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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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만주어: ᠮᠠᠨᠵᡠ
ᡠᡴᠰᡠᡵᠠ
Manchu celeb 2.jpg
인구 약 1,068만 명
거점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홍콩
마카오 마카오
중화민국 중화민국
미국 미국
캐나다 캐나다
일본 일본
러시아 러시아
언어 만주어, 중국어
종교 샤머니즘, 불교, 조상 및 하늘숭배
관련민족 허저족, 시버족, 퉁구스 민족
건륭제의 일등시위 훠르차 바투루(Hūrca Baturu) 장임보오(占音保, Janggimboo)
자금성에 있는 캰칭먼(乾淸門, 만주어: ᡴᡳᠶ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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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yan Cing Men) 현판. 왼쪽에는 한문, 오른쪽에는 만문로 적혀 있다.
만주국의 국기

만주족(滿洲族, 만주어: ᠮᠠᠨᠵ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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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ju Uksura) 또는 만족(중국어 간체자: 满族, 정체자: 滿族, 병음: Mǎnzú)은 퉁구스계 민족으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만주족의 선조는 말갈족여진족으로 역사적으로 발해국, 금나라, 청 제국을 건설하였다.[1] 2000년, 중국에 1,068만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주요 분포 지역은 동북 3성으로 7,185,461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중 랴오닝 성이 4,952,859명으로 가장 많다.[2]

과거에는 만주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청 제국 시대에 진행된 만주어의 한화(漢化)로 인해 현재는 만주어의 사용 인구는 오히려 감소하여 극소수에 불과하고, 거의 대부분 중국어를 사용한다.

현재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시버족은 건륭제 시대에 신강 영구 주둔군의 후손으로 만주팔기에 소속됐었지만 시버 쿼와란(錫伯營, Sibe Kūwaran)으로서 독자적인 군대 조직을 유지했고, 만주어와 만주 문자를 사용하였지만 완전히 만주족화되지 않고, 시버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어원[편집]

'만주’의 어원을 밝히려는 시도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 결과 청 제국은 《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만주어: ᠮᠠᠨᠵᡠᠰᠠ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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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jusai Da Sekiyen-i Kimcin Bithe)를 편찬하면서 공식적인 견해를 만주라는 명칭이 문수보살(산스크리트어: मञ्जुश्री Mañjuśrī)에서 유래했다고 규정했다.[3]

1636년에 만들어진 《태조태후실록(太祖太后實錄)》은 순치조에 다시 베껴 쓰고 개수(改修)하여 《태종문황제실록(太宗文皇帝實錄)》의 체례에 따라 만문(滿文)·몽골문(蒙古文)·한문(漢文) 3종의 문본으로 나누어 쓰되, 삽도를 없애고 개칭한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과 《태조태후실록》을 근거로하여 1779년에 편찬된 청 제국 역대 왕조의 실록 중 오직 만문(滿文)·몽골문(蒙古文)·한문(漢文) 3종의 문자가 한 체로 모아져 있고, 또 삽도(揷圖) 82폭까지 덧붙여 《만주실록(滿洲實錄)》[4]에는 명나라가 만주를 오인하여 건주(建州)를 발음이 결과라고 하였다.[5][6]

만주족의 직계조상이 기왕에 흑수말갈(黑水靺鞨)로 된 이상, 그 추장은 "대막불만돌(大莫拂瞞咄)"이었다. 자의상의 해석으로는 대막불(大莫拂)은 다마파(大馬法, 만주어: ᡩᠠᠮ
ᠠᡶᠠ
Da Mafa)이니, 대부(大斧)·대로(大老)·노옹(老翁)·노조(老祖)라는 뜻이요, 만돌(瞞咄)은 추장이란 뜻이다. 역사자료를 참고하여 '대막부만돌(大莫拂瞞咄)'을 풀이하자면 곧 부락연맹의 대추장(大酋長)이란 뜻이다.[7] 만돌(瞞咄)은 Mandu를 나타내는데, 모두 추장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주라는 명칭도 이 만돌과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며, 발해의 성(姓)인 대씨(大氏)도 이와 관계 있는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8][9]

일각에서는 만주가 man과 ju가 의 조합어라고 여기는데, man은 강경하다는 의미의 만주어 망아(만주어: ᠮᠠᠩᡤᠠ Mangga), ju는 강한 활을 의미하는 주(만주어: ᠵᡠ ju)이다.[10] 또, 파저강[11]의 다른 이름인 마저강(馬猪江)의 '마저'의 변음이라느니, 파저강의 또 다른 이름 포주강(蒲州江)의 포(蒲)자가 만(滿) 자와 슷해서 오독한 결과라느니[12] 하는 수십개의 설이 분분하다.[13]

역사[편집]

대청국을 선포한 숭덕제

후금의 두번째 군주인 천총한이 1635년 음력 10월 13일, 조서를 내려 오랫동안 자신들을 지칭해온 용어였고, 누르가치가 통치하던 시기에도 건주여진을 가르키거나 해서여진까지 포함하는 여친의 총칭으로 빈번하게 된 용어인 주션(諸申, 만주어: ᠵᡠᡧᡝᠨ Jušen)이라는 족명을 자신들과 상관없는 시버족의 초오 머르건(超墨爾根, 만주어: ᠴᠣᠣ
ᠮᡝᡵᡤᡝᠨ
Coo Mergen)[주 1]의 후예를 이르는 망령된 족명이라 왜곡하여 금지하고, 족명을 만주(滿洲, 만주어: ᠮᠠᠨᠵᡠ Manju로 개칭했다. 이후 유권점 만주문자로 기록된 사료들에서 여진을 주션 대신 뉘즈(만주어: ᠨᡳᠣ‍ᡳ
ᡷᡳ
Nioi Jy)로 기재했다.

원문
天聰九年十月庚寅諭曰 「我國原有滿洲、哈達、烏喇、葉赫、輝發等名。向者無知之人,往往稱爲諸申。夫諸申之號乃席北超墨爾根之裔,實與我國無涉。我國建號滿洲,統緖綿遠,相傳奕世。自今以後,一切人等,止稱我國滿洲原名,不得仍前妄稱。」

— 청태종문황제실록

해석
천총(天聰) 9년(1635년) 10월 경인일에 유지(諭旨)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원래 만주와 합달 및 오라와 엽혁 및 휘발 등의 이름이 있었다. 이전에는 무지한 자들이, 왕왕 제신(諸申)이라 칭하였다. 대저 제신(諸申)의 호는 곧 석북(席北)의 초묵이근(超墨爾根)의 자손이니, 실로 우리나라와 더불어 관계가 없다. 우리나라는 만주(滿洲)라는 국호를 만들어, 한 갈래로 이어온 계통의 이어져 내려온 시간이 오래되었고, 혁세(奕世)에 대대로 서로 전하였다. 이제부터 이후, 일체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원래 명칭인 만주라 칭해야 할 것이며, 거듭 전의 망칭을 얻지 못하게 할지어다."

숭덕제가 밝힌 개칭의 이유는 의도적으로 왜곡된 것이고, 그 외에 다른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짜 이유를 추정의 영역에서 찾아야한다. 일반적으로 주션이라는 용어의 이미가 변했기 때문에 이 명칭을 계속 족명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주장인데, 본래 주션은 사회의 상류 계층인 '이르건(만주어: ᡳᡵᡤᡝᠨ Irgen)'과 노예인 '아하(만주어: ᠠᡥᠠ Aha)'의 중간에 있는 일반 인민을 가르키는 용어이기도 했고, 누르가치의 정복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포로가 된 수많은 일반 백성인 '주션'이 노예화되면서 주션이라는 의미가 담기게 되었으며, 따라서 만주로 족명을 개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숭덕제여진족, 몽골족, 한족이 공존하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통일 전 다양하게 존재했전 여진을 융합시켜야 하는 이중의 고민을 맞게된 상황을 고려하면, 숭덕제는 주션이라는 명칭을 폐기함으로써 그 이름에 묻어있는 과거의 상쟁의 기억, 특히 건주여진해서여진의 상쟁의 기억을 일소하고, 만주만을 사용함으로써 여진을 새로운 이름 이래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는 학설도있고[14], 일찍이 말갈 시대부터 관직 또는 족장의 칭호로서의 요소가 있었던 만주에서 유래한 이만주의 이름은 건주연맹의 적법한 족장으로서 그의 지위를 보여주는 작위였는데, 누르가치의 조상들이 1400년대에 이만주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후에, 명나라가 만주라는 작위를 전체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인했고 이후에, 숭덕제의 정책에 의해 법제화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학설도 있으며, 말갈 시대부터 족장을 가르키는 고대의 용어와 약간의 어원적 연관성이 있었던 만주를 국가내의 지배민족 규정을 위해 차용했다는 학설도 있다.[15]

새로 만들어진 만주는 과거의 주션이 이름만을 달리 한 것이 아니었다. 만주는 팔기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그에 소속된 주션, 즉 건주여진해서여진 그리고 동해여진의 일부를 가리켰다. 따라서 팔기에 속하지 않은 동해여진의 다수는 여진의 일부였지만 만주족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되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는 과거의 여진과 범주가 달라진,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공동체였다. 만주는 과거의 여진과 범주만이 아니라 속성도 달라졌다. 만주의 업종은 사냥꾼, 어부, 상인 등에서 전업 군인으로 변화했다. 만주는 과거의 여진처럼 문화적으로 복합적이지 않았고, 국가가 선포한 기준, 즉 혈통, 팔기에 대한 의무 등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되었다.[16]

만주족은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민족공동체였기 때문에, 팔기에 새로 편입되는 병력이 생기면 만주의 범위도 확장되었다. 만주팔기에 편입되는 자격이 반드시 과거의 여진인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숭덕제는 1634년부터 1640년까지 흑룡강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원정했고, 투항시킨 솔온(索倫, 만주어: ᠰᠣᠯᠣᠨ Solon)[17], 어웡키, 오로촌, 다구르동해여진의 일부를 만주팔기의 일부로 편제했다. 즉 여진과 함께 북방퉁구스 계통의 이민족이 만주로 편입된 것이다. 이 때 팔기에 편입된 이들은 “새로운 만주”라는 의미로 신만주(新滿洲, 만주어: ᡳᠴᡝ
ᠮᠠᠨᠵᡠ
Ice Manju)라고 불렸다. 이들 신만주를 제외한 본래의 만주는 자연스럽게 구만주(舊滿洲, 만주어: ᡶᡝ
ᠮᠠᠨᠵᡠ
Fe Manju)로 불리게 되었다. 만주의 외연 확장은 이후에도 일어났다. 명나라를 점령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 1644년 이후 전투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병력의 충원이 잦았고, 청 제국은 필요한 병력을 자신들의 고토인 만주지역에서 찾았다. 강희 시기인 1671년부터 1677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만주지역에서 1만명 이상의 허저와 쿼야라(庫雅喇, 만주어: ᡴᡴᡡᡟᠠᡵᠠ Kūyara)[18][19] 성인남성을 팔기로 편입시켰고[20], 1714년에는 삼강 유역의 허저족을 삼성협령어문을 설치하면서 팔기에 편입되었다고 한다.[21] 또한, 흑룡강 유역에서 포로로 잡은 러시아인도 팔기 만주로 편입되었으며,[22] 18세기 중반에는 건륭제가 "한군팔기는 원래 모두 한인"이라고 선포하며, 한군팔기를 만주족과 확실히 구분하여 정복층, 엘리트 층에서 배제시켰다. 청 제국은 요동의 오랜 한족(만주어: ᠨᡳᡴᠠᠨ Nikan) 가문의 후손들 중에 한군팔기에 남아 있던 자들은 만주팔기로 이적시켰다.[23] 더불어 위구르 무슬림과 티베트인으로 구성된 니루가 새로 조직되어 만주팔기로 편입되었다.[24] 이처럼 만주족은 필요에 따라 융통성있게 외연을 확장해갔다.[25]

이후 만주족은 인류사에서 보기 드문 위업을 이룩했다. 중국을 정복해서 중원왕조의 외피까지 입은 만주족은 티벳·신강·몽골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했다. 만주족이 획득한 강역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창안한 통치기술은 현대 중국에 계승되었다. 이런 성취와 유산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역사에서 평가절하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한족과 우월한 중국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족에 흡수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만주족은 청대에 자신들의 언어와 생활양식의 많은 부분을 상실해갔지만, 한인과의 경계를 허물어뜨리지 않았고 만주족이라는 자의식과 정체성을 잃지도 않았다. 현재 만주족은 중국에서 만족(滿族)이라는 민족명으로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며, 그 인구는 천만명을 상회한다.[26] 중국에 살든 대만에 살든 이제 자신을 만주족으로 규정하기로 한 최근의 젊은 세대에 의해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이 다시 회복되었고, 비교적 젊은 일부의 만주족은 청조의 정복 기간에 양주와 가정에서 벌어진 대학살에 대한 역사상의 기록으로 고통받았다고 주창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쿠빌라이 칸이든 강희제이든 간에) 정복자 황제들이 중국에 유익한 업적을 성취한 점에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한다는 평가에 분노하기도 하며[27], 근래 이들은 각종 단체와 협회를 조직해서 만주족 문화의 유지와 부활을 도모하고 있다. ‘만주’가 지나간 과거의 주인공만이 아닌 ‘만족’의 전신으로서 오늘에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의 주인으로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다.[28]

문화[편집]

만주족의 민속문화에는 만주 지역의 오랜 역사와 문화가 녹아 첩첩이 쌓여온 애니미즘, 샤머니즘을 비롯한 문화원형이 담겨 있다.[29]

성씨[편집]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满洲氏族通谱, 만주어: ᠵᠠᡴᡡ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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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ūn Gūsai Manjusai Mukūn Hala be Uheri Ejehe Bithe
)》

할아는 본래 혈연관계를 가진 동일 성씨의 각 가정으로 구성된 씨족 공동체였다. 한 할아에 속한 사람들은 동일한 씨족명칭을 가지는데, 동일한 선조를 숭배하고, 종족의 규정을 준수해야 하며, 씨족 내의 혼인을 엄격히 금한다.[30] 무퀀(穆昆, 만주어: ᠮᡠᡴᡡᠨ Mukūn)은 가족 공동체를 말하는데, 하나의 할아는 다수의 무퀀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의 무퀀은 두 개 이상의 할아에 동시에 속할 수 없다. 또한 무퀀은 자급자독의 독립경제 단위이며, 생산수단을 공유하여 공동생산, 공동소비를 한다.[31] 최초의 할아와 무퀀은 뚜렷하게 구분되었든데 이후 씨족 조직이 와해됨에 따라 할아는 점차 성씨로 변하였다. 비록 씨족이 성씨로 변하였지만 사람들은 할아라는 명칭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가족인 무퀀 앞에 할아를 덧붙여 할아무퀀(만주어: ᡥᠠᠯᠠ
ᠮᡠᡴᡡᠨ
Hala Mukūn)이라는 말이 출현하게 되었다.[32] 즉, 금나라 여진족의 성씨를 계승한 할아는 씨족에서 만주족의 성씨를 의미하게 되었고,[33] 무퀀은 씨족이 아닌 성씨의 가족 분파를 표시하는 명칭이 되었다.[34]

건륭 연간에 편찬한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满洲氏族通谱, 만주어: ᠵᠠᡴᡡ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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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kūn Gūsai Manjusai Mukūn Hala be Uheri Ejehe Bithe
)》에 의하면 만주씨족은 무려 1114개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이름난 가문으로는 궈왈갸 할아(瓜爾佳氏), 뇨후루 할아(鈕祜祿氏), 슈무루 할아(舒穆祿氏), 타타라 할아(他塔喇氏), 교로 할아(覺羅氏), 나라 할아(那拉氏)가 있다.[35]

역사상, 여진족은 한성(漢姓)을 사용하는 관습이 있었다. 금나라 때 "완안은 왕(王), 오고론(烏顧論)은 상(商), 흘석렬(紇石烈)은 고(高), 여해렬(女奚烈)는 낭(郎), 포찰(蒲察)은 이(李), 협곡(夾谷)은 동(仝)"라는 기록이 있다.[36] 그러나 청 제국은 만주족 성씨가 한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만주 성씨에서 한성 성을 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발견되면 군주로부터 질책을 당했다.[37]

청대 만주족은 일상에서 자신들의 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이름만을 사용했다. 심지어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만주족의 성명을 기록하거나 불러야 할 때에도 역시 성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이름만을 기록하거나 불렀다. 청대에 만주족의 성은 족보에만 기록되어 전해지는, 박제화 된 상징이었다.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은 원인은, 그들이 국가를 세우기 전에 씨족 단위로 생활했던 당시의 영향이 청대 내내 지속된 때문이었다.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청 제국을 세우기 전인 부락시기의 초기에 씨족 단위로 산산이 흩어져 거주했었다. 동성의 씨족인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거주하고 그들의 생활 범위가 그 집단을 벗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을 명명할 때에 성을 쓰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후 팔기제를 통해 대대적으로 여진의 조직을 재편했어도 장구한 시간을 존속해온 씨족은 살아남았다. 그 원인은 팔기제의 기층 단위인 니루(만주어: ᠨ᠋ᡳᡵᡠ Niru)를 편제할 때, 과거의 할아무퀀이나 가샨(만주어: ᡤᠠᡧᠠᠨ Gašan)을 단위로 했기 때문이었다. 누르가치의 정복전에 강력히 저항하다 복속된 여진인은 기존의 조직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구성원을 산산이 흩트려서 여러 니루에 배속시켰지만, 그 외에 다수의 여진인은 과거의 혈연조직과 지연조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니루로 편입되었다. 하나의 혈연집단의 사람 수로 하나의 니루를 만들 수 있으면 그렇게 했고, 대개 씨족장인 할아다(姓長, 만주어: ᡥᠠᠯ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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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a Da)나 무퀀다(族長, 만주어: ᠮᡠᡴᡡ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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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kūn Da)를 니루의 수장인 니루어전(牛彔额真, 만주어: ᠨ᠋ᡳᡵᡠ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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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ru-i Ejen)으로 임명했다. 하나의 지연집단 내에 몇 개의 혈연집단이 있고 이를 합쳐서 하나의 니루를 만들면 대개 촌락장인 가샨다(鄉長, 만주어: ᡤᠠᡧᠠ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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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šan Da)를 니루어전으로 임명했다. 다시 말해 씨족은 여진인이 팔기로 편제된 후에도 그 영향을 받지 않고 니루 속에서 존속되었다. 결국 팔기제가 만들어진 후에도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나지 않은 것이다.

청대 모든 니루에는 니루를 총괄한 니루어전 외에 씨족사회의 제도였던 할아다가 존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신해혁명 후에도 일시 지속되었을 정도로 생명력이 질겼다. 청대에 기인이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니루어전이나 할아다에게 보고하고 등기했다. 만주족은 엄격한 족외혼제를 유지했다. 시간이 지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일족(만주어: ᡠᡴᡠᠨ Uksun)의 사람들이 서로를 모르게 되었고 전적으로 할아다의 성씨(姓氏)에 대한 지식에 의존했으며 결혼할 때에 반드시 할아다의 소개에 의존하여 족내혼의 발생을 방지하였다. 만주족은 청 제국이 망한 때까지 전원이 니루 내에 있었다. 즉 씨족시기부터 전해내려 온 혈연집단과 지연조직 내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청대 만주족이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은 원인이었다.[38]

성명[편집]

수명성[편집]

잘아풍아(扎拉丰阿, 만주어: ᠵᠠᠯᠠᡶᡠᠩᡤᠠ Jalafungga)

만주족에게는 일상에서 성을 사용하지 않는 관행과 이름의 첫 음을 마치 성처럼 사용하는 독특한 관행이 있었다. 예컨대 청 중기의 관원인 나단주(那丹珠, Nadanju)는 사람들로부터 나대인(那大人)이라고 불렸다. ‘나대인’이라는 호칭을 보면 그의 성이 ‘나’인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성은 ‘교르차(만주어: ᡤᡳᡠᡵᡮᠠ
ᡥᠠᠯᠠ
Giorca)’였다. 마찬가지로 동치 연간의 고관이었던 뇨후루씨(鈕祜祿氏, 만주어: ᠨᡳᠣᡥᡠᡵᡠ
ᡥᠠᠯᠠ
Niohuru Hala)의 잘아풍아(扎拉豐阿, 만주어: ᠵᠠᠯᠠᡶᡠᠩᡤᠠ Jalafungga)는 자대야(扎大爺)로 불렸다. 이름의 첫 음인 ‘자’가 ‘대야(大爺)’라는 존칭의 앞에 붙어 마치 성처럼 쓰였던 것이다. 청 제국의 마지막 군주 푸이(溥儀, 만주어: ᡦᡠ ᡳ Pu-I의 동생인 푸계(溥傑, 만주어: ᡦᡠ ᡤᡳᠶᡝ Pu-Giye)는 말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푸로(溥老, Pǔ lǎo)라고 불렸다.

푸계는 본래의 성인 ‘아이신 교로(만주어: 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Aisin Gioro)’보다 김(金, Jīn)이라는 한성(漢姓)을 주로 썼으나[39], 주위 사람들은 그를 ‘김로’ 혹은 ‘애신각라로(愛新覺羅老, Ài xīn jué luó lǎo)’로 부르지 않고, 이름의 첫 음인 ‘푸(溥, 만주어: ᡦᡠ Pu)’를 성처럼 불렀던 것이다.

만주족의 이런 독특한 방식의 관행을 중국 학계에서는 ‘수명성(隨名姓)’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수명성’의 관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1644년 만주족이 중국 내지에 진입한 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만주족이 본래의 성을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으면서, 성을 관직이나 존칭의 앞에 두어 부르는 한인의 관습에 적응한 결과 ‘수명성’의 관행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단, 수명성은 관행이었을 뿐 대대로 계승되어야 할 규범적인 강제력이 부가된 것은 아니었다.[40]

이중 이름[편집]

수명성이 만주족의 한인 지배 과정에서 나타난 관행이었다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여진족이 국가를 수립하고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가기 전까지 나타났던 ‘이중(二重) 이름’의 작명 관행이 있다. 이중 이름이란 두 개의 단어가 조합되어 만들어지는 이름이다. 일례로 아이신 교로 신화상 조상인 부쿼리 용숀(博克里雍順, 만주어: ᡴᡡᡵᡳ
ᠶᠣᠩᡧᡠᠨ
Bukūri Yongšon)부터 이중 이름이다. 이 이름의 의미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또 다른 사례로 만주족의 샤먼의 이야기인 《니샨 사만이 비트허(만주어: ᠨᡳᡧᠠᠨ
ᠰᠠᠮᠠᠨ ᡳ
ᠪᡳᡨᡥᡝ
Nišan Saman-i Bithe)》에 나오는 아이의 이름인 서르구다이 퍙궈(色爾古岱篇古, 만주어: Sergudai Fiyanggū)가 있다. 퍙궈(篇古, 만주어: ᡶᡳᠶᠠᠩᡤᡡ Fiyanggū)는 ‘막내’라는 뜻이고, 서르구다이는 의미를 알 수 없다. 이 아이의 아버지 이름은 발두 바얀(만주어: Baldu Bayan)인데, 바얀은 ‘부자(富者)’라는 의미이고 발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누르가치가 거병한 초기에 그의 숙적이었던 니칸 와이란(만주어: ᠨᡳᡴᠠᠨ
ᠸᠠᡳ᠌ᠯᠠᠨ
Nikan Wailan)도 이중 이름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니칸(만주어: ᠨᡳᡴᠠᠨ Nikan)은 ‘한인(漢人)’을 가리키는 만주어이고, 와이란은 한어인 외랑(外郎)이 만주어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와이란은 그 원형인 ‘외랑(外郞)’의 의미를 볼 때 관직명처럼 보이지만 인명으로도 사용되었다. 해서여진 하다(哈達, 만주어: ᡥᠠᡩᠠ Hada)의 창시자인 왕주 와이란(旺住外蘭, (만주어: ᠸᠠᠩᠵᡠ
ᠸᠠᡳ᠌ᠯᠠᠨ
Wangju Wailan) 역시 ‘와이란’이 포함된 이중 이름이었다.

이러한 이중 이름은 만주족의 초기 역사에서 나타나며 17세기 전기에 국가를 수립한 후부터는 점차 사라진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이중 이름은 만주족의 작명 관행이라기보다 여진족의 관행이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이중 이름이 만주족의 국가 수립과 길항관계에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41]

언어[편집]

만주족은 청 제국을 세우기 전에는 여진족으로 불렸다. 여진족은 12세기 에 금나라를 세운 종족이지만, 칭기즈칸에게 망한 후 이른바 백산흑수(白山黑水), 즉 백두산흑룡강 사이의 넓은 지역에서 무리를 지어 살았다. 누르가치가 금나라의 후신을 표방하는 후금을 세운 후에도 여진이라는 명칭은 계속 사용되었다. 따라서 편의상 여진어는 여진족이 활동했던 12~16세기까지 기록된 자료 에 나타난다. 여진어와 만주어 두 언어는 아마 방언적 차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여진어와 만주어를 비교해보면 이 두 언어는 많은 부분 닮아 있어서 여진 어를 만주어의 직전 선대 언어라고 보아도 좋으며, 16세기 후반 시작한 만주 어를 좁은 의미의 만주어라고 한다면, 12~16세기의 여진어를 포함하여 만주 지역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이전 언어들을 넓은 의미의 만주어라고 부를 수 있다.[42]

하지만 현대에는 만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구는 수천 명으로 극히 적고[43],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더욱 적어 약 10명에 불과하다.[44] 흑룡강성의 싼자쯔(三家子)촌에 살고 있는 70~80대의 고령의 노인들이 아직도 꽤 유창한 만주어를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만주어를 모국어로 하는 마지막 세대다. 이들은 1680년경 러시아가 침입하여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이주해온 만주인의 후손들이다.[45]

현재 시베리아만주 일대에 남아 있는 어원어, 어웡키어, 솔론어, 네기달어, 나나이어, 윌타어, 울치어, 우디허어[주 2], 오로치어 등도 만주어와 같은 계통의 언어들이지만, 이 언어들도 거의 절멸되었거나 절멸 위기에 처해 있다. 다만 중국 서부 신장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버어는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만주어의 방언으로 볼 수 있다.[46]

만주어는 특히 한국어와 아주 가까운 언어다. 만주어가 한국어와 유사한 것은 현재까지 약 250개 어휘가 있고, 이는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더 많이 발 견될 것으로 보인다.[47]

음식[편집]

만주·퉁구스 어계 민족들은 대흥안령 산맥 속에서 수렵, 채집 및 유목생활을 하면서 부분적으로 농경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들이 거주하는 자연환경과 기후의 영향을 받은 식재료를 많이 활용하였다. 그래서 생업환경과 밀접한 음식문화를 꽃피워 왔으며 여러 가지 음식 정체성을 갖고 있다. 만주족은 원래 농업과 수렵, 채집 등 여러 가지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업환경을 기반으로 오곡(쌀, 보리, 조, 콩, 기장)을 비롯한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 등을 많이 먹는다. 만주족 고유 음식문화 속에는 여진족의 전통과 북방 지역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청대 중엽에 만들어진 만주족의 만한전적(滿漢全席)은 중국 최대 규모의 고전적인 음식에 속한다. 만주족이 청 제국을 지배하면서 주류 문화가 되어 널리 퍼진 결과다. 오늘날에도 청 황제가 먹었다 하여 만한전적을 전문적으로 하는 음식점이 있을 정도다.

잘 차려진 훠궈

만주족의 화과(火鍋)는 중국 전역에서 많은 사람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화 과는 일종의 샤브샤브 요리에 해당한다. 화과(화궈)라는 말은 구리, 주석 등으로 만든 둥근 모양의 그릇을 뜻한다. 원래 돼지고기나 쇠고기, 양고기를 끓는 물에 데워 먹는데, 주로 돼지고기를 끓는 물에 담가 익혀 먹는다. 중국 전역에 서 애용할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화과 요리점이 많이 생겼다. 중국 전역에서 많이 먹다보니 각 지역의 특성이 가미되어 냄비에 육수를 붓고 채소, 면류, 고기 등을 끓여 먹기도 한다.

사치마

만주족은 사치마(薩其瑪, 만주어: ᠰᠠᠴᡳᠮᠠ Sacima)라는 과자를 즐겨 먹는다. 사치마는 만주족의 전통 과자로 청 제국을 건국한 이후 궁중에서 주로 먹던 과자다. 우리의 강정과 비슷한 과자에 해당한다. 계란과 물을 밀가루와 잘 섞어 반죽을 하여 만든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서 가늘게 썬 후 기름에 튀긴다. 이때 물엿, 참깨, 호박씨 등을 섞는데, 이렇게 하여 식은 것을 적당한 크기로 썰면 된다. 사치마 역시 청 제국 이후 중국 전역에서 각광받았다. 또한 사치마는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민족들이 명절에 즐겨 먹는 과자이기도 하다. 만주족은 평소에는 검소하게 차려서 먹는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음식문화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유독 많이 받는데, 만주족에게서 이러한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 만주족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힘들고, 거주하는 사람들 역시 적어서 외지인을 만나기 힘든 환경을 가지고 있다. 대개 인구밀도가 적고, 혹 독한 자연환경에 적응한 민족들이 이러한 음식문화를 갖고 있다. 그래서 만주 족은 손님을 귀하게 여겨 손님이 집을 방문하면 잘 대접하는 전통을 갖고 있 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데, 돼지고기로 국을 끓이고, 배추를 섞어서 구수하 게 먹는다. 자신들이 좋아하고 귀하게 여기는 돼지고기는 손님 접대에 반드시 동반된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는 것은 만주족이 유목이나 이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정착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돼지고기를 통해 충분한 단백질을 공급받고 농경을 통해 남게 되는 음식찌꺼기를 돼지가 처리할 수 있어 정착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돼지는 비교적 상호 호혜적인 동물에 해당한다.[48]

놀이[편집]

가추하(嘎出哈, 만주어: ᡤᠠᠴᡠᡥᠠ Gacuha) 혹은 가라하(嘎拉哈, 만주어: ᡤᠠᠯᠠᡥᠠ Galaha)는 대략 직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포유류의 발목관절뼈를 지칭하는 만주어이다.[주 3] 또한 가추하는 청대에 만주족이 이 뼈를 던지며 노는 놀이의 이름이기도 했다. 조선의 만주어 사전인 《한청문강(漢淸文鑑)》에서는 가추하를 ‘노름하는 깍뚝뼈’라고 설명했다.

‘노름’은 오늘날 한국에서 사행성 짙은 도박이란 의미가 강하지만 이 사전에서는 단순히 ‘놀이’ 정도의 의미이고, 깍뚝뼈는 깍뚜기처럼 육면체 모양으로 생긴 뼈라는 의미이다. 이 놀이도구를 만들 때 모든 동물의 가추하뼈를 사용한 것은 아니고 주로 이나 돼지의 뼈를 많이 사용했다. 때로는 나 사슴의 관절뼈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런 동물의 관절뼈는 가추하 중에서도 특히 로단(만주어: ᠯᠣᡩᠠᠨ Lodan)이라고 불렀다.

가추하는 만주족만의 놀이는 아니었다. 만주족이 가추하라고 부르는 이 뼈와 놀이를 몽골에서는 ‘샤가’ 혹은 ‘샤가이’라고 부르며 많이 즐겼고 오늘날에도 즐기고 있다. 몽골만이 아니라 키르키즈카자흐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 다수가 명칭은 다르지만 이 뼈를 가지고 만주족의 가추하와 유사한 놀이를 즐기거나 점을 치는 데 사용해왔다. 만주지역 북부의 오로촌족이나 허저족 같은 종족들도 모두 만주족의 가추하와 같은 놀이도구와 놀이가 있었다. 오로촌의 경우는 가추하 도구를 만들 때 개의 관절뼈를 사용했다. 청대에 한족들도 만주족의 영향을 받아 가추하를 즐겼다.[49]

피트험비[편집]

다양한 가추하 놀이 가운데 가장 단순한 방식이고 가장 많이 즐겼던 방식으로서 일종의 알까기가 있었다. 이 방식은 여러 개의 가추하뼈를 바닥에 흩뿌려놓고 두 명이나 여러 명이 둘러앉아서 손가락으로 자기의 가추하뼈를 튕겨서 다른 사람의 가추하뼈를 맞히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가추하뼈를 튕기는 것, 혹은 그렇게 알까기로 진행하는 가추하 놀이의 방식을 만주어로 피트험비(만주어: ᡶᡳᡨ᠋ᡥᡝᠮᠪᡳ Fithembi, 彈背式骨)라고 했다. 손가락으로 자기의 가추하를 튕겨서 상대의 가추하를 맞힐 때 상대의 가추하 모두를 무조건 겨냥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튕기는 가추하와 목표로 하는 상대의 가추하의 보이는 윗면의 종류가 일치해야 했다.

바닥에 던져진 가추하뼈는 보이는 윗면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냈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가추하뼈는 육면의 형태가 모두 달랐다. 가추하뼈의 긴 양쪽 끝은 형태가 둥글기 때문에 그 두 면으로는 바닥에 설 수 없고, 네 개의 면으로만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네 면의 형태도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 제각각이었다. 네 면에서 대체로 두 면은 면적이 조금 좁고 다른 두 면은 상대적으로 면적이 넓었다. 네 면은 확률적으로 자주 나오는 면과 그렇지 못한 면이 구분되었다.

네 개의 면에는 각기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도 지역마다 시기마다 제각각이었지만, 바닥에 던져졌을 때 가장 나올 확률이 적은 면을 만주어로 알추(Alcu, 珍兒)라고 했다. 그보다는 나올 확률이 큰 면은 한어로 귀아(鬼兒)라고 했다. 그보다 확률이 조금 더 큰 면은 만주어로 머커(Meke, 背兒)라고 했다. 나올 확률이 가장 큰 면은 만주어로 처커(Ceke, 梢兒)라고 했다. 나오기 어려운 면부터 쉬운 면의 순으로 간단히 정리하면 Alcu(珍兒) - 鬼兒 - Meke(背兒) - Ceke(梢兒)이다. 당연히 나오기 어려운 패를 던진 사람이 나오기 쉬운 패를 던진 사람보다 점수를 더 받거나 게임의 다음 순서로 먼저 진입하는 우선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네 면의 명칭도 모든 만주족에게 획일적으로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었고 지역마다 시기마다 약간씩 상이했다. 청 제국이 망하고 중화민국 시기가 되면 앞의 네 이름 알추(珍兒), 鬼兒, 머커(背兒), 처커(梢兒)는 이름이 약간 바뀌어서 한어로 쩐얼(珍兒), 컹얼(坑兒), 베이얼(背兒), 루얼(驢兒)로 많이 쓰였다.

대개 네 개의 가추하뼈를 한 벌로 사용했는데, 바닥에 던져진 네 개의 가추하뼈는 네 개 모두 알추가 나올 수도 있고, 네 개 모두 처커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니면 네 개가 모두 다른 면을 보일 수도 있었다.[50]

 칸잠비[편집]

앞의 알까기 방식이 주로 실내에서 이루어졌다면 실외에서 이루어진 가추하 놀이 방식도 있었다. 이 방식은 자신의 가추하뼈를 던져서 상대의 가추하뼈를 맞혀서 따먹는 것이었다. 이 방식을 만주어로는 칸잠비(打背式骨, 만주어: ᡴᠠᠨ᠋ᡷᠠᠮᠪᡳ Kanjambi)이라고 불렀다.

《한청문감(漢淸文鑑)》에서는 칸잠비를 '깍뚝뼈 맞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의 놀이로 치면 일종의 비석치기와 비슷한 셈이다. 이 칸잠비 방식에 대해서는 청대의 양빈(楊賓)이라는 사람이 《유변기락(柳邊紀略)》이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양빈이라는 인물은 강희기에 무단강변의 영고탑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던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고향인 절강성 산음(山陰)을 떠나 오랜 기간 영고탑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그곳의 만주족 풍속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언급에 의하면 영고탑에서 칸잠비 가추하를 즐긴 것은 주로 남자 아이들이었다. 당시 양빈이 보았던 영고탑의 가추하는 사슴의 관절뼈로 만들었고 뼈의 빈 구멍에는 주석이나 아연을 채워서 무겁게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추하뼈를 땅 위에 세 개나 다섯 개 정도 쌓으면 상대는 멀리에서 자기의 가추하뼈를 던져서 그것을 맞혔다. 던져서 가추하를 맞힌 사람은 쌓였던 가추하뼈들을 모두 가졌지만, 만약 못 맞히면 거꾸로 자기 가추하를 하나 내놓아야 했다. 영고탑에서 많게는 천개의 가추하뼈를 가진 녀석도 있었고 적게 가진 녀석도 백개는 가지고 있었다. 겨울철 농한기에는 어른들도 칸잠비 가추하를 즐겼다. 영고탑은 농사도 지었지만 수렵이 생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무거운 가추하를 던져서 목표물을 명중시키는 것은 이 지역에서 단순히 놀이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고 수렵의 훈련이기도 했다. 양빈은 영고탑의 가추하 놀이에 대해 서술하면서 가추하를 가추하(嘎出哈)가 아니라 가스하(嘎什哈)라고 표기했다. 영고탑에서는 가추하가 ‘가추하’로 발음되지 않고 ‘가스하’ 혹은 ‘가시하’로 불렸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51]

텁커점비[편집]

셋째 방식은 마치 주사위 놀이와 공깃돌 놀이를 결합시킨 것 같은 방식이다. 만주어로는 떨어지는 것을 받는다는 의미의 어휘인 텁커점비(抓背式骨, 만주어: ᡨ᠋ᡝᠪᡴ᠋ᡝᡷᡝᠮᠪᡳ Tebkejembi)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손에 가추하뼈를 쥔 상태에서 공중에 던져진 다른 물체를 받아 쥐는 것이 이 방식의 규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만주어 텁커점비를 한어로 번역할 때 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접마아(接馬兒: 接碼兒)라고 했다.

텁커점비 방식에는 가추하뼈 네 개가 한 벌로 구성되어 사용되었다. 가추하로 승부를 결하려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은 먼저 네 개의 가추하뼈를 바닥에 던졌다. 가추하뼈를 가장 먼저 던지는 사람을 웅우(만주어: ᡠᠩᡠᡠ Unggu)라고 했다. 웅우는 만주어로 ‘첫 번째’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는데, 가추하 놀이에서는 가추하뼈를 첫째로 던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웅우에 이어 두 번째로 가추하뼈를 던지는 사람을 다할이(만주어: ᡩᠠᡥ᠊ᠠᠯᡳ Dahali)라고 했다. 다할이는 만주어에서 ‘뒤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인데 도박판이나 가추하같은 놀이에서는 두 번째로 나서는 사람을 가리켰다.

바닥에 던져져서 펼쳐진 네 개의 가추하뼈 앞에서 게임에 임하는 자가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같은 면이 나온 가추하뼈를 훑어보고 파악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게이머는 동전 몇 개를 묶은 꾸러미나 동전처럼 생긴 납작한 돌맹이 같은 물체를 공중에 던지고 재빨리 같은 면이 나온 가추하뼈들을 손에 움켜쥐고 떨어지는 동전을 받았다. 같은 면이 나온 가추하뼈가 많을수록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한국공깃돌 놀이에서 공깃돌 하나를 공중에 던지고 바닥에 놓인 공깃돌을 쓸어 움켜쥐며 떨어지는 공깃돌을 받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가추하 놀이에서 사용하는 뼈는 네 개이기 때문에 한국의 공깃돌보다 한 개가 적지만, 공중에 던지는 말을 가추하뼈 외에 별도의 동전으로 사용하여 총 다섯 개의 말을 쓰는 것도 공깃돌과 유사하다. 이렇게 공중에 던지는 동전 꾸러미 등의 물체를 전마자(錢碼子)라고 불렀다. 전마자(錢碼子)를 받는 데 실패하면 벌칙으로 자신의 가추하뼈를 하나 내놓아야 했다.[52]

빙희[편집]

기인들의 빙희

만주한반도보다 춥고 결빙기가 길다. 한국인이 겨울철 북풍을 부르는 삭풍(朔風)이란 말은 곧 만주 벌판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을 가리킨다. 자연히 만주족은 눈과 얼음 위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길었고, 때로는 오락과 전투가 얼음 위에서 이루어졌다. 《만문노당》(滿文老檔, 만주어: ᡨᠣᠩᡴ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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ᡩᠠᠩᠰᡝ
Tongki Fuka Sindaha Hergen-i Dangse)은 누르가치 시기에 개최된 대규모 빙상 경기의 광경을 전하고 있다. 이 흥미로운 빙상 대회가 열린 것은 1625년 음력 정월 2일이었다. 이 날 누르가치는 만주, 몽골, 한군팔기의 여러 버일어들과 관원들과 그들의 부인들까지 이끌고 얼어붙은 태자하(太子河) 위에서 대규모 빙상 체육대회를 개최했다. 버일어들은 시위들, 병사들과 함께 얼어붙은 강 위에서 축구를 했다. 이 때의 축구는 오늘날의 축구처럼 정교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공중에 던져진 공을 먼저 잡는 자가 이기는 단순한 경기였다. 우승자에게는 상금이 주어졌다.

남자들의 축구가 끝난 후에는 부인들이 나와서 빙상 달리기 시합을 했다. 누르가치와 그의 부인들은 얼음 위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여진족 선수 여성들은 양쪽으로 나뉘어 서있다가 출발 신호와 함께 중앙의 골인지점을 향해 뛰었다. 골인지점에는 금과 은을 20냥, 10냥씩 묶어서 18곳에 놓아두고 선착순으로 고액을 잡게 했다. 부인 선수들이 골인지점의 금은을 향해 전력을 다해 뛰었을 것임은 직접 보지 않아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여진족 여성들의 달리기가 끝난 후 몽골 타이지들의 부인들의 달리기가 이어졌고 그 후에는 몽골의 소(小) 타이지들의 부인들의 경주가 이어졌다. 몽골 부인들의 상금은 만주 부인들보다 약간 적었다. 등수 안에 들지 못해서 상금을 획득하지 못한 부인 선수들에게도 소액의 상금이 주어졌다. 일종의 위로금이었다. 누르가치는 경기를 관람하면서 얼음 위에 미끄러져 나뒹구는 부인 선수들을 보며 크게 웃었다. 이 빙상 달리기를 묘사한 만문 기록에서 만주어로 ‘달리다’라는 의미의 '수점비'(만주어: ᠰᡠᡷᡠᠮᠪᡳ Sujumbi)라는 단어를 쓰고 얼음위에서 '활주하다'는 의미의 ‘니숨비'(만주어: ᠨᡳᠰᡠᠮᠪᡳ Nisumbi)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을 보면 선수들은 스케이트화를 신지 않고 일반 신발로 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빙상 경기는 오락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전투훈련을 겸한 것이었다. 누르가치는 전시에 썰매로 이동하는 속도전 부대를 운용하기도 했으며, 겨울에 북방으로 정복전을 갈 때에는 병사들에게 톱니가 달린 나무신을 신도록 해서 행군 속도를 높이기도 했다. 《청어적초(清語摘抄)》의 기록에 의하면 누르가치의 휘하 장군인 비고렬(費古烈)이 지휘한 부대는 스케이트화를 신고 하루에 7백리(약 350km)를 달렸다고 한다. 아무리 스케이팅을 잘 탄들 서울 - 대구간 거리를 하루에 달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어쨌거나 이 부대는 오늘날의 스키부대의 전신인 셈이다. 때로는 결빙된 바다 위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만주실록》(滿洲實錄, 만주어: ᠮᠠᠨᠵᡠ ᡳ
ᠶᠠᡵᡤᡳᠶᠠᠨ
ᡴᠣᡠᠯᡳ
Manju-i Yargiyan Kooli) 권8의 기록에 의하면 누르가치가 1626년, 명나라의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자 산해관의 명나라 군대는 후금을 측면 공격하기 위해 해로를 통해 영원성에서 남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각화도(覺華島)라는 섬으로 이동하여 집결했다. 각화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는 얼어붙은 바다 위에 군영을 세우고 얼음을 잘라서 참호를 만들었다. 결국 후금의 장수 우너거(만주어: ᡠᠨ᠋ᡝᡤᡝ Unege)의 부대가 공격하여 결빙된 바다 위의 전투는 명군의 패배로 종식되었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사는 한국인은 어떻게 빙판 위에서 전투까지 벌일 수 있는지 의아스러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북방의 얼어붙은 빙판은 상상 외로 단단하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는 동방의 전장으로 병력과 물자를 급송하기 위해 1.5m 두께로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위에 임시철도를 부설했다. 이 철도는 시험 운행 도중 얼음장이 갈라지면서 호수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지만, 북방 하천과 호수의 겨울철 얼음이 그 위에 철도를 부설할 생각을 할 정도로 단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644년, 만주족이 중국으로 진입한 후 황제가 주최하는 빙상 운동은 누르가치 시기 팔기의 고위층 남성과 여성을 모두 동원한 대규모 대회보다는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전통은 계속 유지되다가 청 제국의 전성기인 건륭기에 빙상 운동도 전성기를 맞았다. 청 제국의 군주들은 매년 겨울, 대개 음력 12월 8일에 북경 자금성의 서쪽 옆에 있는 태액지(太液池)에서 팔기인의 빙상 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이를 ‘빙상의 오락’이란 의미로 ‘빙희'(冰嬉, 만주어: ᠨᡳᠰᡠᠮᡝ
ᡝᡶᡳᡵᡝ
ᡝᡶᡳᠨ
Nisume Efire Efin)라고 불렀다. ‘빙희’라는 말은 청 제국이전부터 중국에서 ‘빙상 오락’을 의미하는 말로 있어왔지만, 청대에 만주족 군주가 개최한 빙희는 좀더 특수하고 특별했다. 청대의 빙희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형식을 갖춘 일종의 빙상 전투훈련이자 군주의 참관 하에 진행된 빙상 사열이었다. 청대에 빙희는 ‘국속'(國俗)으로 일컬어졌고 청조의 법규집인 《대청회전(大淸會典)》에 그 격식이 기록되었다. 다시 말해 빙희는 국가적 차원에서 제도화된 행사였다.[53]

빙희는 매년 겨울 음력 12월 8일 경에 주로 북해(北海)에서 열렸다. 빙희를 개최하기 전날 밤에 검사관이 북해의 얼음이 단단하게 얼었는지 검사했다. 얼음을 파고 깨뜨려봐서 그 소리가 돌을 치는 것처럼 단단하게 들리면 다음날 예정대로 빙희를 개시했다. 빙희에 스케이트 선수로 선발된 팔기 병사들의 수는 팔기의 각 기에서 200명씩, 총 1600명 정도였다. 이들은 팔기 가운데 자신이 소속된 기의 색과 일치하는 색의 옷을 입고 무릎에는 보호대를 대고 스케이트 날이 장착된 가죽 스케이트화를 신었다. 당시의 스케이트화는 단순해서 나무판 아래에 살짝 휘어진 형태의 강철 칼날을 붙이고 가죽신 아래에 묶으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빙판 위에는 세 개의 문이 설치되었다. 이 문은 깃발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문(旗門)이라고 불렸다. 기문의 도리에는 알록달록 선이 그려진 구체가 매달려 있었다. 이 구체는 선수들이 스케이팅을 하면서 을 쏘아 맞추어야 할 표적이었다. 빙판의 한쪽에는 군주의 화려하고 거대한 썰매가 있었다. 이 썰매가 일종의 사열대인 셈이다. 군주의 썰매 주위에는 팔기의 고위 관료들이 사열단으로 도열해 있었다.

빙희가 시행되는 날 아침에 군주가 호수에 도착하여 썰매에 자리잡고 앉으면 사방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빙희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면 황제의 썰매로부터 2~3리 떨어진 호숫가에 세워진 큰 깃발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여명의 선수들이 일제히 전속력으로 황제에게 활주해왔다. 이것이 당시 ‘창등'(搶等)이라고 불렸던 스피드 스케이팅이었다. 이들의 활주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자력으로 급정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군주 측근의 시위(侍衛)들이 이들을 잡아서 정지시켜주었다. 선수들은 활주를 멈춘 후에 군주에게 무릎꿇고 절을 했다.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게는 군주가 포상을 했다.

빙희에는 스피드 스케이팅인 창등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피겨스케이팅에 해당하는 ‘창구'(雜技)와 빙상 축구인 ‘잡기'(搶球)도 종목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피겨 스케이팅에서 선수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은 그림에서 보이듯이 등에 자신의 소속 기(旗)의 깃발을 묶은 기수(旗手)와 활을 맨 사수(射手)로 나뉘었다. 빙희가 시작되면 기수와 사수가 한명씩 번갈아가며 빙판으로 나아가 기문을 향해 활주하면서 각종 기술을 시연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스케이터의 자세가 제각각이다. 봉황이 날개를 펴듯이 두 팔을 펼친 봉황전시(鳳凰展翅) 자세, 뒤로 활주하는 과로기려(果老騎驢) 자세, 물 찬 제비처럼 팔을 벌리고 상체를 굽힌 후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는 연자희수(燕子戲水) 자세, 곧추 선 상태로 다리 하나를 들고 하나의 다리로만 활주하는 금계독립(金鷄獨立) 자세 등이 그림에서 보인다. 이 가운데 가장 난이도 높은 자세는 현대 피겨 스케이팅의 스파이럴 기술에 해당하는 연자희수였을 것이다. 선수들은 피겨 스케이팅을 펼치면서 기문에 매달린 구체를 표적으로 활을 쏘았다. 만주족이 말을 타며 활을 쏘는 것을 만주어로 냠냠비(騎射, 만주어: ᠨᡳᠶᠠᠮᠨᡳᠶᠠᠮᠪᡳ Niyamniyambi)라고 했다. 피겨 스케이팅의 활쏘기는 욱상의 ‘냠냠비’가 얼음판 위로 옮겨 온 것이었다. 피겨 스케이팅에서 우수한 스케이팅 기술과 활쏘기 능력을 선보인 자는 스피드 스케이팅과 마찬가지로 포상을 받았다.

가경기 이후 빙희는 건륭기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과 전투훈련으로서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점차 황실의 오락성 겨울놀이로 쇠퇴해갔다. 동시에 황실과 만주족의 빙희 문화가 차츰 민간으로 유행되어갔다. 청 제국 서태후 시기에 황실의 후비(后妃)들과 왕부(王府)의 부인들 사이에 썰매타기가 유행이었는데 썰매의 호화스러움이 심했다. 일반 백성들도 호화스러운 썰매는 아니었지만 썰매를 즐기게 되었다.

청대 만주족의 스케이팅 관습은 1911년, 신해혁명과 함께 청 제국이 와해된 후에도 여전히 겨울철 오락으로 유지되었다. 신해혁명 후에 중화민국의 북경시민이 된 만주족은 겨울이 되면 종종 조양문(朝陽門)에서 출발하여 얼어붙은 수로를 따라 활주하여 이갑(二閘)을 지나 로하(潞河)로 진입해서 북경의 동남쪽 교외 통주(通州)까지 가서 그곳 특산인 삭힌 두부를 한 사발 사들고 북경으로 돌아오곤 했다. 북경시내에서 통주까지 거리가 대략 20km 정도이니까 빙상으로 마라톤을 즐긴 셈이다. 청대에 매년 빙희가 열렸던 북해(北海)는 청 제국이 멸망한 후 1925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겨울이면 스케이팅을 즐기는 북경시민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청대 만주족의 동계 행사인 빙희가 열렸던 북해는 현재 북해공원이 되어 겨울이면 스케이팅을 즐기는 수많은 북경시민으로 붐비고 있다.[54]

더 보기[편집]

각주[편집]

  1. 孟森. 《清史讲义》. 中华书局. 7~8쪽. ISBN 9787101069457. 
  2. (http://www.chinabang.co.kr/minzu/man.htm 중국의 어제와 오늘)
  3. 阿桂等 (1988). 《《满洲源流考》》. 辽宁民族出版社. 2쪽. ISBN 9787805270609. 
  4. 佟永功, 「功在史冊, 滿語滿文及文獻」, 『圖文幷茂的〈滿洲實錄〉』
  5.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 南朝誤名建州。
  6. 《만주실록(滿洲實錄)》, 其國定號滿洲乃其始祖也【南朝誤名建州】
  7. 趙展, 《對皇太極所謂諸申的辨正》
  8. 馮繼欽,「靺鞨族共同體類型及其特征初探」『北方文物』1986
  9. 童萬崙,「白山靺鞨族考」『北方文物』1986
  10. 《族称manju词源探析》,长山作,刊载于《满语研究》, 2009년, 1쪽
  11. 청대 동가강(佟佳江, 만주어: ᡨᡠᠩᡤᡳᠶᠠ
    ᡠᠯᠠ
    Tunggiya Ula)
  12. 陳鵬, 「“滿洲”名稱述考」, 『民族研究』, 2011, 제3기
  13.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4쪽. ISBN 9788994606514. 
  14. 이훈(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49~157쪽
  15. Pemela Kyle Crossly, 《만주족의 역사》, 돌베게, 339~340쪽
  16. Pemela Kyle Crossely, A translucrnt mirror: history and identity in Qing imperial ideilog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9, 194쪽
  17. 牛素嫻(2006), 清初的「索倫」諸部 솔온(索倫, 만주어: ᠰᠣᠯᠣᠨ Solon)은 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솔론어를 사용하는 어웡키족의 한 갈래로 어웡키족, 다우르족, 오로촌족의 총칭이기도 했다.
  18. 萬侖, 1987, 淸代庫雅喇滿洲硏究 民族硏究 , 96~97쪽, 쿼르카(庫爾喀, 만주어: ᡴᡡᡵᡴ᠋ᠠ Kūrka)와 쿼야라(庫雅喇, 庫雅拉, 苦雅拉, {{llang|mnc|ᡴᡴᡡᡟᠠᡵᠠ)는 같은 부족을 가르키는 다른 이름이며, 이들은 원말명초 골간올적합(骨看兀狄哈)의 후예로 청대에 훈춘으로 이주한 뒤, 팔기에 편입되어 '쿼야라 만주'로 불리었다.
  19. 增井寬也, 1989, クルカKūrkaとクヤラKūyala-淸代琿春地方の少數民族 立命館文學 514쪽, 쿼르카와 쿼야라는 다른 부족인데, 쿼르카는 숭덕연간에 얀추 지방(炎楮地方)에 거주하다가 순치연간에 훈춘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가르키는 반면, 쿼야라는 얀추와 혼춘 지방에서 멀리 우수리강 상류에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르켰다. 강희 10년에 이르러 쿼르카는 대부분 혼춘을 떠났고, 대신 우수리강 유역의 쿼야라가 길림 울아의 주방 팔기에 편입되어 '쿼야라 만주'로 분류되어 훈춘에 배치되었다. 훈춘의 쿼야라 만주가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명칭대로 쿼르카라고도 불리면서 쿼르카와 쿼야라가 같은 부족으로 여겨졌지만,실제로 많은 쿼야라 중에 훈춘에 거주하는 쿼야라만이 쿼르카라고 불린 것이다.
  20. 劉小萌, 「關於淸代“新滿洲”的幾個問題」, 『滿族研究』, 1987年 第3期.
  21. 한중관계연구소(2017) ,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2장(『허저족의 기원과 역사』), 59쪽
  22.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제4장 청 제국과 러시아, 민음사, 216쪽
  23. Pamela Kyle Crossley 「신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윤영인 편, 『외국학계의 정복왕조 연구 시각과 최근 동향』, 동북아역사재단, 2010
  24. 구범진,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제4장 청 제국과 러시아, 민음사, 216쪽
  25. 劉小萌, 「關於淸代“新滿洲”的幾個問題」, 『滿族研究』, 1987年 第3期.
  26. 이훈(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7~158쪽
  27. Pemela Kyle Crossly, 《만주족의 역사》, 돌베게, 322쪽
  28. 이훈(2018),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157~158쪽
  29. 마크 C. 엘리엇, 이훈·김선민 역, 《만주족의 청 제국》, 푸른역사, 2009, 355쪽
  30. 한중관계연구소,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4장(『사회조직과 지도자의 역할』), 2017, 81쪽
  31. 한중관계연구소,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4장(『사회조직과 지도자의 역할』), 2017, 83쪽
  32. 한중관계연구소, 「아무르강의 어렵민, 허저족」, 『청아출판사』 4장(『사회조직과 지도자의 역할』), 2017, 85쪽
  33. 金启孮 (2009). 《金启孮谈北京的满族》》. 中华书局. 109쪽. ISBN 9787101068566. 
  34. 爱新觉罗瀛生 (2004). 《满语杂识》. 学苑出版社. 973쪽. ISBN 9787800600081. 
  35. 弘昼等 (2002). 《八旗满洲氏族通谱》. 辽海出版社. 31, 100, 115, 167, 181, 280쪽. ISBN 9787806691892. 
  36. 脱脱等 (1975). 《金史》. 中华书局. 2896쪽. ISBN 9787101003253. 
  37. 刘小萌 (2008). 《清代八旗子弟》. 辽宁民族出版社. 165~166쪽. ISBN 9787807225638. 
  38.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ISBN 9788994606514. 
  39. 孙文良 (1990). 《《满族大辞典》》. 辽宁大学出版社. 617쪽. ISBN 9787561008645. , "애신각라씨(愛新覺羅氏), 만족의 성씨로, 나중에 한자 성인 김(金)·조(趙)·조(肇)·라(羅)·애(艾)로 바꿨으며 대대로 요령성 신빈현 일대에서 살았다
  40.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ISBN 9788994606514. 
  41.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ISBN 9788994606514. 
  42.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85~87쪽. ISBN 978-89-6187-305-5. 
  43. China News (originally Beijing Morning Post): Manchu Classes in Remin University (Simplified Chinese)
  44. “UNESCO 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 2015년 10월 27일. 
  45.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71~72쪽. ISBN 978-89-6187-305-5. 
  46.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105쪽. ISBN 978-89-6187-305-5. 
  47.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103쪽. ISBN 978-89-6187-305-5. 
  48. 윤은숙ㆍ연규동ㆍ장준희ㆍ최준ㆍ김선자ㆍ김정열ㆍ장석호ㆍ박소현ㆍ김주용. 《만주 이야기》. 동북아역사재단. 112~114쪽. ISBN 978-89-6187-305-5. 
  49.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52~253쪽. ISBN 9788994606514. 
  50.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54~256쪽. ISBN 9788994606514. 
  51.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56~258쪽. ISBN 9788994606514. 
  52.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58~259쪽. ISBN 9788994606514. 
  53.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43~247쪽. ISBN 9788994606514. 
  54. 이훈. 《만주족 이야기》. 너머북스. 247~251쪽. ISBN 9788994606514. 

참고 자료[편집]

  • 이성호 (1985년). 《古代 滿洲族의 硏究》. 淸州大學校. 
  • 김재선 (1998년). “韓民族과 滿洲族의 淵源 연구(The study of the origin of Han people and Manju people)”. 《大眞論叢》. Vol.6. 
  • 徐大錫 (1992년). “한국 신화와 만주족 신화의 비교 연구”. 《古典文學硏究》. Vol.7. 
  • 임계순(任桂淳) (2000년). “청사 -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淸史- 滿洲族이 통치한 中國)”. 《中國史硏究》. Vol.11 (No.1).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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