴 상태였다. 그는 대만에 거주하는 시버족 역사가 광루[廣祿]에게서 만주어를 배웠다. 플레쳐는 광루가 만주어 자료를 읽는 것을 녹음했는데, 하바드에서 공부한 플레쳐의 제자들을 1980년대까지도 이를 들을 수 있었다. 플레쳐가 만주어를 공부한 목적은 중앙아시아와 내륙아시아의 진정한 통합사(integrated history)를 서술하기 위해서였다. 몽골와 투르키스탄의 정복을 제외하고 청 제국은 그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플레쳐는 이 시기를 연구하는데 만주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80년대 초 그의 저작에서, 그리고 청사 연구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플레쳐는 만주어 독해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님을 지적하고, 만주어가 청 황실의 언어였던 만큼 모든 청사 연구자가 배워야 하는 과목이라고 강조했다. 대부분의 청사 연구자들은 이런 견해를 무시했고 만주어로 쓰여진 청대 자료에는 모두 한문 번역본이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으로 신청사 연구자들의 선구자인 사뮤엘 그루퍼(Samuel Martin Grupper)가 있다. 그는 1980년에 마하칼라[大黑天] 신앙에 대해 학위논문을 썼다. 중국어, 몽고어, 만주어, 티베트어 독해 능력을 바탕으로 작성된 그루퍼의 이 놀라운 저작은 청사 연구자들이 마하칼라 신앙의 의례적 기반을 이해하는 데 획기적인 기술적 수단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면에서도 한문자료에만 의존하는 연구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청의 종교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그 후 발표한 몇 편의 글에서 그루퍼는 아직까지도 완성되지 못한 진정한 “청사연구”의 윤곽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플레처의 제자 가운데 거트러드 로쓰 리(Gertraude Roth Li)는 무권점자 만문자료를 이용하여 학위논문을 썼다. 로쓰 리는 계속해서 청초의 역사에 대한 논문을 썼고 하와이 대학에서 만주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만주족 국가의 초기 형성과정에 대한 로쓰 리의 학위논문은 지금까지 무권점자 만문자료에 근거하여 쓰여진 유일한 영어저작이다. 플레쳐는 관대하게도 그의 수업을 듣고자 하는 모든 청사 연구자들에게 만주어를 가르쳤다. 이에 호응한 청사 연구자들이 비트리스 바틀렛(Beatrice Bartlett), 피터 퍼듀(Peter Perdue), 그리고 파멜라 크로슬리였다. 바틀렛은 특히 청사의 모든 부분에서 만문 자료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틀렛은 당안 자료를 활용하는 데 탁월했고, 만문 자료의 수량, 범위, 상황, 내용을 가장 일찍부터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1980년대 말 바틀렛은 중국의 당안관에 (대부분 중화인민공화국에 있지만 대만에도 일부) 소장되어 있는 만문 자료의 수가 백만건에 달한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플레쳐를 놀라게 만들었다.

1984년 플레쳐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미국에서 만주어를 배우고자 하는 대학원생들에게는 몇 가지 방법이 남아 있었다. 워싱턴 대학교의 제리 노만(Jerry Norman)은 여러 가지 언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만주어 사전인 《The Manchu-English Lexicon》(1978)의 저자였다. 워싱턴 대학 외에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분교의 제임스 보손(James Bosson)과 인디아나 대학의 로렌스 크레이더(Lawrence Krader)에게서 만주어를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일본에서는 만주어 학습이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중국에서도 만주어 학습의 필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는 단지 당안관에 방치된 엄청난 수의 만문 자료의 목록을 만들고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아시아를 제외한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만주어 연구지는 독일이었다. 독일의 학자들은 만주어 센터를 여러 개 설립했다. 이곳의 만주어 프로그램은 에리히 해니쉬(Erich Haenisch), 할트무트 발라벤스(Hartmut Walravens), 발터 푹스(Walther Fuchs) 등이 관할하고 있었는데, 지오반니 스타리(Giovanni Stary)와 마틴 김(Martin Gimm)과 같은 학자들을 배양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엄격한 언어훈련과 분석을 강조했고 문학적 활용에 중점을 두었다. 플레쳐와 달리 독일 학자들은 역사가를 배양하는 데 주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스타리의 제자인 니콜라 디 코스모(Nicola di Cosmo)가 미국에 와서 인디아나 대학의 박사과정에 들어오면서 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기초가 한층 강화될 수 있었다.

신청사[편집]

《New Qing Imperial History》 (2004)의 편집자들은 신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새로운 청사연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 여기에는 역사가 외에도 미술사가, 지리학자, 문학가 등이 포함된다 - 만주족에 대한 새로운 관심, 그리고 그들이 한인과 중국 문화, 또한 중국의 통치하에 있던 다른 비한족 집단과 맺은 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조안나 웨일리-코헨(Joanna Waley-Cohen)은 신청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주족의 정치전통에 깃든 내륙아시아적 기원을 깨닫게 되면 만주족의 특징, 그리고 중국사에서 청대가 지닌 특징을 이전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청사의 핵심 목표이다. 신청사 연구는 중국과 중앙유라시아에 걸쳐, 그리고 그 너머에 세워졌던 제국의 역사 뿐만 아니라 제국의 여러 문제, 제국적 맥락, 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는 근대로의 이전과 관련한 복잡한 문제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만약 만주족과 그들이 제국에 끼친 지속적인 영향을 인식하는 것이 신청사와 연관이 있다면, 페멜라 카일 크로슬리 연구 역시 여기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1990년 크로슬리 “후기 중화제국에서의 종족성”(Thinking about Ethnicity in Late Imperial China)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나는 “한화”가 중국사 연구에서 필요하거나 혹은 중요하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고아가 된 전사: 만주족 삼대와 청 세계의 종말》(Orphan Warriors: Three Manchu Generations and the End of the Qing World, 1990)에서 나는 처음으로 19세기에서 20세기 중국의 중부지역에 거주하는 만주족 가문의 삶과 의식에 대해 서술했다.

그 책의 서론에서 크로슬리는 청 제국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중국적 정치제도에 문화적으로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프란쯔 마이클의 주장에 문제를 제기하고, 메리 라이트(Mary Wright)가 《The Last Stand of Chinese Conservatism》에서 태평천국 이후 개혁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만주족이 유가적 가치에 완전히 동화되어 일체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반박했다. 전체적으로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한 바는 만주족의 정체성이 청대에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주족의 정체성은 한인의 문화와 수세기 동안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고, 청 제국이 해체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을 때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형태와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

1992년에 발표한 “중국의 통치(The Rulerships of China)”에서 크로슬리 교수는 과거의 청사 연구가 묘사해온 것과 달리 청의 통치자들은 문화적으로 변용되거나 동화된 자들이 아니었음을 자세히 설명했다. 청의 통치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만들기 위해 “유가적” 격식과 만주, 몽골, 티벳의 종교적 관습이나 이미지를 의식적으로 번갈아 사용했고, 그들의 지위는 제국 내 모든 종교와 그들이 정복한 모든 것들로부터 획득한 정당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로슬리의 책 《반투명 거울》(A Translucent Mirror, 1999)은 이 주제에 대해 내가 몇 년간 발표해온 논문과 글을 정리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크로슬리는 청 제국이란 황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저술하고 수정한 그 스스로에 대한 역사였으며 이것은 한인 대중이나 한인 지식인들의 요구나 기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크로슬리 고수는 흔히 “신청사”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 저술과 연구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전제와 방향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때로 모두 신청사 학파에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저명하고 때로 가장 과감한 신청사 옹호자는 에블린 러스키이다. 러스키는 중국 사회사와 경제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후 1990년대부터 만주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청 제국에서 만주족의 문화적 성향이 제국 전체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에서 황실 가문의 개인적 습관, 의복, 결혼관습, 언어사용, 사고방식을 자세히 검토한 러스키는 만주족이 중국황제의 전통과 일체감을 가졌다거나 기본적으로 유가적인 관점에서 스스로를 바라보았다는 오랜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러스키의 철저한 연구는 종교적 신앙과 관습에서, 교육에서, 그리고 자기표현에서, 청 황실이 차별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러스키는 이러한 특징이 제국 전체의 특색에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본고의 주제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1996년 러스키의 아시아학회 회장연설이다.

여기에서 러스키가 말한 청사 “다시 생각하기”는 당시 막 부상하고 있던 연구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러스키에 따르면 청 제국의 영토와 주요 업적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만주족이 동화 혹은 “한화”되었다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청이 정복, 통치, 교육, 예술, 경제면에서 이룩한 모든 성공은 오직 만주족이 자신의 본연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인들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는 사실로써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과거의 관점이었다. 나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러스키는 “한화”란 우선 학술적으로 취약한 개념이며 만주족 엘리트나 제국 전체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청 제국은 앞선 명조보다 영토가 두 배에 달했고 국제 무역과 상업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는데, 이는 만주족과 그들이 가진 특징을 극복한 결과가 아니라, 바로 그 특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신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학자인 러스키가 1996년 회장 연설에서 주장한 내용은 청대의 모든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웨일리-코헨이 설명했듯이 신청사 학파에서는 수준높은 연구가 발표되었다. 제임스 밀워드의 《Beyond the Pass》는 신강성이 만들어지기 전 청이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하고 점령하는 과정에 대한 독특한 분석이다. 다른 청사 연구자들이 만문 사료를 활용하는 것처럼 밀워드는 투르크 사료를 사용하여 신강지역이 독특한 언어, 관습, 그리고 역사적 정체성을 지닌 지역이었으며, 이러한 특징들은 한족의 이주가 점차 증가하고 청의 혹독한 식민통치 속에서도 살아남았음을 보여주었다. 마크 엘리엇의 《만주족의 청제국》은 만주족에 의해, 그리고 만주족을 위해 쓰여진 자료를 활용하여 17세기-18세기 팔기 주방의 삶을 내부로부터 묘사하고 만주족의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피터 퍼듀의 《China Marches West》는 청의 몽고와 준가르 정복에 대한 영어저작 가운데 가장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다수의 만문 자료를 활용하여 강희제의 무인으로서의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저작들은 청 제국을 서술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청사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 저작들은 청 제국에 바탕을 둔 시종(始終) 연도를 제시한다. 이들은 청의 시작점을 명나라가 멸망한 1644년으로 보지 않고 홍 타이지가 제국을 선언한 1636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혹은 금국이 세워진 1616년, 또는 팔기제가 개정된 1601년, 심지어 누르가치가 지역의 패자로 등장한 1587년으로 삼을 수도 있다). 또한 청의 마지막 해를 민족주의자들이 봉기하여 최초의 성단위 국민정부를 수립한 1911년으로 보는 대신 부의가 퇴위한 1912년 혹은 황실이 법적으로 사라진 1924년이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유라시아에 미친 파급효과와 중국에 기반한 제국이 내륙적 추세에 통합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국사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나와 다른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것이기도 하다. 신청사는 대학원 과정이나 박사후 과정에서 만주어가 일반 교과목이 되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었는데, 이는 청사연구가 이룬 또 하나의 큰 진전이다. 과거 중국학 연구에서 전해 내려온 원-명-청 연속성의 패러다임과 달리, 신청사는 명대와 청대에 분명한 분계선을 그어 주었다. 그러나 몇몇 부분에서 신청사는 학문적으로 입증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만주족 중심사 對 청사[편집]

플레쳐가 지적했듯이 오스만 제국과 청 제국은 몽골의 정치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크로슬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스만 연구의 또 다른 개념적 측면이었다. 첫째, 학술적으로 논할 때 오스만 “왕조"나 투르크 제국이 아니라 오스만 제국이라 칭해졌다 (비록 오스만 제국 시절 유럽인들은 투르크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둘째, 오스만 연구자들이 학문연구를 위해 오스만 투르크어(Osmanlı Turkcesi), 페르시아어, 아랍어를 배우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셋째, 비록 일부에서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국가라기보다는 투르크인의 국가라고 주장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는 대체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하나의 역사적 대상이었다. 그러나 청 제국은 그렇게 간주되지 않은 것이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청 제국은 중국사의 한 시기에 불과한 청 “왕조”였다. 당시에 크로슬리는 청사 연구자들과 오스만 연구자들에게는 서로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게 되어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신청사학자들은 이른바 청사연구방법(a Qing studies approach), 앞에서 말한 오스만 연구와 유사한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청사 연구자들 가운데 버거, 만, 히비아, 웨일리-코헨, 지토 등은 만주족과 한족 그리고 몽골족의 정치적, 문화적 유산 사이의 차이점을 결합, 통합 심지어 초월하면서 청 제국의 국가적 비전을 만들어내는 데 만주족의 기원과 그들의 영향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제국, 제국의 완정함에 대해 알리고 변형시키는 제국의 능력, 젠더를 포함한 정체성과 지위의 관계, 역사서술과 집단결속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에는 필립 포레, 아마도 피터 퍼듀, 그리고 크로슬리도 포함된다. 논평자들이나 연구사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때로 크로슬리 교수를 “만주족 중심적인”(Manchu-centered) 역사가들 속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크로슬리는 이를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청 제국 역사의 윤곽을 보여준 이 학자들은 의식적으로 “만주족 중심적” 역사를 옹호하는 학자들과는 다르다. 러스키는 1995년 아시아학회 회장연설에서 청사에 만주족 중심주의를 채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크 엘리엇도 《만주족의 청제국》에서 만주족 중심주의를 반복해서 언급했다. 엘리엇은 그의 책에서 한 차례 만주족 중심주의와 청 중심주의를 동일한 역사적 관점으로 등치시킨 적이 있지만, 크로슬리의 결론은 엘리엇과 다르다. 이 두 관점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두 관점의 차이는 학자들마다 “신청사”를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미국의 많은 명청사 연구자들은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에 체류했다. 일본에는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은 한꺼번에 혹은 따로따로 중국으로부터 반출된 것들이었다. 일군의 일본학자들은 만주어를 배워 가르치고, 만문 자료를 번역·전사하고, 팔기의 역사를 면밀히 연구했는데, 이들의 연구를 읽은 청대에 관심을 둔 학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칸다 노부오(神田信夫)와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가 가장 유명했다. 칸다는 오카다와 다른 여러 제자들을 지도하여 현재 신청사 연구에 토대가 되는 자료들을 선별·번역·전사·해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들은 《만문노당(滿文老檔)》이라 불린 청 초기 자료집의 몇 가지 출전을 찾아내었다. 《만문노당》은 8년간의 작업 끝에 1963년 마침내 출판되었는데, 이 자료의 원천이 된 것은 나이토 토라지로(内籐虎次郎)가 심양을 여행하고 일본으로 가지고 온 청대 자료 복사본이었다. 대만에서 성장한 칸다는 대만에도 초기 만문자료가 한 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자료가 《만문노당》의 원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의 칸다와 대략 비슷한 시기에 대만의 학자들도 그곳의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플레쳐의 만주어 교사였던 광루을 포함하여 리쉐쯔[李學智], 쳰졔셴[陳捷先] 등 대만학자들은 1965년부터 선별한 이 자료들을 출판하기 시작하여 1969년 《구만주당(舊滿洲檔)》를 완간했다. 대만 연구진과 일본 연구진은 계속 연락을 취하여 각 자료의 차이점을 검토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고 서로 중첩되는 부분에 대한 해석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날 만주사료연구의 대가인 쫭지파[莊吉發]가 등장하게 되었다.

《만문노당》을 만든 일본 학자들과 신청사의 대두 사이의 관계는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부분이다. 만주족 역사와 언어에 대한 일본의 연구는 한국과 동북지역에서의 일본 제국주의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나이토 토라지로가 활동하던 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일본학자들은 심양과 북경에 소장된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이는 주로 일본이 청 제국의 영토,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의 영토를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일본학자들의 연구의 이면에 있는 개념적 배후에 의구심을 갖는다. 칸다 노부오의 팀원 가운데 일부는 일본인, 한국인, 만주족, 몽골족이 고대부터 문화적으로 상호관련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초기에 이런 주장은 일본이 중국인으로부터 청의 영토를 강탈하고 만주국을 수립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데 활용되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학계는 더 이상 이런 주장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칸다와 오카다는 알타이 가설을 열렬히 옹호했는데, 이 주장에 대만학자 쳰졔셴도 동조했고, 독일의 만주학 연구자나 미국의 조셉 플레쳐도 지지했다. 오늘날의 언어학자들은 핀란드부터 알라스카에 이르는 지역의 언어가 몇 개의 공통 조어(祖語)에서 파생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대담한 주장에 회의를 품고 있지만,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는 설득력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만 한국어·일본어와 이른바 알타이 어족과의 관계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기는 했었다.

오카다 히데히로나 쳰졔셴 같은 학자들에게 “알타이”는 하나의 어족일 뿐만 아니라 문화이기도 했다. 이 문화는 시공을 넘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유목, 사냥, 말과 기마의 세계로 이어주며, 플레쳐가 말하는 테니스트리(tanistry, 최고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공식적인 경쟁)를 정주사회, 특히 중국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전통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알타이즘을 입증할 수 없는 가설로 여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1930년대의 인종주의적 사고와 밀접하게 연관된 이데올로기로써, 이 가운데 일부분은 독일 제3제국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이었음을 지적한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칸다로 대표되는 일본학자들은 대개 신청사 학파의 선조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청사의 뿌리 가운데 많은 부분은 이 일본학자들과 관련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구만주당》을 편찬한 사람들과 함께 영어권의 무수한 학자들이 만주어를 다룰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무권점자 만문과 후대 유권점자 만문자료의 전사와 번역뿐만 아니라 일본학자들이 지금도 연구하고 있는 양홍기(鑲紅旗, 만주어: ᡴᡠᠪᡠᡥ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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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behe Fulgiyan Gūsa)의 역사나 1965년에 출판된 《八旗通志》의 인명색인과 같은 주요 자료집을 소개한 것도 포함된다. 1978년 제리 노만의 《The Manchu-English Lexicon》이 출판되기 전까지 만주어 연구자들은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 사전에 의존해야 했는데, 일본어 사전의 경우 1937년에 나온 하네다 토루(羽田亭)의 고전적 연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와 80년대 청사를 연구한 영어권 연구자들은 대학원생 시기에 일본어를 정규교과목의 일부로 공부했기 때문에, 일본어로 된 만주어 사전과 칸다, 오카다 등의 저작들을 통해 만주학을 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초창기 만주어 자료의 발전을 가져온 일본 석학들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학자는 마크 엘리엇이다. 그는 알타이즘에 대해 칸다나 오카다와 대체로 같은 관점을 갖고 있다. 《만주족의 청제국》은 앞부분에서부터 만주족을 “알타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다른 글에서도 엘리엇은 만주족의 전통이라는 생각에 시간성과 깊이를 더하는 것으로써 알타이의 문화적 유산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지아 닝(Chia Ning, 賈寧)과 함께 저술한 “청대 무란 사냥”(The Qing Hunt at Mulan)에서 가경제가 쓴 시가 황실 사냥의 환희와 미덕을 자랑스럽게 칭송했다는 점에서 이를“알타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엘리엇은 또한 청사 연구를 “알타이 학파”로 묘사하면서 “알타이 중심적” 관점으로 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피터 퍼듀는 그의 책 《China Marches West》에서 이런 관점을 인용하고 있다. 퍼듀의 경우 “알타이”를 더 광범위하게 사용하지만 항상 인용부호로 취급한다. 러스키는 언어이론에 대해 언급할 경우에만 “알타이”를 사용한다. 크로슬리를 포함하여 다른 학자들은 이 용어가 지닌 낭만주의적 분위기나 혹은 그 불완전한 근거 때문에 대체로 사용하지 않는다.

알타이 세계라는 개념은 1930년대, 특히 Central Asiatic Journal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에 의해 발전한 것인데, 문제는 이것이 그저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알타이즘이란 원래 언어학적 가설로, 별 근거도 없이 유목, 사냥, 하늘숭배, 샤마니즘을 포함하는 유라시아 기원문화라는 거대 영웅담으로 점차 발전해 간 것이었다. 언어학적 가설 그 자체는 인도유럽어족의 모델에서 발전하였지만 인도유럽어 가설의 통시적, 변형적 통합성과는 결코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알타이주의자들은 투르크어, 몽골어, 퉁구스어족군 사이의 유전적 연관성의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아직 근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알타이어로 구분되는 언어들에서는 문법적 유사성이 가장 현저하지만 그것이 언어들 사이의 유전적 관계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 문법적 유사성이란 우리가 “알타이” 문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상 모든 언어에 옛날부터 있어 온 공통의 구조였는데 인도-유럽어와 같이 다른 언어군의 특징적인 패턴에 의해 약화되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알타이어군은 언어 사용자간의 무수한 접촉을 통해 점점 비슷해졌을 수도 있다. 공통 어휘, 그리고 심지어 매우 기초적인 단어에서도 알타이어에는 하나의 어군으로 여길만한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유사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대부분 언어와 언어 사이의 단어 차용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알타이어군이 같은 기원을 갖고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더구나 알타이 문법의 특징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같은 알타이 조상의 후손이라거나 혹은 알타이 전통이 중앙아시아와 내륙아시아의 문화를 모두 아우를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타이즘의 전통은 신청사의 몇몇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만주족과 관련된 분야를 연구하는 일부 청대 연구자들은 알타이즘에 영감을 받아, 완전한 알타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완전한 만주족의 세계를 상정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만주족의” 혹은 “여진족의” 라는 표현 대신 “알타이” 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청 초기부터 만주족 문화의 핵심적인 특징은 태고적부터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신청사에 핵심적인 문제, 그러나 반드시 핵심적일 필요는 없는 문제를 건드리게 된다. 즉 청대 만주족의 문화는 초기부터 명확한 기원이 있었고 이 기원이 청대 만주족 문화와 공동체의 외관을 결정했으며, 청 제국에서 만주족은 하나의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 기원은 “종족적(ethnic)”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족성이라는 문제는 몇가지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첫째, 누르가치가 처음 팔기를 조직하던 시기에 만주족의 문화라는 것이 모든 여진족 가정에서 얼마나 통일적으로 존재했고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누르하치 시기 요동에서 지금의 흑룡강성과 남쪽으로 현재 북한에 이르는 지역은 경제적, 언어적, 사회적 다양성이 폭넓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폭넓은 다양성 속에서 동몽골인, 조선인, 여러 퉁구스어 연합체에 속한 개인들이 누르가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때로 누르가치는 자신의 백성들을 문화적 정체성에 따라 분류하는 것을 꺼려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작업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누르가치의 영역이 서쪽으로 확장되어 한어사용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언어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권력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유용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팔기의 선조는 누르가치 자신의 호위부대, 사냥동반자, 그리고 가내 경호단이었다. 대략 1601년부터 이 집단들을 개조하여 새로운 국가가 백성을 통치하는 초기 기반으로 삼았다. 당시 정복, 협박, 유인, 그리고 불안정한 지역에서 인심을 얻게 된 결과,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었다. 《팔기통지(八旗通志)》와 여러 전기류를 확인한 결과 크로슬리는 누르가치의 국가가 이들 집단을 형성하게 하고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계보를 작성하게 만들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누르하치 이후 청조는 정복과 통치의 목적에 따라 계속해서 정체성과 소속을 자의적으로 이용해왔다.

“만주족 중심주의” 역사학자들은 만주족이 자신들을 다른 집단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통일적이고 지속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다고 여기고, 이 때문에 이들은 “종족적(ethnic)”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종족적이라는 용어이다. 하나의 집단으로서 자신을 다른 집단과 다르게 인식했다는 것은 분명 문화적 현상이다. 그러나 “종족” 집단간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유럽의 역사가들이 “종족”이나 혹은 그에 해당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특징적인 현상을 설명할 때이다. 즉 정책을 입안하고 역사를 서술하는 국가 기관이 특정 문화집단을 비정상적, 주변적, 이질적, 비영구적, 야만적(즉 소수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identities)은 같은 국가기관이 정상적, 중심적, 고전적, 영구적, 문명적이라고 해석한 문화적 특징들과 공존해왔다. 중국어에서도 이와 관련된 용어는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발달해 있으며, 만주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용어들이 가리키는 것은 각 언어마다 다른데, 신청사학파는 이 문제를 통찰력있게 지적하고 있다). 1980년대 유럽과 북미의 문화연구는 엄밀한 의미의 종족성(ethnicity)이 근대적 정체성과 결합하는 과정을 분석하고, 민족적 정체성이 계층, 대중적 묘사, 이데올로기로부터 새롭게 파생되어 나오면서 대신 언어, 복식, 거주지, 종교와 같은 관습적인 기준들이 배제되는 과정을 탐색해왔다.

동시에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에 대한 사회과학이 여전히 지배적인데, 여기에서는 “객관적” 차별성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기준을 사용하여 “소수민족”을 열거하고 있다. 《고아가 된 전사》에서 크로슬리는 기본적으로 한족이 민족주의자가 되는 지점에서 중국의 만주족이 종족으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만주족은 중국어를 사용하고, 중국 이름을 가졌고, 한인의 옷을 입고, 한인처럼 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한족과 다르다고 인식했다. 이는 근대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유럽사와 중국사에서 모두 종족적 용어와 개념이 오랫동안 계속 사용되었다는 측면에서 이는 종족적이다.

크로슬리의 이러한 견해는 태평천국 시기에 많은 만주족 공동체가 파괴되고 19세기 말 주방팔기에 대한 청 제국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이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한 이후의 만주족의 상황에 대한 것이다. 일부 만주족 공동체가 계속 존재하고 자신들을 점차 “만주족”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종족적 실체에 대한 증거로 볼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이런 식의 종족적 주변부화나 공동체적 연대감이 존재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국가가 만주족 정체성의 기준[주 4]을 강력하게 강제했기 때문이었다. 기인들 대부분이 이런 요구를 회피하거나 혹은 여기에 따를 수 없었다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불법적으로 주방을 벗어난 많은 기인들이 문화적 혹은 종족적 연대감에 기초한 새로운 만주족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볼 수는 없다. 초기 만주족의 지위와 문화적 상황은 내가 종족이라고 생각하는 청대와 명대의 집단인 회족, 이족(彛族), 다이족(傣族), 단가(蜑家) 등과는 매우 달랐다.


국가의 속박에도 불구하고 이들 공동체는 때로 문화적 소수자집단으로서 살아남았다. 반면 만주족은 국가가 차별적인 문화적 행동을 지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하는 경우 포상을 내렸다. 만주족의 차별적 문화는 국가의 의례, 기념물, 역사적 묘사 속에서 사실상 중심이고, 우월하고, 정통이며, 문명화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종족적 상황과는 모든 면에서 상반되는 것이다. 이런 속성이 사라지고 일부 만주족 공동체가 자신들의 문화적 사회적 에너지를 지켰을 때에만 만주족은 종족으로서의 특질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신청사의 관점은 다르다. 예를 들어 마크 엘리엇은 그가 “종족주권”이라 부르는 하나의 분명한 현상으로 만주족을 묘사한다. 그에게 이 말은 다른 집단과 문화적으로 다른 것일 뿐만 아니라 제국 내에서 하나의 통치계급, 혹은 우월하고 중심적인 문화집단으로의 역할을 지녔음을 뜻한다.

만약 사람들이 “종족성”을 단순히 “문화적 차별성과 응집성”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한다면, 모든 문화집단은 종족집단이 될 수 있고 사람들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내가 진정한 종족적 경험이라고 여기는 것이 서술과 분석상의 용어에서 분명해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국가의 조세징수, 군사점령, 동화정책으로부터 자신들의 신념, 관습, 역사적 관점, 그리고 언어를 지켜내고자 하는 공동체도 “종족”이 되고, 국가가 한 집단의 지위를 승격시키고 그들에게 문화적 속성을 부과하고 강제하며 이에 대한 복종의 대가로 포상을 지급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는 경우에도 이들은 “종족”이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는 신청사가 의미있는 서술이 되기란 어렵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엘리엇은 《만주족의 청제국》에서 언어는 종족성의 근본적인 요소이며 종족성은 중국에서 200년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역설하는데, 이는 근대적 정체성에 대한 비교문화학에서는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청초에 만주족이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이 종족성이라는 것이 청의 정복과정에서 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주장하는 신청사의 기본전제 역시 충격적이다. 웨일리-코헨, 엘리엇, 퍼듀는 모두 청의 군사적 우수성에서 특히 만주족의 요소를 강조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엘리엇은 이것은 알타이 전통의 유산이며 황실 수렵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여긴다. 더 나아가 엘리엇은 만주족의 문화적 일관성 덕분에 황제권은 전장에서나 점령과정에서 예외적으로 강력한 응집력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만주족은 “엄격한 군사생활”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호전적”이었으며, 이를 통해 청조의 정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로슬리는 이런 주장은 탈영, 불법적인 주방 외 거주, 그리고 중원을 정복한 초기부터 팔기가 제도로서 유지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주방의 만주족들이 예술 속에서 창의적인 삶을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청 제국의 정복과정에 특별히 만주족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과 제국 자체가 “만주족적”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논리적으로 쉽게 연결된다. 이 분야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청을 설명하는 데 “만주족 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청의 정복 시기에 대해 “만주족의 제국주의,” “만주족의 식민주의,” “만주족의 정복”이라고 표현한다. 러스키, 퍼듀, 웨일리-코헨, 히비아, 밀워드, 엘리엇, 지아 닝과 같은 중진 연구자들이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데이비드(David Brophy), 로레타 김(Loretta Kim), 그리고 하이윈 마(Haiyun Ma) 같은 소장학자 역시 이런 용례를 받아들이고 있다.

러스키나 퍼듀를 포함한 신청사 연구자들이 청 제국의 정복에서 만주족의 특징(Manchuness)이 진정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생각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퍼듀는 “만주족 식민주의”를 주제로 한 1998년 《International History Review》의 편집자였는데, 만주족 식민주의에서 정확히 무엇이 만주족적인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고, 다른 논문의 저자들도 “만주족”보다는 “청”을 더 많이 사용했다. 이 경우 “만주족”은 청사가 중국사와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다소 경솔하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엘리엇은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고, 《만주족의 청제국》의 결론에서 만주족 제국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팔기부대가 전투에서 독특한 응집력을 보였다는 주장에 덧붙여 엘리엇은 만주족이 만리장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제국의 정치적, 행정적 구조가 달라졌다고 여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 영토가 만주족의 제국 하에서 하나의 정치체제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엘리엇은 1957년 저우언라이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거대한 지리적 영토는 “청 제국의 유산”이라고 언급했다는 점에서 “만주족의 손길을 아직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묘사는 여러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복의 역사는 청의 중원정복이 만주족의 종족적 성공비결과는 전혀 무관함을 보여준다. 도르곤과 같은 만주족 지휘관은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644년 청으로 투항하기 전까지 명나라를 섬겼던 동북출신의 오삼계 역시 중요한 인물이었다. 청군이 양자강 이남으로 진격했을 때 병사의 대부분은 명을 배신한 자들이거나 혹은 한인들 가운데 새로 투항한 자들이었다. 팔기병 가운데에서도 만주족은 소수였고, 18세기에 행정적 조치에 의해 한군팔기(漢軍八旗)가 걸러진 후에야 비로소 만주족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웨일리-코헨 자신이 설명했듯이, 청이 정복에 성공한 것은 대포와 총기를 도입한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 무기들은 청에 앞서 명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사실 1618년 여진족이 처음 무순을 공격했을 때 요새에서 발사된 대포에 말이 놀라는 바람에 무수한 여진병사들이 낙마했다.

이때부터 누르가치는 대포를 사들였고 또한 대포를 제작·수리·운반·발포할 줄 아는 한인들을 불러들이는 데 공력을 기울였다. 지도를 제작한 예수회 선교사, 중앙아시아의 말, 중국의 수레와 보급품 및 거대한 군사력 (이들은 팔기의 일부를 구성했는데, 팔기의 일부만이 만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청의 성공과 관련되어 있었다. 강희제는 개인적으로 그의 모든 사업에서 열성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여 활용하였는데, 청의 정복력에 있어서 이 점이 만주족 문화의 지속성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강희제는 그의 아들들, 특히 옹정제와는 이런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지 못했다. 군사적 성공을 이루는 데 어떤 문화적 요소, 특히 만주족 문화의 요소가 경제적, 물질적 요인보다 더 중요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야심찬 목표라 할 것이다.


만주족이, 혹은 역사적으로 말해서 청조가, 장성을 무시했는지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과 《이신전(貳臣傳)》 등 18세기 역사서의 핵심 주제였지만, 이 경우를 제외하고 장성에 대한 무시 혹은 집착이 제국의 특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더 중요한 문제는 청 제국은 중국내 모든 문화를 인정하거나 혹은 수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청의 정복과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문화들을 역사화하고 목록화하는 작업에는 관심이 있었다.


그 외에 문화적, 경제적 차이는 명대에서 계승된 토사(土司) 제도를 통해 관리되거나 혹은 전면적인 점령과 강제적인 동화를 통해 통제되었는데, 이는 모두 서남부에서 실시된 것들이었다. 중국 중부지역이나 동투르키스탄에서 무슬림들은 의구심과 경멸의 대상이었다.[주 5].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제국이라는 의미 그 자체에서 이 “만주족의 제국”(만주족의 제국주의, 만주족의 식민주의 등등)이라는 말이 하나의 넌센스라는 점이다. 국가의 기반과 행정의 향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홍 타이지 시기이래 제국은 그 속에 여러 통치체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팔기는 하나의 통치체제였고, 이번원(理藩院)의 전신인 “몽고아문”도 하나의 통치체제였으며, 1621년 심양을 정복하고 흡수한 한인의 성단위 행정구조 역시 하나의 통치체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각각의 권한이 팽창하면서 더욱 복잡해져갔다. 각각 분리된 이 통치체제는 황실과 연계되어 있다.


더욱이 청의 황제권과 국가는 세심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표현체(presentation)였으며, 17세기 말과 18세기에 걸쳐 스스로 정당성을 지닌 통치권으로 발전하였고 그 관할영역은 다만 문화적 지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청의 정복에 기여하고 이를 정당화시켰던 지역의 역사는 황제권을 창출한 근거지로 성문화되었고 그 황제권은 그들 역사의 언어인 만주어, 몽골어, 한어, 티베트어, 그리고 건륭 후기에는 위구르어를 통해서 하나의 일체로써(simultaneously) 설명되었다. 이런 방식이 청에서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체성(simultaneous quality)을 지녔던 다른 어떤 통치권에서보다 건륭제 시기에 가장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국가와 통치권의 연도 역시 “만주족 제국”이라는 주장과 부합되지 않는다. 누르가치가 자신을 여진족의 한으로, 그리고 여진족으로 여겼다는 증거는 있다. 누르가치의 정권은 아마도 순수하게 여진족 한의 나라였을 것이다. 이는 1636년 홍 타이지가 여진족 한의 나라와 차하르 카안의 나라를 통합하면서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청 제국의 발전과 관련된 별개의 문화들을 표준화시키고 전시하고 후원하는 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강희년간에도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건륭년간에 최고조에 달했다. 이와 동시에 황제권 자체가 점차 추상화되어 건륭년간에 이르면 황제는 자신을 특정 문화에만 관련된 존재로 표현하거나 설명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이제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강희년간과 건륭년간 사이 옹정년간은 수수께끼같은 시기이다.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옹정제는 스스로 만주족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있다고 여겼고, 한인 엘리트에게 만주족 문화를 정당화시키는 작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의 표현이 그의 아들에게서는 없었다. 건륭제는 만주족을 청 황제권과 청 제국을 구성하는 여러 구성요소 가운데 한 부분으로 여기는 과거의 경향을 다시 회복하였다. 만주족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만주족의 풍습을 언급할 때 강희제와 건륭제는 특히 “우리의 만주인들(ᠮᡠᠰᡝ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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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i manjusa)”이라고 했지 “우리 만주인들(ᠮᡠᠰ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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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 manjusa)”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군주도 청 제국을 만주족의 제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홍 타이지가 붙인 대청(중국어 정체자: 大淸, 병음: Dàqīng,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Daicing, 몽골어: ᠳᠠᠶᠢᠴᠢᠩ Dayičing)이라는 이름 외에는 어떤 것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황제권을 “만주족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건륭년간 분명해진 청 제국의 특징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신청사의 진정한 업적, 즉 청대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만주족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고, 그 다음 다시 이 거대한 정복을 만주족의 작품으로 만들어 복합적인 통치권을 단순한 것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또한 제국에 관한 사실을 부정하고 청이 초기 만주족 한의 나라의 연장선에 놓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분석상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설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논리상 일부가 전체를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주족의 제국”이라는 개념 하에서는 만주족의 문화, 정체성, 관습, 팔기제, 이 모든 것이 청 제국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 되어버린다. 만주족을 제국의 산물로 여기는 대신, 제국은 만주족의 산물이 되어버린다. “만주족 중심주의” 역사와 진정한 제국의 역사 사이에 생긴 이러한 갈등은 앞으로 청대 역사가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18]

역사[편집]

건국[편집]

청 제국은 홍 타이지가 제국을 선언한 1636년으로 볼 수 있지만, 그 기원은 1587년, 혹은 1601년 팔기의 재편, 혹은 1616년 후금의 건국까지 소급될 수 있다.[19]

1583년에 독자적인 깃발을 내걸고 과감히 거병한 누르가치는, 니칸 와일란의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하여 마침내 숙수후를 비롯한 '만주 구룬'의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는 1587년 퍼 아라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누르가치는 대량의 인삼과 모피를 거래하면서 경제력을 축적하는 한편, 해서여진야인여진의 여러 집단을 하나씩 복속시켜 나갔다. 1592년에는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예허와 하다를 위시한 해서여진 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 서북부에서 유목하던 코르친 몽골을 비롯한 아홉 구룬이 결성한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만주 지역의 최강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1603년에 허투 아라로 근거지를 다시 옮긴 누르가치는 정복 활동을 이어나가 예허를 제외한 모든 여진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이에 명나라와 긴장이 점차 고조되어 갔지만, 누르가치는 1616년 2월 17일, 여진족 수령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식을 거행하고 '겅옌 한'(만주어: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Sure Genggiyen Han)을 칭하였다.

이로써 누르가치는 정식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이 나라는 아이신 구룬이라고 하는데, 과거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 계승을 표방한 것이다. 그는 아이신 구룬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니루와 구사를 창설하여 니루를 민정은 물론 군정까지 아우르는 기층 사회 조직으로 발전시켜 사회 조직상의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20]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묵던으로 귀환한 누르가치는 곧 병이 들어 68살의 나이를 숨을 거두었다. 누르가치의 뒤를 이어 아이신 구룬의 두 번째 한으로 즉위한 사람은 그의 8남 홍 타이지였다.

홍 타이지는 군사 방면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명나라이 화의를 제한하고 나섰다. 이어서 식량과 물자의 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선 연해의 가도에 근거를 두고 배후를 위협하던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을 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을 침공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킨 뒤,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고 교역의 루트를 확보했다.

홍 타이지는 원숭환이 지키던 요서 지역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방어선을 우회하여, 내몽골 지역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가 약탈전을 벌이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포위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홍 타이지는 원숭환이 아이신 구룬과 내통하여 반역을 꾀한다는 말을 유포시키는 계략을 써서 영원성 전투의 영웅 원숭환을 처형하게 만들었다.

요동 지역의 한족 지배와 관련해서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의 거주지를 분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한인을 관료로 등용하여 이들에게 피정복민인 한인 농민에 대한 행정을 맡기는 방식을 취하였다. 또한 문관과 육부를 비롯한 행정 기구를 새로 설치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21]

홍 타이지에게 직속된 기구인 육부는 국가의 대소사를 논의함으로써, 기존의 팔기의 버이러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던 국가 통치의 영역을 잠식했다. 육부의 업무를 총관한 것은 6명의 버이러였지만, 그들 가운데 아바타이(阿巴泰, (만주어: ᠠᠪᠠᡨᠠᡳ Abatai)만이 홍 타이지의 형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 타이지의 아들과 조카였다.[22]

이렇듯 대등한 동료 중의 1인자에 불과했던 홍 타이지는 독자적인 업적을 쌓으면서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구축해 가는 한편, 아이신 구룬의 권력을 서서히 자신에게로 집중시켜 나갔다. 대버이러 중에서 홍 타이지에게 가장 도전적이었던 아민을 군사적 실패를 이유로 삼아 실각시켜 감금하고, 이어서 자신과 공개적으로 다툼을 벌이다 칼까지 뽑아 들었던 망굴타이에게 강당 처분을 내림으로써 그를 실각시켰다. 마침내 1632년에는 단독 남면을 실현함으로써 한으로서의 권위를 확립했다.

1636년에 병사한 망굴타이가 생전에 반역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홍 타이지는 이를 명분으로 망굴타이가 소유했던 정람기를 해체해 버렸고, 다시 새롭게 편성된 정람기는 자신의 장남 호오거에게 주었다. 이렇게 해서 팔기 가운데 삼기를 확보한 홍 타이지는 내부적으로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권력을 확립하였다.[23]

차하르릭단 칸의 패권 추구에 반발한 많은 몽골 유목민 집단이 아이신 구룬에 도움의 손길을 청하자, 홍 타이지는 릭단 칸이 티베트 방면으로 원정을 떠난 틈을 타 내몽골의 중심부인 후흐호트를 점령하고 내몽골 초원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1634년 릭단 칸이 천연두에 걸려 청해에서 병사하였고, 1635년에는 릭단 칸의 아내와 아들 에제이가 아이신 구룬에 투항해 왔다. 홍 타이지는 릭단 칸의 아들을 부마로 삼았다.[24]

이렇게 차하르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홍 타이지는 먼저 차하르의 압박을 피해 대거 투항해 왔던 몽골 유목민의 일부를 니루와 구사로 편입시켜 팔기몽고를 조직하였다.[25] 후금의 직접 통치하에 들게 된 몽골인의 수가 대폭 증가했고, 후금 통치하에 여진인과 한인 수가 비슷해지자, 삼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델이 필요하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의 핵심 종족인 주션(만주어: ᠵᡠᡧᡝᠨ Jušen)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중적인 상황이 도래했다.[26]

1635년 11월 22일,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하고 '만주'를 공식적이고 유일한 족명으로 선포했다.

원문
만주어: ᡨᡝᡵᡝ ᡳᠨᡝᠩᡤᡳ᠈ ᡥᠠᠨ ᡥᡝᠨᡩᡠᠮᡝ᠈ ᠮᡠᠰᡝᡳ ᡤᡠᡵᡠᠨ ᡳ ᡤᡝᠪᡠ ᡩᠠᠴᡳ ᠮᠠᠨᠵᡠ᠈ ᡥᠠᡩᠠ᠈ ᡠᠯᠠ᠈ ᠶᡝᡥᡝ᠈ ᡥᠣᡳᡶᠠ ᡴᠠᡳ᠈ ᡨᡝᡵᡝ ᠪᡝ ᡠᠯᡥᡳᡵᠠᡴᡡ ᠨᡳᠶᠠᠯᠮᠠ ᠵᡠᡧᡝᠨ ᠰᡝᠮᠪᡳ᠈ ᠵᡠᡧᡝᠨ ᠰᡝᡵᡝᠩᡤᡝ ᠰᡳᠪᡝᡳ ᠴᠣᠣ ᠮᡝᡵᡤᡝᠨ ᡳ ᡥᡡᠨᠴᡳᡥᡳᠨ ᡴᠠᡳ᠈ ᡨᡝᡵᡝ ᠮᡠᠰᡝ ᡩᡝ ᠠᡳ ᡩᠠᠯᠵᡳ᠈ ᡝᡵᡝᠴᡳ ᠵᡠᠯᡝᠰᡳ ᠶᠠᠶᠠ ᠨᡳᠶᠠᠯᠮᠠ ᠮᡠᠰᡝ ᡤᡠᡵᡠᠨ ᡳ ᡩᠠ ᠮᠠᠨᠵᡠ ᠰᡝᡵᡝ ᡤᡝᠪᡠ ᠪᡝ ᡥᡡᠯᠠ᠈ ᠵᡠᡧᡝᠨ ᠰᡝᠮᡝ ᡥᡡᠯᠠᡥᠠ ᡩᡝ ᠸᡝᡳᠯᡝ᠈

tere inenggi. han hendume. musei gurun-i gebu daci manju. hada. ula. yehe. hoifa kai. tere-be ulhirakū niyalma jušen sembi. jušen serengge sibei coo mergen-i hūncihin kai. tere muse-de ai dalji. ereci julesi yaya niyalma muse gurun-i da manju sere gebu-be hūla. jušen seme hūlaha-de weile.

— 만문원당(滿文原檔)

해석
이 날에 한이 말하길, "우리의 나라의 이름은 본래 만주, 하다, 우라, 예허, 호이파이니라. 그것에 무지한 사람들이 주션이라 한다. 주션이라는 것은 시버의 초오 머르건의 후예이니라. 그들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로부터 앞으로 모든 이들은 우리 나라의 본래 이름인 만주라고 부르라. 주션이라고 부르면 죄이다."

즉 홍 타이지는 주션이라는 족명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 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족을 새로운 명칭 아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다.[27] 이에 따라 종래의 팔기는 팔기만주로 불렸다. 그리고 차하르를 꺾고 내몽골 초원의 유목민을 모두 복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차하르 칸 가문에 전해 오던 쿠빌라이 카안 이래 몽골 제국 카안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인 '제고지보(制誥之寶)'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 '대원전국(大元傳國)이라는 이름의 금으로 만든 도장을 손에 넣은 홍 타이지는 이제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군주를 자처할 수 있었다.

1636년 홍 타이지는 팔기는 물론 내몽골 왕공 및 한족 무장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식을 올리고 칭기스 칸으로부터 이어져 온 몽골제국의 전통을 완전히 복원·계승하였음을 보이는 것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시각으로, 옛 몽골 제국의 동쪽 절반을 청이 지배하는 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스스로 세 언어로 된 칭호인 매우 관대하고 조화로우며 성스러운 군주(弘德彰武皇帝, 만주어: ᡤᠣᠰᡳᠨ
ᠣᠨ᠋ᠴᠣ
ᡥᡡᠸᠠᠯᡳᠶᠠᠰᡠᠨ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Gosin Onco Hūwaliyasun Enduringge Han, 몽골어: ᠠᠭᠤᠳ‍ᠠ
ᠥᠷᠦᠰᠢᠶᠡᠩᠴ‍ᠢ
ᠨ‍ᠠᠶ᠋‍ᠢᠷ‍ᠠᠮᠳ‍ᠠᠭᠤ
ᠪᠣᠭᠳᠠ
ᠬᠠᠭᠠᠨ
Aγuda Örüsiyegči Nayiramdaγu Boγda Qaγan)를 칭하였으며,[28][29] 국호를 기존의 아이신 구룬(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ᡠᡵᡠᠨ
Aisin Gurun)에서 다이칭 구룬(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으로 개칭하고, 만주족이자 요동 한인의 황제이자 몽골의 카안이 됐다. 이는 곧 만주인이 한인, 몽골인과 공존하겠다는 의지를 선포한 것이었고 다종족국가의 표방을 의미했다.[30]

당시 홍 타이지가 제위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 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했다. 홍 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31] 홍 타이지는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 인조삼전도에서 홍 타이지를 황제로 받드는 치욕스러운 의식을 거행해야 했고, 이후 명나라가 아닌 청 제국의 책봉을 받고 청 제국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32]

홍 타이지는 총과 대포를 능숙리 다룰 줄 아는 한인들을 기존의 팔기 조직에 속하지 않는 별도의 부대로 조직하여 홍이포를 제작 및 운용하였는데, 이 한인 부대를 '한군'이라고 불렀다. 홍 타이지는 한군의 규모를 계속 확대하여 1642년까지 한군만으로 구성된 팔기 편성을 완료하였는데, 이들 구사는 팔기한군이라고 부른다.

1630년대 중엽부터 홍 타이지가 추진한 일대 혁신으로 탄생한 다이칭 구룬은 더 이상 여진 국가가 아니었다. 다이칭 구룬은 몽골제국의 정통 계승을 지향하는 만주인과 몽골인 그리고 한인의 제국으로 변모했다.[33]

1643년 홍 타이지의 사후, 청 제국은 황제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1643년 당시 홍 타이지의 뒤를 이을 유력한 후보는 홍 타이지의 동생 머르건 친왕 도르곤과 홍 타이지의 장남 파풍가 친왕 호오거였다. 이 두 사람을 추대하려는 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팽팽한 긴장이 조성되었지만,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코르친 몽골 출신의 보르지기트 붐부타이의 소생인 홍 타이지의 9남이었던 6살의 어린아이인 푸린이었다. 푸린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황제의 숙부인 머르건 친왕 도르곤과 우전 친왕 지르가랑이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실제로 청 제국을 이끌었던 인물은 머르건 친왕 도르곤이었다.[34]

이듬해인 1644년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명의 숭정제는 자살하는 변고가 일어났다. 이때 다이칭 구룬의 섭정 도르곤은 팔기의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명나라를 정복하는 전쟁에 나섰다.

당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산해관 일대를 지키던 오삼계는 진퇴양난에 빠졌고,[35] 이자성이 세운 순나라가 북경에서 약탈과 만행 등의 악행을 자행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오삼계는 청에 투항하였다.[36] 청군은 산해관 지역에서 오삼계와 더불어 이자성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이에 이자성은 북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하였고, 청군은 북경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청 제국은 아예 북경으로 천도했고, 그해 10월 30일에 자금성에서 이미 작년에 선양에서 다이칭 구룬의 황제로 즉위한 순치제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 즉위식은 다이칭 구룬의 황제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화제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37] 이로써 장성 밖에서 이미 성립해 있던 다이칭 제국에 청 왕조로서의 성격도 덧붙여지게 된다.[38]

청 제국의 산해관 통과전의 세력도와 강희제 시기의 청 제국 형세도

청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髮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는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이 학살 되었으며,[39][40] 물론 정사도 아니고 근거도 빈약하지만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청 제국은 전체적으로는 타 민족에 대해 정책을 훌륭히 펼친 제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41]

쇠퇴와 멸망[편집]

1896년, 청 제국 강역도. 홍콩과 연해주, 아무르 이북지역, 중앙아시아의 이리지역, 카슈가르를 상실한 이후의 지도이다.

강희제 이후 옹정제·건륭제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대에 이은 청의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백련, 천리의 난을 계기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건륭제 즉위 시기에 그레이트브리튼 연합 왕국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 초중기에는 공행무역만이 실시되었다.

19세기 무렵에 이러한 편무역으로 인해 중국으로의 은 유출 정도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을 실시했으나, 피해를 입은 청 제국에서 엄금론을 펼치며 임칙서를 무역항에 파견하고 아편을 소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1842년 난징 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할양되었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들이 쇄도해오면서 청 제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난국을 맞는다.

1851년 홍수전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 제국은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을 겪고 있었다. 이후, 청 제국은 휴전 중재역할을 맡은 러시아 제국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할양하고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의 주재를 허용하였다. 서구열강세력들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었다. 태평천국 운동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 등의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파견한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증국번·이홍장 등 기술적 개혁의 필요성을 깨달은 한인 신사층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킴으로써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관독상판제와 표면적인 개혁이라는 점 등 뚜렷한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그 와중의 청일전쟁이 청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이 실패했음이 드러났고, 청의 반복된 패전으로 인해 청 제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량치차오 등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자강 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위안스카이·이홍장 등 보수세력의 반격(무술정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대규모로 일어난 의화단 운동으로 일본 등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을 겪고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며 청 제국은 위기에 내몰렸다. 한편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위협요소가 되었다. 한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사건의 심각성을 자각한 보수파와 서태후조차 외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 등을 시찰하였으며, 국내적으로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신식 군대도 신설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무창기의 이후 순친왕 자이펑을 위시한 기존 청 제국의 권력층은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청 제국의 대처가 미비한 와중에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입헌군주제의 옹호자임을 자처하며 청 제국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혁명파와의 교섭 과정에서 청 황제의 퇴위를 조건으로 자신이 임시 대총통으로 즉위하는 것에 동의하여 공화제로 돌아섰다. 협상에 나선 융유태후는 군주가 국정에 간섭하지 않는 방법을 제시하여 황제의 직위만이라도 보전하려 했지만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1912년 선통제의 퇴위와 함께 청 제국은 공식적으로 소멸하였다.[42], 1924년, 펑위샹의 정변으로 인해 청나라 소조정도 해체되었다.

외교[편집]

청나라 초, 정성공 등 청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다시 쇄국정책(海禁, 하이진)을 실시하였다. 마침내, 1683년 7월, 정성공의 손자 정극상이 투항하고 청 제국은 타이완 섬을 평정하였다. 1684년, 청나라 조정은 정식으로 바다를 열어, 백성들에게 대외무역을 허락하였다. [43] 또한, 월동(粵東)오문(澳門)(일설에는 광저우), 복건(福建)의 장주부(漳州府), 절강(浙江)의 영파부(寧波府), 강남(江南)의 운대산(雲台山)에 각각 월해관(粵海關), 민해관(閩海關), 절해관(浙海關), 강해관(江海關)을 설립하고 대외무역을 관리하고 관세를 징수하는 기관으로 삼았다. 강절민월 4대 해관은 각자 소재지 성(省)에 소속된 해관 항구를 다스렸으니, 통상적으로 10여개에서 수십개의 해관 항구를 직할로 두었다.[44]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의 일부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중국은 1876년 10월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새로운 중국 외교사를 썼다. 중국이 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에 중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며,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 이후 청조는 30년 동안 모두 18개 국가에 연인원 68명의 공사 또는 부사(副使)를 파견했고, 1877년부터는 57개 지역에 영사를 파견했다.[45]

경제[편집]

명 말에서 청 초에 이르는 시기에, 시장이 확대되고 상인들의 교역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에 가족 중심으로 이뤄지던 회사들이 합자(合資) 형식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청 초기에는 극장, 광산, 연안 및 해외 운송, 상업 작물, 전당업 등의 사업에 자금을 제공하는 합자회사들이 등장하였다.[46] 북경, 성도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인들이 모이는 회관(會館)들이 생겨났다. 회관은 숙박이나 창고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상인과 기술자들이 교역을 조정하는 기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명 말부터 등장한 이런 회관들은 18세기 무렵에는 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47]

외국 무역이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청은 18세기 초에 인두세(정은)를 따로 거두지 않고, 토지세(지은) 속에 포함시켜, 세금 제도를 단순화한 지정은제를 시행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열강이 교역을 원하자, 청나라는 교역항을 광저우로 한정하여 서양 상인들을 통제하고, '공행'이라는 특허 상인의 조합에 대외 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공행무역 등으로 서양 상인들의 무역량이 적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청나라의 차와 생사는 유럽에서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과 청의 무역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유럽의 상인들 중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해 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무역 역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막대한 양의 은을 청에 지불하게 된 영국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무역 제한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은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매년 급격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수출양이 증가하자, 청나라는 국내의 아편중독자가 늘어나는가 하면, 막대한 양의 은이 빠져나가게 된다. 이무렵 청나라는 '은본위제'를 실시했었는데,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무역'으로 인해 은의 급격한 감소로 국가체제의 위기를 맞게된다. 1830년대에는 은의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하고, 그 결과 은으로 세금 납부하던 농민들과 상인들은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났고, 결국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빠져 버린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외세 열강세력들의 침탈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면서 청나라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게 된다.

청나라때에는 양자강 중류 지역이 최대의 쌀 재배 지역이 되고, 감자, 양파, 땅콩, 옥수수 등의 외래작물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상품 작물 재배와 함께 면, 제지, 제당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문화[편집]

만약 청 제국의 직성 지역에서만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청 제국 군주는 한화에 성공한 '중국'의 수명천자처럼 보이지만 직성 이외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해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이 떠오른다. 몽골 유목민의 초원 세계에서는 카안(몽골어: ᠬᠠᠭᠠᠨ Qa'an)의 이미지, 티베트를 중심으로 한 티베트 불교도의 세계에서는 불법의 수호자인 전륜성왕이자 '문수보살 황제'라는 이미지, 타림 분지의 위구르 무슬림 세계에서는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각각 갖게 된다. 그리고 기인의 세계에서는 누르가치의 계승자인 한(汗, 만주어: ᡥᠠᠨ Han)으로 표상되었다.[48]

청 제국은 중원의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원에서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煕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청적(反淸的)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考證學)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의복의 큰 특징은 단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속은 바지이고 옆으로 트어져 있는 형식인데 이때 전족이 몸에 나쁨에도 불구하고, 귀족은 물론 서민까지 퍼져있었다.

종교[편집]

기독교[편집]

경교와 천주교[편집]

중국에서는 일찍이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대진사라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때부터 마테오 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교하면서 겪었던 어려움 중 하나는 조상 제사 문제였다. 조상 제사 문제는 1704년 조상 제사에 반대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조상 제사를 중국인전통으로 존중하는 예수회간의 신학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교황청에서 조상 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금지함에 따라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49]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럽에 중국 문화를 소개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중국연구열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 똑같은 을 입는 등 중국전통 문화를 존중하였다.

개신교[편집]

개신교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에서 태동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국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사람들과 똑같은 을 입음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는데,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영어: China Inland Mission,CIM)를 결성하여 1898년 중국 후난성을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여 1951년에 철수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64년 OMF(영어: Overseas Missonary Fellowship)으로 선교회의 이름을 바꾸었다.[50]

청나라의 중앙 관제[편집]

중앙 정치 제도[편집]

청나라명나라의 정치제도와 관료제도를 팔기군과 만한병용을 제외하고는 동일하게 사용했다.

행정구역[편집]

가경 25년(1820년) 시기, 청나라의 행정구분도.
광서 34년(1908년) 시기, 청나라의 행정구분도.

청나라 초기 행정구역은 18개의 성(省)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각 성은 7~13개의 부(府)로 나뉘었고, 각 부는 다시 7~8개의 현(縣) 또는 주(州)로 분류되었다.

건륭제 말기인 18세기 말 청나라에는 1,281개의 현과 221개의 주가 있었다.[51]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편집]

통치 행정 구역의 구분은 성-부-주-현-청 (省-府-州-縣-廳)이었고, 성에는 민정과 감찰을 위해 포정사(布政使) ·안찰사(按察使)가 있었다. 또한, 1-3개 성에 총독 1명이, 1개 성에 순무 1명이 있었다. 그리고 각 성에는 장관급에 해당하는 제독 (군사), 총원 (교육), 학정사 (?), 도원이 있었다. 그리고 부 ·주 ·현에는 지부(知府) ·지주(知州) ·지현(知縣)이 수장이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참조주[편집]

  1. 1819년, 미상의 편찬자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실록을 필기체 만주문자로 번역한 《Taidzu Dergi Hūwangdi i Ben Gi Bithe》에는 암바 칭 구룬(만주어: ᠠᠮᠪᠠ
    ᠴᡳᠩ
    ᡤᡠᡵᡠᠨ
    Amba Cing Gurun)으로 표기했다.
  2. Pamela Kyle Crossley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윤영인 편,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010, 1쪽, "20세기 초 중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청대사를 “왕조,” 즉 단순히 중국사의 한 시기로 규정했고 이러한 관점은 곧바로 영어권 학계에 전해졌다. 이 세대가 남긴 놀라운 학문적 유산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바로 청조의 시종(始終) 연도이다. 지금 학자들은 청대가 중원의 정복으로 시작하여 1911년 10월 중국 민족주의자들의 봉기에 끝났다는 견해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청대를 “1644년부터 1911년까지”로 보는 것은 중국의 강고한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이다."
  3. 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토마스 알슨; 미할 비란; 테무르; 파멜라 크로슬리;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18~219쪽. ISBN 9788961871976. , 청말에는 국호인 대청(大淸)에 대한 만주어 표기가 청 초기의 ‘대청(Daicing)’에서 ‘대대청(Amba Daicing)’으로 변화하고 있다.
  4. 만주어를 말하고 쓰는 것, 무술을 익히는 것, 소집되고 봉급을 받으면 군대에 복무하는 것, 주방 안에 거주하는 것
  5. 청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은 몽골 부족도 마찬가지였다.

출전[편집]

  1. Crossley, Pamele K.(2009), “The Influence of Altaicism on East Asian Studies", 194~196쪽.
  2. 李國祁. 《中國歷史》. 三民出版社. ISBN 9789571406565. 
  3. 李國祁. 《中國歷史》. 三民出版社. ISBN 9789571406565. 
  4. 李國祁. 《中國歷史》. 三民出版社. ISBN 9789571406565. 
  5. , 《고종실록》 39권, 광무 3년 9월 11일 양력 4번째기사, "光緖二十五年八月初七日。 大淸帝國欽差議約全權大臣二品銜太僕寺卿徐壽朋。"
  6. 흠정헌법대강》"一、大清皇帝統治大清帝國,萬世一系,永永尊戴。"
  7. 효종실록》 8권, 순치 9년 3월 30일 신축 2번째기사, "遽遭李子成之亂, 且綠淸朝侵伐南京, 弘光天子被害, 天下洶擾, 小商等不敢回歸, 轉投交趾, 行商爲業, 今至七年。 竊聞, 淸朝, 愛民如子, 故將還本土, 正月二十二日自日本發船, 二月初九日到貴國地方, 遇風船敗, 同伴二百十三人皆溺死, 存者僅二十八人。 懇祈老爺, 大發慈悲, 直送小商等于日本, 則庶可得生也。 若送北京, 道路逾遠, 二三年當到本土, 而其全生得達, 不可必也。 自此距日本, 纔數日程, 自日本距南京, 亦數月程, 父母、妻子重得相逢, 恩莫大焉。 伏乞稟于國王殿下, 施行云云。卓男悉記所見, 且將供辭, 報于濟州牧使李元鎭, 元鎭馳狀以聞。
  8. 미중천진조약》, "茲中華大清國與大亞美理駕合眾國因欲固存堅久真誠友誼,明定公正確實規法,修訂友睦條約及太平和好貿易章程,以為兩國日後遵守成規,為此美舉。"
  9. 石橋秀 雄,「大淸國の國書]」(『歷史と地理』, 世界史の硏究 162, 山川出版社, 1995)
  10. Pamela Kyle Crossley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윤영인 편,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010, 1쪽, "滿淸이라는 용어는 과거 제국의 무능력, 부패, 압제에 대한 비난과 함께 중국어 저술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1.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11쪽. ISBN 978-89-9460627-9. 
  12.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12쪽. ISBN 978-89-9460627-9. 
  13.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제4장 청 제국과 러시아, 민음사, 225쪽
  14.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356~365쪽. ISBN 978-89-9460627-9. 
  15. Crossley, Pemela Kyle; 양휘웅. 《만주족의 역사》. 돌베게. 374쪽. ISBN 9788971995310. 
  16. 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
  17. M. Shimada, Shinchō Mōko Rei no Kenkyū
  18. Pamela Kyle Crossley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19. 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토마스 알슨; 미할 비란; 테무르;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동향》. 동북아역사재단. 196쪽. ISBN 9788961871976. 
  20.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61~66쪽. ISBN 9788937484940. 
  21.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68~71쪽. ISBN 9788937484940. 
  22.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7~168쪽. ISBN 9788994606514. 
  23.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4~75쪽. ISBN 9788937484940. 
  24.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6쪽. ISBN 9788937484940. 
  25.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6쪽. ISBN 9788937484940. 
  26.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1~152쪽. ISBN 9788994606514. 
  27.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2쪽. ISBN 9788994606514. 
  28. Reuven Amitai-Preiss, David O. Morgan, 《The Mongol Empire & its Legacy》, BRILL, 1999, pp. 260 - 73
  29.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6~77쪽. ISBN 9788937484940. 
  30.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68~169쪽. ISBN 9788994606514. 
  31. 병자호란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
  32.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7쪽. ISBN 9788937484940. 
  33.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7~78쪽. ISBN 9788937484940. 
  34.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78~79쪽. ISBN 9788937484940. 
  35.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81쪽. ISBN 9788937484940. 
  36. William T. Rowe. 《하버드 중국사 청 중국 최후의 제국》. 21세기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 너머북스. 43쪽. ISBN 978-89-9460627-9. 
  37.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서울대 인문 강의. 민음사. 81쪽. ISBN 9788937484940. 
  38. 윤영인; 이용규; 김선민; 토마스 알슨; 미할 비란; 테무르; 파멜라 크로슬리; 이시바시 다카오.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18쪽. ISBN 978896187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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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明熹宗賣錄 卷4》. 2007년 1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월 18일에 확인함. 明代中國人口,最後的全國官方統計,爲5,165.5459人,時間爲明光宗泰昌元年。 
  42. 정세련, 《中國 國體變革期 滿洲族 團體의 政治活動, 1901-1924》, 2014, 32쪽.
  43. 《淸聖祖實錄》卷一一七,第10頁
  44. 劉軍《財經問題硏究》(大連)2012年11期 第21-30頁
  45.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4쪽. ISBN 978-89-91965-12-6.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의 일부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중국은 1876년 10월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새로운 중국 외교사를 썼다. 중국이 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에 중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며,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 이후 청조는 30년 동안 모두 18개 국가에 연인원 68명의 공사 또는 부사(副使)를 파견했고, 1877년부터는 57개 지역에 영사를 파견했다. 
  46. 나퀸 (1998), 83쪽
  47. 나퀸 (1998), 84-85쪽
  48.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제4장 청 제국과 러시아, 민음사, 225쪽
  49. 《5시간만에 읽는 교회사》/유현덕 지음/작은 행복 p.181
  50. “한국 OMF홈페이지에 올라온 OMF역사 설명문”. 2009년 4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7월 6일에 확인함. 
  51. 나퀸 (1998), 31쪽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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