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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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
𑀅𑀲𑁄𑀓
Indian relief from Amaravati, Guntur. Preserved in Guimet Museum.jpg
지위
Ashoka Chakra.svg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삼랏
재위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
즉위식 기원전 268년
전임 빈두사라
후임 다사라타 마우리아
재상 라다굽타
아반티 속주부황
재위 ? ~ BC 273년
이름
아소카 마우리아
별호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존호 차크라바르틴
신상정보
국적 마우리아 제국
출생일 기원전 304년
사망일 기원전 298년
왕조 마우리아 왕조
부친 빈두사라
배우자 카루바키
티슈야라크샤
파드마바티
아산디미트라
베디사 마하데비 샤캬쿠마리
자녀 티발라
쿠날라
차루마티
종교 불교
군사 경력
참전 칼링가 전쟁
참전기간 BC 268년 ~ BC 265년

아소카(𑀅𑀲𑁄𑀓, 산스크리트어: अशोकः 아쇼카)는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삼랏이다.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서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이며,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삼랏의 하나로서 전륜성왕(samrāṭ Chakravartin)으로 인용된다. 아소카는 수많은 군사 정복뒤에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아소카 시대 마우리아 제국은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동쪽으로는 인도의 아삼 주 남쪽으로는 미소레 주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곳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정리하였으며, 실론·타이·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총애하는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죽었으며,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생애[편집]

재위 이전[편집]

아소카는 기원전 304년에 빈두사라와 어느 브라만 여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아소카는 못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아버지인 빈두사라는 아소카를 멀리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인 수시마를 편애하였다. 한편 빈두사라 재위 도중 마우리아 제국에서는 반란이 자주 발생하였는데, 탁실라를 주도로 하는 웃타라파타(북부 속주)에서 반란이 대표적으로 이 지역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아소카가 웃타라파타 사람들이 이 속주를 담당하는 관리의 횡포로 인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안 후 그 관리에게 처벌을 내림으로서 평화적으로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탁실라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자신의 군대 또한 확장하였으며, 탁실라 인근에서 발생한 반란 또한 진압하며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후 기원전 273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을 직감한 빈두사라는 제국의 차기 군주로 아소카가 아닌 당시 웃타라파타 지역에 또다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부왕으로 파견된 수시마를 차기 군주로 지명한 후 한 신하에게 수시마를 불러와 황위에 앉히고 대신 이전에 웃타라파타에서의 반란을 진압한 전적이 있는 아소카를 다시 파견해 반란을 재진압하도록 명령하였지만, 이 반란 자체가 그 신하가 수시마에게 앙금을 품고 당시 우자인을 주도로 하는 아반티파타(서부 속주)에 부왕으로 파견되어 있던 아소카를 황위에 앉히기 위해 웃타라파타의 시민들을 선동하여 꾸민 자작극이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아소카는 수시마보다 먼저 파탈리푸트라에 귀환하였다. 귀환한 아소카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빈두사라를 찾아가 수시마가 아닌 아소카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설득하였고 이에 빈두사라는 분노하며 이를 거절하였지만, 이 일로 화병까지 겹친 빈두사라는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났고 아소카는 사실상 마우리아의 차기 황제가 되었다. 한편 반란을 진압하던 수시마는 이 소식을 들고 아소카가 있는 파탈리푸트라를 공격하였는데, 당시 마우리아 제국의 재상이었던 라다굽타파탈리푸트라의 동쪽 성문에다 여러 가지 기계 장치와 아소카의 동상과 군사들의 상을 만들고, 그 주위에 불구덩이가 덮어진 함정을 만든 후 수시마와 그의 군사들을 이쪽으로 유인해 함정에 빠뜨려 죽였다. 수시마 이외에도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대두하자 아소카는 4년에 걸쳐 99명의 이복 형제들, 자신에게 반대하는 500명의 신하들, 선왕인 빈두사라의 후궁들을 숙청하였으며, 4년후인 기원전 269년에 숙청 작업이 완료되자 대관식을 치루며 마우리아 제국의 3대 황제로 공식 즉위하였다.

재위 이후[편집]

아소카가 대관식을 치루던 당시 오디샤의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예로부터 교역에 유리한 항구들을 지녔던 칼링가 왕국은 강력한 해군을 동원하여 마우리아 제국의 주요 해상 무역로들을 차단하였는데,[1] 이로 인해 칼링가 왕국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아소카는 결국 대관식을 치룬지 1년뒤인 기원전 268년에 칼링가 정벌을 개시하였다. 초기에는 칼링가의 군대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소수의 군대만을 파견하여 칼링가군에게 패배를 겪었으나 이후 기원전 265년에 아소카가 직접 당시 보병 60만, 기병 10만, 코끼리 부대 9천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에 나섰고 칼링가의 입구인 마하나디강에 도착하였다. 이 강을 건너가던 도중 아소카는 칼을 강물에 빠뜨렸는데, 이를 본 군사들을 불길한 예감에 철군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아소카는 부하들의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고 군대의 사기를 독려시키기 위하여 더 공격적인 자세로 진군에 나섰다. 마침내 마하나디강의 지류인 다와강에서 마우리아군과 칼링가군이 마주치면서 전면전이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칼링가가 패배하며 칼링가는 마우리아 제국에 정복되었다. 이 전투로 칼링가군 10만명이 사망하고 칼링가인 15만명이 포로로 이송되었으며, 전투가 끝난 직후의 칼링가 마을에서 무수한 시체들과 고아가 된 아이들의 미쳐버린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은 아소카는 전쟁에 회의심을 가지게 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의 영토 확장을 중지하게 되었다.[2]

칼링가 전쟁이 끝난지 4년후인 기원전 261년에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는 "다르마에 의한 정복"을 표방하며 불교 기반의 통치를 시행하였는데, 마우리아 제국 전역에 약초 재배지, 정신병원, 동물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건설하였고 병원에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하도록 하거나 곡식을 매우 싼 이자에 빌려주는 등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시켰으며, 물이 없는 마을에 노동력을 동원해 우물을 파거나 제국의 영토 곳곳에 도로·관개(灌漑) 등의 공공사업을 시행하는 등 중앙 집권 체제를 발전시켰다. 특히 마우리아의 각 속주에 설치된 하위 행정 단위인 "아하라"(군현) 지역에 지방관직의 "프라데시카"와 토지 측정관직의 "라주카"를 5년 임기제로 지방에 파견시키는 제도를 실시하여 지방 행정을 더욱 체계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 통치에 부조리가 없는 지를 감찰함으로써 안정적인 통치를 꾀했다. 아소카는 황궁에서 가축의 도살을 금지시킨 후 동물의 도살과 사냥에 대해 규제하는 법을 반포하였으며, 이 외에도 강제노동을 금지하거나 불교 이외의 아지비카교, 브라만교, 자이나교, 바가바트교와 같이 제국에 존재하는 다른 종교들도 허용하며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다르마에 기초를 둔 불교 이념을 통치 정책에 반영하면서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리를 보관하는 불탑 또한 아소카 치세부터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석가모니 열반 직후 구성된 8개의 불탑에 안치된 사리를 꺼내 이를 고운 가루로 만들어 인도 전역에 8만 4000기의 불탑을 조성했으며, 이때 산치 스투파,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붓카라 스투파 등이 건설되었다.

아소카는 자신의 가르침과 사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구두 포고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의 동굴이나 석주에 규정들을 세긴 아소카 칙령을 선포한 후 이를 전국에 세웠다. 이 칙령들은 대부분 마가다 프라크리트어로 쓰였지만 그리스어, 아람어로도 쓰인 것들도 있는데, 이 칙령은 야바나인, 캄보자인. 간다라인들을 제국의 국경 지대에 사는 사람들로 언급하고 있으며, 아소카가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서부의 디아도코이 통치자들에게 불교 선교사들과 외교 사절을 보냈다는 것에 대한 언급도 담겨있다. 또한 칙령은 안티오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마가스 및 에피로스의 알렉산드로스 2세 등 당시 디아도코이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으며, 당시 마우리아 제국과 그리스 세계 사이의 거리(약 4,000 마일)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3] 이 아소카 석주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석주인 사르나트의 4사자 석주는 오늘날 인도의 국장으로 사용될 정도로 균형미와 기법의 정교함을 인정받고 있으며, 이 석주에 새겨진 법륜 문양인 아소카차크라는 오늘날 인도 국기의 정중앙에도 볼 수 있다. 아소카는 기원전 232년에 사망하였다.

종교 전파[편집]

스리랑카 불교에 미친 영향[편집]

스리랑카 불교는 기원전 3세기 데바남피야티샤왕이 집권하던 시절, 아소카 왕의 아들로 상좌부 불교의 장로인 마힌다가 아소카 왕의 명령으로 실론섬에 오면서 포교되었다. 데바남피야티샤왕은 바로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아누라다에 마힌다 장로를 위한 큰 사원(大寺: Mahavihara)를 세웠다. 이것이 바로 훗날 대사파의 기원이 된다. 대사의 창건은 상좌부불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현재의 남방상좌부 불교 모두가 마힌다의 대사 창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4]

기독교에 미친 영향[편집]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저술가인 윌듀란트(Will Durant)는 아소카 왕이 불교 선교사들을 인도의 모든 지역과 스리랑카,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까지 보냈으며, 아마도 이들이 기독교 윤리학(ethics of Christ)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5]

미국의 역사학자 케네스 스콧 라두렛(Kenneth Scott Latourette)에 따르면 예수가 태어난 시기에 "불교는 이미 인도, 실론(스리랑카), 중앙 아시아, 중국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6]

기원전 270년무렵 인도에서는 아소카 왕이 집권했다. 집권 이후에 그는 불교로 개종하였으며,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파견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아소카 왕은 그의 포교활동이 서방 국가에게 우호적으로 수용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토마스 복음서나그 함마디 텍스트(Nag Hammadi texts)는 이러한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믿는다.[7]

갤러리[편집]

각주[편집]

  1. Roy, K. (2015). Military Manpower, Armies and Warfare in South Asia. Warfare, Society and Culture. Taylor & Francis. p. 15. ISBN 978-1-317-32128-6. Retrieved 28 June 2019.
  2. Guruge, Ananda W. P. (1995). "Emperor Aśoka and Buddhism: Unresolved Discrepancies between Buddhist Tradition & Aśokan Inscriptions". In Anuradha Seneviratna (ed.). King Aśoka and Buddhism: Historical and Literary Studies.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ISBN 978-955-24-0065-0.
  3. Edicts of Ashoka, 13th Rock Edict, translation S. Dhammika.
  4. 김영고 동국대 교수, 남방불교의 어제와 오늘 - 남방불교의 略史[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월간불광 2008년 3월호
  5. Will Durant, The Story of Civilization: Our Oriental Heritage, Part One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35), vol. 1, p. 449
  6. Latourette, Kenneth Scott (1975). A History of Christianity. p. 274
  7. 민희식, 법화경과 신약성서, 블루리본, 2007

관련 항목[편집]

  • 불교와 기독교 - 예수가 태어날 당시, 그 지역에는 아소카 왕이 전파한 불교가 퍼져 있었다고 한다.

외부 링크[편집]

전 대
빈두사라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삼랏
기원전 273년 ~ 기원전 232년
후 대
다사라타 마우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