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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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제국
मौर्य साम्राज्यम्

기원전 322년 ~ 기원전 185년
 

 

Mauryans.JPG
수도파탈리푸트라
정치
정부 형태전제군주제
입법부만트리파리샤드
삼랏(황제)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73년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24년
기원전 224년 ~ 기원전 215년
기원전 215년 ~ 기원전 202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7년
기원전 187년 ~ 기원전 185년

찬드라굽타(초대)
빈두사라
아소카
다사라타
삼프라티
샬리슈카
데바바르만
샤타단반
브리하드라타(말대)
왕조마우리아 왕조
역사
 • 건국BC 322년
 •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BC 305년 ~ BC 303년
 • 최전성기BC 273년 ~ BC 232년
 • 칼링가 전쟁BC 268년 ~ BC 265년
 • 최대 영토 확보BC 265년
 • 멸망BC 185년
지리
위치남아시아
면적5,000,000 km2
인문
통용어산스크리트어
마가다어
지역어박트리아어
코이네 그리스어
통용문자브라흐미 문자
민족인도아리아인
드라비다인
야바나인
사카인
인구
기원전 261년 어림50,000,000명[1]
경제
통화파나
종교
종교불교
자이나교
브라만교
아지비카교
바가바트교
조로아스터교[2]
기타
현재 국가인도의 기 인도
파키스탄의 기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기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의 기 아프가니스탄
네팔의 기 네팔
인도의 역사
भारत का इतिहास
Red Fort in Delhi 03-2016 img3.jpg

마우리아 제국(산스크리트어: मौर्य साम्राज्यम् 마우리야 삼라지얌)은 기원전 320년부터 기원전 185년까지 남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한 고전기 인도의 제국으로,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이자 동시에 제일 넓은 면적을 지녔던 국가이다.[3]

초대 황제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시대에 발전된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국력을 키운 후 북인도 지역을 통일하였고, 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3년까지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을 벌여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부 인도와 남인도 지역을 정벌하며 타밀라캄칼링가 왕국을 제외한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3대 황제인 아소카 시대에는 마우리아 제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던 칼링가 왕국을 정복하며 타밀라캄 지역의 촐라, 체라, 판디아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 전역을 통일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전성기 인구가 5천만에서 6천만 사이를 기록할 정도로 당시 고대 국가 중에서는 매우 많은 인구를 자랑했으며,[4][5] 면적 또한 19세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을 제외한 남아시아 역사상의 국가들 중 제일 넓은 면적을 자랑했지만, 아소카 사후 암군들의 통치, 왕위 계승 분쟁, 사타바하나의 독립 등 제국 내 영토들의 독립, 최고 행정부인 소파가세누스의 부패,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같은 외세의 침략 등으로 점차 쇠퇴하다가 기원전 185년에 푸샤미트라 숭가의 쿠데타에 의해 왕조가 전복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역사[편집]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편집]

마우리아의 시조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본래 마가다 왕국 난다 왕조의 분가인 "마우리아"라는 크샤트리야 가문 출신으로, 탁샤실라 대학의 구루였던 차나키야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이즈음 인도 아대륙마케도니아 왕국바실레우스알렉산드로스 3세의 공격으로 차례차례 점령당하고 있었는데, 서부 펀자브 지역의 탁샤실라 왕은 알렉산드로스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동부 펀자브 지역의 파우라바 왕국을 다스리던 왕인 포루스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저항을 시도했지만 기원전 326년에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펀자브 지역을 비롯한 북서부 인도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차나키야는 당시 북인도의 패권 국가 마가다를 다스리던 난다 왕조의 왕 다나 난다에게 마케도니아를 쳐부수자고 제의하였지만 모욕을 받음과 동시에 거절당했으며,[6] 이후 난다 왕조를 증오하게 된 차나키야는 제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마가다난다 왕조부터 멸망시킨 후 인도를 이 위기로부터 구할 왕국을 세우자고 제안하였으며, 이를 수락한 찬드라굽타가 펀자브 지역의 파우라바 왕국을 정복하며 펀자브를 거점으로 삼았다. 차나키야난다 왕조가 약해질 틈을 기다리는 동시에 탁실라의 장교, 그가 키운 제자들, 당시 마가다의 장군인 바드라살라 등을 포섭하고 기원전 221년 마가다의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점령하며 난다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그 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초대 삼라트(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이 형성되었다.

동시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사망함으로써 마케도니아 제국의 지방 권력이 와해되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이를 기회로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인도 지역인 니카노르, 에우다모스 등을 수복하기 시작하였는데,[7] 이러한 팽창 정책을 펼치던 찬드라굽타의 마우리아 제국과 과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서로 충돌하면서 기원전 305년에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이 발발하였지만,[8]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인더스 강을 뒤로 하여 전술적으로 불리한 지역에 위치하던 것을 파악한 마우리아 제국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였다. 기원전 303년에 셀레우코스 제국과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으며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이 지배하던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지역을 얻었다.[9]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문명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10]

헬레니즘 세계와 마우리아 제국 간에 교류가 지속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에 수많은 그리스인 사절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 중 셀레우코스 제국의 외교관이자 당시 고대 인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인 메가스테네스가 저술한 역사서인 《인디카》에서는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 대해 "64개의 성문과 570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자 페르시아의 궁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궁전을 지닌 도시"라고 기록된 내용이 존재한다.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이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인도 아대륙 안쪽으로 관심을 돌려 북인도뿐만 아니라 중부 인도와 남인도 지역에도 확장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마우리아 제국은 오디샤 지역의 칼링가타밀라캄 지역의 촐라, 판디아, 체라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통일하였지만,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재위 말기인 기원전 298년에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에 발생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당시 그가 스승으로 모시던 자이나교 구루의 충고를 들은 후 정치에 손을 떼고 아들인 빈두사라에게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자이나교에 귀의하여 출가한 후 고행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빈두사라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73년)[편집]

이후 마우리아 제국의 2대 황제로 즉위한 빈두사라는 아버지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때부터 마우리아 제국의 총리였던 차나키야의 도움을 받아 당시 데칸 고원 남부의 카르나타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동시에 해당 지역에 존재하던 16개의 왕국을 전부 정복하였으며, 칼링가남인도 지역을 제외한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11]

빈두사라는 그리스 세계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빈두사라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바실레우스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에게 무화과와 그리스 포도주, 그리스 수사학 교사를 사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으며, 이에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그리스 법에 교사 판매는 금지되어 있다"는 내용이 적힌 서신과 함께 무화과포도주를 보내주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12] 빈두사라의 아버지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자이나교를 믿었던 것과 달리, 빈두사라는 아지비카교를 믿었으며, 당시 아지비카교의 사원들을 후원하는 정책들을 실시하였다.[13] 그러나 빈두사라 시절에는 반란도 자주 발생하였는데, 탁실라를 주도로 하는 웃타라파타(북부 속주)에서 반란이 대표적으로 이 지역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아소카 황자가 웃타라파타 사람들이 이 속주를 담당하는 관리의 횡포로 인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안 후 그 관리에게 처벌을 내림으로서 평화적으로 반란을 진압하였고 이로 인해 탁실라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자신의 군대 또한 확장하였으며, 탁실라 인근에서 발생한 반란 또한 진압하며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지만,[14] 이 사건으로 아소카가 당시 제국의 황제인 빈두사라보다 시민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게 되면서 빈두사라는 아소카를 경계하게 되었다.

한편 기원전 273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을 직감한 빈두사라는 제국의 차기 황제로 아소카가 아닌 당시 웃타라파타 지역에 또다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부왕으로 파견된 수시마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 후 한 신하에게 수시마를 불러와 황위에 앉히고 대신 이전에 웃타라파타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전적이 있는 아소카를 다시 파견해 반란을 재진압하도록 명령하였지만, 이 반란 자체가 그 신하가 수시마에게 앙금을 품고 당시 우자인을 주도로 하는 아반티파타(서부 속주)에 부왕으로 파견되어 있던 아소카를 황위에 앉히기 위해 웃타라파타의 시민들을 선동하여 꾸민 자작극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아소카수시마보다 먼저 파탈리푸트라에 귀환하였다. 귀환한 아소카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빈두사라를 찾아가 수시마가 아닌 아소카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설득하였고 이에 빈두사라는 분노하며 이를 거절하였지만, 이 일로 화병까지 겹친 빈두사라는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다.

아소카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편집]

아소카 시대의 영토

빈두사라가 세상을 떠나며 사실상 아소카가 마우리아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되었다. 한편 반란을 진압하던 수시마는 이 소식을 들고 아소카가 있는 파탈리푸트라를 공격하였는데, 당시 마우리아 제국의 재상이었던 라다굽타파탈리푸트라의 동쪽 성문에다 여러 가지 기계 장치와 아소카의 동상과 군사들의 상을 만들고, 그 주위에 불구덩이가 덮어진 함정을 만든 후 수시마와 그의 군사들을 이쪽으로 유인해 함정에 빠뜨려 죽였다. 수시마 이외에도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대두하자 아소카는 4년에 걸쳐 99명의 이복 형제들, 자신에게 반대하는 500명의 신하들, 선왕인 빈두사라의 후궁들을 숙청하였으며, 4년후인 기원전 269년에 숙청 작업이 완료되자 대관식을 치루며 마우리아 제국의 3대 황제로 공식 즉위하였다.

아소카는 즉위 직후 행정제도 개편을 단행했으며, 웬만한 일은 신하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국정을 처리했다. 그는 자신이 식사를 하거나 침실에 있더라도 언제든지 국정 보고를 받고 일을 처리하며 국내 상황을 안정시켜나갔다.[15] 한편 당시 오디샤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예로부터 교역에 유리한 항구들을 지녔던 칼링가 왕국은 강력한 해군을 동원하여 마우리아 제국의 주요 해상 무역로들을 차단하였는데,[16] 이로 인해 칼링가 왕국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아소카는 결국 기원전 268년에 칼링가 정벌을 개시하였다. 초기에는 칼링가의 군대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소수의 군대만을 파견하여 칼링가군에게 패배를 겪었으나 이후 기원전 265년에 아소카가 직접 당시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부대 9천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에 나섰고 칼링가의 입구인 마하나디강에 도착하였다. 이 강을 건너가던 도중 아소카는 칼을 강물에 빠뜨렸는데, 이를 본 군사들을 불길한 예감에 철군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아소카는 부하들의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고 군대의 사기를 독려시키기 위하여 더 공격적인 자세로 진군에 나섰다. 마침내 마하나디강의 지류인 다와강에서 마우리아군과 칼링가군이 마주치면서 전면전이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칼링가가 패배하며 칼링가는 마우리아 제국에 정복되었다. 이 전투로 칼링가군 10만명이 사망하고 칼링가인 15만명이 포로로 이송되었으며, 전투가 끝난 직후 칼링가의 한 마을에서 무수한 시체들과 고아가 된 아이들의 미쳐버린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은 아소카는 전쟁에 회의심을 가지게 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 확장을 중지하게 되었다.[17]

칼링가 전쟁이 끝난지 4년후인 기원전 261년에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는 "다르마에 의한 정복"을 표방하며 불교 기반의 통치를 시행하였는데,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 전역에 약초 재배지,[18] 정신병원, 동물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건설하였고 병원에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도록 하거나 곡식을 매우 싼 이자에 빌려주는 등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시켰으며, 물이 없는 마을에 노동력을 동원해 우물을 파거나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 곳곳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시행하는 등 중앙 집권 체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마우리아의 각 속주에 설치된 하위 행정 단위인 "아하라"(군현) 지역에 지방관직의 "프라데시카"와 토지 측정관직의 "라주카"를 5년 임기제로 지방에 파견시키는 제도를 실시하여 지방 행정을 더욱 체계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 통치에 부조리가 없는 지를 감찰함으로써 안정적인 통치를 꾀했다. 아소카는 황궁에서 가축의 도살을 금지시킨 후 동물의 도살과 사냥에 대해 규제하는 법을 반포하였으며, 이 외에도 강제노동을 금지하거나 불교 이외의 아지비카교, 브라만교, 자이나교, 바가바트교와 같이 제국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들도 허용하며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다르마에 기초를 둔 불교 이념을 통치 정책에 반영하면서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리를 보관하는 불탑 또한 아소카 치세부터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석가모니 열반 직후 구성된 8개의 불탑에 안치된 사리를 꺼내 이를 고운 가루로 만들어 인도 전역에 8만 4000기의 불탑을 조성했으며,[19] 이때 산치 스투파,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붓카라 스투파 등이 건설되었다.[20]

아소카때의 불교 전파

아소카는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의 동굴이나 석주에 규정들을 세긴 아소카 칙령을 선포한 후 이를 전국에 세웠다. 이 칙령들은 대부분 마가다 프라크리트어로 쓰였지만 그리스어, 아람어로도 쓰인 것들도 있는데, 이 칙령은 야바나인, 캄보자인. 간다라인들을 제국의 국경 지대에 사는 사람들로 언급하고 있으며, 아소카가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서부의 디아도코이 통치자들에게 불교 선교사들과 외교 사절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언급도 담겨있다. 또한 칙령은 안티오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마가스 및 에피로스의 알렉산드로스 2세 등 당시 디아도코이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당시 마우리아 제국과 헬레니즘 세계 사이의 거리(약 4,000 마일)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21] 이 아소카 석주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석주인 사르나트의 4사자 석주는 오늘날 인도의 국장으로 사용될 정도로 균형미와 기법의 정교함을 인정받고 있으며,[22] 이 석주에 새겨진 법륜 문양인 아소카차크라는 오늘날 인도 국기의 정중앙에도 볼 수 있다.

쇠퇴[편집]

아소카 시대는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였지만, 아소카에 의해 브라만교야즈나와 같은 생명 희생 의식이 금지되며 브라만 계급의 위상이 좁혀지며 브라만 계급의 반발심을 샀으며,[23] 아소카 석주불탑의 공사 실시, 불교 교단에 면세 혜택을 주고 대규모의 재화를 보시하는 행위로 재정이 약화되었고 아소카 사후 마우리아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32년에 아소카가 사망하자 차기 황제로 즉위한 다사라타 마우리아의 실정으로 인하여 마우리아 제국은 전성기 시절에 확보한 영토들을 많이 상실하였으며, 삼프라티에 의해 다시 영토를 수복하여 잠시동안 중흥기를 맞이하였지만, 삼프라티 사후 암군들의 통치, 왕위 계승 분쟁, 제국 내 영토들의 독립, 최고 행정부인 소파가세누스의 부패,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침공 등이 겹치며 또다시 쇠퇴하였고 결국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 제국의 세나파티[24]였던 푸샤미트라 숭가의 쿠데타로 인해 브리하드라타 마우리아가 살해되며 왕조가 단절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행정[편집]

마우리아 제국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스승인 차나키야의 저서인 아르타샤스트라에 따라 인도 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적인 행정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이러한 행정 체제는 마우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굽타 제국 등 여러 북인도 왕조들에 의해 계승되는 등 후대 북인도 왕조의 행정 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앙[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중앙 행정부는 최고 통치자인 삼랏(황제), 각료 회의기구인 만트리파리샤드로 구성되었다. 삼랏은 제국의 최고 통치자로서 행정, 사법, 입법을 전부 총괄하였고, 만트리파리샤드는 제국의 최고 회의 기구로서 황제의 통치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이 기구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다.

  • 만트리파리샤드 아다크샤 - 오늘날의 의장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만트리파리샤드 회의를 총괄하였다.
  • 마하만트리 -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 세나파티 - 오늘날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제국의 국방을 총괄하였다.
  • 푸로히탐 - 최고 종교 지도자로, 제국 내부의 종교적인 사안들을 다루었다.
  • 유바라자 - 제국의 차기 후계로 황태자에 해당함.
  • 산니다타 - 왕실의 재산을 담당하는 관직
  • 그 외 20여 개의 기타 부서들을 담당하는 아다크샤(장관)들

이들중 "만트리파리샤드 아다크샤", "세나파티", "마하만트리", "유바라자"들은 높은 권한을 지녔기 때문에 이들이 만트리파리샤드의 주축을 담당하였다.

지방[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속주 주도가 나타나 있는 지도. 작은 별로 표시되어 있고 밑줄이 그어져 있는 도시가 각 속주의 주도이다. 큰 별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도시는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이다.

마우리아 제국은 자국의 행정 구역을 수도인 파탈리푸트라가 위치한 마가다 지역과 그 외 4가지 "파타"(속주)로 나누었는데, 이 속주들은 다음과 같다.

각 "속주"들은 황자 출신으로 파견된 부황(副皇)이나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총독이 통치하였는데, 전자의 경우로 파견된 부왕은 "쿠마라"로 불렸으며 후자의 경우로 파견된 총독은 "아리야푸트라"로 불렸다. 특히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성인이 된 황자를 각 속주로 파견하여 정치 경험을 쌓게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25] 마우리아 제국은 처음으로 인도 아대륙을 통일했지만, 각 지역 세력을 강력하게 통제할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각 속주로 황자를 파견하여 황제를 보조하는 부황(副皇)으로서 마우리아 제국의 통치권 강화에 힘쓰도록 했다.

각 속주는 "아하라"(군현)들로 나뉘었으며 지방관직의 "프라데시카"와 토지 측정관직의 "라주카", 비서 및 지방 회계를 담당하는 관직인 "유크타" 3명이 "아하라" 지역을 담당하였는데, 이들 중 지방관인 "프라데시카"는 5년마다 중앙 정부가 있는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방문해 근황을 보고해야만 하였으며, 이 제도는 아소카 시대부터 확립되었다.

"아하라"는 다시 "그라마"(마을)들로 나뉘었으며 마을의 회의 기구인 판차야트에서 선출된 그라미카(촌장)이 마을을 다스렸다.

시정[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는 시정을 처리하기 위해 시민에 의해 선출되는 30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된 자치 행정 의회가 있었는데, 이 30여개의 평의원들은 각각 5명의 임원으로 구성된 6개의 위원회로 나뉘었다. 이 6개의 위원회들은 파탈리푸트라공업, 공예, 여행자나 순례자의 취급, 과세를 위한 사망 및 출생 신고의 접수, 물산 등을 관리하였으며 이들을 총괄하는 자치 행정 의회는 위생, 재정, 공원 및 공공 건축물 등을 관리하였다.[26]

사법[편집]

마우리아 제국에는 크게 민사재판을 담당하는 법원인 "다르마스티야"와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법원인 "칸타카소다나"라는 두 종류의 법원이 존재하였으며, 지방관이나 총독이 거주하는 도시나 마을에는 특별 법원이 있었다. 또한 메가스테네스에 따르면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사소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사형당할 정도로 법률이 엄격했으며 이 때문에 범죄 또한 거의 일어나지 않아 시민들이 외출할 때 대문을 잠그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군사[편집]

메가스테네스에 따르면,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시대에 마우리아 제국의 군대는 해군, 군사 소송병, 보병, 기병대, 전차 사단, 전투 코끼리 등 6개의 병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27] 보병 600,000명,[28] 기병 30,000명, 전투 코끼리 9,000마리 등 강력한 대군을 지니고 있었다.[29] 아소카 시대에 마우리아 제국의 군대는 보병 60만, 기병 10만, 전투 코끼리 부대 9천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이루고 있었다.[30]

경제[편집]

마우리아 제국에서 통용된 파나

남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통일과 군사 안보를 이룬 마우리아 제국은 수자원이 풍부한 갠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수로 등을 개통하거나 농업 생산성을 높이면서 공동 경제 체계와 상업 체계를 강화하였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파나가 인도 전역에 단일 통화로 통용되었으며, 지방 정부는 농민과 상인들을 지역 토후들로부터 보호하였다. 마우리아 제국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공공 사업과 수로를 후원하였으며, 대내 무역은 크게 확대되었다.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종전 이후인 기원전 303년부터 아소카 치세가 끝나는 기원전 232년까지 대외 무역 또한 크게 활성화되었는데,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위치한 항구인 카이버 패스를 중심으로 디아도코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교역하였으며,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교류하였다.

당시 마우리아 제국은 비단, 섬유, 향료 등을 수출하였으며, 목재, 생선, 가축, 무화과, 포도주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아소카에 의해 수천 개의 도로, 수로, 운하, 병원, 휴게소 및 기타 공공 공사의 건설이 진행되었으며, 세금 및 농작물 수집과 같은 엄격한 관리 관행이 완화되면서 제국 전역의 생산성과 경제 활동이 향상되었다. 고대 아시아에서 제일 긴 무역망 중 하나인 그랜드 트렁크로드도 마우리아 제국 시대에 건설되었다.[31]

예술[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예술은 페르시아고대 그리스 미술 양식과 인도 고유의 양식이 결합되며 확립되었다.

마우리아 제국의 궁정에서는 석조 조형 예술이 발달하였는데, 주로 아소카 치세때 만들어진 약사여래상, 남자 토르소 조각 등이 대표적이며, 아시리아페르시아의 돌기둥 제작 방식을 반영해 추나르산의 사암으로 만들어져 종 모양 또는 동물 모양에 연꽃 문양으로 장식된 후 각 지역에 세워진 아소카의 기둥 또한 마우리아 궁정 예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나무를 재료로 하여 인도 고유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목조 조형 예술이 발달하였는데, 주로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조각한 미술로써 야크샤상·야크시니 여신상 등이 대표적이며, 궁정 예술보다는 예술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에 지어진 주요 건축물로는 산치 스투파, 마하보디 사원 등의 불교 건축물들이 대부분이며, 역시 석조 조형 예술과 마찬가지로 아소카 시대에 지어졌다.

종교[편집]

마우리아 제국에서 유행한 종교로는 자이나교불교가 있다. 이 중 아소카 시대에 인도 전역에 84,000개의 스투파를 건설하거나 제3차 결집을 개최하는 불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불교가 발달하였지만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딱히 국교로 지정된 종교가 없었으며 다른 종교를 박해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였다. 또한 불교를 믿었던 아소카와 달리 자이나교를 믿었던 삼프라티는 인도 전역에 125,000개의 데라사(자이나교 사원)들을 건설하였으며,[32] 아소카가 외국에 사절들을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한 것처럼 삼프라티 또한 외국에 사절들을 파견하여 자이나교를 전파하는 등 자이나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33][34]

역대 황제[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BOESCHE, Roger. The First Great Political Realist: Kautilya and His Arthashastra. Lanham, Maryland: Lexington Books, 2002. ISBN 0-7391-0401-2. S. 11. (anglicky)
  2. Boyce, Mary; Grenet, F. (January 1991). 《A History of Zoroastrianism, Zoroastrianism under Macedonian and Roman Rule》 (영어). BRILL. 149쪽. ISBN 978-90-04-29391-5. 
  3. 정확히는 대영 제국의 식민지 국가인 영국령 인도 제국이 마우리아 제국보다 더 큰 영토를 지녔기 때문에 식민지 시절까지 포함하면 인도 제국이 인도 역사상 제일 넓은 면적을 지닌 국가이다.
  4. Boesche, Roger (2003년 3월 1일). 《The First Great Political Realist: Kautilya and His Arthashastra》. 11쪽. ISBN 9780739106075. 
  5. Demeny, Paul George; McNicoll, Geoffrey (May 2003). 《Encyclopedia of population》. ISBN 9780028656793. 
  6. Sugandhi, Namita Sanjay (2008). Between the Patterns of History: Rethinking Mauryan Imperial Interaction in the Southern Deccan. pp. 88–89. ISBN 9780549744412.
  7. 《From Polis to Empire, the Ancient World, C. 800 B.C.-A.D. 500》. Greenwood Publishing. 2002. ISBN 0313309426. 2019년 8월 16일에 확인함. 
  8. Kosmin 2014.
  9. https://books.google.co.kr/books?id=-5RHK4Ol15QC&pg=PA64&redir_esc=y#v=onepage&q&f=false
  10. s, deepak (2016년 10월 25일). 《Indian civilization》 (영어). deepak shinde. 
  11. Kistler, John M. (2007). 《War Elephants》.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67쪽. ISBN 978-0803260047. 2019년 8월 16일에 확인함. 
  12. BBC 인도이야기 한 권으로 읽는 인도의 모든 것.134쪽~135쪽
  13. Beni Madhab Barua, Ishwar Nath Topa, Ashoka and his inscriptions, Volume 1, p. 171
  14. 《고대인도왕국·무굴제국(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23쪽
  15. 《고대인도왕국·무굴제국(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24쪽
  16. Roy, K. (2015). Military Manpower, Armies and Warfare in South Asia. Warfare, Society and Culture. Taylor & Francis. p. 15. ISBN 978-1-317-32128-6. Retrieved 28 June 2019.
  17. Guruge, Ananda W. P. (1995). "Emperor Aśoka and Buddhism: Unresolved Discrepancies between Buddhist Tradition & Aśokan Inscriptions". In Anuradha Seneviratna (ed.). King Aśoka and Buddhism: Historical and Literary Studies.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ISBN 978-955-24-0065-0.
  18. 《고대인도왕국·무굴제국(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34쪽
  19. 《고대인도왕국·무굴제국(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39쪽
  20. 《고대인도왕국·무굴제국(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40쪽
  21. Edicts of Ashoka, 13th Rock Edict, translation S. Dhammika.
  22. 《고대인도왕국·무굴제국(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36쪽
  23. 《고대인도왕국·무굴제국(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43쪽
  24. 오늘날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이며 동아시아의 대장군에 대응되는 직책이었음.
  25. 《고대인도왕국·무굴제국(생각하는 힘 세계사컬렉션)》22쪽
  26. 일빛출판사《세계사 편력》 47쪽
  27. Kangle, R. P. (1986). 《A Study》 (영어). Motilal Banarsidass Publ. ISBN 978-81-208-0041-0. 
  28. Saul, David: War: From Ancient Egypt to Iraq p. 362
  29. R. C. Majumdar 2003, 107쪽.
  30. https://www.icrc.org/en/doc/resources/documents/article/other/57jmf2.htm
  31. https://roadsandkingdoms.com/2016/dinner-on-the-grand-trunk-road/
  32. John Cort 2010, 142쪽.
  33. John Cort 2010, 199쪽.
  34. Tukol, T. K. 《Jainism in South India》. 4 March 2016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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