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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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티야
కాకతీయులు

800년~1323년
국기
수도오루갈루
정치
정치체제군주제
마하라자
800년 ~ 815년
1261년 ~ 1289년
1289년 ~ 1323년

니리파 베나
루드라마 데비
프라타파루드라 2세
역사
 • 건국800년
 • 서찰루키아로부터 독립1163년
 • 멸망1343년
지리
위치텔랑가나
인문
공통어텔루구어, 산스크리트어
공통문자텔루구 문자
민족텔루구인
종교
국교힌두교
기타
현재 국가인도의 기 인도

카카티야(텔루구어: కాకతీయులు)는 중세 인도의 한 왕조로, 남인도 텔랑가나 지역의 오루갈루를 중심으로 번영한 텔루구계 왕조이다.

역사[편집]

800년경 텔루구계 부족의 족장인 니리파 베나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초기에는 서부 데칸의 서찰루키아의 속국으로 존재하였다. 12세기 중반에 점차 서찰루키아가 쇠퇴하자 당시 통치자였던 프롤라 2세는 이를 틈타 세력을 확장하였고 그의 후계자인 프라타파루드라 1세때 서찰루키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후 고다바리 삼각주까지 왕국을 북쪽으로 확장시켰다. 다음 통치자였던 마하데바는 해안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 후 13세기 가나파티 왕때 카카티야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당시 카카티야의 인접국들인 세부나, 호이살라, 판디아, 촐라 등과 격돌하며 칸치푸람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텔루구 지역의 통합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나파티 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의 딸 루드라마가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그녀는 1270년에 동강가 왕국과 동맹을 맺어 세부나를 공격해 동부 데칸을 차지하였다. 1289년 루드라마가 죽고 프라타파루드라 1세가 왕위를 물려받은 이후 카카티야는 쇠락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1323년 델리 술탄국의 침공으로 멸망하였다.

사회[편집]

카카티야는 당시 타 국가에 비해 카스트 제도가 그리 엄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카카티야의 역대 왕들이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수드라 출신인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자티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왔으나 카카티야 비문은 사람들이 자티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정권과 군대의 연계는 카카티야의 중요한 특징이었는데, 유목민 계통의 농민들을 군대에 모집하여 전사 계급을 창출하고 사회적으로 이동시키며 왕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카카티야에서는 관개를 위하여 고지대에 약 5000개의 저수지가 건설되었으며, 이로써 건조 기후 지역의 개발 가능성을 높였다.

문화[편집]

카카티야의 왕들은 예술과 문학 발전에 큰 후원을 했는데, 산스크리트어를 장려함으로써 산스크리트 문학을 부흥시키기도 했으며, 하남콘다에 위치한 1000개의 기둥을 가진 사원(Thousand pillared temple)과 같이 인도 북부와 남부 양식을 혼합한 카카티야 양식의 만디르들을 건립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