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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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제국
मौर्य साम्राज्य

기원전 322년 ~ 기원전 185년
 

 

국기
Mauryans.JPG
수도파탈리푸트라
정치
정부 형태전제군주제
삼라트(황제)
기원전 322년 ~ 기원전 298년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73년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
기원전 232년 ~ 기원전 224년
기원전 224년 ~ 기원전 215년
기원전 215년 ~ 기원전 202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7년
기원전 187년 ~ 기원전 185년

찬드라굽타
빈두사라
아소카
다사라타
삼프라티
살리수카
데바바르만
사타단반
브리하드라타
국성마우리아
입법만트리파리샤드
역사
 • 제국 성립BC 322년
 •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BC 305년 ~ BC 303년
 • 최전성기BC 273년 ~ BC 232년
 • 칼링가 전쟁BC 268년 ~ BC 265년
 • 최대 영토 확보BC 265년
 • 멸망BC 185년
지리
지역남아시아
면적5,000,000 km2
인문
공용어프라크리트어
통용문자브라흐미 문자
민족인도아리아인
드라비다인
인구
기원전 261년 어림50,000,000명[1]
경제
통화파나
종교
종교불교
자이나교
브라만교
아지비카교
기타
현재 국가인도의 기 인도
파키스탄의 기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의 기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의 기 아프가니스탄
네팔의 기 네팔
인도의 역사
Red Fort in Delhi 03-2016 img3.jpg

마우리아 제국(산스크리트어: मौर्य साम्राज्य)은 기원전 320년부터 기원전 185년까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지배한 고전기 인도의 제국으로,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이자 동시에 제일 넓은 면적을 지녔던 국가이다. 초대 군주인 찬드라굽타 시대에 발전된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국력을 키운 후 북인도 대부분을 통일하였으며, 3대 군주인 아소카 시대에는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통일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전성기 인구가 5천만에서 6천만 사이를 기록할 정도로 당시 고대 국가 중에서는 매우 많은 인구를 자랑했으며,[2][3] 면적 또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을 제외한 인도 역사상의 국가들 중 제일 넓은 면적을 자랑했지만, 아소카 사후 점차 쇠퇴하다 숭가 제국의 시조인 푸샤미트라 숭가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사[편집]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기원전 321년 ~ 기원전 298년)[편집]

마우리아 제국이 등장하기 이전, 당시 인도는 알렉산더 대왕의 공격으로 차례차례 점령당하고 있었다. 탁실라 왕은 알렉산드로스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그 일대의 구루였던 카우틸랴는 당시 북인도의 패권 국가였던 마가다 왕국을 다스리던 난다 왕조의 왕 다나 난다에게 마케도니아를 쳐부수자고 제의하였지만 모욕을 받음과 동시에 거절당했으며,[4] 이후 난다 왕조를 증오하게 된 카우틸랴는 제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난다 왕조부터 멸망시킨 후 인도를 이 위기로부터 구할 왕국을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이를 수락한 찬드라굽타가 펀자브 지역의 파우라바 왕국을 정복하여 펀자브를 거점으로 삼은 후 카우틸랴난다 왕조가 약해질 틈을 기다리는 동시에 탁실라의 장교, 그가 키운 제자들, 당시 난다 왕조의 장군인 바드라살라 등을 통섭하였고, 기원전 221년 난다 왕조의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점령함으로써 난다 왕조를 정복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초대 삼라트(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이 형성되었다. 때마침 이 시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함으로써 헬레니즘 제국의 지방 권력이 와해되자 이를 기회로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인도 지역인 니카노르, 에우다모스 등을 수복하기 시작하였는데,[5] 이러한 팽창 정책을 펼치던 마우리아 제국과 과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며 서로 충돌하면서 기원전 305년에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이 발발하였지만,[6]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인더스 강을 뒤로 하여 전술적으로 불리한 지역에 위치하던 것을 파악한 마우리아 제국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기원전 303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와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던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 등의 땅을 얻게 되었으며,[7] 이 전쟁을 계기로 마우리아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등의 헬레니즘 문명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8] 특히 이 시기 셀레우코스 제국의 외교관이자 당시 고대 인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 인디카를 저술한 역사가인 메가스테네스가 이곳으로 자주 파견되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는 "64개의 성문과 570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궁전을 지닌 도시"라고 할 정도이니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시기 마우리아 제국의 위엄을 엿볼 수 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재위 말기인 기원전 298년에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정치에 손을 떼고 스스로 빈두사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자이나교에 귀의하여 출가한 후 고행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빈두사라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73년)[편집]

이후 마우리아 제국의 2대 황제로 즉위한 빈두사라는 아버지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때부터 마우리아 제국의 총리였던 차나키야의 도움을 받아 당시 데칸 고원 남부의 카르나타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해당 지역들에 존재하던 16개의 왕국과 충돌하거나 탁실라 지역에서의 반란 등 저항도 발생하였지만 전부 진압하였으며 칼링가남인도 지역을 제외한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9] 빈두사라는 그리스 세계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빈두사라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였던 안티오쿠스에게 무화과와 그리스 포도주, 그리스 수사학 교사를 사고 싶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으며, 이에 셀레우코스 제국에서는 "그리스 법에 교사 판매는 금지되어 있다"는 내용이 적힌 서신과 함께 무화과와 포도주를 보내주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10] 빈두사라의 아버지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자이나교를 믿었던 것과 달리, 빈두사라는 아지비카교를 믿었으며, 당시 아지비카교의 사원들을 후원하는 정책들을 실시하였다.[11] 빈두사라는 기원전 273년에 사망하였으며 이후 빈두사라의 아들이자 당시 우자인을 주도로 하는 서부 속주의 총독이었던 아소카가 마우리아 제국의 3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아소카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3대 황제인 아소카 치세에 마우리아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오디샤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예로부터 교역에 유리한 항구들을 지녔던 칼링가 왕국은 강력한 해군을 동원하여 마우리아 제국의 주요 해상 무역로들을 차단하였는데,[12] 이로 인해 칼링가 왕국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아소카는 결국 기원전 268년에 칼링가 정벌을 개시하였으며, 당시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부대 9천마리라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함으로써 결국 기원전 265년에 칼링가를 정복하는데 성공하였지만,[13] 칼링가 마을에 가득한 피와 고아가 된 아이들의 미쳐버린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은 아소카가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는 의미로 상좌부 불교에 귀의하며 정복 활동을 중지하면서 마우리아 제국은 영토 확장을 중지하게 되었다.[14] 이후 아소카는 마우리아 제국 전역에 정신병원, 동물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건설하였고 곡식을 매우 싼 이자에 빌려주는 등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시켰으며, 물이 없는 마을에 노동력을 동원해 우물을 파거나 제국의 영토 곳곳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시행하는 등 중앙 집권 체제를 발전시켰다. 또한 강제노동이나 사냥 금지 등 비폭력과 사회 윤리에 기초를 둔 불교 이념을 통치 정책에 반영하면서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전 세계에 상좌부 불교를 알리게 되었다. 아소카는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의 동굴이나 석주에 규정들을 세긴 아소카 칙령을 선포한 후 이를 전국에 세웠다. 이 칙령들은 대부분 마가다 프라크리트어로 쓰였지만 그리스어, 아람어로도 쓰인 것들도 있는데, 이 칙령은 야바나인, 캄보자인. 간다라인들을 제국의 국경 지대에 사는 사람들로 언급하고 있으며, 아소카가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서부의 디아도코이 통치자들에게 불교 선교사들과 외교 사절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언급도 담겨있다. 또한 칙령은 안티오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마가스 및 에피로스의 알렉산드로스 2세 등 당시 디아도코이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당시 마우리아 제국과 그리스 세계 사이의 거리(약 4,000 마일)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15]

쇠퇴(기원전 232년 ~ 기원전 185년)[편집]

아소카 대제 사후 왕위에 오른 다사라타 마우리아의 실정으로 인하여 마우리아 제국은 전성기 시절에 확보한 영토들을 많이 상실하였으며, 삼프라티에 의해 다시 영토를 수복하여 잠시동안 중흥기를 맞이하였지만, 삼프라티 사후 마우리아는 암군들의 통치, 왕위 계승 분쟁, 제국 내 영토들의 독립, 최고 행정부인 소파가세누스의 부패,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같은 외세의 침략 등 여러 이유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하였고 결국 기원전 185년에 마우리아 제국의 최고사령관 푸샤미트라 숭가의 쿠데타로 인해 브리하드라타 마우리아가 살해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사회[편집]

행정[편집]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초대 황제 찬드라굽타의 스승인 카우틸랴가 저술한 아르타샤스트라의 내용을 참고하여 제국의 행정 구역을 수도인 파탈리푸트라가 위치한 중앙 직할지와 동서남북을 기준으로 토살리를 주도로 하는 동부 속주, 우자인을 주도로 하는 서부 속주, 수바르나기리를 주도로 하는 남부 속주, 탁실라를 주도로 하는 북부 속주 등의 지방 속주들로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중앙 직할지는 삼라트(황제)와 만트리파리샤드(각료 의회)로 구성된 중앙 정부가 직접 통치하고 각 지방 속주들은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총독과 지방의 자치 행정 기구인 판차야트로 구성된 지방 정부들이 중앙 정부로부터 지방의 행정· 사법· 조세 등을 관리권을 위임받아 통치하였다. 또한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는 시정을 처리하기 위한 자치 행정 의회가 있었는데, 시민에 의해 선출되는 30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된 이 평의원은 5명의 임원으로 구성되는 6개의 위원회로 나뉘는데 이 위원회들은 파탈리푸트라공업, 공예, 여행자나 순례자의 취급, 과세를 위한 사망 및 출생 신고의 접수, 물산 등을 관리하였으며 자치 행정 의회는 위생, 재정, 공원 및 공공 건축물 등을 관리하였다.[16]

군사[편집]

메가스테네스에 따르면, 당시 마우리아 제국의 군대는 해군, 군사 소송병, 보병, 기병대, 전차 사단, 전투 코끼리 등 6개의 병과로 편제되어 있었으며,[17] 보병 600,000명,[18] 기병 30,000명, 전투 코끼리 9,000마리 등 강력한 대군을 지니고 있었다.[19]

경제[편집]

남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통일과 군사 안보를 이룬 마우리아 제국은 수자원이 풍부한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수로 등을 개통하거나 농업 생산성을 높이면서 공동 경제 체계와 상업 체계를 강화하였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파나가 인도 전역에 단일 통화로 통용되었으며, 지방 정부는 농민과 상인들을 지역 토후들로부터 보호하였다. 마우리아 제국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공공 사업과 수로를 후원하였으며, 대내 무역은 크게 확대되었다.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종전 이후인 기원전 303년부터 아소카 치세가 끝나는 기원전 232년까지 대외 무역 또한 크게 활성화되었는데,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에 위치한 항구인 카이버 패스를 중심으로 디아도코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교역하였으며, 말레이 반도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교류하였다. 당시 마우리아 제국은 비단, 섬유, 향료 등을 수출하였으며, 목재, 생선, 가축, 무화과, 포도주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아소카에 의해 수천 개의 도로, 수로, 운하, 병원, 휴게소 및 기타 공공 공사의 건설이 진행되었으며, 세금 및 농작물 수집과 같은 엄격한 관리 관행이 완화되면서 제국 전역의 생산성과 경제 활동이 향상되었다. 고대 아시아에서 제일 긴 무역망 중 하나인 그랜드 트렁크로드도 마우리아 제국 시대에 건설되었다.[20]

예술[편집]

마우리아 제국의 예술은 페르시아와 고대 그리스 미술 양식과 인도 고유의 양식이 결합되며 확립되었다. 마우리아 제국의 궁정에서는 석조 조형 예술이 발달하였는데, 주로 아소카 치세때 만들어진 약사 여래상, 남자 토르소 조각 등이 대표적이며, 아시리아나 페르시아의 돌기둥 제작 방식을 반영해 추나르산의 사암으로 만들어져 종 모양 또는 동물 모양에 연꽃 문양으로 장식된 후 각 지역에 세워진 아소카의 기둥 또한 마우리아 궁정 예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나무를 재료로 하여 인도 고유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목조 조형 예술이 발달하였는데, 주로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조각한 미술로써 야크샤상·야크시니 여신상 등이 대표적이며, 궁정 예술보다는 예술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에 지어진 주요 건축물로는 산치 스투파, 마하보디 사원 등의 불교 건축물들이 대부분이며, 역시 석조 조형 예술과 마찬가지로 아소카 시대에 지어졌다.

종교[편집]

마우리아 제국 시대에 유행한 종교로는 자이나교불교가 있다. 이 중 아소카 시대에 인도 전역에 84,000개의 스투파를 건설하거나 제3차 결집을 개최하는 불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함으로써 불교가 발달하였지만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딱히 국교로 지정된 종교가 없었으며 다른 종교를 박해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였다. 또한 불교를 믿었던 아소카와 달리 자이나교를 믿었던 삼프라티는 인도 전역에 125,000개의 데라사(자이나교 사원)들을 건설하였으며,[21] 아소카가 외국에 사절들을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한 것처럼 삼프라티 또한 외국에 사절들을 파견하여 자이나교를 전파하는 등 자이나교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22][23]

역대 삼라트(황제)[편집]

각주[편집]

  1. BOESCHE, Roger. The First Great Political Realist: Kautilya and His Arthashastra. Lanham, Maryland: Lexington Books, 2002. ISBN 0-7391-0401-2. S. 11. (anglicky)
  2. Boesche, Roger (2003년 3월 1일). 《The First Great Political Realist: Kautilya and His Arthashastra》. 11쪽. ISBN 9780739106075. 
  3. Demeny, Paul George; McNicoll, Geoffrey (May 2003). 《Encyclopedia of population》. ISBN 9780028656793. 
  4. Sugandhi, Namita Sanjay (2008). Between the Patterns of History: Rethinking Mauryan Imperial Interaction in the Southern Deccan. pp. 88–89. ISBN 9780549744412.
  5. 《From Polis to Empire, the Ancient World, C. 800 B.C.-A.D. 500》. Greenwood Publishing. 2002. ISBN 0313309426. 2019년 8월 16일에 확인함. 
  6. Kosmin 2014.
  7. https://books.google.co.kr/books?id=-5RHK4Ol15QC&pg=PA64&redir_esc=y#v=onepage&q&f=false
  8. s, deepak (2016년 10월 25일). 《Indian civilization》 (영어). deepak shinde. 
  9. Kistler, John M. (2007). 《War Elephants》. University of Nebraska Press. 67쪽. ISBN 978-0803260047. 2019년 8월 16일에 확인함. 
  10. BBC 인도이야기 한 권으로 읽는 인도의 모든 것.134쪽~135쪽
  11. Beni Madhab Barua, Ishwar Nath Topa, Ashoka and his inscriptions, Volume 1, p. 171
  12. Roy, K. (2015). Military Manpower, Armies and Warfare in South Asia. Warfare, Society and Culture. Taylor & Francis. p. 15. ISBN 978-1-317-32128-6. Retrieved 28 June 2019.
  13. https://www.icrc.org/en/doc/resources/documents/article/other/57jmf2.htm
  14. Guruge, Ananda W. P. (1995). "Emperor Aśoka and Buddhism: Unresolved Discrepancies between Buddhist Tradition & Aśokan Inscriptions". In Anuradha Seneviratna (ed.). King Aśoka and Buddhism: Historical and Literary Studies.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ISBN 978-955-24-0065-0.
  15. Edicts of Ashoka, 13th Rock Edict, translation S. Dhammika.
  16. 일빛출판사《세계사 편력》 47쪽
  17. Kangle, R. P. (1986). 《A Study》 (영어). Motilal Banarsidass Publ. ISBN 978-81-208-0041-0. 
  18. Saul, David: War: From Ancient Egypt to Iraq p. 362
  19. R. C. Majumdar 2003, 107쪽.
  20. https://roadsandkingdoms.com/2016/dinner-on-the-grand-trunk-road/
  21. John Cort 2010, 142쪽.
  22. John Cort 2010, 199쪽.
  23. Tukol, T. K. 《Jainism in South India》. 4 March 2016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출처[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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