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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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반 안춘 구룬
女真文中的「大金」

 

 

1115년 ~ 1234년
 

 

 

1142년 금나라
1142년 금나라
수도상경회령부
중도대흥부
남경개봉부
채주(임시도읍)
정치
정부 형태전제 군주제
황제
1115년 ~ 1123년
1234년

태조 원황제
말황제
국성완안씨
역사
 • 성립1115년
 • 멸망1234년
지리
위치중국
1142년 어림 면적2,900,000 km2
인문
공용어여진어, 거란어, 중세 중국어, 발해어
지배층여진족
피지배층한족, 거란족
인구
1190년 어림45,440,000명
기타
현재 국가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몽골 몽골
러시아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의 역사
中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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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大金, 여진어: 女真文中的「大金」 /amba-an antʃu-un/[1], 1115년 1월 28일 ~ 1234년)은 여진족 완안부의 아골타가 1115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금(大金, 여진어: /amba-an antʃu-un/), 연호를 수국(收國, 여진어: /gurun baxa uai/)으로 정하면서 건국됐다.[2]

금나라의 시조 아골타는 한때 여진족들을 지배하던 요나라를 서쪽으로 내쫒고 그 자리에 여진족들의 나라인 금나라를 세웠다. 이 서쪽으로 내쫒긴 이후의 요나라를 서요라고 칭한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내쫒은 이후, 남쪽에 있던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대규모 군사 원정을 일으켰고, 이 전쟁은 향후 몇 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한편 금나라의 여진족들은 중원에 거주하기 시작하며, 한족의 문화에 깊이 젖어들었으며 나중에는 심지어 북부의 몽골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개축하기까지 하였다. 금나라 시기, 중국 북부에서는 유교가 다시 흥하였고 한족의 문화가 흥성하였다.

금나라의 봉신으로 살던 몽골족들은 칭기즈 칸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자 하나로 통합되었고, 마침내 1211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금나라 군대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1234년에 금나라는 멸망하고야 만다.

국호[편집]

발해 대족 출신으로 고영창의 반란 때에 여진에 항복한 양박은 완안 아골타에게 황제(여진어: xuaŋ-di)를 칭하라고 권했고 새로운 나라를 개원하게 하였다. 그리고 금나라의 영토에서 금이 많이 생산되니 국호를 대금(大金)이라고 정하도록 권했다.[3] 이에 아골타는 황위에 오르며 "요나라는 빈철(賓鐵)을 국호로 삼아, 그 견고함을 취하였지만, 결국에는 또한 녹이 슬고 부러지니, 오직 금만이 변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금의 색깔은 백(白)인데, 완안부의 색깔 또한 백이다."라 하였다. 이로부터 국호를 대금이라 정했던 것이다.[4]

역사[편집]

건국[편집]

금나라는 1115년, 현대 지린성헤이룽장성에 걸쳐 살던 여진 부족완안부의 족장 아골타에 의하여 세워졌다. 구전에 의하면 아골타는 완안 함보의 후손이었다고 전해진다. 원래 여진족들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수 백년동안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시기에 여진족들은 거란족들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잡혀가 무고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이같은 처사는 여진족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결국 요나라가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자 여진족들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나라와 적대 관계였던 송나라는 이를 크게 반겼다. 1121년, 송나라는 금나라와 해상의 맹약을 맺어 함께 요나라를 무너뜨리기로 합의하였고, 곧바로 합동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송나라 군대가 요나라에 맞서 고전하는 와중에,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에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결국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 조정을 중앙아시아로 쫒아내는 데에 성공하였고, 요나라의 영토 거의 대부분을 흡수하였다. 한편 송나라는 요나라가 쫒겨간 틈을 타 요나라 남부 지역을 일부 회복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이 곳에 살고 있던 한족들의 극심한 반발을 받았다. 송나라도 한족 왕조였기에 한족들이 오히려 환영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시 사정은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구 요나라 영토에 살고 있던 한족들은 거의 대부분 요나라에 협력한 자들이었고, 송나라는 이들을 같은 한족이 아니라 적으로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 군대가 들어오자 이들은 북부의 금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금나라는 이를 기회로 삼아 곧바로 남진하였다. 이 때 송나라가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송나라가 이때 요나라와 송나라의 국경 사이에 조성했던 거대한 숲을 없애버렸던 것이다. 나중에 기병 위주의 금나라 군대가 물밀듯 밀려오자 송나라는 더 이상 자연의 보호도 받기 어려워졌고, 금나라는 손쉽게 1127년 1월 9일에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점령하였다. 이 때 금나라는 송나라의 황제 흠종과 태상황이었던 휘종을 잡아갔고, 이들과 함께 조정의 고관대작들도 대거 납치해갔다. 이를 정강의 변이라고 칭하고, 북송 시기가 이를 기점으로 끝난 것으로 본다. 이후 송나라는 남아있는 세력들을 수습하여 중국 강남 지방으로 후퇴, 고종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고, 이 시기 이후의 송나라를 남송이라고 부른다. 남송은 남쪽에서 군대를 모아 끊임없이 금나라와 맞서 싸웠으나, 이후 조정에서 주화파가 득세하며 1141년에 송나라의 진회가 금나라와 평화협상을 맺으며 일시적으로나마 평화가 찾아왔다. 이 협상에서 송나라는 화이허 이북의 영토를 모두 금나라에 내주어야 했으며, 당대 최고 명장이었던 악비를 죽여야만 했다. 게다가 세공(歲貢)으로 매년 은(銀) 25만량과 비단 25만 필을 보낼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5]

이후 개봉을 점령하고 중국 북부를 완전히 장악한 금나라는 오행 중에 흙을 자신들의 상징 원소로 정했고, 황색을 왕실의 색으로 삼았다. 오행설에 의하면, 흙은 송나라의 상징 원소였던 불 다음으로 오는 원소인데, 이와 같이 금나라가 흙을 자신의 원소로 삼은 것은 송나라가 끝나고 금나라의 천하가 열렸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남진[편집]

중국 북부를 점령한 금나라는 급격하게 한족화되기 시작하였다. 금나라는 대략 150만 명에 달하는 여진인을 화북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이 150만 명의 여진족들이 3천 만명에 달하는 한족들을 다스렸던 것이다. 여진족들에게는 땅이 배분되었으며, 각각 군직의 의무가 부여되었다. 300가구는 모극을 이루었고, 7개에서 10개의 모극이 맹안을 이루었다. 많은 여진족들이 한족과 결혼하였으며, 점차 여진족은 그 정체성을 잃어갔다. 금나라 조정도 이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귀족들은 반드시 여진족들과만 결혼하게 하였으나 이 규제마저도 1191년에 철폐되었다. 1135년에 태종이 사망한 이후 황위에 오른 자들은 모두 태조의 손자들이었다. 이들 중 희종은 중국 문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스스로 중국식 시를 쓸 정도로 한족의 문화를 좋아하였다. 그는 황실에 한족의 풍습까지도 대거 들여왔으나, 이 당시에도 고위 관직들은 모두 여진족들이 독점하게 하였다.

희종은 말년에 점차 술에 빠졌으며, 그를 비판하는 관리들을 모두 참살하며 폭정을 펼쳤다. 그는 심지어 최측근인 완안부의 인물들도 그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죽여버렸으며, 이는 여진 지도계급 내에서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결국 1149년, 희종은 암살되었고 그의 뒤를 의어 완안량이 해릉왕으로 즉위하였다. 해릉왕은 종실 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남송을 침공해서 통일 중국의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고, 이를 위하여 국력을 쥐어짜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게다가 해릉왕은 여색을 극심하게 밝혔으며, 오히려 희종보다 더한 폭정을 펼치며 황실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강제 징병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황실 내 반대 세력이 해릉왕을 쫒아내고 랴오양에서 오록(烏祿, 세종)을 황제로 옹립했다.

북쪽의 반란[편집]

해릉왕은 황위를 찬탈한 직후, 정당한 중국 대륙 전체의 황제가 되기 위하여 애썼다. 1153년에 해릉왕은 수도를 상경회령부에서 중도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옮겼고, 4년이 지난 1157년에는 중도대흥부의 중요성을 높이기 위하여 상경에 남아있던 귀족들의 집까지 모두 중도대흥부로 강제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해릉왕은 1127년에 함락된 이래 폐허로 남아있던 옛 송나라의 수도 개봉도 재건하여 금나라의 남쪽 중심도시로 삼았다.

해릉왕은 155명에 달하는 왕족들을 죽이는 등 여진족 귀족들의 권력을 꺾기 위하여 폭정을 펼쳤다. 게다가 중국 전체의 황제가 되고 싶었던 해릉왕은, 1161년에 남송을 공격하였는데, 황제의 눈이 딴데로 쏠린 틈을 타 상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 거란족들도 해릉왕의 폭정에 반발하여 동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해릉왕의 사촌 완안옹이 중심이 되어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해릉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남송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송나라 군대는 허겁지겁 후퇴하는 금나라 군대의 뒤를 쳐 큰 승리를 올렸다. 이처럼 해릉왕이 송나라와의 전쟁에서까지 패하자, 이미 민심을 잃었던 해릉왕의 지지기반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였으며 결국 그는 휘하 장군들에게 1161년 12월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게다가 수도에 있던 그의 아들과 가족들도 함께 살해당했다.

세종은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기는 하였으나, 해릉왕의 후계들이 모두 살해당할 때까지 공식적인 황제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1164년이 되어서야 세종은 겨우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고, 거란족들을 다시 금나라 군대로 편입시켜 군을 강화하고자 했다. 허나 이미 금나라의 국력은 반란 때문에 심각할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고, 결국 세종은 남쪽의 송나라와 화의를 맺어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금나라는 1164년에 송나라와 용흥화의를 맺었으며, 이 화의로 금과 송은 대략 40년이 넘게 평화를 맛보게 된다.

1180년대 초, 세종은 탈세를 방지하고 여진족들의 기틀을 잡기 위하여 200여 호에 달하는 맹안을 다시 만들었으며, 농경지 개발을 크게 장려했다. 세종의 선정 덕분에 금나라는 빠르게 번영하였으며, 쌀 생산량도 크게 늘어났다. 세종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여진족의 풍습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진어를 사용하도록 장려했고, 여러 중국 문학작품들을 여진어로 바꾸고 황실 주도의 여진 학교를 만드는 등 큰 노력을 쏟았다. 또한 과거제를 여진어로 보는 등 여진어를 퍼뜨리기 위하여 많은 관심을 보였다. 세종은 1161년부터 1189년까지 통치했으며, 그의 치세는 금나라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백성들도 그를 존경하였으며, 세종을 종종 전설적인 임금 요순과 비교하곤 하였다.

세종 사후, 장종이 황위에 올랐다. 세종의 손자인 장종은 여진족들의 문화도 중시하였으나, 점차 한족의 문화에 빠져들었다. 그는 한족 여인을 아내로 맞았으며 당나라 시대의 법전에 기반한 법전을 1201년에 공포하였다. 1207년, 남송 정권은 금나라를 토벌하려 들었으나 금나라 군대는 효과적으로 이들을 몰아냈다. 이후 금나라는 이를 빌미 삼아 송에게 더 많은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장종이 추진한 화약에 따르면 남송이 금에게 주어야 할 물건은 은 20만 냥, 비단 20만으로 바뀌었으며 세공(歲貢)이라는 칭호에서 세폐(歲幣)라는 단어로 바뀌었다. 또한 송나라의 재상이자 주전론자였던 한탁주를 처형시키도록 요구하였고, 송나라 조정은 이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멸망[편집]

13세기 초, 금나라는 점차 북쪽의 몽골의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1205년, 몽골의 칭기즈 칸서하를 침공하여 4년 동안 서하를 약탈했고, 서하 바로 옆에 있던 금나라도 점차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1211년에는 5만 명에 달하는 몽골 기병들이 금나라 국경으로 들어와 거란, 여진족 반란군들을 모아 힘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당시 금나라는 15만 명에 달하는 기병들로 이들에게 맞섰으나, 몽골이 너무 강력하여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퇴하였다. 결국 위소왕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본거지인 중국 동북지방을 빼앗겼고, 남송과 서하의 공격도 받았다. 이후 1213년, 몽골족들은 금나라의 수도 중도대흥부를 약탈하였고, 1214년 여름에 금나라는 몽골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으며 겨우겨우 수도만큼은 지켜내었다. 이후 선종은 중도대흥부를 버리고 개봉으로 수도를 천도하여 몽골의 위협을 어떻게든 피해보고자 하였다.

1216년, 금나라 조정의 일부 신하들이 선종에게 송나라를 공격하여 몽골에게 받은 분을 풀자고 제안하였다. 선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송을 공격하였으나, 양쯔 강에서 송나라 군에게 패하면서 위신이 추락하였다. 이렇게 되자 금나라는 북쪽의 몽골, 남쪽의 송을 동시에 상대해야만 했으며,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황위에 오른 애종은 국난을 타개하고자 송나라와의 전쟁을 끝내고 수도로 돌아와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그는 서하의 탕구트족과도 평화협정을 맺었다.

1227년에는 칭기즈 칸이 죽었고, 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 칸은 1232년 남송의 도움을 받아 군을 몰아 금나라를 다시 침공하였다. 여진족들은 저항하려 하였으나, 1233년에 개봉이 함락되자 애종은 개봉을 탈출해 허난지역을 전전하다가 1234년에 채주에서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에게 포위당하자 자살했다. 금나라의 영토는 몽골과 송나라가 나누어 가졌는데, 이 영토 배분 과정에서 다툼이 생기며 이후 몽골과 송나라가 또 전쟁을 벌이게 된다. 뒤이은 말제도 몽골군에게 살해되어 금나라는 10대 120년 만에 멸망했다.

정부기구[편집]

금나라는 초기에는 여진족의 제도를 그대로 사용하고 기존의 요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했다. 희종과 해릉왕 때 정치제도 개혁을 단행했고, 세종 때 중국식 정치제도를 확립했다. 금은 기본적으로 송의 법제를 따르면서도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여진의 대표 관제는 발극렬(勃克烈/bogile)로, 약 20년 동안 시행하다가 중국 관제인 3성제를 도입하면서 폐지했다. 발극렬은 관장(官長), 관인(官人), 또는 부족 추장을 뜻하는데, 황제도 그 일원이었다. 초기에는 종실의 최고 실력자들을 발극렬에 임명해서 회의를 통해 국가의 중요 사항을 결정했다. 3성제는 처음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다랐다가 해릉왕 때에 중서성과 문하성을 폐지하고 상서성으로 통합했다.

금나라는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데다가 여진족이 한족보다 적었다. 그래서 군사력을 유지하려고 여진족을 보호·우대했고, 각 민족을 각각 분리 통치했다. 여진족·거란족은 맹안·모극을 통해 편성했고, 한족·발해인은 주현제로 통치했다. 주·현의 장관은 한인 관료를 임명해 자치를 권장했다.

지방은 전국을 19개 로(路)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府)나 주(州)를 두고, 다시 그 아래에 현(縣)을 두었다. 로에는 도총관(都總管), 부에는 윤(尹), 주에는 절도사(節度使)·방어사(防禦使)·자사(刺史), 현에는 지현(知縣)을 임명해 다스렸다.

금나라는 초기에는 여진족의 관습법에 따르다가 화베이를 점령한 후 1145년에 역대 중국법을 참고해 <황통조제>를 편찬했다. 해릉왕 때 <정융속황제조>를 만들어 귀족의 특권을 제한했고, 세종 때는 <대정중수제조>를 반포했다. 장종 때는 금의 기본법이 되는 <태화율령>을 반포했다.

금나라는 한족을 통치하려고 여진족을 화베이로 이주케 한 다음 토지와 소를 지급하고 세금을 줄여 정착을 도왔다. 사회 지위도 일반 한족보다 높아서 형벌을 받을 때에도 유리한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여진족이 화베이로 이주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여진족과 한족의 관계가 나빠지고, 여진족은 국가의 보호만 믿다가 점차 몰락해 유랑민이 되었다. 또한 여진족 사이에서도 계층간의 격차가 심해졌다. 더 나아가서 세종은 여진 정신을 고취하고 근면 검약한 생활을 유도했고, 한족의 토지와 여진족 권력자의 토지를 몰수해 여진족에게 나누어 주기에 이르렀다. 이로인한 차별정책으로 한족과 여진족 사이의 반목이 더욱 깊어져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군사제도[편집]

초기에는 군사도 독립된 제도 없이 맹안·모극이 통솔했다. 이후 태조는 항복한 요나라군에 요의 제도인 도총관제(都總管制)를 그대로 적용했다. 태종 때는 군사 최고 기관으로 도원수부(都元首府)를 두어 북송을 공격했다. 해릉왕은 도원수부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를 폐지하고 추밀원을 설치했다. 추밀원은 상서성에 속한 참모기관으로 군대 지휘권은 없었다.

경제[편집]

금나라는 영토는 넓었지만 경제 가치가 있는 곳은 화베이뿐이었다. 그러나 화베이지역도 물산이 풍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주요 물자는 남송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송과 분쟁이 지속되면 전국민이 물자 부족으로 곤란을 겪었다.

정부는 주로 조세로 국고를 충당했는데 여진족이 화베이로 이주하면서 조세 수입이 크게 줄어 재정난에 직면했다. 그러자 세종은 재정을 확보하려고 물력전을 실시했다. 물력전은 한족을 대상으로 재산에 따라 부과했다. 그러나 이 제도로 한족은 정부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 한편, 해릉왕 때 동전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교초를 발행했다. 그러나 교초는 장종 이후 재정 궁핍으로 남발해서 가치가 폭락했고, 정부는 신임을 잃어갔다. 재정 위기 때문에 돈을 받고 관직과 도첩 등을 파는 일이 잦았다.

문화[편집]

여진족은 이미 농경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이전부터 한족과 자주 접촉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북송 지역을 점령한 후 비교적 빨리 중국 문화를 수용했다. 그리고 화베이지역으로 이주한 후에는 점차 한족에게 동화해갔다. 태조는 여진 문화를 보존하려고 거란문자를 본떠 여진대자를 만들었고, 희종은 여진소자를 만들었다. 세종은 여진부학, 여진국자학 등의 학교를 세워 여진문자를 가르쳤고, 여진진사과를 설치해 여진족 관리를 양성했다. 또한 중국 고전을 여진어로 번역하고, 여진족이 중국식 성명을 쓰거나 한족의 복식을 입지 못하게 하는 등 한족에 동화되는 것을 막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여진족은 전통적으로 원시 샤머니즘을 숭배했다.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요나라에서 융성했던 불교를 들여왔는데, 화베이지역에서는 유학이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12세기 중반이 되자 불교는 쇠퇴하게 되었고, 대신 도교가 성행했는데 특히 왕중양은 도교의 일파인 전진교를 개창했다. 전진교는 왕중양의 제자인 장춘진인을 교주로 해 화베이지역에서 발전했다.

금은 시·부 시험으로 관리를 채용했기 때문에 시사(詩詞)가 유행했다. 우문 허중, 고사담, 오철, 채송년과 아들 채규가 유명하다. 장종 때는 문운이 융성했는데, 중앙정부에서는 서화 명품을 수집·전시했다. 장종도 서예에 뛰어났으며, 북송 휘종의 글씨체를 흠모하며 모방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서예가로는 임순, 이조, 양방기 등이 유명하다.

역대 황제[편집]

여진족 추장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재위기간 능호
- 금 시조
(金始祖)
(금 태조 추숭)
의헌경원황제
(懿憲景元皇帝)
완안함보
(完顔函普)
941년 ~ 960년 희릉(熙陵)
- - 연목현덕황제
(淵穆玄德皇帝)
(금 태조 추숭)
완안오노
(完顔烏魯)
960년 ~ 962년 희릉(熙陵)
- - 화정경안황제
(和靖慶安皇帝)
(금 태조 추숭)
완안발해
(完顔跋海)
962년 ~ 983년 건릉(建陵)
- 금 헌조
(金獻祖)
(금 태조 추숭)
순렬정소황제
(純烈定昭皇帝)
완안수가
(完顔綏可)
983년 ~ 1005년 휘릉(輝陵)
- 금 소조
(金昭祖)
(금 태조 추숭)
무혜성양황제
(武惠成襄皇帝)
완안석노
(完顔石魯)
1005년 ~ 1021년 안릉(安陵)
- 금 경조
(金景祖)
(금 태조 추숭)
영렬혜환황제
(英烈惠桓皇帝)
완안오고내
(完顔烏古迺)
1021년 ~ 1074년 정릉(定陵)
- 금 세조
(金世祖)
(금 태조 추숭)
신무성숙황제
(神武聖肅皇帝)
완안핵리발
(完顔劾里鉢)
1074년 ~ 1092년 영릉(永陵)
- 금 숙종
(金肅宗)
(금 태조 추숭)
명예목헌황제
(明睿穆憲皇帝)
완안파자숙
(完顔頗刺淑)
1092년 ~ 1094년 태릉(泰陵)
- 금 목종
(金穆宗)
(금 태조 추숭)
장순효평황제
(章順孝平皇帝)
완안영가
(完顔盈歌)
1094년 ~ 1103년 헌릉(獻陵)
- 금 강종
(金康宗)
(금 태조 추숭)
헌민공간황제
(獻敏恭簡皇帝)
완안오아속
(完顔烏雅束)
1103년 ~ 1113년 교릉(喬陵)
제1대 금 태조
(金太祖)
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
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
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아골타
(完顔阿骨打)
(아구다)
1113년 ~ 1115년 예릉(睿陵)
금나라 황제와 연호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여진 이름 연호 재위기간 능호
제1대 금 태조
(金太祖)
응건흥운소덕정공인명
장효대성무원황제
(應乾興運昭德定功仁明
莊孝大聖武元皇帝)
완안민
(完顔旻)
아골타
(阿骨打)
수국(收國) 1115년 ~ 1116년
천보(天輔) 1117년 ~ 1123년
1115년 ~ 1123년 예릉(睿陵)
제2대 금 태종
(金太宗)
체원응운세덕소공
철혜인성문열황제
(體元應運世德昭功
哲惠仁聖文烈皇帝)
완안성
(完顔晟)
오걸매
(吳乞買)
천회(天會) 1123년 ~ 1135년 1123년 ~ 1135년 공릉(恭陵)
- 금 휘종
(金徽宗)
(금 희종 추숭)
윤공극양효덕현공
우성경선황제
(允恭克讓孝德玄功
佑聖景宣皇帝)
완안종준
(完顔宗峻)
승과
(繩果)
- - -
제3대 금 희종
(金熙宗)
(금 민종(金閔宗))
홍기찬무장정효성황제
(弘基纘武莊靖孝成皇帝)
(무령황제(武靈皇帝))
완안단
(完顔亶)
합랄
(合剌)
천회(天會) 1135년 ~ 1137년
천권(天眷) 1138년 ~ 1140년
황통(皇統) 1141년 ~ 1149년
1135년 ~ 1149년 사릉(思陵)
- 금 덕종
(金德宗)
(해릉양왕 추숭)
헌고홍도문소무열
장효예명황제
(憲古弘道文昭武烈
章孝睿明皇帝)
(명숙황제(明肅皇帝))
완안종간
(完顔宗幹)
알본
(斡本)
- - -
제4대 - -
(해릉양왕(海陵煬王))
완안량
(完顔亮)
적고내
(迪古乃)
천덕(天德) 1149년 ~ 1153년
정원(貞元) 1153년 ~ 1156년
정륭(正隆) 1156년 ~ 1161년
1149년 ~ 1161년 해릉왕묘
(海陵王墓)
- 금 예종
(金睿宗)
(금 세종 추숭)
입덕현인계성광운
문무간숙황제
(立德顯仁啓聖廣運
文武簡肅皇帝)
완안종요
(完顔宗堯)
와리타
(訛里朶)
- - 경릉(景陵)
제5대 금 세종
(金世宗)
광천흥운문덕무공
성명인효황제
(光天興運文德武功
聖明仁孝皇帝)
완안옹
(完顔雍)
오록
(烏祿)
대정(大定) 1161년 ~ 1189년 1161년 ~ 1189년 흥릉(興陵)
- 금 현종
(金顯宗)
(금 장종 추숭)
체도홍인영문
예덕광효황제
(體道弘仁英文
睿德光孝皇帝)
완안윤공
(完顔允恭)
호토와
(胡土瓦)
- - 유릉(裕陵)
제6대 금 장종
(金章宗)
헌천광운인문의무
신성영효황제
(憲天光運仁文義武
神聖英孝皇帝)
완안경
(完顔璟)
마달갈
(麻達葛)
명창(明昌) 1190년 ~ 1196년
승안(承安) 1196년 ~ 1201년
태화(泰和) 1201년 ~ 1208년
1189년 ~ 1208년 도릉(道陵)
제7대 - 폐황제
(廢皇帝)
(위소왕(衛紹王))
완안윤제
(完顔允濟)
흥승
(興勝)
대안(大安) 1209년 ~ 1211년
숭경(崇慶) 1212년 ~ 1213년
지녕(至寧) 1213년
1208년 ~ 1213년 -
제8대 금 선종
(金宣宗)
계천흥통술도근인
영무성효황제
(繼天興統述道勤仁
英武聖孝皇帝)
완안순
(完顔珣)
오도보
(吾睹補)
정우(貞祐) 1213년 ~ 1217년
흥정(興定) 1217년 ~ 1222년
원광(元光) 1222년 ~ 1223년
1213년 ~ 1224년 덕릉(德陵)
제9대 금 애종
(金哀宗)
(금 의종(金義宗))
경천덕운충문정무
성렬효장황제
(敬天德運忠文靖武天
聖烈孝莊皇帝)
(순황제(順皇帝))
(민황제(閔皇帝))
완안수서
(完顔守緖)
영갑속
(寧甲速)
정대(正大) 1224년 ~ 1232년
개흥(開興) 1232년
천흥(天興) 1232년 ~ 1234년
1224년 ~ 1234년 -
제10대 -
(금 소종(金昭宗))
말황제
(末皇帝)
완안승린
(完顔承麟)
호돈
(呼敦)
성창(盛昌) 1234년 1234년 -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金啓孮,《女真文辭典》, 文物出版社, 1984, 224쪽
  2. 羅永男, 《金代 渤海人의 存在樣態 및 政治的 位相》, 2017, 40~41쪽
  3. 羅永男, 《金代 渤海人의 存在樣態 및 政治的 位相》, 2017, 41쪽
  4. 금사》 본기 태조, "收國元年正月壬申朔,群臣奉上尊號。是日,即皇帝位。上曰:「遼以賓鐵爲號,取其堅也。賓鐵雖堅,終亦變壞,惟金不變不壞。金之色白,完顏部色尚白。」于是國號大金,改元收國。"
  5. 《金 史》 卷77, 皇統二年二月,宗弼朝京師,兼監修國史。宋主遣端明殿學士何鑄等進誓表,其表曰:「臣構言,今來畫疆,合以淮水中流為界,西有唐、鄧州割屬上國。自鄧州西四十裏並南四十裏為界,屬鄧州。其四十裏外並西南盡屬光化軍,為弊邑沿邊州城。 既蒙恩造,許備籓方,世世子孫,謹守臣節。 每年皇帝生辰並正旦,遣使稱賀不絕。 歲貢銀、絹二十五萬兩、匹,自壬戌年為首,每春季差人般送至泗州交納。 有渝此盟,明神是殛,墜命亡氏,踣其國家。 臣今既進誓表,伏望上國蚤降誓詔,庶使弊邑永有憑焉。」
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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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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