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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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景福宮
대한민국 대한민국사적

경복궁 근정전
종목 사적 제117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면적 432,703㎡
시대 조선 시대
소유 국유
위치
경복궁 (대한민국)
경복궁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좌표 북위 37° 34′ 43″ 동경 126° 58′ 38″ / 북위 37.57861° 동경 126.97722° / 37.57861; 126.97722좌표: 북위 37° 34′ 43″ 동경 126° 58′ 38″ / 북위 37.57861° 동경 126.97722° / 37.57861; 126.97722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 세종로에 있는 조선 왕조법궁(法宮, 정궁)이다. 면적은 432,703㎡이며, 동서 500m 남북 700m 규모로 현재 350여칸만(실제 7481칸이 배치되었었다고 한다.)이 남아 있다.[1]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는 낙산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부분 완료된 상태다.[2]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3]

역사[편집]

경복궁 전경도 (광화문 (가운데 맨 아래), 경복궁 근정전 (정중앙), 경회루 (경복궁 상단 왼쪽), 집현전터 (경회루 아래))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4][5]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6]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7]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8]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은 이때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5][9]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 : 남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10][7]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11]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8]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8]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12][8]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13]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7]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년(세종 8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5]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1553년 화재[편집]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실화로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을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14]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9월에 낙성하였다.[14] 이 때에 동원된 인력이 부역이 2,200명이었고 품팔이꾼이 1.500명이었다고 한다. 명종 때에 건립된 경복궁을 그린 ‘한양궁궐도병’이라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림은 임진왜란 당시에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출처 필요]

임진왜란[편집]

1592년 선조가 피란할 때에 난민이 발생하였고, 노비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궁궐들을 난민들이 불태웠다고 전해진다.[5][15]현재, 이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논란이 나오고 있다.[16] 유성룡의 《서애집》에는 "왕실과 관료들이 일찌감치 피난을 떠나고 남은 빈 궁궐을, 왜적이 수도 한성을 입성하기도 전에, 백성들이 궁중으로 침입하여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보물도 약탈했다."라는 기록을 볼 수가 있으나 이는 목격담이 아니라 전해 들은 것으로, 유성룡이 불탄 궁궐을 직접 목격한 것은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한성을 탈환한 뒤인 계사년(1593년) 4월 20일이었는데, 이때 종묘는 불타고 세 궁궐은 모두 무너진 후였다. 그러나 왜군이 한성에 입성했을 때인 1592년 5월에 기록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의 《조선일기》에는 왜군이 한성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을 직접 답사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서 그때까지 경복궁의 전각들이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북산 아래 남향하여 자궁(경복궁)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 다섯 발자국마다 누가 있고 열 발자국마다 각이 있으며, 행랑을 둘렀는데 처마가 높다. 전각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붉은 섬돌로 도랑을 냈는데, 그 도랑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정면에는 돌다리가 있는데, 연꽃무늬를 새긴 돌난간으로 꾸며져 있다. 교각 좌우에는 돌사자 네 마리가 있어서 다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기록들로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은 왜군과 조·명 연합군의 전투가 거듭되면서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17]

환도 후에는 월산대군의 옛 집(광해군 3년 이후로 경운궁, 지금 덕수궁 일부)을 임시로 사용하였다.

대원군의 중건[편집]

그 후로 273년간 재건하지 못하다가 1865년(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이 시작되어[18] 같은 해 4월 13일 공역이 시작되어 1868년 6월 말에 공사를 마쳤으며,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경복궁 이어(移御)가 이루어져 정무를 개시하였다.[14] 경복궁의 재건을 주도한 흥선 대원군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공사를 마치기까지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7년이 넘게 걸렸는데, 경복궁에는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승정원, 홍문관 등 기타 여러 관아가 정비되어 있었다.[5]

중건된 경복궁의 많은 건물은 그 뒤 몇 차례 소실되고 복구되기를 반복하였다.[14] 고종 32년(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된다.[14]

일제강점기[편집]

1910년에 한일합방 이후 경복궁은 훼손되어 본 모습을 잃게 된다. 1910년 이후 경복궁 내의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던 일제는[19],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건물 4,000여 칸을 헐고, 그 자리에 5,200여 평에 달하는 18개소의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20] 전시회가 끝나자 일제는 경복궁 안에 궁궐 시설과 무관한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을 전국 각지에서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하였으며,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시작하였다.[20]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에 큰 화재가 나서 침전이 모두 불타버리자,[20]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경성전 등을 1918년부터 1920년 사이에 헐어내어 창덕궁의 침전 복구공사 재목으로 썼으며, 1918년부터는 왕권의 상징인 근정전, 사정전, 만춘전, 천추전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21] 1916년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하였다.[19] 총독부 청사 신축을 두고 조선내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인들까지 맹렬히 비난하여 여론을 환기시켰다.[21] 이 과정에서 일제는 1927년 9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헐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21]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1929년 5월에는 융무당(隆武堂), 융문당(隆文堂) 등을 헐어 한강로에 용광사를 지었으며, 1932년에는 선원전을 헐어 장충동에 이토 히로부미의 명복을 비는 사당인 박문사(博文寺)를 지었다.[19] 1940년에는 건청궁터에다 미술관(옛 전통공예전시관)을 지으며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19]

일제 시대를 거치며 경복궁에 남게 된 건물은 1865년(고종 2년)에 건설한 건물로 건춘문, 천추전, 신무문, 동십자각이 있고, 1867년 건설한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과 주변 회랑 및 행각, 제수합, 함화당, 경회루, 수정전, 경안당 등이 있으며, 1873년에 지은 건물로는 향원정, 집옥재, 협길당 등이 있다.[22]

해방 이후[편집]

2012년 야간개장 당시의 경복궁

해방 이후 경복궁 내에 국립중앙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후생관(용산으로 이전하기 전의 국립중앙박물관), 제2별관(옛 문화재연구소) 등이 건립되고 서북쪽에는 군부대가 주둔하였다.[22] 광화문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문루가 타버리고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63년에 원래 위치쪽에다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였다. 이후 1990년에 들어서 대한민국 정부는 20년 계획으로 경복궁 복원사업 1차 복원정비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 총독부 청사를 1995년에서 1996년에 걸쳐 문민정부가 철거하였다.[21] 2010년 기준으로,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어 89동 8987㎡(2720평)의 건물이 복원됐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현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23] 2010년 9월 이후 광화문 권역이 완전 개방되며 이후 복원작업은 2차 정비사업과 장기복원으로 나뉘어 2차복원에는 수정전 앞 궐내각사지역이 현재 복원 진행 중이며 흥복전권역이 복원 예정에 있고 전체적인 궁장과 동서십자각도 복원 예정에 있다. 2차 사업까지 완료하면 고종 당시의 75% 수준으로 복원이 되며 그 이후 장기 복원계획은 국립 고궁박물관과 국립 민속박물관 및 관리사무소, 주차장 등 시설의 이전에 맞춰져 진행된다.

건축물[편집]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채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입구[편집]

광화문[편집]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오문(午門)이었으나, 세종때에 와서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건춘문[편집]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동쪽은 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천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영추문[편집]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문 밖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영추문의 천장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에 물자를 조달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흥례문[편집]

흥례문

흥례문(興禮門)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영제교[편집]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 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하다.

신무문[편집]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 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외전[편집]

근정문[편집]

근정문

근정문(勤政門)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24]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금천교, 어구, 흥례문을 비롯하여 이곳도 해체ㆍ철거되었는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고 이 일대를 재건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다.[24]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근정전[편집]

근정전

근정전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25]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25]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ㆍ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25]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쌍의 품계석이 놓여있다.[24]

근정전 내의 어좌

근정전 건물 외관은 충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의 병풍이 있다.[24]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 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24] 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24]

사정전[편집]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천추전[편집]

천추전(千秋殿)은 왕의 편전(便殿)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사정전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만춘전[편집]

만춘전(萬春殿)은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전쟁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다가 1988년에 복원하였다. 예전에는 사정전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내전[편집]

내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도 내전에 있는데 대왕대비, 즉 왕의 할머니의 거처이다.

강녕전[편집]

강녕전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으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초익공 팔작 지붕이다. 왕의 침전이므로 용마루가 없으며, 전면에 퇴가 개방된 중앙 어칸은 마루로 좌우는 온돌방으로 꾸몄다. 강녕전 일곽은 1920년 창덕궁의 복원을 위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년 복원하였다.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녕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너의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라고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정도전,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강녕전의 소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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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지당[편집]
연생전[편집]
경성전[편집]
연길당[편집]

교태전[편집]

교태전

교태전(交泰殿)은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으로, 강녕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있는 괘 이름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다. 그이유는 오른쪽은 양,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본래 교태전 건물은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지어 대조전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최근에 재건하였으나,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 중건 때의 것이다.[26]

아미산[편집]

아미산 굴뚝

아미산(峨嵋山)은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돋운 작은 가산(假山)이지만,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맥이 북한산, 북악을 지나 경복궁에서 멈춘 장소이다.[26] 아미산에는 괴석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보물 811호인 아미산 굴뚝이 있다.[26]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혹은 31단으로 쌓고,[26]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전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자경전[편집]

자경전

보물 809호인 자경전(慈慶殿)은 왕비의 정침(正寢)인 경복궁 교태전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26] 왕이 세상을 떠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로 높여져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교태전에서 옮겨와 주로 머물던 곳이 자경전이다.[26]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로, 현재의 자경전은 조대비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지은 뒤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한 것이다.[26] 전면 마당 동ㆍ남ㆍ서쪽에는 각각 동행각, 남행각, 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27] 자경전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27]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자경전 후정 담의 중앙부에는 자경전 십장생(十長生) 굴뚝이 있다.[27] 이 굴뚝은 담보다 한단 앞으로 나와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어있다.[27] 벽면 상부에는 소로 및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고 십장생 무늬로 장식하였다.[27]

집경당과 함화당[편집]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공간

교태전 북쪽인 아미산 너머에는 흥복전 일원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일대는 후궁과 궁녀들을 위한 영역이다. 침전으로 쓰였던 수많은 전각과 복잡한 행각들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함화당과 집경당만이 남아 있다. 이나마도 일제가 동궁터에 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흥복전은 빈궁전으로서 중궁전인 교태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되 격을 한 단계 낮추어 지었다. 그런데 신정왕후가 이곳 흥복전에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전의 용도로도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회루 일대[편집]

경회루와 연못

경회루[편집]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국보 제224호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때 대연회를 베풀던 곳이다.[28] 지금의 경회루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7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크고 사각진 인공 연못 안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28] 원래 경회루는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완성하였다.[28] 태종은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며 경복궁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 장소를 마련하고자 이 누각을 지었다.[28]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이다.[29]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점, 거대한 건물을 간결한 구조법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 장소를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인왕산, 북악산, 남산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도록 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 대 방지(方池)의 물과 당주를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29]

수정전[편집]

수정전(修政殿)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건청궁 일대[편집]

건청궁[편집]

건청궁(乾淸宮)은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30] 을미왜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아관파천)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훼손·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는데,[31] 이 미술관은 해방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년 5월 20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건청궁 복원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 4개월 만에 완공됐다.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 및 낙선재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이 배치돼 있다. 이곳은 또한 1887년에 미국의 에디스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최초로 전깃불을 밝혔던 장소로도 유명하다.[32]

건청궁 건물[편집]

곤녕합[편집]

곤녕합은 명성황후의 침전이다.

옥호루[편집]

옥호루는 명성 황후가 시해된 건물이다.

장안당[편집]

장안당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추수부용루[편집]
관문각[편집]

고종의 서재. 원래 전통적 목조건물이었으나,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건축된 경복궁 안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향원정[편집]
향원정

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집옥재[편집]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태원전 일대[편집]

태원전[편집]

태원전(泰元殿)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이 봉안됐던 곳이자,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도 활용되었다. [33]빈전은 빈소의 높임말로,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일본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바로 뒤인 관계로 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해 있었다.[34] 현재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고종때 태원전의 건축이유는 왕의 적통이아니라 입양된 고종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위해 건설한것으로 알려져있다.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원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이다.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이곳은 궁 안 외진 곳이어서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인 공묵재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은 제사지내는 집답게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동궁[편집]

자선당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이 세자시절 단종을 낳기도 하였으며, 고종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만 복원이 되었다. 동궁의 북쪽에는 수라간인 내·외 소주방이 있었다.

자선당[편집]

자선당(資善堂)은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빈이 살았다. 일제시대 당시, 건물전체가 일본에 건너가 이왕가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터만 남아 버려져 있던 것을 1995년에 반환받아 현재 건청궁 옆으로 옮겨두었다. 현존 건물은 199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비현각[편집]

비현각(丕顯閣)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부속 건물[편집]

국립고궁박물관[편집]

광화문 안 서쪽 터에 자리잡고 있다. 일제강점기때 건축된 건물을 한국전쟁때 파괴된 것을 기본구조를 유지한채 보수, 개조 등의 공사를 통해 새로 지었다.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로 이전하면서 덕수궁 석조전에 있던 궁중유물전시관이 국립고궁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옮겨졌다.[35]

국립민속박물관[편집]

국립민속박물관은 경복궁 중앙 동쪽 터에 자리잡고 있다. 1993년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로 사용하던 현 건물로 옮겨졌다.

조선 총독부 청사[편집]

조선 총독부 청사는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으나, 1995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영제교와 흥례문이 복원되었다.

경복궁관리소[편집]

경복궁관리소는 본래 지어질 때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설립 연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기타[편집]

  •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
2009년 5월 23일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29일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열렸다. 여야 지도부와 전직 대통령 등 정치권 인사들을 비롯하여 수십만 명의 시민이 국민장에 참석하였다.[36]

사라진 전각[편집]

  • 흥복전
  • 만경전
  • 궐내각사
  • 마랑, 원역처소

교통[편집]

사진[편집]

함께 보기[편집]

주석[편집]

  1. 7천칸 경복궁은 ...]
  2. [서울신문] [8·15 65주년] 훼손 궁궐 제모습 찾기 어디까지
  3. 경복궁(서울특별시)
  4. 글로벌세계대백과》〈서울의 사회·문화#경복궁
  5. 글로벌세계대백과》, 〈왕권의 재확립과 쇄국책〉, 경복궁.
  6. 이상해, 2004, p.37.
  7. 이상해, 2004, p.39.
  8. 김동욱, 1998, p.15.
  9. 정교(鄭喬) 저, 조광(趙珖) 편, 《대한계년사 1》(소명출판, 2004년) 47~48쪽.
  10. 태조 4년 9월 29일 기사
  11. 김동욱, 1998, p.17.
  12. 세종 61권 15년 7월 21일
  13. 김동욱, 1998, p.16.
  14. 이상해, 2004, p.43.
  15.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16.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 39장 372~381쪽
  17. `용의 세계인가, 仙界인가`, 《연합뉴스》, 2008.4.7.
  18. 《고종실록》(권2 고종2년 4월2일)
  19. 이상해, 2004, p.46.
  20. 이상해, 2004, p.44.
  21. 이상해, 2004, p.45.
  22. 이상해, 2004, p.47.
  23. ‘景福宮 1차정비’ 강녕전 등 89동 본모습 되찾아. 문화일보, 2010.08.12
  24. 이상해, 2004, p.49.
  25. 이상해, 2004, p.48.
  26. 이상해, 2004, p.56.
  27. 이상해, 2004, p.57.
  28. 이상해, 2004, p.54.
  29. 이상해, 2004, p.55.
  30. 〈명성황후 시해당한 건청궁 복원돼〉, 한겨레신문, 2007.10.18
  31. 건청궁, 비극의 역사도 복원되야 한다. 한겨레신문, 2007.10.19
  32. 문화재청 50년사, 문화재청, 575쪽
  33. <조선의 궁궐과 종묘>, 2010, 문화재청
  34. 변선구 기자 (2003년 12월 4일). 체험 테마가 있는 여행 : 고궁엔 이야기가 있다. 중앙일보.
  35. 국립고궁박물관 언제 문 여나, 《오마이뉴스》, 2005.3.31.
  36. 정윤섭 기자, 강병철 기자. "정치권, 경복궁 영결식 `비통의 눈물'", 《연합뉴스》, 2009년 5월 29일 작성. 2009년 5월 31일 확인.

참고문헌[편집]

  • 김동욱, 조선초기 창건 경복궁의 공간구성, 한국건축역사학회, 건축역사연구, 1998
  • 이상해, 궁궐ㆍ유교건축, 서울: 솔 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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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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