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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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진종
朝鮮 眞宗
지위
왕세자(王世子)
추존왕(追尊王)
추존황제(追尊皇帝)
이름
시호 효장세자, 자는 성경(聖敬), 본명 만복(萬福)
신상정보
출생일 1719년 4월 4일
출생지 조선의 기 조선
한성부 북부 순화방
사망일 1728년 12월 16일 (10세)
사망지 조선의 기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왕조 조선의 기 조선
부친 영조
모친 정빈 이씨
배우자 효순소황후
자녀 정조 (양자)
종교 유교(성리학)

진종(眞宗, 1719년 4월 4일(음력 2월 15일) ~ 172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6일))은 조선왕세자이자 추존왕, 대한제국 추존황제이다. 영조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정빈 이씨 소생이다. 는 행(緈), 아명은 만복(萬福), 자는 성경(聖敬)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효장세자(孝章世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양자 정조가 즉위하면서 진종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각민왕(恪愍王)이며 대한제국 때 황제로 추존되어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가 되었다.

1724년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부왕 즉위 후 1725년 세자(世子)에 책봉되었으나 10세의 나이에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요절하였다. 사후 효장(孝章)의 시호를 받아 효장세자(孝章世子)라 불렸고, 영조는 승통세자(承統世子)라는 호를 내렸다. 숙종의 첫 손자이자, 그의 생전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이기도 하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1719년 2월 15일 연잉군(후일의 영조)의 서장자(庶長子)이자 정빈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사후에 태어나는 사도세자는 그의 이복 동생이었다. 처음 이름은 만복(萬福)이라 했다가 뒤에 행(緈)으로 고쳤다.

어머니 정빈 이씨는 증 좌찬성 이준철과 김해김씨의 딸로, 동궁전 나인으로 있다가 아직 왕자이던 연잉군의 첩이 되었다.

그는 할아버지 숙종 생전에 태어난다. 그러나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상 중에 잉태되어 태어난 탓인지 영조의 장남이자 숙종의 첫 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에 존재가 기록되지 않았다. 영조 즉위년인 1724년 11월 3일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으며 11월 6일 종친부유사당상에 올랐다. 다음 해 2월 25일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었다.

세자 책봉 이후[편집]

1725년(영조 1) 5월 부스럼을 앓았고 6월에 나았다. 6월 8일약방제조의 보고에 의하면 부스럼이 아닌 수두(水痘) 같은 병이었다고도 한다. 그밖에 한때 홍역을 앓기도 했다.

1726년 8월 왕세자빈(王世子嬪) 간택을 통해 8월 19일 초간택, 8월 20일 재간택, 8월 28일 삼간택에 최종으로 조문명(趙文命)의 딸 효순왕후를 낙점하여 가례를 올렸다. 1727년(영조 3) 3월 3일 왕명으로 대제학 이의현(李宜顯)을 세자빈객을 삼고, 3월 9일 경연에서 입학례를 올렸다. 1727년 9월 9일 인정전(仁政殿)에서 관례를 행하였다. 그해 11월 세자빈 조씨가 홍역을 앓게 되어 경춘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10월 28일 무렵 갑자기 가벼운 미열이 올랐다가 11월초경 초경 병을 앓게 되어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 누워 있었으며, 안질(眼疾)도 겹치게 되었다. 1728년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에서 열병과 안질환 등의 합병증으로 훙서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날 당시 그의 아버지 영조의 보령은 35세였다. 영조는 친히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하는데, 그는 병석에 누워서도 마지막까지 효를 다하고 가지 못함을 애통해하였다 한다.

한때 그에 대한 독살설이 돌기도 하였지만 그가 독살을 당했는가 여부는 불확실하다. 다만 1729년 3월 9일, 순정 등 궁녀 여럿이 세자와 옹주들에게 독을 쓰고 저주했던 사실이 발각되어 영조의 친국을 받고 처참되었다.[1]

사후[편집]

1728년 12월 2일, 당상관들이 회의하여 시호로 장효(莊孝), 효장(孝章), 장헌(章獻) 셋을 추천했고[2], 영조는 모든 행동 중에서 효가 으뜸이라는 점을 들어 '효장'을 골랐다. 시신은 한성부 연희궁 근처 북아현에 매장되었다가 뒤에 파주군 조리면의 공릉, 순릉 근처로 이장되었다.

이후 효장세자로 불리다가, 훗날 영조에 의해 이복동생 사도세자가 폐서인되면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양자로 입적된 후 승통세자(承統世子)라는 별호를 얻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영조의 유지에 따르는 방식으로 진종(眞宗)에 추존되었다. 청나라에서는 각민왕(恪愍王)의 시호를 내렸으며, '온량예명철문'(眞宗溫良睿明哲文)의 시호가 추가되어 진종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眞宗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이 되었다. 1908년, 대한제국 순종에 의해 소황제(昭皇帝)로 추존되었다.

능묘[편집]

1728년 11월 16일 효장세자가 10살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자, 영조는 그해 1728년 12월 2일 효장(孝章)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한성부 연희면 북아현리, 연희궁과 애오개 근처에 안장하였다. 효장세자의 첫 무덤이 있던 곳은 이후 능안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3] 영조 5년 1729년 1월 26일 현재의 위치인 순릉 왼쪽 산언덕 영릉(永陵)에 예장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세자의 사후 현빈(賢嬪)으로 봉해졌다가 영조 27년 1751년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建極黨)의 동실인 의춘헌(宜春軒)에서 소생 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년 1월 22일 효장세자의 묘 왼쪽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진종소황제 (眞宗昭皇帝, 1719~1728)

기타[편집]

그는 실제로 통치하지 않았고 대리청정 경험도 없었는데 세자에서 왕으로 추존되고, 다시 왕에서 황제로 추존된 이력의 소유자이다.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처형당하면서 역적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걸렸던 영조는 사도세자의 차남 이산을 호적상 그의 양자로 입적시켜서 왕위계승에 하자가 없게 하였다. 이때는 이미 그의 부인인 효순현빈 조씨도 이미 사망한 뒤였다.

각주[편집]

  1. 영조실록 6년(1730 경술 / 청 옹정(雍正) 8년) 3월 9일(정축) 2번째기사
  2. 저마다 정치(政治)의 실리(實利)를 저군(儲君)의 덕행(德行)을 유자(儒者)의 흠모(欽慕)를 나타내었다고 추정되는데 이는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에 해당한다.[독자연구?]
  3. "조선 초 3대 천도지의 하나였던 안산(鞍山)과 이궁(離宮) 연희궁 터" 프레시안 2012.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