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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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제국/다이칭 구룬
大清帝國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ᡳ
1636년 ~ 1912년
Flag of the Qing Dynasty (1889-1912).svg
국기
국가 공금구
Empire of the Great Qing (orthographic projection).svg
1896년 청나라 강역. 홍콩과 연해주, 아무르 이북지역, 중앙아시아의 이리지역, 카슈가르를 상실한 이후의 지도로, 최대 영토는 아니다.
수도 성경(1636~1644)
북경(1644~1912) 북위 39° 55′ 동경 116° 23′  / 북위 39.917° 동경 116.383° / 39.917; 116.383
정치
공용어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
정부 형태 전제 군주제
황제 천명제 (1616 ~ 1626)
강희제 (1661 ~ 1722)
옹정제 (1722 ~ 1735)
건륭제 (1735 ~ 1796)
선통제 (1908 ~ 1912)
역사
 • 성립 (후금)
•국호 개칭
•중국 통일
신해혁명
해체
1616년
1636년
1644년
1911년 10월 10일
1912년 2월 12일
지리
면적 9,984,670km²
내수면 비율 2.8%
인구
1820년 어림 383,100,000명
기타
통화 위안 (1889년부터) ()
이전 국가
다음 국가
후금
명나라
준가르 제국
겔룩파
북원
정씨왕국
중화민국 임시 정부 (1912년)
청나라 소조정
일본 제국
복드 칸국
티베트 왕국
타이완 민주국
영국령 홍콩
현재 국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중화민국
러시아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몽골 몽골
파키스탄 파키스탄
미얀마 미얀마
중국의 역사
중국의 역사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황하장강 문명
신화·삼황오제
기원전 2070?~기원전 1600?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기원전 1046?~기원전 256
  서주 기원전 1046?~기원전 771
  동주 기원전 771~기원전 256
    춘추 시대 기원전 771~453
    전국 시대 기원전 453~221
제국의 시대
기원전 221~기원전 206

기원전 202~서기 220
  전한 기원전 202~서기 8
  8~23
  후한 25~220

삼국 시대 220~280
  220~265
  촉한 221~263
  229~280
265~420
  서진 265~316
  동진 317~420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남북조 시대 439~589
581~618

618~907
무주 690~705

오대십국시대
907~960

916~1125

960~1279
  북송
 960~1127
서하
1038~1227
  남송
 1127~1279

1115~1234
1271~1368

1368~1644


1636~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민정부) 1912~1949
중화인민공화국
1949~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1949~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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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淸—) 또는 대청제국(大淸帝國,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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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칭 구룬)은 일반적으로 명나라 이후 중국 대륙이 여진족(만주족)의 지배를 받은 시기로, 1616년누르하치가 건국한 ‘금’(후금)을 근간으로, 아들 홍타이지 집권 후 명나라를 몰아내고 ‘청’으로 국호를 바꾸어 중국 대륙을 지배하였다.

아무르 분지(헤이룽 강변)에서 탄생한 이민족의 나라 청나라는 광대하진 않으나 융성했으며 인구도 증가하였다. 청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건륭제)이 통치했다. 한족의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몽골 제국(원나라)을 제외한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이루게 되며,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683년부터 1830년까지는 그야말로 중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였다. [1] 이민족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1912년 선통제 푸이 대에서 서구열강 세력 등의 영향으로 국력이 약해져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간 이어졌던 제국의 시대가 끝나게 된다.

[2]

역사[편집]

건국[편집]

명나라 말기, 후금과의 대립(명말청흥)

1616년 만주족누르하치(재위: 1616~26년)가 만주를 통일하고, 예전에 만주족의 다른 이름인 여진족이 세웠던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에서 후금(後金)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우며 시작되었다. 그 후계자 홍타이지(재위: 1626~43년)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1636년)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홍타이지의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재위: 1643~61년)때 청의 팔기군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1644년)

청나라의 산해관 통과전의 세력도와 강희제 시기의 청나라 형세도.

청나라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가정삼도(嘉定三屠)’와 ‘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發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만주의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는데, 이들을 기선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이 학살 되었으며 [3][4]물론 정사도 아니고 근거도 빈약하지만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5]

성장과 강건성세[편집]

만주족이 세운 청은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을 중용하였으며 그들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에 힘썼다. 순치제에 이어 강희제(재위: 1661~1722년)가 8살에 제4대 황제에 즉위하였다. 강희제는 15세 때부터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즉위한 초기까지 청나라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이 있었다. 즉, 오배의 난(1669년), 오삼계(吳三桂)등 3명의 번왕세력들의 반란(삼번의 난, 1674~83년)이 있었으나, 이를 진압하고 타이완정씨왕국을 복속(1683년)하여 청나라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중국 통일을 이루게 된다.

또한 러시아가 강점한 네르친스크를 회복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을 체결하고, 스타노보이 산맥과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한다. 또한 아직까지 완전히 충성을 맹세하지 않던 외몽골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고 자신에게 반항하던 중가르의 군세를 크게 꺾어놓았다.

문화적으로는 한자 5만여자를 부수별, 획수별로 분류한 《강희자전》을 편찬케 하였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예수회 선교사(대표적으로 아담샬을 들 수있다.)들을 총애하였다.

강희제 치세에 이르러 광동 성을 중심으로 서양과의 무역이 크게 발달한다. 그러나 강희제는 적장자 윤잉을 황태자로 세운 뒤 폐해가 일어나 윤잉을 두 번 황태자에 책봉하고 두 번 폐위하였으며 뒤이어 자식들이 황태자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여 말년에는 그리 평온하지 못하였다. 그는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이 있었다.

강희제가 사망하자 넷째 아들 옹정제 (1722 ~ 1735)가 4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옹정제는 형제의 난에서 승리하여 부황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청나라의 통치체제를 완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옹정제는 세금을 단일화 하여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문화적으로는 강희제 때 시작한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것을 억누르는 문자의 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옹정제는 하루 4시간밖에 자지않고 정무에 너무 몰두하다가 과로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옹정제의 최후에는 아직도 의혹이 많이 남아있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1735 ~ 1795)는 몽골 제국을 제외한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큰 영토를 완성하였다. 이 당시의 영토는 몽골, 신강, 티베트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 등의 종주권을 확보했다. 이 시기의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3억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명나라의 인구가 6천만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적으로는 사고전서를 편찬, 경전과 역사서, 철학서, 문집을 모두 모아 10만권을 만들었다. 청조는 이 편찬 사업을 한족 지식인을 감시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고, 청조통치에 문제가 있는 내용들은 폐기하였다. 또한 이러한 편찬사업은 금석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많은 해외정벌과 계속되는 황실의 사치로 인한 천문학적인 경비가 국가재정에 부담을 주게되어 국운이 기울어지기 시작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도 건륭제의 총신(寵臣)이었던 화신(和神)의 전횡과 관리들의 부패로 인해 건륭제 말기에는 청나라 각지에서 백련교의 난(白蓮敎─亂)을 비롯한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쇠퇴와 멸망[편집]

1896년, 청나라 강역도.

강희제 이후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더러는 직접 지배하고 더러는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이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로 불렸다. 그러나 건륭제 말기부터 백련(白蓮, 1796년-1804년),·천리(天理, 1813년)의 난을 계기로 청나라는 점차 쇠퇴로 기울었다.

한편, 영국1792년 매카트니를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세기 무렵에 영국계 동인도 회사가 삼각 무역(아편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보려고 했으나, 청조는 이를 반대하여 아편 무역을 금하였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 전쟁(1840년-1842년)을 시작하여 승리하였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넘어갔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중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이 쇄도해옴으로써 중국은 역사상 유례없이 휘청거렸다.

1851년 홍수전(洪秀全)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내면에서는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이 일어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제2차 아편 전쟁이후, 청나라는 휴전에 중재역할을 한 러시아 제국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할양하는 등 서구열강세력들의 이권 침탈을 더욱 심하게 받게 되었다.

태평천국의 위세는 그러나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과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앞세운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天京:태평천국이 난징을 고쳐 부른 이름)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洋務)은 증국번(曾國藩)·이홍장(李鴻章) 등의 주도하에 일어났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켜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정부의 감독을 받았기 때문에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1894년-1895년청일전쟁이 청나라의 패배로 끝나자 양무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중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었다.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은 일본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하여 무술개혁(戊戌)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西太后)·이홍장 등 기존세력의 반격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과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과 그 수습을 위한 베이징 의정서(1901년)를 체결하며 청조는 쇠퇴해갔다. 또한 1904년-1905년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을 물리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서태후는 유학생을 일본 등에 보내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에 대해 알아보게 했으며, 국내적으로도 낡은 과거 제도 대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최신식 군대도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은 1911년 10월 10일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결국 1912년에 멸망하였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 내에서 청나라 소조정을 이루어 사실상 고립된 상태로 사직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펑위샹의 정변으로 인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 그 이후, 1949년국공 내전으로 인하여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이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외교[편집]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의 일부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중국은 1876년 10월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새로운 중국 외교사를 썼다. 중국이 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에 중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며,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 이후 청조는 30년 동안 모두 18개 국가에 연인원 68명의 공사 또는 부사(副使)를 파견했고, 1877년부터는 57개 지역에 영사를 파견했다. [6]

경제[편집]

명 말에서 청 초에 이르는 시기에, 시장이 확대되고 상인들의 교역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에 가족 중심으로 이뤄지던 회사들이 합자(合資) 형식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청 초기에는 극장, 광산, 연안 및 해외 운송, 상업 작물, 전당업 등의 사업에 자금을 제공하는 합자회사들이 등장하였다.[7] 북경, 성도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인들이 모이는 회관(會館)들이 생겨났다. 회관은 숙박이나 창고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상인과 기술자들이 교역을 조정하는 기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명 말부터 등장한 이런 회관들은 18세기 무렵에는 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8]

외국 무역이 활발해져, 은의 유입도 크게 증가하였다. 청은 18세기 초에 인두세(정은)를 따로 거두지 않고, 토지세(지은) 속에 포함시켜, 세금 제도를 단순화한 지정은제를 시행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선교사를 앞세운 서구열강이 교역을 원하자, 청나라는 교역항을 광저우로 한정하여 서양 상인들을 통제하고, '공행'이라는 특허 상인의 조합에 대외 무역의 독점권을 주었다. 공행무역등으로 서양 상인들의 무역량이 적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청나라의 차와 생사는 유럽에서 많은 이익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서구 열강과 청의 무역량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유럽의 상인들 중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청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해 가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에서 '무역 역조 현상'이 두드러졌다. 막대한 양의 은을 청에 지불하게 된 영국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청나라에게 무역 제한조치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은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매년 급격히 영국 동인도 회사의 아편 수출양이 증가하자, 청나라는 국내의 아편중독자가 늘어나는가 하면, 막대한 양의 은이 빠져나가게 된다. 이무렵 청나라는 '은본위제'를 실시했었는데,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무역'으로 인해 은의 급격한 감소로 국가체제의 위기를 맞게된다. 1830년대에는 은의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하고, 그 결과 은으로 세금 납부하던 농민들과 상인들은 부담이 두 배로 늘어났고, 결국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 않아, 국가 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빠져 버린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후, 외세 열강세력들의 침탈이 본격적으로 심화되면서 청나라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게 된다.

청나라때에는 양자강 중류 지역이 최대의 쌀 재배 지역이 되고, 감자, 양파, 땅콩, 옥수수 등의 외래작물이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상품 작물 재배와 함께 면, 제지, 제당 등의 분야에서 매뉴팩처가 발달하였다.

문화[편집]

비(非)한족 지배자인 청조는 방대한 한족 지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와 여러 제도를 답습하고 한족의 협력을 얻어 지배체제를 확립코자 하였다. 특히 한족의 지식인층을 회유하여 관심을 정치와 사회문제로부터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하여 대편찬 사업을 추진하였다. 강희 연간의 『강희자전(康熙字典)』, 옹정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건륭의 『사고전서』는 그렇게 하여 생긴 것이다.

반면에 반청적(反淸的)이라 판단한 사상에는 용서 없는 탄압을 가하여 이른바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실증주의(實證主義)에 투철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인 고증학(考證學)은 이미 명대에 시작을 보았지만 청조의 사상 탄압은 한인 학자로 하여금 더욱더 고증학으로 나아가게 하여 정치 문제로부터 도피시켰다. 그러나 고증학은 그 자신 일종의 과학적 객관주의이며, 서양 과학문명의 영향도 더해져 학문의 전분야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가령 실제의 측량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 등은 이러한 학풍의 소산인 것이다.

또한 청대에는 소설과 희곡의 발달이 한층 더 현저하여 『홍루몽(紅樓夢)』 『유림외사(儒林外史)』 『요재지이(聊齊志異)』 등 걸작이 나왔고, 희곡도 풍성하게 연출되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전통적 기법 외에 카스틸리오네에 의하여 서양의 화법(畵法)이 받아들여졌고, 건축은 원명원(圓明園)과 같이 베르사유 궁전에도 비길 만한 훌륭한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종교[편집]

기독교[편집]

경교와 천주교[편집]

중국에서는 일찍이 당나라 시대에 네스토리우스파(京敎)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대진사라는 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천주교는 명나라때부터 마테오 리치 신부(1552년-1610년)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전교활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전교하면서 겪었던 어려움 중 하나는 조상제사문제였다. 조상제사문제는 1704년 조상제사에 반대하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와 조상제사를 중국인전통으로 존중하는 예수회간의 신학논쟁으로 이어지는데, 결국 교황청에서 조상제사를 천주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규정하여 금지함에 따라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9] 천주교 선교사들은 유럽에 중국 문화를 소개하여 유럽 지식인들의 중국연구열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과 똑같은 을 입는 등 중국전통문화를 존중하였다.

개신교[편집]

개신교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세기 독일에서 태동한 모라비안 교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1860년에는 영국제임스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아내 마리아 테일러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중국사람들과 똑같은 을 입음으로써 중국인들에게 다가섰는데, 당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허드슨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륙선교회(영어: China Inland Mission,CIM)를 결성하여 1898년 중국 후난성을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정부를 수립하여 1951년에 철수할 때까지 활동하였으며, 1964년 OMF(영어: Overseas Missonary Fellowship)으로 선교회의 이름을 바꾸었다. [10]


청나라의 중앙 관제[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중국의 역사
이전 시대 청나라 청나라
1616 ~ 1912
다음 시대
남명 중화민국 중화민국 임시 정부
몽골의 역사
이전 시대 청나라
1635 ~ 1911
다음 시대
북원
중가르
Flag of Mongolia (1911-1921).svg 복드 칸국
  1. 조르주 뒤비 (2006). 《지도로 보는 세계사》. 채인택 옮김. 생각의 나무. 228쪽. ISBN 89-8498-618-6. 청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이 통치했다. 강희제(1661~1722 재위)와 건륭제(1736~1796 재위)는 몽골과 티베트, 이리 계곡, 신장을 합병하고,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침입을 저지한다. 아무르 분지(헤이룽 강변)에서 탄생한 이 제국은 광대하진 않으나 융성했으며 인구도 증가한다. 1683년부터 1830년까지는 그야말로 중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였다. 
  2. 중국에게 있어 이 시기는 만주족에게 식민 지배를 당한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청나라 초기에는 만주족에 의한 학살로 인구가 급감하기도 했었고, 피지배계층 한족들은 만주족의 풍습을 따르는 것을 거부하다 학살과 탄압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말기에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반대하는 '멸만흥한(滅滿興漢)'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3. 杜文凯 (1985年 6月版). 《《清代西人见闻录》》. 中国人民大学出版社(중국인민대학출판사). 53页(페이지)쪽. 
  4. 司徒琳 著 (1992年 12月版). 《李荣庆等译《南明史》》. 上海古籍出版社(상하이고적출판사). 131页(페이지)쪽. 
  5. 《明熹宗实录 卷4》. 明代中国人口,最后的全国官方统计,为5,165.5459人,时间为明光宗泰昌元年。 
  6. 박승준 (2010). 《한국과 중국 100년》. 서울: 기파랑. 14쪽. ISBN 978-89-91965-12-6. 국제사회를 보는 시각에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중국도 세계의 일부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일으킨 중국은 1876년 10월 영국에 처음으로 공사를 파견하는 새로운 중국 외교사를 썼다. 중국이 외국에 외교사절을 파견한 것은 중국의 대외관계에 중대 변혁이 일어난 것이며, 중국이 근대 서양 국제법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진입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였다. 이후 청조는 30년 동안 모두 18개 국가에 연인원 68명의 공사 또는 부사(副使)를 파견했고, 1877년부터는 57개 지역에 영사를 파견했다. 
  7. 나퀸 (1998), 83쪽
  8. 나퀸 (1998), 84-85쪽
  9. 《5시간만에 읽는 교회사》/유현덕 지음/작은 행복 p.181
  10. 한국 OMF홈페이지에 올라온 OMF역사 설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