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폴로

![]() Marco Pol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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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 폴로의 초상화[1] | |
작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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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254년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출생으로 추정 |
사망 | 1324년 1월 8일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에서 병사 후 Church of San Lorenzo(북위 45° 15′ 41″ 동경 12° 12′ 15″ / 북위 45.2613° 동경 12.2043° )에 매장 |
국적 | 베네치아 공화국 |
언어 | 이탈리아어, 베네토어, 라틴어 |
직업 | 작가, 상인, 탐험가 |
종교 | 가톨릭 |
활동기간 | 1269년 ~ 1305년 |
장르 | 탐험 기행 문학 |
부모 | 아버지: 니콜로 폴로(Niccolo Polo, 1230~1294) 어머니: 니콜레 안나 데푸제(Nicole Anna Defuseh, 1234~1308) |
배우자 | 도나타 바도에르(Donata Badoer, 1273~1354) |
자녀 | 3녀 첫째딸: 판티나 폴로(Fantina Polo, 1297~1368) 둘째딸: 벨렐라 폴로(Bellela Polo, 1299~1358) 막내딸: 모레타 폴로(Moretta Polo, 1301~1316) |
친지 | 친할아버지: 니콜라 마페오 폴로(Nicola Maffeo Polo, 1209~1261) 작은할아버지: 마르코 마테오 폴로(Marco Matteo Polo, 1212~1240) 이복 숙부: 마테오 폴로(Matteo Polo, 1248~1265) 이복 숙부: 마페오 폴로(Maffeo Polo, 1252~1309) |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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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견문록》(루스티치아노 작가의 대필) | |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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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받은 인물 | 크리스토페로 콜룸부스와 바스쿠 다 가마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모두 각각 그의 영향을 받음. |
마르코 폴로(이탈리아어: Marco Polo, 문화어: 마르꼬 뽈로, 1254년경 ~ 1324년 1월 8일)는 이탈리아의 탐험가로 17세 시절(1271년)에 고향을 떠나 아시아를 탐험하고 1292년에 향리로 돌아왔다.
생애[편집]
마르코 폴로는 1254년경,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베네치아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아직 마르코 폴로가 출생하기 5개월 전에 실크 로드 원정을 떠나서 1259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으며 마르코 폴로의 삼촌인 마페오 폴로와 1260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킵차크 칸국, 부하라를 거쳐 쿠빌라이 칸의 조정에 머무른 뒤 1269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 와중에 아버지를 아직 한 차례도 목도치 못한 어린 시절의 마르코 폴로는 1261년 조부 상(할아버지 장례)을 치렀고, 1268년 계조모 상(새할머니 장례)을 치렀으며 그 후 1269년 당시 15세였던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콜로 폴로(당시 39세)와 이복 숙부 마페오 폴로(당시 17세)를 베네치아에서 처음으로 함께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1271년 당시 17살 된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콜로 폴로(당시 41세)와 숙부 마페오 폴로(당시 19세) 이 둘과 함께 모두 다시 본격적으로 중국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그 후 1275년 11월 당시에서부터 1292년 2월 당시까지 마르코 폴로는 관리로서 원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17년 동안 중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을 비롯하여 몽골·부르마·베트남까지 다녀왔다. 그 후 1292년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 후 제노바와의 해전에서 가리 함대에 민간 종군원으로 예속되어 출전하였지만 결국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재탈출하여 1295년에 고향으로 재귀환을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는 고향 베네치아에서 이미 1294년에 병으로 하세하였다. 마르코 폴로 그는 제노바 전쟁 포로 시절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아시아 국가 거류 시절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구술로써 들려 주었는데, 이때 작가 루스티치아노(Rusticiano, 루스티켈로 다 피사)가 그의 해박한 발언 및 구술 관련 여행담을 기록한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동방견문록[편집]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 그가 여행한 지역의 방위와 거리, 주민의 언어, 종교, 산물, 동물과 식물 등을 하나씩 기록한 탐사 보고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도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문화인 한자(漢字), 차(茶)에 대한 언급도, 뿌리깊은 악습인 전족(纏足)에 대한 비평도 없다[2]. 또한 칼리프가 바그다드의 기독교인을 학살하려고 했다면서 이슬람교가 마치 다른 종교를 탄압한 종교라고 비판했다. 일본에 대한 언급도 “지팡구”는 황금으로 가득한 땅이라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당시 서구 상인들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당시 아랍인에게 황금향으로 알려진 나라는 지팡구가 아닌 “실라”(아마도 신라)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3] 즉, 동방견문록은 서구인들에게 동방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한 긍정적인 역할은 했지만, 편견과 허구도 있다는 점에서 비평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동방견문록의 허구적인 면은 학자들로부터 마르코가 실제로는 동방을 여행한 적이 없으며, 동방견문록 또한 자신이 실제로 여행하고 겪은 일을 쓴 기행문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이거나 자신이 지어낸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동방견문록이 허구라고 추정하고 있다.
- 만리장성, 중국의 기술이나 관습 등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미흡한 점.
- 동방견문록에는 마르코가 쿠빌라이 칸을 알현했고, 황제의 칙사를 지냈다고 하나 중국 문헌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
- 동방견문록에 언급되어 있는 마르코의 여행 경로는 실제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점.
- 기행 중에 자기 자신의 감정이 전혀 서술되지 않았다는 점.
- 여행 중 마르코 본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 본인의 기행문이라고 보기엔 내용 구성이 어색하다는 점.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며, 이러한 의구점은 마르코 폴로가 일부 지역에 대해 자신의 바람과 더불어 입소문을 함께 사실로써 기록해 서술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현재 학계에서 해당 내용은 여전히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나, 여전히 동방 여행에 대해서는 사실이라고 여기는 의견이 대다수이다.[출처 필요]
관련 작품[편집]
TV 드라마[편집]
각주[편집]
- ↑ The exact source is unknown, but the portrait originated from a 16th-century painting in the Gallery of Monsignor Badia in Rome. Inscription: Marcus Polus venetus totius orbis et Indie peregrator primus. It appears in the Nordisk familjebok Berg 1915, 1261쪽
- ↑ 하지만 이 가운데 한자나 전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당시 원에서는 한자 대신 몽골 문자가 공용 문자로 사용되었으며, 전족은 북송 때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명대에 이르러 성행하였다. 즉, 원대의 몽골에게 전족은 낯선 관습이었다.
- ↑ 무역활동으로 견문이 넓었던 아랍인들은 신라를 살기 좋은 곳으로 언급하는 기록을 남겼으며 일부는 신라에 정착해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용설화의 처용을 아랍인으로 보는 설도 있다. 《우리역사의 수수께끼》1권/이덕일 외 공저/김영사.
같이 보기[편집]
- 야코브 단코나(Jacob d'Ancona) - 마르코 폴로보다 먼저 중국에 왔다는 이탈리아의 유태계 상인
- 마테오 리치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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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캐스트 - 마르코 폴로
- 동방견문록에 대한 비평
- (영어) Marco Polo - Curl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