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루키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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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루키아 왕국
ಚಾಲುಕ್ಯ ರಾಜ್ಯ

 

543년753년
 

 

왕국
Badami-chalukya-empire-map.svg
수도바다미
정치
정부 형태군주제
마하라자
543년 ~ 566년
609년 ~ 642년
655년 ~ 680년
찰루키아 왕조
풀라케신 1세
풀라케신 2세
비크라마디트야 1세
지리
지역중부 인도
인문
공용어산스크리트어
칸나다어
주민칸나다인

종교
종교힌두교
기타 종교불교, 자이나교
인도의 역사
Ahilya Ghat by the Ganges, Varanasi.jpg

찰루키아 왕국(칸나다어: ಚಾಲುಕ್ಯ ರಾಜ್ಯ)은 543년부터 753년까지 데칸 고원 일대를 중심으로 번영한 고전기 인도 왕국이다. 6세기 중반 최초로 나타난 찰루키아는 바나바시의 카담바 왕국이 쇠퇴하자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풀라케신 2세 통치기간 동안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풀라케신 2세가 사망한 이후 동찰루키아는 데칸의 동부에서 독립적인 왕국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11세기까지 왕조가 유지되었다. 데칸의 서부에서는 8세기 중반 라슈트라쿠타 왕국이 새롭게 등장하였으며, 10세기 후반에는 서찰루키아라고 불리웠다. 서찰루키아는 칼야니 지방에서 12세기까지 왕조를 유지하였다.

역사[편집]

찰루키아 왕국은 543년 풀라케신 1세에 의해 세워졌다. 풀라케신 1세는 바타피(현재 카르나타카 주의 바갈코트 지방의 바다미)를 수도로 명명하였다. 왕위를 물려받기 전 에레야라는 이름을 가졌던 풀라케신 2세는 데칸 고원 전체를 지배하고 통치하였으며, 찰루키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꼽힌다. 그의 왕비들은 남부 카나라 지역의 알루파 왕조와 탈라카드의 서강가 왕조의 공주들로서, 찰루키아 왕국과의 혼인을 통해 혈연관계로 친밀한 유대를 맺었다. 풀라케신 2세는 찰루키아의 영토를 팔라바 왕국의 북쪽까지 확장하고 나르마다 강둑에서 푸슈야브후티 왕국의 남진을 저지했다. 그 후 데칸 남동부에서 비슈누쿤디나 왕국을 격파했다. 그러나 팔라바 왕국의 나라스임하바르만은 642년 바다미를 공격해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찰루키아 왕국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였다. 이 전쟁에서 풀라케신 2세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찰루키아 왕국은 수도인 바다미가 13년 동안 팔라바 왕국에 점령당했을 때 내분으로 풀라케신 2세가 죽은 후 잠시 쇠퇴하였으나, 비크라마디트야 1세가 바다미에서 팔라바인들을 밀어내고 찰루키아에 질서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찰루키아 왕국은 비크라마디트야 2세의 통치기간(733–744) 동안 다시 전성기에 올랐는데, 이시기 툰다이만달람 영토의 정복과 이때의 팔라바 왕국의 난디바르만 2세에게서 거둔 승리는 비크라마디트야 2세의 유명세를 널리 떨치게 하였다. 또한 정복자임에도, 팔라바 왕국의 국민들과 수도 칸치푸람의 기념물에 자비를 베풀어 더욱 존경을 받았다. 이로써, 팔라바 왕국이 반다비를 정복했던 이전의 굴욕을 복수하고, 카날라사나타 사원에 승전비를 세워 칸나다 비문을 새겼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랍 침입자들은 찰루키아 통치하에 있던 남부 구자라트를 침공했으나 아랍인들은 나브사리의 찰루키아 총독인 풀라케시에 의해 패배하고 쫓겨났다. 비크라마디트야 2세 사후 점차 쇠퇴하던 찰루키아는 753년 라슈트라쿠타 왕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영향[편집]

찰루키아의 통치는 남인도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이며 카르나타카의 역사에서 황금시대를 상징한다. 찰루키아 왕국의 등장으로 남인도 지역에서 작은 왕국들이 난립했던 시기는 끝나고 제국이 등장하게 된다. 또한 찰루키아 왕국은 남인도에 수도를 둔 채 카베리 강과 나르마다 강사이의 전 지역을 통합하고 지배하였다. 찰루키아의 발흥은 효율적인 행정, 해외 무역과 상업을 탄생시켰으며, " 찰루키안 건축"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스타일의 건축을 발전시켰다. 서찰루키아의 자인과 베라샤바 전통에서 유래된 칸나다 문학은 9세기 라슈트라쿠타 왕국의 궁정에서 열렬한 후원을 받았으며, 11세기에는 텔루구어 문학이 동찰루키아의 후원을 받았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