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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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전쟁(阿片戰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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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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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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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 전쟁(阿片戰爭, 영어: Opium Wars)은 19세기 중반에 청나라와 대영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두 전쟁에서 청나라가 완패함으로써 중화사상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제1차 아편 전쟁[편집]
1840년에 일어난 제1차 아편 전쟁은 중국의 아편 단속을 원인으로 하여 영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전쟁 발발 당시 영국에 대한 중국의 최대수출품은 차(茶)였고, 영국의 주요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였다. 양국의 무역수지는 중국의 수출초과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차 수입을 결제할 은(銀)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하였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중국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아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들로 인해 '동방의 병든 남자'라는 뜻의 동아병부(東亞病夫)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청나라는 임칙서를 내세워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치고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냈다.
영국은 청나라의 아편 단속에 반발하며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1842년에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난징조약이 체결되었다. 난징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섬을 할양받고,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다섯 개 항구를 강제적으로 개항시켰다. 이로 인해 홍콩과 마카오가 좌측통행을 하게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제2차 아편 전쟁[편집]
1856년에 일어난 제2차 아편 전쟁, 일명 애로호 전쟁은 제1차 아편 전쟁 이후 청나라의 개방이 기대에 못 미치자 영국이 청나라가 애로호의 영국국기를 배에서 내린 애로호 사건을 구실로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여 일어난 전쟁이다.
광대한 영토를 가진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영국의 무역은 생각만큼 확대되지 못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면포는 영국의 주력 수출품인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에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다. 게다가 제1차 아편 전쟁으로 광둥을 중심으로 대영(對英)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에 영국은 중국인 소유의 영국 해적선 애로호를 빌미로 한 애로호 사건을 일으켰다.
영국은 프랑스와 구성한 연합군으로 광저우를 침략하여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고, 이와 동시에 러시아군도 청나라 영토로 진격했다. 연합군은 톈진을 점령하여 불평등 조약인 톈진 조약을 맺었다. 톈진조약은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고 개항 항구를 확대하며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청나라는 이때 기독교 공인도 약속해야 했다.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텐진조약 체결 후에도 청나라의 후속 조치가 미진하자 진격을 계속해 1859년에 수도 베이징 근처까지 이르렀고, 1860년에는 별궁인 원명원을 약탈하였다. 결국 베이징 함락 후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베이징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