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난의 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정난의 변
날짜 1399년 8월 8일 ~ 1402년 7월 13일
장소 화베이 평원
결과 연나라의 결정적 승리.
교전국
연왕 황제군
지휘관
연왕 주체 건문제
병력
120,000 500,000
피해 규모
불명 불명
Jingnan Campaign (English).svg

정난의 변(靖難之變)[1]영락제가 제위를 건문제로부터 탈취한 사건을 말한다. 1399년 8월 6일 건문제 원년에 발생하여 4년간 지속되었다.

정난의 변[편집]

1398년에 할아버지인 주원장이 71세를 일기로 붕어하자, 주윤문이 22세로 명나라의 제2대 황제로 오르니 이가 혜종 건문양황제(惠宗 建文讓皇帝)이다. 건문제는 제일 먼저 할아버지 주원장의 유지에 따라 숙부들에게 남경으로 문상을 오지 말라 하였다. 또한 너무나 커져있던 숙부들의 세력을 끊으려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왕 주체를 필두로 한 번왕, 즉 건문제의 숙부들과 사촌들은 이에 반발하며 주체를 중심으로 몰래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부에 대항할 방책을 세우고 있었다. 건문제는 이에 대해 세가 약한 번왕들을 수도인 남경으로 은밀히 불러들여 체포한 후, 유배를 보내거나 죽여버렸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연왕 주체는 건문 1년인 1399년에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정난의 변'(靖難之變)이다.

초기 연왕은 승승장구하여 이경륭이 이끄는 황제군을 박살내면서 제남에 이르렀지만 산동참정 철현이 제남성에서 3개월동안 영왕군을 맞이하여 필사적으로 버티었고 그 사이 황제군 20만명이 후방인 덕주를 함락하자 후방의 포위를 염려한 연왕은 결국 병력을 후퇴시킬 수 밖에 없었다.그 뒤 3년동안 대부분의 전투에서 연왕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건문제의 세력은 중국 그 자체였다. 연왕이 아무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황제군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충원되었고 초한전쟁의 항우처럼 전투에서 승리해도 전쟁에서는 결국 지는 결과만이 기다리는 것 같았다. 결국 1402년 음력 4월 황제군은 소하에서 연왕군을 대파하는데 상황이 어려워지자 대부분의 연왕의 장수들이 철수를 제의하지만 연왕은 결사코 거부하였다. 그런데 이 때 황제에게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지는데 연왕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황제는 사령관 서휘조를 남경으로 불러들이는데 용병술에 능한 연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치고 들어가 대치중이던 황제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연왕은 그대로 남경까지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연왕의 남진은 번개같이 이루어졌는데 대패하여 절망적 상황에 빠진것이 4월이었는데 한달동안 요동에서 구원온 병력과 대치중이던 황제군을 박살내고 5월에 양주를 함락시키더니 6월에는 무려 장강을 건너버렸습니다. 당황한 건문제는 연왕의 사촌누나를 보내 협상을 제의하면서 지연전을 펼치면서 병력을 끌어모을려고 하였고 잠시 승리를 거두기도 하나 죽기살기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여 단숨에 남경까지 내달리는 연왕의 병력을 결국 막지못하였고 1402년 7월, 연왕 주체는 결국 수도 남경성을 포위하였고 결국 함락시켰다. 건문제는 남경의 궁전에 불을 질렀고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해지나 결국 그 시체는 찾지 못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얼마 뒤, 연왕 주체는 황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이다.

배경[편집]

건문제 주윤뮨(재위:1398년-1402년)

명 건국 후,명 태조 주원장은 천하통일 후 제실의 평안을 기도하여 창업 공신을 배제함과 동시에 종실의 황자들 25명을 전국 요소에 영주로 봉했다. 그것도 세록을 지급할 뿐, 지방 백성에 대한 지배권은 주지 않았다. 그러나 대 몽골 관계로 인해서 북방의 아홉 제후들(요왕 주식, 녕왕 주권, 연왕 주체, 곡왕 주혜, 대왕 주계, 진왕(晉) 주강, 진왕(秦) 주상, 경왕 주전, 숙왕 주영)에게는 더 많은 병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세력이 강한 자가 나타났고, 그 중에서 현재의 북경인 북평에 분봉된 연왕 주체의 세력은 강대해졌다. [2]。 홍무제 주원장의 태자 주표는 요절하였기 때문에 후계자로 내정된 것은 주표의 아들이자 주원장의 손자인 혜제(건문제)였다. 홍무 31년(1398년)윤달 5월 10일 태조 주원장이 죽자, 건문제가 16세로 즉위하고 가까운 신하들의 말에 따라 주원장의 집권 정책을 계승하여 여러 영주들을 비롯한 지방 제후들의 권력을 축소시키는 억압책을 취했다. 특히 그들이 지닌 군사력을 감축시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3] 당시 북방민족을 평정하면서 가장 큰 세력을 구가하고 있던 연왕 주체는 이 기도를 알자 "임금 옆의 간신을 제거하여 제실의 위난을 평정한다"고 하면서 북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4년간의 내전 끝에 1402년 건문제 4년 7월 13일 남경을 함락시키고 건문제가 실종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가 곧 성조 영락제이며 간신을 몰아내고 제실의 난을 다스린다는 명목을 들어 스스로 이 사건을 ‘정난’(靖難)이라 일컫고, 그 군사를 정난사(靖難師)라 불렀다.[4][5][6]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中国大百科全书》2009年第二版第12卷175頁英译作 Jingnan Campaign
  2. 每位親王都有三護衛,明制每衛約五六千人,故合計不超過一萬九千。駐守北方邊境的九位邊王軍權更大,如寧王“帶甲八萬,革車六千”.《明史》卷七:寧獻王權,太祖第十七子。洪武二十四年封。逾二年,就藩大寧。大寧在喜峰口外,古會州地,東連遼左,西接宣府,為巨鎮。帶甲八萬,革車六千,所屬朵顏三衛騎兵皆驍勇善戰。權數會諸王出塞,以善謀稱。
  3. 《明史》卷三:遺詔曰:「朕膺天命三十有一年,憂危積心,日勤不怠,務有益於民。奈起自寒微,無古人之博知,好善惡惡,不及遠矣。今得萬物自然之理,其奚哀念之有。皇太孫允炆仁明孝友,天下歸心,宜登大位。內外文武臣僚同心輔政,以安吾民。喪祭儀物,毋用金玉。孝陵山川因其故,毋改作。天下臣民,哭臨三日,皆釋服,毋妨嫁娶。諸王臨國中,毋至京師。諸不在令中者,推此令從事。」
  4. 甚至燕王朱棣已經前來奔喪,卻被惠帝命令返回,導致諸王不滿。惠帝於是與齊泰黃子澄商量開始削藩.《明通鑑》卷十一:至是燕王自北平奔喪,援遺詔止之,於是諸王皆不悅,流言煽動,聞于朝廷。謂子澄曰:「先生憶昔東角門之言乎?」對曰:「不敢忘。」於是始與泰建削藩之議. 朱允炆繼位後開始削藩。在削藩順序上,齊泰認為應先削實力最強的燕王,時戶部侍郎卓敬亦上疏請改燕王封地於南昌
  5. 《明鑑綱目》卷一:(洪武三十一年)六月,戶部侍郎卓明請徙封燕王棣於南昌,不聽。
  6. 但黃子澄反對,認為燕王有功無過,爲了爭取輿論支持,應該先找有問題的親王下手。惠帝支持黃子澄,遂先後廢除五位親王。洪武三十一年七月,削周王。因周王是燕王同母兄弟,而朱允炆怕他與燕王呵成一氣,於是決定先廢周王。時周王次子朱有爋告發父親謀反,於是派曹國公李景隆以備邊之名經過開封,將周王全家押回南京,廢為庶人,遷往雲南蒙化.《明鑑綱目》卷一:乃命曹國公李景隆以備邊為名,猝至開封,圍王宮,執之以歸。……乃廢橚為庶人,竄蒙化。諸子皆別徙。

참고 자료[편집]

  • 명사》 본기제4, 제5, 열전제14, 32, 33
  • 陳時龍、許文繼,《正說明朝十六帝》
  • 張宏杰,《大明王朝的七張面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