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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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緋緞路, 비단로) 또는 실크로드는 근대 이전에 동서양을 잇는 육지나 해상의 무역 경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양'은 중국을 의미합니다. 이는 현대 언어로 표현한다면,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제안한 비단길 자체가 중국의 비단이 유럽으로 거래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비단길은 중국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생산된 매우 수익성 높은 비단 직물 거래에서 그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한(漢)나라 시기 중앙아시아로의 확장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약 기원전 114년 장건(張騫)의 임무와 탐험을 통해 해당 지역이 통일된 통제 하에 들어갔습니다. 파르티아 제국은 동아프리카와 지중해로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기원후 1세기 초에는 중국의 비단이 로마, 이집트, 그리스에서 널리 찾아졌습니다. 동방에서 온 다른 수익성 높은 상품으로는 차, 염료, 향수, 도자기가 있었으며, 서방에서의 수출품으로는 말, 낙타, 꿀, 와인, 금이 있었습니다. 종이와 화약과 같은 상품의 확산은 신흥 상인 계급에게 상당한 부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여러 왕국의 궤적을 크게 변화시켰으며, 세계 역사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1]

비단길은 단순히 동서를 잇는 횡단축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남북의 여러 통로를 포함해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한 하나의 거대한 교통망으로 보아야 한다. 이에 따라 비단길의 개념 또한 확대되어 3대 간선과 5대 지선을 비롯해 수만 갈래 길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적인 그물 모양의 교통로이다.

이름[편집]

비단길 즉 실크로드라는 이름은 독일의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의 1877년 발간된 저서 《중국(China)》 1권에서 '실크로드(Seidenstrassen)'라고 명명한 것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비단길은 튀르크와 몽골제국 등 북방 유목 민족들이 기원전부터 서양에서 아시아까지 개척하여 이용한 길이었다.[2]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이 말하는 비단길은 좁의 의미에서 대륙간 이동 무역을 말하며 대항해시대의 신항로 개척 또한 해양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1세기경의 비단길

불교의 전래, 간다라 미술[편집]

비단길은 동아시아의 농경 정주민들보다 말을 타며 이동을 하며 생활하던 유목민들의 무역 통로로 사용되었다. 대월지라는 유목민들이 불교를 전해받으면서 불교의 간다라 양식이 아시아에 전파되었다.[3]

아시아에서의 비단길[편집]

근대 유럽 세계에서 서양과 동양의 무역에 대해서 논할 때는 보통 대항해시대 때 이용되는 해양길이 대표적이였으나 독일 지질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유럽인이 개척한 해양길 보다 더 오래 전부터 서양과 동아시아 간에 유목민들을 통한 무역이 존재했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을 실크로드라고 명명하였다.

비단길은 유럽, 중동과 같은 서양에서 동아시아까지 여러 문물이 교환, 판매되는 통로 였으나 유럽인들이 대항해시대 때 사용하던 해양길보다는 이용하는 인구도 현저히 적었고 대항해시대 때 일어난 동서양의 문물 교환에 비교하여 비단길의 무역 규모는 인적 교류와 문물 교환에서 현저히 적었다. 하지만 이동을 하며 생계를 해결하는 유목 민족들에게 무역은 필수적인 행동이였고 유목민들은 유럽과 아시아를 이동하며 동아시아에서 얻은 비단을 유럽에 팔고 로마제국과 중동에서 얻은 물건들을 동아시아에 팔면서 재산을 얻고 의식주를 해결하였다. 기원전 7세기부터 유라시아에서는 유목민족 스키타이가 나타나 유럽지역과 아시아 지역의 비단길을 통해 무역을 하였는데 이때 그리스 양식의 그릇 등 물품들이 동아시아에 이동하였다. 이후 기원전 4세기부터 유라시아의 넓은 지역에 사르마트인이 나타나면서 스키타이는 흑해 북쪽 지역에 정착하게 되고 유라시아의 비단길 무역은 사르마트인이 장악하였다. 이후 그리스 양식의 물품들의 교환은 사르마트인을 통하여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파되었다.[3] 천마전쟁과 한-흉노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국 군대는 중앙아시아에 자리를 잡고 비단길을 주요 국제 무역 통로로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중국의 황제 오가 페르가나, 박트리아, 파르티아 제국의 세련된 도시 문명과의 상업적 관계 개발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천자(天子)는 이 모든 것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다: 페르가나(대원 "대 이오니아인들"), 박트리아(대하사)와 파르티아 제국(안서)의 영토는 희귀한 것들로 가득 찬 큰 나라들이며, 고정된 거주지에서 생활하고 중국인들과 다소 유사한 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있지만, 약한 군대를 가지고 있고 중국의 풍부한 생산품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 (후한서, 후한 역사). 다른 이들은 오 황제가 주로 흉노와 싸우는 데 관심이 있었고, 주요 무역은 중국이 허서(河西) 회랑을 평정한 후에만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4]

한(漢)나라 군대는 주로 흉노로 일반적으로 식별되는 유목민 강도 세력에 맞서 무역 경로를 정기적으로 순찰했습니다. 한나라 장군 반초(班超)는 기원후 1세기에 70,000명의 기병과 경기병 병력을 이끌고 무역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타림 분지(Tarim Basin)까지 서쪽으로 멀리 진출했습니다. 반초는 파미르 산맥을 넘어 카스피 해안과 파르티아의 경계까지 정복을 확대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한나라 장군은 대친(로마)으로 사신 간영(간응)을 파견했습니다. 비단길은 기원전 1세기부터, 중국이 서방 세계와 인도로 가는 길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따라, 타림 분지 지역에 직접 정착하고, 더 서쪽의 대원, 파르티아, 박트리아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실질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비단길은 사람들이 상품과 문화를 교류할 기회를 제공한 "복잡한 무역 경로 네트워크"였습니다.[5]

몽골 제국과 유럽의 비단길을 통한 교류[편집]

몽골 제국 이후, 비단길을 통해 서양과 아시아의 인적 교류 또한 많아졌다. 이전 유럽에서 동아시아까지 여행을 하는 유럽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나 마르코 폴로의 아시아 여행은 비단길을 이용하였다고 전해진다.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 일행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원나라로 먼 여행을 떠났다. 당시 동아시아에 직접 가본 유럽인은 매우 적었기 때문에 동아시아는 미지의 지역이였고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록은 『동방견문록』으로 정리되어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도양에서는 독립적인 항구 도시들 사이에 주로 계절풍을 이용해서 교역이 이루어졌다. 12월부터 3월까지 바람은 교역선을 인도에서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까지 밀어주었고, 목적지에 도착한 상인들은 4월부터 8월까지 북동쪽으로 부는 습한 계절풍을 타고 귀환했다. 인도양 각 지역에는 자체 상인 연맹이 있었고, 지역 간 경계에는 가장 부유한 항구들이 자리 잡았다. 이 교역로를 따라 중국산 자기가 동아프리카로 대량 유입되었다. 자기, 비단 등의 사치품이 인도양 교역망의 대들보였으나, 1350년에서 1500년 사이에는 곡물 같은 대량 상품의 수송도 중요해졌다. 배는 아라비아해의 전통 선박으로 목재를 무거운 노끈으로 엮어서 조립한 다우선과 중국에서 무거운 가문비나무나 전나무 판재를 큰 쇠못으로 고정해 만든 정크선을 이용했다.[6]:364~365 인도양 교역망은 크게 몇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중동(이슬람) 교역망[편집]

중동을 중심으로 한 교역망은 무슬림 상인들이 좌우했다.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은 아라비아해를 동쪽의 인도, 남쪽의 동아프리카와 연결하는 해상 교역망을 개척했다. 페르시아만 입구에 자리 잡은 호르무즈를 비롯한 항구들은 인도를 오가는 교역을 처리했다. 아라비아반도 남부에 위치한 아덴을 비롯한 항구들은 홍해와의 연계를 지배했다.[6]:365~366

동아프리카 교역망[편집]

스와힐리 해안을 따라 늘어선 소도시들은 아프리카 요소, 아랍 요소, 페르시아 요소가 뒤섞였다. 스와힐리(Swahill)라는 이름은 '해안'을 의미하는 아랍어 사힐(sahil)의 복수형인 사와힐(sawahil)에서 유래했다. 이 해안 중앙에 자리한 몸바사항이 스와힐리 도시 국가 중 가장 컸지만, 교역망의 중심지는 남쪽의 섬에 정교하게 건설한 소도시 킬와였다. 잠베지강 남쪽의 강력한 짐바브웨 제국이 통제한 내륙 금광의 황금이 킬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제국의 수도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78 헥타르에 걸친 대형 석조 건축물들과 약 1만 8000명의 인구가 사는, 이집트 남쪽에서 가장 인상적인 내륙 도시였다.[6]:366

지중해 교역망[편집]

중동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카이로베이루트가 있었다. 이곳 상인들은 지중해의 기독교도 상인들과 연계를 유지했다. 종교적 대립보다 상호 이익을 중시한 도시 국가 베네치아제노바는 오래전부터 이 연계를 바탕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탈리아 북부 사람들은 알프스산맥을 가로질러 북대서양 연안의 저지대 국가들에까지 닿는 교역로를 개척했고, 저지대 도시 브뤼허, 헨트, 안트베르펜의 상인 공동체가 북유럽을 누비고 다녔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뒤 베네치아는 바다와 육지를 통한 전략적 연계를 바탕으로 돈을 더 많이 벌어들였다. 15세기 중엽 대운하를 따라 상점이 줄지어 선 유명한 리알토 시장은 베네치아 상거래의 심장이었다.[6]:366

인도 교역망[편집]

인도양 중부에는 인도 아대륙의 상인 공동체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동쪽의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로 향하는 교역과 서쪽의 중동으로 향하는 교역을 처리했다. 인도 중서부 구자라트의 상인들은 오래전부터 중동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중동에서는 구자라트의 고급 가죽 제품, 면과 비단으로 만든 아름다운 카펫을 귀하게 여겼다. 1390년 델리 술탄국에서 독립을 되찾은 구자라트는 인접한 힌두교 국가들로 통제권을 확대했고, 덕분에 구자라트 상인들은 면직물, 인디고 염료 같은 귀중한 교역품을 취급할 수 있어 중동 및 동아프리카 교역망을 재건할 수 있었다.[6]:366~367

인도 남부는 동쪽과 서쪽의 장소 사이에서 구자라트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 상업 활동의 두 번째 중심지였다. 남서부 말라바르 해안에 위치한 코치코지코드 등 항구의 통치자들은 느슨한 내륙 공급망과 다양한 상인 공동체를 통제했다.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 온 상인들이 가장 큰 공동체를 이루었으나, 중동 및 아프리카와 거래하는 유대인 공동체도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남동부 코로만델해안의 다른 항구들은 동인도양 교역에 더 깊이 관여했고, 저 멀리 중국까지 이어지는 상업망이 있었다.[6]:366~367

믈라카 교역망[편집]

동인도양에서 남중국해로 가는 자연 항로는 말레이반도수마트라섬 사이 믈라카해협을 지나는 것이었다. 1407년 정화의 제1차 원정 선단은 귀환하는 길에 수마트라에 근거지를 두고 교역을 방해하던 해적 소굴을 파괴했다. 뒤이은 권력 공백기 동안 믈라카해협에서 말레이반도에 위치한 새로운 항구가 두각을 나타냈다. 안전과 낮은 세율을 제공한 그 항구는 동남아시아와 중국, 인도의 상인을 끌어들였고, 그들의 존재 덕에 믈라카 해협은 중국과 인도의 각종 상품뿐 아니라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 미얀마의 루비와 사향과 주석, 수마트라의 황금까지 교역하기 좋은 장소가 되었다. 1500년 직후에 방문한 여행자에 따르면 믈라카의 상인 공동체는 84개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왁자지껄한 언어의 소란 속에서 믈라카 관리 네 명이 질서를 유지했다. 이들 4명은 수많은 구자라트 상인들과 인도와 미얀마 상인들,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중국과 일본 상인들을 담당했다.[6]:367

3대 간선[편집]

서양동양을 횡으로 연결하는 길로 세 가지 간선이 있다.

초원길[편집]

기원전 10세기부터 문명 교류의 주통로로 사용되었던 길이며, 유라시아 북방 초원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이다. 서쪽의 끝인 카스피해 연안 혹은 발트해 남단으로부터 흑해의 동북편과 남러시아의 카스피해와 아랄해 연안을 지나 카자흐스탄과 몽골 고비 사막의 북단 오르혼 강 연안으로 이어진다. 이후 동남향으로 바꾸어 길이를 연장하면 중국의 화북지역과 한반도까지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찍이 문명 교류의 처음을 연 비너스상이 1만 년 전에 이 초원로를 따라 북방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동서로 널리 전파된 것으로 짐작된다. 기원전 4천~3천년경에는 채도 문화가 이길을 거쳐 서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길을 '채도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서아시아에 기원을 둔 청동기나 로마의 유리도 이길을 따라 전파되었다. 일본 사학계의 기마민족설에서 고분문화기(3세기~5세기)의 기마문화도 초원로를 통하여 전달되었다고 여겨진다.

오아시스길[편집]

오아시스길이란 중앙아시아의 건조지대(사막)과 반사막에 점재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여 동서로 뻗은 길을 일컫는다. 사막을 비롯한 건조 지대의 군데군데에 항상 물이 고여 있어 수목이 자라고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아시스다. 오아시스는 사막인들의 생활의 보금자리일 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로서 거기에서 문물이 집산되고 교통이 발달되어 왔다. 비단길 중에서 가장 심장부에 위치한 오아시스길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역사시대 전에는 초원로가 많이 이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오아시스길이 동서교류의 주요 통로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서아시아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달된 교통로가 만들어졌으나, 파미르고원이 장애가 되어 완성되고 있지 못했다. 기원전 138~126년 전한장건(張騫,~BC 114)이 사절단으로 파견됐을 때 파미르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오아시스길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바닷길[편집]

전성기에 접어든 로마 제국이 남해로를 통한 도서 교역에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기마 민족인 스키타이의 해외 정복을 이용하여 세력을 넓혔다. 로마의 시장에는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 각지의 유명 산물이 큰 인기를 끌었다. 1세기 중엽에 로마의 항해사였던 히파루스(Hipalus)가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인도양 계절풍의 비밀을 알아낸 후, 아테네로부터 홍해를 거쳐 동방 원거리 무역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비로소 중국에서 인도로 반출된 비단이 인도 서해안으로부터 해로로 로마에 운송되기 시작하였다. 3세기 중엽에는 로마의 배가 인도차이나나 광동성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카티가라(Kattigara)까지 항해하는 상선도 나타났고, 이슬람 발흥 이후에는 동아프리카인들의 성지 순례길을 거꾸로 밟아서 동아프리카 해안 항구들로 중국의 교역품이 이동했다.[7]

5대 지선[편집]

남북을 연결하는 길로 지선이라 부르고 있지만 문명 교류와 교역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그 노선 또한 대단히 복잡하다. 중세에 있어서의 남북로는 다음과 같은 5개로 나눌 수 있다.

마역로[편집]

남북로의 맨 동쪽에 있는 길로 초원로의 동쪽 끝인 막북의 오르혼 강 유역에서 카라코룸을 지나 장안이나 유주와 연결된다. 여기에서 다시 화남을 그대로 뻗어 항주나 광주에 닿아서 바닷길과 접한다. 유목 민족들이 장악한 길이기도 하다.

티베트로[편집]

북쪽 끝은 준가리아(Dzungaria) 분지에서 시작해서 고창 서부부 투르판(Turfan)과 타림 분지 동편에 있는 자루기루꾸(러잔)를 지나 티베트의 라사를 거쳐 히말라야 산록을 따라 북인도의 시킴에 이른 후 다시 남하해 인도 갠지스 강 어구에 있는 디무라리프데까지 이어진다. 이길에서 7~9세기부터는 티베트가 이 일대를 장악하게 되었다. 준가리아 분지에서 통일제국을 이룩한 유목민족 이 길을 따라 티베트와 중국 서북과 중부 허난 지방을 정복하였다.

불타로[편집]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출발하여 타슈켄트와 사마르칸드를 거쳐 동서남북 십자로상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발흐(Balkh)와 페샤와르(Peshawar, 즉 Gandhara)를 지나 인더스 강 유역을 따라 중인도 서해안의 바루가자(현재 Surat)까지 줄곧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은 동서남북 교통로의 중심 교차점에 자리하고 있어 동서문명교류와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기원전 2000년에 동부 유목 아리아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길이다. 불교는 이 길을 따라 북상한 다음 중앙 아시아를 거쳐 동방에 전파되었으며, 법현, 현장 같은 많은 수법승이 이 길로 천축(인도)에가서 수도하였다.

메소포타미아로[편집]

흑해와 카스피 해 중간지대에 있는 카프카즈(Kavkaz 일명 Caucasus) 북부를 기점으로 하여 트빌리시(Tbilishi)와 타브리즈(Tabriz)를 경유해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따라 펼쳐진 메소포타미아를 관통한 후 페르시아 만의 바스라(Bastah) 항까지 이르는 길이다. 일찍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개화한 지대를 지나는 이 길은 고대 문명 전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호박로[편집]

북방의 발트 해에서 시작해 모스크바와 키예프를 거쳐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접지인 콘스탄티노플과 에페수스(에베소, Ephesus)를 지나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남하하는 길이다.

이 길은 페니키아 시대부터 중요한 호박의 무역로였다.

비단길을 소재로 한 작품[편집]

다큐멘터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The Silk Road” (영어). 2024년 2월 11일에 확인함. 
  2.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2010)》 19쪽
  3. “실크로드”. 2023년 2월 21일에 확인함. 
  4. Di Cosmo, Nicola (2002).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ISBN 978-0-521-77064-4. 
  5. https://global.oup.com/ushe/product/old-world-encounters-9780195076400?cc=us&lang=en&. 2024년 2월 11일에 확인함.  |제목=이(가) 없거나 비었음 (도움말)
  6.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이재만 옮김 (2020). 《옥스퍼드 세계사》. 교유서가. 
  7. 발레리 한센, 이순호 옮김 (2020). 《1000년》. 민음사. 19쪽. 

관련 서적[편집]

  • 정수일, "고대 문명 교류사", 사계절(서울), 2001.
  • 정수일, "씰크로드학", 창작과 비평사, 2001.
  • Grousset, René., 김호동 외 번역,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사계절(서울), 1998.
  • Ishida, Mikinosuke., 이동철 외 번역, "장안의 봄", 이산(서울), 2004.
  • 프리실라 갤러웨이 외 지음, 양녕자 옮김, "서유기의 삼장 법사, 실크로드에서 진리를 찾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1
  • 프리실라 갤러웨이 외 지음, 양녕자 옮김, "위대한 전사 칭기즈칸, 실크로드를 정복하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1
  • 프리실라 갤러웨이 외 지음, 양녕자 옮김,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 실크로드를 따라 동방을 누비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1
  • 김대호 지음, "통일신라의 혜초, 실크로드를 왕오천축국전에 담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1
  • 김은영 지음, "고구려 장군 고선지, 실크로드에서 용맹을 떨치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1
  • 조혜진 지음, "해상왕 장보고, 바다 실크로드에서 활약하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2
  • 차무진 지음, "대왕 알렉산드로스, 미지의 실크로드를 가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2
  • 김대호 지음, "중국 사신 장건, 실크로드를 개척하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2
  • 김은영 지음, "명나라 외교관 정화, 바다 실크로드를 탐험하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2
  • 박유상 지음, "알라의 사도 이븐 바투타, 실크로드 세계를 여행하다", 아카넷주니어(서울),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