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자금성
(· 시대의 궁궐)
Welterbe.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Forbidden City Courtyard.jpg
자금성의 정전 태화전
소재국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영어명*Forbidden City
(Imperial Palace of Ming and Qing Dynasty)
프랑스어명*Cité interdite
지정 역사
1987년  (11차 정부간위원회)
* 세계유산목록에 따른 정식명칭.
** 유네스코에 의해 구분된 지역.
자금성
지도

자금성(중국어: 紫禁城, 병음: Zǐjìnchéng 쯔진청[*])은 베이징의 중심에 있는 왕조의 궁궐이다. 자금성의 규모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현재는 황실이 사라져서 중국어권에서는 주로 고궁(중국어 간체자: 故宫, 정체자: 故宮, 병음: Gùgōng 구공[*])으로 불리고 있으며, 1925년 10월 고궁 박물원(중국어 간체자: 故宫博物院, 정체자: 故宮博物院, 병음: Gùgōng Bówùyùan)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1] 동서로 760m, 남북으로 960m, 72만 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의 담과 800채의 건물과 일명 9999개의 방(실제로는 8707칸이라고 한다.)이 배치되어 있다.[2]자금성은 5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중국의 정치적,상징적 수도였다.

1406년에서 1420년까지 지어졌으며, 980개에 달하는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고, 72헥타르나 되는 면적을 차지한다. 전통적 중국 궁궐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동아시아 곳곳에 영향을 끼쳤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 "명·청 시대의 궁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25년부터 고궁 박물원으로 바뀌어, 명,청 시대의 황실이 수집한 엄청난 규모의 작품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다만 자금성에 있던 유물들의 일부는 국공내전으로 인해 국민당이 가져가면서 현재 타이완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12년부터 자금성은 매년 1500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을 맞고 있으며, 2016년과 2017년에는 1600만 명이 넘게 자금성을 다녀갔다.

소개[편집]

자금성의 주위에는 해자와 성벽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른다. 해자에는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가로지르는 4개의 다리가 있다. 궁궐 주위의 장벽의 길이는 4km에 이르며 높이는 10m나 되며 4개의 큰 출입구가 뚫려 있다. 자금성은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고건축물이며, 자금성 안에는 오직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제의 상징인 용 문양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1406년 명나라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건설한 황궁으로, 명~청 시대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궁전이다. 1961년에는 중국 정부로부터 제1차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8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자금성 건축물과 고대 예술품 및 궁정역사 유적 위주의 내용물을 주로 전시하는 대형 종합 박물관이기도 하다.

자금성은 명대부터 청대까지(1420~1912) 중국 황실의 궁궐이었다. 중국 베이징의 중심에 자리해 있고, 지금은 궁궐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거의 500년 동안 상징적이면서 정치적으로도 중국 정부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와 그 식솔들의 집이기도 하였다. 1406년부터 1420년까지 지어졌고, 전체엔 980여 채의 건물이 있으며 72 헥타르에 이르는 넓이를 갖고 있다.

이름[편집]

자금성이란 이름은 1576년 처음 공식적으로 나왔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자금성의 자紫(보라색, 자주색)는 북극성을 의미하고, 자금성은 곧 우주와 같은 공간으로 생각되어, 하늘로부터 신성함을 부여받은 황제와 그의 가족의 영역이었다. 자금성은 세속적인 세상과 신성한 세상을 분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황제의 신성함과 불가침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금禁은 금지되었다는 뜻인데, 이는 황제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궁을 들어오거나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城은 도시를 의미한다.

오늘날, 자금성은 중국에서 고궁이라고 가장 흔히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옛 궁궐’을 의미한다. 이런 건물들로 구성된 박물관이 고궁박물관이다. (古宮博物館)

역사[편집]

명나라 시대[편집]

홍무제(1328년~1398년)의 아들 주체가 영락제(1403〜1424년)로 즉위하고 나서, 그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고, 1406년 자금성 건축을 시작했다. 14년이 걸린 이 공사엔 100만명 이상의 일꾼을 필요로 했다. 중국 남서부에서 발견되는 고급의 녹나무와 베이징 근처에서 채취되는 큰 대리석 등을 이용하여 지상 최고의 궁전을 지으려 하였다. 정전의 바닥은 특별히 쑤저우에서 구운 “금 벽돌”(金砖,금색의 벽돌)로 포장되었다.

1420년부터 1644년 동안 자금성은 명 왕조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명 후기, 나라의 혼란이 극심해지며 북쪽에서 후금 군대가 몰려오고 내부에서 반란이 발생하였고, 1644년 4월에 순 왕조의 황제라고 자칭한 이자성에 의해 자금성은 함락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자성은 자금성의 일부에 불을 지르고 명의 장군 오삼계와 후금 군대가 도달하기 전에 도망쳤다.

청나라 시대[편집]

10월까지, 만주군은 중국의 북쪽에서 패권을 주도했고, 순치제는 중국이 청 왕조의 지배하에 있다고 선언하기 위해 자금성에서 의례를 거행했다. 청의 지배자들은 몇몇 주요한 건물의 이름을 바꾸었는데, “패권”보다는 “조화”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는 건물들의 이름에 중국어와 만주어, 이 두 개의 언어가 섞여있게 만들었다. 또한 궁궐에 샤머니즘적 요소를 불어 넣기도 하였다.

1860년에, 2차 아편전쟁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는 자금성을 차지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점령했다. 1900년에 서태후는 1901년까지 자금성이 군대에 의해 점령되도록 내버려둔 채, 의화단 사건 동안 자금성을 도망쳤다.

자금성은 14명의 명나라 황제와 10명의 청나라 황제, 총 24명의 천자를 모셨으며, 자금성은 1912년에 푸이가 퇴위할 때까지 중국의 정치적 중심에 서있었다. 새로운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자금성의 외성은 공용으로 넘겨졌지만, 내성에는 1924년에 쿠데타로 쫓겨나기 전까지 푸이가 거주했다. 1925년에 궁궐 박물관이 자금성 안에 지어졌고, 1933년에 청일 전쟁이 일어나며 자금성 내부의 보물들은 외부로 옮겨졌다. 보물들의 일부는 2차 세계 대전 말에 반환되었지만, 나머지는 장제스의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도망치며 1948년에 타이완으로 방출했다. 이 수집품들은 양은 작지만 당시 자금성의 보물들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들이었고, 1965년까지 창고에 보관된 후, 타이페이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며 다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중화 인민 공화국[편집]

1949년에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며, 온 나라가 혁명의 열기에 휩쓸리면서 자금성에도 몇몇 손상이 생겼다.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에 자금성에 큰 파괴가 일어날 뻔 하였으나, 당시 총리 저우언라이가 궁궐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을 보내면서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자금성은 중국의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궁궐이기 때문에, 1987년에 “명과 청 황제의 궁궐”로서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지정되었다. 현재 자금성은 고궁 박물관이 관리하고 있고, 모든 건물을 1912년 이전 상태로 수리하고 복원하기 위해 16년간의 재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금성 내부에 입주한 상업 기업의 존재가 논란이 되고 있다. 2000년에 오픈한 스타벅스는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2007년 7월 13일에 문을 닫았다. 중국의 언론은 또한 2006년에 외국 방문자에게 가격을 속이기 위해 중국 시민들의 입장은 거부하는 몇몇 기념품 숍에 대해서도 보도한 바 있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금성 내부에서 만찬을 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금성 내부에서 식사를 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구조[편집]

자금성은 직사각형의 구조를 하고 있는데, 남북으로 961m, 동서로 753m이다. 현재 980개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8886개의 방이 있다. 내려오는 소문에는 자금성 안에 9999개나 되는 방이 있다고 하나, 조사로 인해 확인된 바는 없다. 청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자금성은 황성의 일부였고, 이 황성은 또 베이징 내성의 일부였다. 황성에서 나와 남쪽으로 내려가면 베이징 내성을 지나 베이징 외성으로 나갈 수 있었다.

자금성은 남북의 축을 따라 건물들이 배열되어 있는데, 자금성의 축을 따라가면 천안문 광장과 베이징 외성의 정문까지 곧바로 향할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이 축은 정확히 남북은 아니고, 약 2도 정도 비틀어져 있다고 한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 축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벽과 문[편집]

자금성의 성벽

자금성은 7.9m에 달하는 벽과, 6m의 깊이를 자랑하는 거대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벽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로, 아래쪽은 8.62m, 위쪽은 6.66m이다. 이 벽들은 모두 단단히 굳힌 흙으로 쌓았으며, 벽들의 양면에는 벽돌을 두르고 모르타르로 접착했다.

자금성 벽의 네 모서리에는 72개의 모서리를 지닌 거대한 누각이 지어져 있는데, 이는 송나라 시대의 설화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구조를 그대로 답습해 온 것이다. 이 탑들은 외부에서 자금성을 볼 때 눈에 가장 잘 띄는 구조물이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설화도 많다. 한 설화를 소개하자면, 청나라 시기에 장인들이 이 누각을 보수공사할 때, 그 지어진 설계가 워낙 교묘하여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고, 결국 전설적인 설계자의 손을 빌려서야 겨우 이를 보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벽들의 네 면에는 각각 정문들이 하나씩 나 있는데, 남쪽에는 오문, 북쪽에는 신무문, 동쪽에는 동화문, 서쪽에는 서화문이 있다. 특히 오문은 문 양쪽에 거대한 날개가 있어 그위에 누각이 지어져 있으며, 이 문을 통과하는 길은 거대한 돌들로 포장되어 있어, 자금성과 고대 베이징을 관통하는 거대한 축을 이루었다. 오문의 중앙에 있는 문은, 오직 황제만이 통과할 수 있었고, 그 외에는 오직 특별한 경우, 예를 들어 장원에 급제한 학자나, 결혼식을 위해 들어오는 황후만이 이 문을 특별히 그날만 이용할 수 있었다.

외조[편집]

전통적으로 자금성은 2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었는데, 남쪽에 있는 외조와 북쪽의 내조이다. 보통 외조에서 공식적이고 상징적인 의례들이 많이 거행되었으며, 내조에서는 황제의 사생활이 이루어졌다. 자금성은 총 3개의 축을 갖고 있는데, 외조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궁전들은 모두 가운데 축을 따라 배열되었다.

오문을 통과하면 큰 광장을 관통하고 있는 거대한 금천이 보이는데, 이 인공 수로는 5개의 금천교로 인해 건널 수 있게 되어 있다. 그 뒤에는 태화문이 버티고 있으며, 이 문을 통과하면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과 같은 자금성에서 가장 중요한 궁전들이 자리해 있다.

태화전

태화전[편집]

중화전

높이 8m나 되는 3층 백색 대리석 기단 위에 세워졌고, 청동 화로들이 그 주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의 이름 '태화전'은 청나라 시대에 순치제가 지은 이름이다. 높이 35m, 폭 66m를 자랑하며, 자금성 내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건축물이다. 또한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거대한 목조 건축물이기도 하다. 태화전의 천장에는 거대한 황금 용이 조각되어 있으며, 거대한 여의주를 물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에게 반역할 뜻을 품고 있는 자가 이 앞에 서면 천장의 용이 이 여의주를 뱉어내 그자를 죽인다고 한다. 황제의 옥좌와 가까운 6개의 기둥들은 모두 금이 덧씌워져 있으며, 옥좌는 황금으로 용이 꿈틀되며 승천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명나라 시대에는 황제가 바로 이곳에서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하였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이곳에서 황제의 즉위식, 결혼식, 책봉식과 같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행사들만 열리게 되었다. 또한 명, 청 시절 24명의 황제가 제위를 물려받을 때 모두 태화전에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중화전[편집]

태화전에서 행사가 있을 때, 이를 준비하기 위해 내조에서 나온 황제가 잠시 쉬던 곳이며, 황제가 예복을 갈아입던 의상실이기도 하였다. 특히 청나라의 황제들은 패션 감각이 유난히 뛰어났다고 하며, 법도에 따라 특정 달, 특정 날에 입는 예복이 정해져 있었지만 평상복도 오늘 입었던 것은 그 다음 날 입지 안을 정도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중화전은 황제가 개인적으로 대신들이나 외국사절을 만나기도 한 곳이기도 하고, 과거 시험을 치르는 곳이기도 하였다.

보화전[편집]

보화전
건청궁

태화전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졌다. 또한 보화전에서는 황제가 제야, 정월보름 및 비정기적으로 성대한 연회를 벌였으며, 청나라 건륭제때부터 이곳에서 과거의 최종시험을 치렀다.

무영전[편집]

외조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황제가 정무를 보거나 대신들과 만났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후에는 황실 서적의 편찬을 관할했다.

문화전[편집]

문화전은 유학자들에 의해 경연이 열리던 장소였으며, 나중에는 편전이 되었다. 후에는 사고전서가 이 곳에 보관되었다.

외조의 궁전들에는 모두 거대한 대리석 답도가 용을 양각하여 조각되어 있다. 특히 보화전 뒤에 있는 거대한 답도는 무려 16.57m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었고,무게가 200톤을 넘어가며, 중국에서 가장 큰 양각 조각이다. 태화전 앞에 있는 답도도 거대하긴 하지만, 이 답도는 2개의 거대한 돌덩어리를 이어붙여 만든 것이다. 이 돌덩어리들의 이음새는 조각 사이에 워낙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 찾지 못하다가, 후에 20세기가 되서야 보수 공사를 할 때 발견했다고 한다.

내조[편집]

내조는 자금성에서도 벽으로 인해 외조와 확실히 구분되었으며, 황실 가족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청나라 시대에 와서, 황제는 이곳에서 업무와 생활을 둘다 하였고, 외조는 거의 의례적인 용도로만 사용했다. 내조에는 외조와 같은 형식으로 3개의 중심 궁전이 있다.

건청궁[편집]

건청궁은 2층 누각을 지녔으며, 1개의 백색 대리석 단 위에 올라가 있다. 건청문을 통해 출입이 가능하며, 명나라 시대 당시 황제의 거주지였다. 하지만 청나라 시기에 옹정제부터 선대의 황제를 기억하기 위해, 청나라의 천자들은 서쪽에 있는 양심전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건청궁은 편전의 기능만 가지게 되었다. 건청궁은 자금성의 다른 건물들이 그렇듯이 황금 용으로 장식되어 있고, 왕좌 위쪽에는 '정의와 영광'이라고 적혀있는 액자가 걸려있다.

교태전

교태전[편집]

교태전은 건청궁과 곤녕궁 사이에 있는 사각형 모양의 건물이고, 피라미드 형식의 기와지붕으로 덮여 있다. 이 건물에는 역대 청나라 황제들의 옥새가 보관되어 있고, 그 외 다른 상징적인 물건들도 많이 모셔져 있다.

곤녕궁

곤녕궁[편집]

곤녕궁은 2층 누각을 지닌 거대한 건물인데, 본디 황후의 거주지였다. 청나라가 자금성을 차지하면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자금성의 건물들 중 하나이지만, 옹정제 시기 이후 황후의 침소로는 더이상 기능하지 않은 대신, 황제와 황후의 신혼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개조되었다.


이 세 궁전들은 외조의 궁전들보다는 그 크기가 작았으나, 황제와 황후의 공식 거주지였다. 황제는 양기와 하늘의 대표자로서, 건청궁을 침소로 삼았고, 황후는 음기와 땅의 대리인으로서 곤녕궁을 침소로 잡았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교태전에서 음과 양의 조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세 궁전 뒤에는 황실 정원이 자리잡고 있고, 이 정원을 지나가면 신무문을 통해 자금성을 빠져나갈 수 있다. 내전의 서쪽에는 양심전이 있는데, 원래는 부속 궁전이었을 뿐이었으나, 옹정제가 이곳을 주요 침소로 사용하며 중요 건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청나라 후대에는 대부분의 국정이 내전의 동쪽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서태후 집권 시기에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 양심전 주위에는 주요 회의 기구들과 정부 기구들이 들어와 일할 수 있었다.

특히 내조의 북동쪽에는 영수궁이 있는데, 건륭제가 퇴위 후 거주할 곳으로 삼기 위해 지어졌다. 자금성의 양식을 본따 지어졌으며, 자금성의 외조와 내조, 사원과 정원까지 그 양식이 거의 비슷하다. 영수궁의 입구에는 유명한 구룡벽이 있고, 중국 정부와 재단이 합작하여 2017년에 보수, 복원공사를 모두 끝냈다.

동6궁[편집]

  • 경인궁(景仁宮) : 1420년에는 장안궁(長安宮)이었다가 1535년 경인궁으로 개칭했다. 강희제의 생모 효강장황후(孝康章皇后), 광서제의 애첩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 등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1654년 5월 4일 강희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 승건궁(承乾宮) : 1420년에는 영녕궁(永寧宮)이었다가 1632년 승건궁으로 개칭했다. 숭정제의 애첩 공숙황귀비(恭淑皇貴妃), 순치제의 애첩 효헌황후(孝獻皇后), 함풍제의 생모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 등이 이곳에 거주했다.
  • 영화궁(永和宮) : 1420년에는 영안궁(永安宮)이었다가 1535년 영화궁으로 개칭했다. 옹정제의 생모 효공인황후(孝恭仁皇后), 도광제의 아내 효정성황후(孝静成皇后), 함풍제의 후궁 장정황귀비(莊靜皇貴妃), 광서제의 후궁 단강황귀비(端康皇貴妃) 등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1678년 12월 13일 옹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 종수궁(鍾粹宮) : 1420년에는 함양궁(咸陽宮)이었다가 1535년 종수궁으로 개칭했고, 1571년에는 전전을 흥룡궁(興龍宮), 후전을 성철전(聖哲殿)으로 개칭해 태자의 거처로 삼기도 했다.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 광서제의 아내 효정경황후(孝定景皇后) 등이 이곳에 거주했다.
  • 경양궁(景陽宮) : 1420년 장양궁(長陽宮)이었다가 1535년 경양궁으로 개칭했다. 태창제의 생모인 공비 왕씨가 출산 이후 여기에서 30년 넘게 유폐되다시피 지내며 아들을 만나지 못하다가 1611년 죽음이 임박하자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태창제가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실명한 생모를 안고 통곡했던 비극이 일어난 곳이다.
  • 연희궁(延禧宮) : 1420년에는 장수궁(長壽宮)이었다가 1535년 연기궁(延祺宮)으로, 청나라 때는 연희궁으로 개칭했다. 1832년, 1845년, 1855년에 잇따라 화재가 발생해 그때마다 중건했으나 함풍제 때 화재 이후로는 터만 남았고 선통제 때 융유황태후의 명으로 그 자리에 수정궁(水晶宮)을 짓도록 했으나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라 비용 문제로 완공되지 못했다.

서6궁[편집]

  • 영수궁(永壽宮) : 1420년에는 장락궁(長樂宮)이었다가 1535년 육덕궁(毓德宮)으로, 1616년 영수궁으로 개칭했다. 건륭제의 생모 효성헌황후(孝聖憲皇后)가 이곳에 거주했고, 1789년 건륭제의 딸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가 화신의 아들과 결혼했을 때 연회를 베푼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 태극전(太極殿)(계상궁(啓祥宮)) : 1420년에는 미앙궁(未央宮)이었다가 1535년 가정제의 생부 흥헌왕이 태어난 곳이라 해서 계상궁(啓祥宮)으로 고쳤다가 청나라 때 태극전으로 개칭했다. 동치제의 후궁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가 이곳에 거주했다.
  • 장춘궁(長春宮) : 1420년 장춘궁이었다가 1535년 영녕궁(永寧宮)으로 바꾸었고 1615년 다시 장춘궁으로 개칭했다. 건륭제의 아내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와 동치제의 생모 서태후가 이곳에서 거주했는데, 특히 서태후는 50세 생일 날 여기에서 축하 경극 공연을 감상하였다. 또한 서태후는 이곳의 한쪽을 무대로 꾸며 놓았다.
  • 익곤궁(翊坤宮) : 1420년에는 만안궁(萬安宮)이었다가 1535년 익곤궁으로 개칭했다.
  • 저수궁(儲秀宮) : 1420년에는 수창궁(壽昌宮)이었다가 청나라 때 저수궁으로 개칭했다. 가경제의 아내 효숙예황후(孝淑睿皇后)와 효화예황후(孝和睿皇后), 선통제의 아내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 등이 이곳에서 거주했으며, 서태후가 동치제를 수태하고 들어와 순산한 후 5~6년간 살았던 거처로, 그녀에게는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된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운의 장소이다. 그래서 50세가 되던 해에 많은 돈을 쏟아 부어 실내외를 완전히 복구한 후 60세 무렵까지 머물던 곳이다.
  • 함복궁(咸福宮) : 1420년에는 수안궁(壽安宮)이었다가 1535년 함복궁으로 개칭했다. 도광제의 후궁 장순황귀비(莊順皇貴妃), 성귀비(成貴妃), 등이 이곳에서 거주했다.

화원[편집]

  • 어화원(御花園) : 자금성 중심축선에 위치한 후원으로 곤녕궁 뒷쪽에 있어서 명나라 때는 궁후원(宮後園)이라 했다가 옹정제 때 어화원으로 개칭했다. 황제와 후비들이 휴식을 취하고 경치를 감상하던 곳이었다.

종교[편집]

종교는 당시 중국 황실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러한 경향은 청나라로 갈수록 뚜렷히 나타났는데, 특히 만주의 샤머니즘이 곤녕궁을 중심으로 퍼져나갔고, 중국 고유의 도가가 여전히 청나라 시기에도 중요한 신앙으로 분류되었다. 자금성 안에는 두개의 도교 사원이 있는데, 하나는 황실 정원 한가운데에, 하나는 내조의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중국 황실에서 숭배한 종교에는 불교가 있는데, 자금성 내부에는 티베트 불교와 라마교가 성행했다. 불교적 이미지들이 궁궐의 이곳저곳에 그려져 있고, 한 전각에는 엄청난 규모의 불화, 만다라, 불상들이 보관되고 있다.

자금성 주변[편집]

자금성은 남쪽을 제외하고, 3면이 모두 거대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에는 증산 공원이 있는데, 이 공원에 있는 산을 쌓기 위해 흙을 파냈고, 이로 인해 새로운 호수가 생겼을 정도로고 한다. 서쪽에는 중난하이가 있는데, 현재는 중국 공산당의 주요한 시설들이 입주해 있다. 동쪽에는 백양공원이 있고, 거대한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자금성의 남쪽에는 2개의 중요한 시설들이 있었는데, 하나가 바로 자금성의 태묘고, 나머지 하나가 황실 가족들의 거주지였다. 태묘에서는 황제가 조상들과 신들에게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으며,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했다. 하지만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며, 이 건축물들을 모두 헐렸고 대신 공산당 기관 건물들이 이 자리를 대신했다.

현재 남아있는 남쪽 축조물에는 천안문이 있는데, 이는 자금성의 입구가 아니라 베이징 황성의 주요 입구이다. 천안문 가운데에는 현재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있으며, 그 양옆으로 액자가 걸려있는데, 각각 '영원한 중화인민공화국'과 '세계 인민들의 영원한 통합'이라고 써져 있다.

현재는 자금성 주변의 공사가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자금성 주위의 유적들은 정치적, 사상적인 이유로 쉽게 헐려나가고 훼손되고, 이로 인해 자금성 주위의 경관은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2000년대 부터 중국 정부는 자금성 내에 들어가 있는 군사적, 정치적 시설들을 밖으로 다시 하나하나씩 이전하고 있으며, 2004년에는 황성과 그 일대를 보존하기 위해 자금성 주위의 높이 제한과, 개발 제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2005년에는 베이징 황성과 백양공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건축 양식[편집]

자금성의 건축 양식은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도 모두 철학적이거나 종교적인 사상들을 담아 만들어졌다. 이같은 반영은 당시 황제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으며, 자금성에 주요하게 쓰인 양식들은 다음과 같다.

  • 당시 황색은 황제의 색깔이었기 때문에, 자금성에 있는 거의 모든 건물들은 황금색 기와를 이고 있다. 오직 2개의 건물만이 예외인데, 황실 도서관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물을 상징하는 색깔이었던 검은색으로 기와를 이었다. 또한 왕자들의 거주지에도 황색이 아니라 녹색의 기와가 얹혀져 있는데, 이는 녹색이 성장과 나무를 상징하는 색깔이었기 때문이다.
  • 외조와 내조의 주요 궁전들은 모두 3개씩 짝을 맞추고 있는데, 이는 도가 사상을 반영하여, 우주의 원리를 표현하기 위해 이처럼 지어진 것이다.
  • 자금성의 모든 건물들의 지붕에는 잡상들이 올라가 있는데, 이 잡상의 개수는 그 건물의 지위를 상징한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건물은 3~5개가 얹혀져 있었고, 그 건물의 지위가 올라갈수록 잡상의 개수도 늘어났다. 특히 태화전에는 10개의 잡상이 올라가 있고, 당시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잡상을 10개씩 얹을 수 있는 건물이었다.
    자금성의 잡상
  • 자금성의 배치도 전통적 궁궐의 배치에 따른 것인데, 궁궐의 맨 앞에는 조상들을 모시는 사원이 있고, 그 뒤에 업무를 보는 공식공간, 맨 뒤에 사적인 공간을 배치하는 형식을 따른 것이다.


입장료[편집]

성수기(4~10월) - 60위안 비수기(11~3월) - 40위안 보물관(진바오관) 시계관(증바오관)은 따로 10위안 입장료를 낸다.

같이 보기[편집]

아래의 궁전들은 자금성처럼 직사각형의 궁전들이다.

참고문헌[편집]

  • 단숨에 읽는 세계 박물관 - CCTV, 《단숨에 읽는 세계박물관》,베이직 복스, 2010.01.15, 37p-41p
  • 자금성을 걸으며 중국을 본다 - 진병팔, 《자금성을 걸으며 중국을 본다》, 청년정신, 2002.11.07, 66p-67p
  • 자금성, 금지된 도시 - 질 베갱, 도미니크 모렐, 《자금성, 금지된 도시》, 시공사, 1999. 05. 15 45p-49p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좌표: 북위 39° 54′ 53″ 동경 116° 23′ 26″ / 북위 39.91472° 동경 116.39056°  / 39.91472; 116.39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