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삼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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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은 명나라 만력 연간에 일어난 3개의 전쟁을 가리킨다. 3개의 전쟁은 명 신종 만력 20년부터 28년 사이(서기 1592년 ~ 1600년)에 서북, 동북, 서남 변경지역에서 발생한, 몽골족 보바이의 반란과,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을 침공하였던 임진왜란, 그리고 묘족 토사 양응룡의 반란이다. 명나라는 비록 3개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극심한 국력을 소모하였다.

  • 서북지역, 오르도스보바이의 난은 1592년(만력 20년) 2월 18일부터 9월 18일까지 이어졌다.
  • 동북지역, 임진왜란은 1592년(만력 20년)에 발생한 임진왜란과 1597년(만력 25년)에 재발하여 1598년(만력 26년)까지 이어진 정유재란을 가리킨다.
  • 서남지역, 양응룡의 난은 1599년(만력 27)부터 1600년(만력 28년)까지 이어졌다.

보바이의 난[편집]

보바이(哱拜)는 원래 몽골족 사람으로 가정 연간(1522-1566)에 명나라에 항복하였으며, 이후에 공을 쌓아 도지휘(都指揮)에 올랐다. 만력 연간에 유격장군(遊擊將軍)에 올랐으며 영하 지역을 관장하였다. 만력 19년 몽골족이 침입하자 보바이는 스스로 3천명을 이끌고 구원을 하겠다고 청하였다. 금성(金城)에 도착하여 몽골족의 침입을 수습하고 병력을 흡수하여 세력이 커지자 독립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순무 당형(黨馨)이 이를 알고 제지하였지만 만력 20년 2월 18일 반란을 일으켰다. 보바이는 당형 등을 죽이고 총병관 장유충(張惟忠)을 협박하여 당형이 “식량을 착복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상주하게 한 다음 다시 장유충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군대를 보내 중위(中衛), 광무(廣武), 옥천영(玉泉營), 영주(靈州) 등을 점령하였으며, 몽골족의 족장들을 회유하여 협력을 받아내려고 하였다. 3월 4일, 부총병 이후(李昫)가 반란을 진압하려고 하였으나 보바이는 몽골족의 지원을 믿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명나라가 마귀(麻貴)를 보내 몽골족을 공격하고 지원을 차단하였다. 4월 다시 이여송(李如松)을 영하총병(寧夏總兵)으로 삼고 진압작전을 총괄하게 하였다. 7월, 마귀 등이 몽골족의 근거지를 불태웠으며 섭몽웅(葉夢熊)의 통솔 아래에 영하성을 포위한 다음 수로를 터뜨려 성을 물에 잠기게 했다. 보바이 등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끊기고 성안이 잠기고 식량이 끊기자 서로 죽이고 배신하여 투항하려 하였다. 이여송이 성문을 돌파하고 보바이의 저택을 포위하자 보바이는 자살하고 그의 아들 등은 포로로 잡혔다. 이로써 보바이의 난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임진왜란[편집]

임진왜란은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 하며,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혹은 항왜원조전역(抗倭援朝戰役)이라고 부른다. 전국시대를 거치며 일본을 사실상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1592년(만력20),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에게 명령하여 조선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부산(釜山)을 침공한 뒤 북상, 수도 한양(漢陽)을 점령하고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평양(平壤)을 차지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피난하였으며, 명나라에게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하여 1차로 유격(游擊) 사유(史儒)가 이끄는 군대를 보냈으나 병력이 부족하여 사유는 전사하고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만이 살아남아 도망쳤다. 명나라는 다시 2차로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구원하게 했다. 이여송의 군대는 평양을 공격하여 고니시의 군대를 격파하고 평양을 회복하였으나, 무리하게 진군한 결과 개성(開城) 부근에서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군의 담판 결과 일본군은 한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1597년(만력 25) 일본군이 재차 조선을 침공하자 만력제(萬曆帝)는 마귀(麻貴)를 비왜대장군(備倭大將軍)으로 임명하고 일본군을 상대하게 하였다. 이듬해 2월, 명나라의 군대는 병력을 4개로 나누어 중앙에 동일원(董一元), 동쪽에 마귀, 서쪽에 유정(劉綎), 수군은 진린(陳璘)이 맡았다. 이 중 진린이 이끄는 수군은 조선의 이순신과 협력하여 고니시의 부대와 대치하였다.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하였다. 명나라와 조선의 수군은 노량(露梁)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조선의 이순신과 명나라의 등자룡(鄧子龍) 등이 전사하였다. 명나라의 군대가 참여한 주요 전투로는 평양성전투, 직산전투, 노량해전 등이 있다.

양응룡의 난[편집]

파주(播州)(오늘날 중국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일대)는 사천(四川), 귀주(貴州), 호북(湖北)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지형이 험준한 산악지역이었다. 당나라 시기에 양단(楊端)이 이 지역을 차지한 이후 양씨가 계속해서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아 이 지역을 다스렸다. 명나라가 일어서자, 양갱(楊鏗)이 명나라에 항복하여 파주선위사사(播州宣慰司使)에 임명되었다. 만력 초기에 양응룡(楊應龍)이 파주선위사사에 올랐는데 위세가 대단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마침내 만력 17년(1589) 반란을 일으켰다. 명 조정에서는 양응룡의 반란 초기에 방침을 분명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다. 때문에 양응룡은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자신의 죄를 사면해줄 것을 요청하는 동시에, 다른 묘족(苗族)을 회유하여 사천, 귀주, 호광(湖廣) 등의 요새 수십 곳을 공격하게 하였다. 만력 26년(1598) 사천순무(四川巡撫) 담희사가 양응룡의 공격을 방어하였고 만력 27년(1599) 귀주순무(貴州巡撫) 강동지(江東之)가 양국주(楊國柱)를 시켜 반란을 진압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양국주가 전사하였다. 명 조정에서는 강동지를 파면하고 곽자장(郭子章)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고 이화룡(李化龍)을 병부시랑(兵部侍郎)에 임명하여 반란의 진압을 총괄하게 하였다. 만력 28년(1600) 대군이 결집하였고 2월 총독(總督) 이화룡의 지휘 아래 명나라 군대가 진격을 시작하였다. 유정(劉綎)이 이끄는 군대가 양응룡의 부대를 격파하였으며 4월, 양응룡이 묘족 군대를 이끌고 결사항전을 준비하였으나, 다시 유정 등이 이끄는 부대가 이를 격파하고 양응룡의 본거지를 포위하였다. 6월 성이 함락되자 양응룡은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알고 자살하였으며 그의 아들은 포로로 잡혔다. 명나라의 군대가 파주를 점령한 뒤 그 땅을 나누어 준의(遵義)와 평월(平越)의 두 부(府)로 나누고 각각 사천과 귀주에서 다스리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