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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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왕국
ราชอาณาจักรไทย
Flag of Thailand.svg Emblem of Thailand.svg
국기 국장
표어없음
국가플렝 찻
Thailand on the globe (Asia centered).svg
수도방콕 북위 13° 45′ 08″ 동경 100° 29′ 38″ / 북위 13.752222° 동경 100.493889°  / 13.752222; 100.493889
정치
정치체제입헌군주제, 단일제, 의원내각제
국왕마하 와치랄롱꼰
총리쁘라윳 짠오차
역사
독립크메르 제국에서 독립
 • 수코타이 왕조
 • 아유타야 왕조
 • 딱신 왕조
 • 짜끄리 왕조
1238년1368년
1350년1767년
1767년1782년
1782년 4월 7일 - 현재
지리
면적514,000 km2 (49 위)
내수면 비율0.4%
시간대UTC (UTC+7)
인문
공용어태국어
통용문자태국 문자
인구
2015년 어림65,104,000명 (21위)
인구 밀도127명/km2 (59위)
경제
GDP(PPP)2012년 어림값
 • 전체$6,468억 (24위)
 • 일인당$10,152 (92위)
GDP(명목)2012년 어림값
HDI0.690 (103위, 2012년 조사)
통화 (THB)
종교
주류종교상좌부 불교
종교분포상좌부 불교 94%
이슬람교 5%
기독교 0.9%
힌두교 0.1%
기타
기년법불기
ISO 3166-1764, TH, THA
도메인.th
국제 전화+66
태국의 왕실 국가국가이다.

타이 왕국(태국어: ราชอาณาจักรไทย 랏차 아나짝 타이[*]) 또는 태국(泰國, 태국어: ประเทศไทย 쁘라텟타이[*])은 동남아시아말레이 반도인도차이나 반도 사이에 걸쳐 있는 나라이다. 동쪽으로 라오스캄보디아, 남쪽으로 타이만말레이시아, 서쪽으로 안다만해미얀마와 접해 있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오랜 독립국으로서 피식민지 경험이 없는 국가이다. 주요 도시로는 방콕, 치앙마이, 파타야, 깐짜나부리 등이 있다.

국호[편집]

태국(泰國)이라는 명칭은 타이(태국어: ไทย)를 중국어에서 '타이'라고 발음되는 한자 '泰'로 음역한 것으로, 타이 왕국(泰王國)의 준말이다. 태국의 정식 국호는 태국어쁘라텟타이(태국어: ประเทศไทย →자유의 땅)이다. 영어권에서는 타일랜드(Thailand)라고 표기하고 있다.

1939년 6월에 국호를 시암(태국어: สยาม 사얌[*], 음역어: 섬라(暹羅)/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타이로 고쳤다가, 1945년 9월에 다시 시암으로 되돌렸다. 1949년 5월 11일에 국호를 다시 타이로 고쳐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사[편집]

태국의 역사
ประวัติศาสตร์ไทย
Templo Wat Arun, Bangkok, Tailandia, 2013-08-22, DD 30.jpg

토착 문화[편집]

타이족이 인도차이나 반도에 남하하여 언제 현재의 태국에 정주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고 있지 않으나 태국에는 반치앙 문화 때부터 여러 다양한 토착 문화가 존재하여 왔다.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태국은 인도중국 그리고 이웃한 동남아시아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수코타이 왕국[편집]

수코타이 왕국 시대 만들어진 왓 마하탓의 불상

태국은 이전에는 캄보디아 왕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는데 12세기경부터 태국인의 토후국이 북부 태국에 할거하여 수코타이 왕조가 일어났다.

타이족으로 형성된 이 나라는 13세기 후반의 람캄행 대왕의 치정하에서 전성기를 맞아 오늘의 태국 대부분을 영토로 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람캄행 대왕메남 강 중·하류 지대를 합치고 말레이 반도의 일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원나라(元朝)와는 밀접한 관계를 가져 대왕은 스스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때 중국의 도공을 데리고 와서 이후 스완칼로크 자기로서 알려져 있는 태국의 도자기가 발달했다. 또한 미얀마에서 발달한 상좌부 불교(上座部佛敎)가 들어왔고, 캄보디아로부터는 예술 ·행정 조직에 영향을 받는 등 주위의 문화가 풍부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태국 자체의 민족 문화가 싹틀 무렵이기도 하여 타이 문자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람캄행 대왕의 사후 왕국의 세력은 쇠퇴하였고, 남쪽의 메남 강 하류지역인 아유타야를 수도로 하는 아유타야 왕조가 번성해갔다. 이 아유타야 왕조1347년수코타이 왕국을 정복하고 태국 전토의 통일을 꾀하였다.

아유타야 왕국[편집]

라마티보디 1세는 소승불교를 국가의 공식적인 종교로 지정하고 동시에 힌두의 법전인 다르마샤스트라나 태국에서의 관습을 바탕으로 법전(삼표법전)을 정비했다. 삼표법전은 근대적인 법전이 정비되는 19세기까지 태국의 기본 법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14 세기말까지 아유타야 왕조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하였지만, 동남아 지역을 완전히 압도할 만큼의 인구는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쇠퇴하고 있던 크메르 왕조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베트남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라마티보디는 말년 1362년 앙코르 왕조를 공격해 아유타야의 영토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러나 아유타야는 앙코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수코타이 왕국과의 관계는 수코타이가 아유타야에 조공을 바치는 형태가 되었지만, 그 후 100년 후에 아유타야 왕조가 수코타이를 병합해 수코타이 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유타야에 새롭게 흥한 스판나품 왕가와 수코타이의 왕가와의 인척 관계를 강화하여 그 후에도 수코타이 왕가는 명맥은 겨우 유지하게 된다.

아유타야 왕국 통치 기간 동안 나라이
아유타야 (시암), c. 1686
나라이 왕과 프랑스 예수회는 1685 년 롭 부리에서 월식을 관찰했다.
프랑스의 나라이 대표

15 세기에는 말레이 반도말라카 왕국이 아유타야의 고민거리가 된다. 말레이 반도에서는 말라카나 탄브라린가 이남의 말레이 반도 여러 도시가 15세기 초기부터 이슬람교으로 개종 하게 되어,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유타야는 말레이 반도 남부를 잃지만, 말레이 반도 북부를 계속 장악하여 고급품을 거래해온 온 중국 상인에 의해 국내의 경제는 활기를 유지하게 된다.

샴 버마 전쟁, 나레수안 의 코끼리 전투 (1584-1593).

한편, 서쪽의 버마는 지역의 패권을 노리며, 16세기경부터 집요하게 아유타야를 침략하여 아유타야의 골칫거리가 되게 된다. 버마 따웅우 왕조의 군주 바인나웅1569년에 아유타야 왕 마힌트라티랏을 패망시켰으나 나레수안 대왕에 의해서 아유타야는 재건되었다. 이후 버마가 내란에 휩쓸리면서 버마의 침공은 줄어들지만, 꼰바웅 왕조가 국력을 축적하게 되면서 아유타야는 다시 버마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는다. 결국 1767년에는 신뷰신에 의해서 아유타야 왕조가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때 아유타야의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버마군이 퇴각한 후 새롭게 왕이 된 딱신은 아유타야 재흥을 위해 차오프라야 강이 흐르는 톤부리 방면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태국의 독립과 짜끄리 왕조[편집]

찬타 부리에있는 큰 딱신 기념비, 탁신 왕의 동상과 그의 신뢰할 수있는 군인 4 명
지도는 톤부리 왕국. 딱신 왕의 통치 기간 동안의 지역을 보여줍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이 버마인들에게 무너졌고 중국계 장군 딱신 대왕이 곧바로 군대를 정비해 미얀마군을 무찌르고 태국의 독립을 회복하였다. 딱신 대왕은 1768년 방콕 건너편의 대방콕 일부에 속하는 톤부리를 도읍지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라오스·캄보디아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그의 뒤를 이어 부장 프라야 차크리(라마 1세)가 왕위에 올라 짜끄리 왕조1782년 도읍을 방콕으로 옮겼다. 이로써 태국 역사의 현 시기(랏따나꼬신 시기)가 시작되었다. 라마 1세(재위 1782년 - 1809년)는 태국의 세력을 크게 확장해 말레이반도의 켈란탄, 미얀마의 타보이까지 지배하였으며 아유타야왕조의 관행부활에 힘쓰고 옛 관례를 재구성하는 법전공포와 불교재흥에 힘썼다.

동남아시아의 유일한 독립 국가[편집]

왓 프라깨오, 라 타나 코신 시대의 건축

이와 같이 태국에서는 왕조가 4차례 바뀌었으며 현재는 짜끄리 왕조가 통치한다. 유럽 세력들은 16세기부터 태국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유럽 열강의 진출이 극심하여, 미얀마 등 주변국들이 프랑스대영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에도 태국은 독립국으로 계속 존속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나라이다. 이것은 19세기 태국에 매우 유능한 통치자가 오랜 기간 통치를 하였고, 프랑스대영 제국 사이의 경쟁 의식과 긴장감을 이용하는 정치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의 사회 개혁[편집]

나폴레옹 3 세는 1864 년 퐁텐 블로 궁전에서 샴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유럽의 학문과 기술 도입에 적극적이던 라마 4세(재위: 1851년 ~ 1868년)의 뒤를 이어 라마 5세 출라롱콘대왕(재위: 1868년 ~ 1910년)은 쇄국 제도를 풀고 개국하여 1855년 영국과 통상 우호 조약을 맺었다. 농노 제도와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사법·교육 제도를 근대화하는 한편 철도·통신 사업도 추진하였으며 사회의 모든 방면을 개혁하였다. 이러한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무역 이익을 위하여 주요 조계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태국은 영국에게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말레이 반도의 크다(Kedah)·프를리스(Perlis)·트렝가누(Terengganu)·클란탄(Kelantan)[1] 을, 프랑스에게는 메콩강 왼쪽 연안의 라오스를 떼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빠따니라 불리는 말레이 인종이 거주하는 나머지 지역[2]은 오늘날에도 태국의 영토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태국은 유럽의 2개의 식민 지배 권력의 식민지가 된 동남아시아에서 완충국으로 남게 되었다. 라마 4세 때 문호를 개방하였고, 라마 5세는 국가를 개혁하였다. 라마 5세는 지식인에게 해외 유학을 장려하였고, 관료로 삼았다.

제1차 세계 대전[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1917년연합국 편으로 참전하게 된다. 전후 승전국으로 처리되어 국제 연맹에 가입할 수 있었고,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태국의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1932년에 무혈 쿠데타, 즉 입헌 혁명이 일어나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뀌어 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송크람 대령이 이끄는 군부독재 정권이 국왕 라마 7세영국으로 추방하고 1992년까지 60년간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추축국에 가담을 하였으나 주미 태국 대사가 본국의 명령을 무시함으로써 패전국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태국은 1946년유엔(UN)의 회원국이 되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정당·정치도 실현되었다.[3]

냉전[편집]

부산에 도착한 태국군.

태국은 한국 전쟁(6·25 전쟁) 당시 유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1950년 11월 7일에 참전하였다. 이후 미군 다음으로 대한민국에 가장 오래 주둔한 국가이며 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출처 필요]

베트남 전쟁 당시 태국은 미군의 기지 역할을 했다. 이 기간에 미국의 경제, 문화적 영향력이 많은 태국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방콕의 유명한 환락가가 생긴것도 미군들의 수요 때문이다.

군부 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편집]

태국은 반공주의를 앞세운 군부 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쿠데타를 경험하였다. 1970년대 학생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민주화 요구와 좌우갈등이 심해졌다. 이념 갈등과 그로 인한 정치 혼란은 결국 1976년 탐마삿 대학교에서 최소 46명의 학생 시위대가 군과 우익 준군사 조직에 학살당하는 사건을 초래했다. 1987년 방콕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 이후로도 1991년에 수친다 장군의 쿠데타로 군부 독재 정권이 다시 연장되었고, 1992년 군의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방콕에서 최소한 50명이 사망하였다. 결국 라마 9세의 명령에 의해 수친다 장군이 사임하면서 정치적 민주화를 거두었다.

공산당[편집]

태국 내부에서도 공산당이 존재했다. 전성기에는 베트남에 이어 동남아시아에서 2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며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내분과 정부의 사면정책으로 쇠락했다. 지금도 공산당 활동은 불법으로 남아있다.

경제 기적과 위기[편집]

1980년대부터 태국은 저렴한 노동력으로 일본 등 선진국의 투자처로 떠올랐다. 태국 경제가 수출주도형으로 재편되면서 쌀등 전통적인 수출품이 공산품에 자리를 내주었다. 1985년1996년 사이 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태국을 강타하였고 태국의 화폐인 은 1 미국 달러 당 56밧까지 치솟았다(1997년 이전에는 대략 25밧이었다). 1998년 태국의 경제 성장률은 -10%까지 떨어졌지만 곧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해 국제 통화 기금(IMF)의 차관을 상환했다. 그 이후로 밧은 다시 평가절상되기 시작하여 2012년 12월 현재는 30밧 정도이다.

탁신 총리[편집]

2003 년 APEC 정상 회의 이전 푸틴 대통령과 탁신시나와 트라 전 총리

2006년에 손티 분야랏끌린 육군 총사령관이 해외를 순방하고 있던 탁신 친나왓 총리를 축출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2008년 탁신 세력인 팔랑쁘라차촌(국민의 힘;PPP)당이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싸막 쑨트라웻이 총리가 되었으나, 탁신 반대세력의 반발과 요리쇼 스캔들 등으로 인해 사임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태국에서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결과로 최소 27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다.[4] 태국은 왕당파 시위대(노란색 상징)와 반대파 시위대(빨간 셔츠 상징)로 인해서 혼란을 겪었으며, 한때는 옐로 셔츠 시위대가 공항을 점거하기까지 했다.[5] 태국에서 계속된 시위는 사법부가 반정부 시위대의 손을 들어주면서 끝났다.[6][7] 그리고 반정부 시위대도 공항 점거 농성을 끝내기로 결정했다.[8] 이후 새로 치러진 총선에서 신임 총리로 영국 유학파 출신 엘리트 이미지를 가진 민주당의 아피씻 웻차치와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탁신 세력을 지지하는 쓰어댕(레드 셔츠)세력들이 태국 전역에서 시위를 벌여 태국의 정국은 극심한 혼란을 빚게 되었다.[9]

잉락 친나왓 는 태국에서 총리가 된 최초의 여성이다.

2011년 새로 치러진 총선에서 사업가 출신의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새로 태국의 총리로 선출되었다.[10] 2013~2014년 태국 정치 위기2014년 태국 쿠데타로 친나왓이 쫓겨나고 군정 통치가 이뤄지고 있다.

자연 환경[편집]

지리[편집]

북부 산악지대
카오야이 국립 공원
태국 남부의 섬, 크라비.
태국 북부의 숲, 치앙마이.

국토의 면적은 51만4000km2로 세계 49위이다. 이는 프랑스미국캘리포니아주와 유사한 크기이다. 동남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태국은 자연 환경에 따라 크게 네 개의 지역 - 북부, 중부, 동북부 및 남부- 로 구분되며, 그 지역마다 여러 가지 특징을 보인다.

북부
북부는 높은 산악지대로 미얀마, 라오스와 접경한다. 비교적 시원한 기후이다. 남북방향의 높은 산맥이 줄지어 있으며, 태국 내 최고봉인 도이 인타논(2,576m)도 이 지역에 있다. 산맥 사이에 치앙마이·치앙라이·난·람빵 등 작은 분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하천 골짜기를 이용한 교통로가 예로부터 발달되었다. 주변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전통적 관개수리체계가 발달되어 태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집약적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코끼리들이 숲에서 일을 하고 겨울철 딸기나 복숭아와 같은 과일을 재배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동북부
동북부(이싼)는 거의 전역에 코랏 분지가 펼쳐져 있으며, 강우량이 적어 농작물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에 있고, 경제적인 빈곤이 문제가 되는 지역이다. 태국 중부 동쪽 끝은 페차분 산맥과 동파야디옌 산맥으로 갑자기 막힌다. 이 산맥들은 역사적으로 태국 중부와 태국 동북부를 갈라놓았는데, 산맥 서쪽은 가파른 산지이자 무성한 삼림지역이고 동쪽은 큰 대지로 태국 전국토의 약 1/3을 차지한다. 메콩 강에 접하고 있기도 하다. 기복있는 저지대는 논으로 만들어지고, 고지대는 소림(疎林)으로 덮였지만 인구증가에 따라 소림지역도 논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벼농사 외에 밭농사와 축산도 이루어진다.
중부
중부에는 짜오프라야 강이 형성한 광대한 짜오프라야 삼각주로 불리는 풍성한 평지가 퍼져,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수한 벼농사 지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짜오프라야 강은 국내 제일의 하천으로 중부의 교통의 대동맥이면서 생활과 농업 생산에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태국 중부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짜오프라야 삼각주는 구델타와 신델타로 나뉜다. 구델타는 예로부터 육지로 만들어진 땅이며, 장대한 자연제방과 습지로 인해 깊은 물에서도 잘 견디는 부도(浮滔)라는 벼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신델타는 아유타야로부터 해안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이며, 완전한 평탄지로 좀체로 물이 빠지지 않는다. 19세기 말부터 물길이 가로세로로 파여져 벼농사 경작지를 확장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취락도 형성하였으며 오늘날 태국 제1의 곡창지이다. 품질 좋은 과일도 이곳에서 많이 재배된다. 태국 중부 서쪽 끝은 다우나산맥으로 미얀마와 국경을 이룬다.
남부
대왕쥐가오리, 피피 국립 공원
남부는 말레이 반도의 일부를 차지하며, 대부분 산지이나 시암만쪽 동편에는 해안에 잇닿은 소규모 해안평야가 몇 곳에 형성되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파라 고무나무가 펼쳐져 있고, 최근까지 주석 채굴이 활발했다. 어업도 중요하다. 또, 우기가 중부보다 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태국 정부는 남부에 말레이 반도 대운하 계획을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 검토 중이다.[11]
위 4개의 지역에 아래 2개의 지역을 더하여 6개의 지역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12] :74
쿠이 부리 국립 공원에서 코끼리
동부 해안 지대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로 유명한 지역이다.
서부
수력 발전을 하기에 알맞은 서쪽의 산악지역과 계곡이다.

기후[편집]

다른 여러 동남아시아 나라와 마찬가지로 열대몬순 지대에 속한다. 수도 방콕에서 가장 더운 4월 평균 기온이 섭씨 29.5도이며, 가장 시원한 12월 평균 기온은 섭씨 25.3도이다. 연교차는 4.2이다. 이러한 단조로운 기후에 변화를 가져오는 게 몬순이다. 5월부터 10월까지 남서몬순이 부는 우기이며, 연간 강우량의 거의 전부가 이 시기에 쏠린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동북몬순이 불어 아시아 대륙의 건조한 대기의 영향을 받아 건조기가 된다.[13]

정치[편집]

태국 의회

민주주의[편집]

태국의 정치입헌군주제에 근거한 민주주의이다. 입헌군주제는 1932년 쿠데타에 의해 확립됐다. 2016년 서거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을 계승한 현 국왕은 마하 와치랄롱꼰이다.

2001년 포퓰리즘 성향의 탁신 친나왓이 압도적 표차로 총리가 된 후 그의 권위주의나 부패,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란으로 태국은 2차례의 쿠데타와 여러 시위를 겪었다. 농민과 도시빈민으로 구성된 탁신의 지지자는 레드셔츠라 불리고 국왕 및 왕실, 고위 관료, 군부, 도시 중산층으로 구성된 반대파는 옐로 셔츠라 불린다.[14]

2019년 최근 군부 쿠데타 이후 5년만에 총선이 치뤄졌지만 부정선거 의혹을 면하진 못했다.

쿠데타[편집]

태국은 1932년 쿠데타 후 현재까지 19차례나 쿠데타를 겪었다. 가장 최근의 쿠데타는 2014년 5월 20일 일어났다. 태국의 쿠데타는 폭력사태 없이 제도화 된 단계를 통해 일어난다고 평가받는다.[15]

민주주의 지수[편집]

2016년을 기준으로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는 4.92점으로 전 세계 100위이다. 결함이 있는 민주주의를 넘어서 비자유적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된다. 인도네시아(48위)나 필리핀(50위), 말레이시아(65위) 등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도 현저히 낮은 편이며, 사실상 독재국가로 분류되는 싱가포르(70위)보다도 낮다. 이는 태국의 심각하고 뒤쳐진 민주주의의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 구역[편집]

수도방콕 (끄룽텝)이며, 치앙마이핫야이 등의 주요 도시가 있다. 행정 구역으로는 위치 구분에 따라 5개의 지역(중부, 동부, 북부, 북동부, 남부)에, 76개의 짱왓(changwat)으로 나뉜다(태국의 주 참조). 중부에는 앙텅 등 19개, 동부에는 차층사오 등 7개, 북부에는 치앙마이 등 17개, 동북부에는 암낫짜른 등 19개, 남부에는 춤폰 등 14개의 짱왓이 있다.

대외 관계[편집]

러시아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 악수하는 라마 9세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태국의 여론은 친독일이었다. 일찍이 프랑스영국에는 많은 영토를 빼앗긴 적이 있었던 데 비해, 독일은 철도 개발에 도움을 주었고, 태국의 영토에 야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마 6세는 1914년 중립을 선포하고 전쟁이 종반에 이를 때까지 계속 중립입장을 고수하였다. 1917년 미국이 대독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 측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라마 6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다. 이와 같은 형식적인 참전이 태국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다. 파리 강화 회의(1919년)가 열렸을 때 태국은 전승국의 입장으로 참가하고 국제 연맹의 창설과 함께 정회원국이 되어(1920년) 불평등 조약을 갱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태국 외교는 이중 외교(dual diplomacy)이고, 주위 정세에 따라 유연히 흔들리는 대나무외교(bamboo diplomacy)였다.[16]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의 식민통치를 받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반공주의에 기초하여 미국과 적극적으로 친밀 관계를 맺어 많은 경제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데탕트를 계기로 공산주의 국가들과도 돈독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왔고, 대한민국과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다.

경제[편집]

방콕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방콕은 무역과 산업의 중심지이다.


개관[편집]

태국은 신흥공업국 중 하나이다. 태국은 1985년부터 1995년까지 연 9%에 가까운 성장률을 기록하며 세계적인 고율 성장기를 보낸 다음, 태국의 화폐 의 평가절하 압력을 받아오다가 1997년에 회복할 수 없는 재정적 약점을 보이고 정부가 환율을 변동환율제로 해야만 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밧은 오랫동안 미화 1달러 당 25밧에 안정되어 있었다가 1998년 1월에 56밧까지 가치가 떨어지고, 그 해에 경제 규모는 10.2% 수축하였다. 태국 은행의 붕괴는 더 큰 아시아 금융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태국은 1998년에 회복 국면에 접어들어 2000년에는 4.2% 확장되고 4.4% 성장하였는데 이는 같은 해에 20%나 증가한 수출 덕분이었다. 2001년 세계 경제의 약화로 성장은 그 기세가 꺾였다가 중국의 급성장과 "탁시노믹스"라고도 널리 알려진 탁신 친나왓 총리의 여러 가지 국내 경기 부양 정책으로 인하여 그 이후에는 경기가 좋아졌다. 2003년2004년의 경기 성장은 연간 6%를 상회하였다.[17]

태국의 연간 수출액은 1,525억 달러를 상회한다.(2007년)[17] 주요 수출 품목은 , 섬유, 신발, 수산물, 고무, 보석, 자동차, 컴퓨터, 가전제품 등이다.

중요한 산업으로는 전자 제품, 전자 부품, 컴퓨터 부품, 자동차가 있다. 또한 관광업은 태국 GDP의 5% 정도를 기여하고 있다.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들과 그들의 사업도 GDP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경제 주요 지표
(2017년)[출처 필요]
인구 68,863,514 명(2016년)
국내총생산 4,552억 달러(2017년)
1인당 GDP 6,593.82 달러(2017년)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 43.57%(2015년)
경제성장률 3.9%(2017년)
실업률 1.0%(2010년)
수출 1,525억 달러(2007년)
수입 2,019.37억 달러(2015년)
경상수지 148억 달러(2010년)
외환보유고 198.4억 달러(2018.06)
외채 522억 달러
세계적인 쌀 수출국, 타이

농업[편집]

농업은 태국의 주산업이며 그 중에서도 도작(稻作)은 국민생활의 기초이다. 쌀은 국민의 주식인 동시 제1의 수출품이기도 하다. 태국은 세계 제1위의 쌀 수출국으로서 매년 도정미 650만 톤을 수출한다. 농업은 태국 GDP의 약 1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의 약 4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쌀은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곡물이다. 태국은 메콩 강 유역의 나라 중 가장 높은 경지율(27.25%)을 보인다.[18] 이 중 55%는 쌀 경작지이다.[19] 주산지는 많은 소작농이 생산에 종사하고 있는 중부 삼각주지역이다. 쌀 다음으로 중요한 산물이 고무와 옥수수인데 역시 수출된다.

수산업[편집]

수산자원으로는 담수어가 압도적으로 많다. 하천, 운하, 호수에서 잡히는 어류는 국민의 필요 불가결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고 있다. 연안의 해양어업은 별로 발달해 있지 않다.[20]

공업[편집]

전에는 경공업이 약간 발달했을 정도로 외국 공업제품의 시장이었으나 1980년대 부터 외국자본의 도입으로 공업화를 이룩했다. 태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자동차 생산량이 많은 국가이고 컴퓨터, 통신기기등 전자산업도 발달했다. 제조업은 주로 외국기업의 기술에 의존한다.[20]

2012년 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245만 대로 전년 대비 68.3%의 성장률을 보임과 함께,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10대 자동차 생산국가에 진입하였다.

태국의 전자산업은 지난 30년 동안 꾸준히 성장을 해온 산업으로 600억 달러의 생산에 달하고 있으며 최근 자동차 산업의 성장 전까지 태국의 제1의 수출산업이었다. 다만, 핵심부품의 생산이나 원천기술 개발 능력은 부족하여 대부분이 OEM이다.

유통과 무역[편집]

화교의 활약이 없으면 경제가 마비될 정도로 화교가 유통기구를 독점하고 있다. 주요 수출상대국은 미국·네덜란드·싱가포르·홍콩·일본 등이다. 수입도 크게 달라져 소비재수입이 크게 줄고, 공업생산용 원재료·자본재·원유 등이 두드러지게 늘었다. 주수입 상대국은 미국·사우디아라비아·싱가포르·말레이지아·일본 등이다. 공업화에 필요한 원재료와 자본재수입이 급증해 농산물 수출액을 넘기 때문에 무역수지는 언제나 적자이다. 특히 대일 무역적자가 커져 해마다 무역마찰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무역수지적자는 관광수입과 외국으로부터의 송금과 민간투자·정부차관 등으로 메워진다. 특히 관광수입 증대와 더불어 아랍산유국으로부터 보내져 오는 노동임금이 많다.[20]

관광 산업[편집]

왓 아룬방콕; 태국은 또한 가장 중요한 국제 관광지 중 하나이다
해변, 끄라비주.

주요 산업은 관광업이다. 이 나라는 유명한 관광 명소들과 문화재로 인해 엄청난 수입을 올리고 있다. 태국의 관광산업은 국가 GDP에 10%에 이를 정도로 비중이 크다. 때문에 곳곳에 관광지와 유적지가 펼쳐져 있다. (관광지와 유적지에 대해서는 관광 참조)

태국을 찾은 관광객은 2012년 처음으로 2200만 명을 넘었으며 총 2230만 명이 찾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화폐[편집]

태국의 화폐 단위는 으로, 1밧은 100사땅(satang)이다. 지폐는 20, 50, 100, 500, 1000 밧이 있으며, 동전은 25, 50 사땅과 1, 2, 5, 10 밧이 있다. 전 권종에 모두 국왕이 그려져 있다. 사땅 동전은 보통 슈퍼마켓이나 편의점 등에서 간혹 사용되며 일반적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편이다.

주요 자원[편집]

주요 자연 자원으로는 주석, 천연 고무, 텅스텐, 천연 가스, 탄탈럼, 목재, , 물고기, 석고, 갈탄, 형석, 경작지, , 타피오카, 안티몬 등이 있다.

교통[편집]

교통에 있어서는 하천과 운하를 이용한 수운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부에서는 운하가 사방팔방으로 발달해서 사람과 물자의 수송에 이용되고 있다. 일찍이 방콕은 운하와 수로가 많아 수운이 발달하여, "동양의 베니스"라고 칭송받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그 대부분이 매립되어 도로가 되어 버렸다. 또한 태국 북부의 국경을 흐르는 메콩 강에는 2001년 6월에 타이, 라오스, 미얀마, 중화인민공화국 간에 메콩강 상선통항협정이 체결되어, 유역 각국 간의 통항로로 이용되고 있다. 태국의 철도는 국유회사인 타이국유철도가 4개 노선을 운영하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는 직결된다. 방콕에는 고가철도와 지하철도 개통되었다. 도로교통은 현재 급속한 발달 과정에 있다.[21] 국내 모든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기관으로서, 철도보다도 대량수송공사에 의한 버스 쪽으로 발달하고 있다. 도시 교통도 방콕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소형 트럭을 개조하여 만든 버스(썽태우)가 일반적이다. 수완나품 공항은 아시아의 허브 공항의 하나로서, 전 세계의 항공사들이 드나들고 있으며, 타이항공과 여러 저가 항공사들이 운항중이다. 대한민국인천, 일본나리타 등의 도시에는 타이항공, 대한항공, 일본항공 등이 운항하고 있다.

사회[편집]

주민[편집]

타이족이 75%로 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태국 주류에서 벗어난 여러 인종이 태국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다. 중국계가 18%, 기타 말레이족, 크메르족, 몽족, 고산족 등 나머지를 차지한다. 그 가운데 타이족은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에도 거주하고 있으며, 태국의 문화적 영향이 강하게 작용함에도 여전히 엄격한 전통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화교 또한 태국 사회, 특히 방콕 주변에서 특징적인 요소이다. 태국 사회로 성공적인 진입을 이룬 화교는 정치나 경제 권력을 가진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태국의 전 수상 탁신 친나왓이다. 그는 2001년부터 정권을 잡았으나 2006년 9월 19일 쿠데타로 축출당했다. 소수 민족으로는 화교 이외에도, 크메르족, 몬족, 말레이족, 산간부족(먀오, 야오, 라와, 리소, 무소, 카렌, 이코)이 있다.[3]

에이즈(AIDS) 확산[편집]

태국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에이즈 감염국이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동남아지역 중에서도 미얀마와 더불어 손꼽히는 에이즈 감염국이다. 또한 트렌스젠더나 미성년자를 통한 매매춘으로 악명을 떨쳤다. 1990년 10만명이었던 태국의 HIV 감염자는 3년만에 3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는 폭발적인 양상을 보였다. 2004년 기준 에이즈 감염인구가 57만명으로 세계 17위를 차지할 정도다. 현재는 퇴치정책으로 인하여 1%가량 줄이는데 성공하였지만 여전히 에이즈 감염도가 높은 국가다. 심지어는 태국 공무원 2만 명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말도 있다.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 승려들도 에이즈에 걸릴 정도라고 한다.

2016년 3월에는 단기 관광비자로 한국에 입국한 태국 여성이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이 됐는데, 해당 여성이 에이즈 의심환자로 알려졌고 2000명의 한국 남성과 성관계를 한 사실이 밝혀져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테러 문제[편집]

태국은 그동안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5년 방콕 폭탄 테러 사건으로 더 이상 안전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태국 도심지에서 일어난 테러로 현재까지 20명이 사망하고 125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폭탄 테러가 발생한 곳이 방콕 시내 관광지였기 때문에 상당수의 외국인들도 피해를 입어 사망자 20명중 7명이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2015년 2월에도 방콕 싸얌 파라곤 쇼핑 거리 근처의 라차프라송 스카이워크 바깥에서 두 개의 폭탄이 터져 2명이 부상당했던 적이 있었다.

범죄[편집]

태국에서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소매치기나 날치기 범죄가 주로 발생하며, 방콕의 유흥가 밀집 지역인 팟퐁, 나나 지역에서는 마약이 불법적으로 유통되기도 한다.[22] 태국의 국왕이나 왕실을 비방, 모독하는 불경죄를 범하면 태국 형법 112조에 따라 최저 3년에서 최고 15년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데[23][24] 이는 태국 국왕의 사진이나 초상을 훼손하는 것도 해당된다.[25]

교육[편집]

유치원[편집]

태국의 교육 제도는 유치원 제도가 이미 기본적으로 정착되어 왔으며, 초 중 고 대학교의 기본 학제가 한국과 같거나 비슷하게 운영된다. 유치원 및 영아 유치원 교육은 교육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라기보다는,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태국에서는 일할 수 있는 여자들의 절반이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 모두 직장을 다니는 맞벌이 부부가 많다. 그래서 부모의 출근 시간대에서부터 퇴근 시간대까지 아이들을 돌봐 주는 탁아소의 역할을 부담하는 요금에 따라서 탄력 있게 감당하고 있다.

진학[편집]

태국에서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좋은 고등학교를 나와야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상급학교 진학은 시험을 통하여 하기 때문에 원하는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서는 좋은 중학교를, 좋은 중학교를 위해서는 좋은 초등학교를, 좋은 초등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좋은 유치원을 나와야만 한다. 따라서 교육에 관심 있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에서 좀 멀고, 힘이 들더라도 좀 더 나은 유치원에 보내려고 애를 쓴다. 비판적으로 보면, 태국에서 교육의 기회는 자녀를 명문학교에 보낼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 소수 부유층들만 가질 수 있고, 거의 대부분의 민중들에게는 처음부터 상당히 닫혀있는 것이다.

태국의 보이, 걸 스카우트
중고교 과정[편집]

태국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위해 각각 3년을 들여야만 하는 정규 학제 이외에도, 중고교 졸업장을 비교적 손쉽게 받을 수 있는 길이 여러 가지로 열려 있다.

  1. 주간에는 일하면서 야간 수업 또는 주말 수업으로 2년 정도 공부하면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장을 얻을 수 있는 준 정규 과정이 전국적으로 많은 정규학교에 병설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시간을 내면 졸업할 수 있다.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조건은 제때에 공부를 시작하지 못하고 2-3년 정도 자기 학년보다 늦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2. 준 정규 과정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수업 시간 및 수업 연한을 갖고 중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3. 검정고시가 있다.
대학교[편집]

대학 과정은 분야별로 명문대가 있는데, 방콕의 쭐라롱껀, 탐마쌋, 씨나카린위롯, 씬라빠껀, 까셋쌋, 마히던 대학교 등이 명문이며 지방의 명문으로는 북부의 치앙마이 대학교, 북동부(이산)의 컨깬대학교, 남부의 송클라나카린대학교가 있다. 한편, 공부는 하고 싶으나 가정형편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방콕에는 물론 지방에도 곳곳에 개방대학이 개설되어 있다. 그 중 방콕에 있는 람캄행 대학은 세계에서 학생 수가 가장 많은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누구든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학비가 저렴하여 등록금과 교재 구입비를 포함하여 한 학기당 25-30달러 정도 되므로 공부를 하고픈 학생들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강의는 하나도 안 들어도 되고, 시험 성적으로 학점을 얻는다. 하지만 졸업이 어려워서, 개방대학을 나오면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일할 수 있다.

문화[편집]

불교에서 안수를 받기 전에 태국 어린이들은 송크란 축제에서 장로들을 존중합니다.

태국은 불교의 나라이자 사원의 나라이다. 주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자이며, 거의 대부분이 소승 불교 신자이다. 태국의 승려들은 한국과는 달리 육식과 음주를 허용하지만 정오 이후의 식사는 금지하며, 여성은 승려와 접촉할 수 없다. 또한 태국에는 아름다운 왕궁과 많은 불교 사원들이 있다. 태국은 왕실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대단한 나라이다.

조상에 대한 존경은 태국의 정신적 관습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태국 사람들은 환대하는 마음과 관대한 마음을 가졌으나 강한 사회적 계급 의식도 있다. 태국 문화에서 어른 공경은 중요한 요소이다. 연장자가 항상 가족 대소사를 결정하거나 의례를 주관한다.

태국의 전통 인사법인 "와이"는 두 사람 중 젊은 사람이 먼저 하는데, 이는 손바닥끼리 서로 닿도록 두 손을 모은 다음, 손가락 끝은 위로 향하게 하고 얼굴이 손에 닿도록 머리를 숙여서 하는 인사이다. 이 인사를 할 때는 남자는 "사왓디 크랍", 여자는 "사왓디 카"라는 인사말을 함께 한다. 그러면 연장자가 같은 방법으로 답례한다. 태국의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부모님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이며 "와이"를 행한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와이는 타인에 대한 존경과 경의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인데 이는 인도 문화권의 나마스테와 비슷하다.

건축[편집]

태국은 전통적인 관광유적과 현대 첨단문명이 잘 맞물려 현대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푸른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사원, 과거의 영광을 증언하는 관광유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종교[편집]

태국의 특징적인 상좌부 불교
태국의 종교[26]
불교
  
94.50%
이슬람교
  
4.29%
기독교
  
1.17%
힌두교
  
0.03%
기타
  
0.01%

태국은 불교의 색채를 가진 나라이자 사원의 나라이다. 주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자이나 국교가 해제된 지금은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는 분위기이다.[27]소승불교는 1997년까지 태국의 국교였다. 그러나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 국교를 해제했다. 아직은 달력, 풍습 등에도 불교적인 것이 많다. 실제로, 태국의 불교는 서서히 발전하여 동물숭배나 조상숭배로부터 기원된 지역 종교들을 포섭하였다. 국왕을 비롯하여 남자라면 일생에 적어도 한번은 절에 들어가 삭발하며 3개월 정도의 수도과정을 지내고 오는 것도 의무적이다. 이른 새벽이면 누런 법복을 걸친 탁발 승려들이 사원을 나서 행렬을 시작하고 신도들은 정성스럽게 이들에게 공양을 바친다. 태국의 승려들은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사회적 지위가 높다. 태국에는 아름다운 왕궁과 많은 사원들이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수호사원으로서 에메랄드 사원과 수코타이 중심부에 있는 최대사원인 왓 마하탓, 유서깊은 절 왓 아룬 등 3만여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사원은 아름답기 그지없다.[28]

이슬람교는 제 2의 세력이다. 로마 가톨릭개신교 종파들도 소수 존재한다. 개신교의 경우 태국 기독교 연맹, 태국 침례교 연맹등의 교단들을 갖고 있다.

태국은 불교 국가이지만,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는 태국 종교청의 지도를 받는다.

무용[편집]

콘의 쇼는 태국 공연의 가장 양식화 된 형태이다

태국의 고전무용은 콘과 라콘, 라밤 등 세 종류가 있는데 수많은 장식품을 사용한 화려한 의상과 우아한 춤동작이 특징이며 태국의 중요한 관광자원이자 자랑거리이다.

언어[편집]

람 캄행 왕의 비석

태국어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다. 태국어는 크메르족과 몬족의 언어가 섞여 만들어졌다. 자음 44자, 모음 32자이고, 5개의 성조가 있다. 북부 지방은 사투리를 사용하지만 표준어와 큰 차이가 없다.[29]

언론[편집]

태국 사회는 최근에 여러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언론과 미디어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수많은 영어, 태국어, 중국어 신문들이 유통되고 있다. 가장 인기 있는 태국의 잡지들은 매혹적이고 우아하게 보이려고 머리기사에 영어를 쓴다. 방콕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큰 사업 건들은 영어로 진행된다. 태국 사람들끼리 말할 때에도 그들이 교육을 받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어로 말한다. 태국은 2003년 기준으로 매일 최소한 1300만 부수의 신문이 유통되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신문 시장이다.

요리[편집]

태국의 음식은 다섯 가지 기본적인 맛, 단 맛, 향이 강한 맛, 신 맛, 쓴 맛, 짠 맛이 어우러져 있다. 태국 음식에 보통 쓰이는 재료로는 마늘, 고추, 라임 주스, 코코넛, 캐슈 열매, 레몬 그라스, 생선 소스가 있다. 주식은 , 특히 다양한 재스민 쌀(홈 말리 쌀이라고도 함)이며 거의 매 끼니에 포함된다. 태국은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이며 태국 사람들은 1년에 100킬로그램(도정미 기준)의 쌀을 소비한다.[30]. 태국이 원산지인 5천여 가지의 쌀이 필리핀에 있는 국제쌀연구소(IRRI)의 유전자 은행에 보관되어 있다. 태국의 국왕은 국제쌀연구소의 공식 후원자이다.

영화[편집]

최근 들어 태국 영화는 완성도 높은 작품성과 기법으로 세계적 주목을 끌고 있다. 태국 영화를 세계무대로 이끈 선구자는 쁘랏야 삔깨우(Prachya Pinkaew) 감독이었다. 그의 작품인 《옹박 - 무에타이의 후예》(Ong-bak), 《옹박 - 두 번째 미션》(Tom-Yum-Goong) 토니 자 주연의, 두 영화 모두 전 세계적으로 4,700 만 달러 이상을 벌었습니다. 미국 박스 오피스에도 있습니다.

태국의 유명한 공포 영화 《셔터》(Shutter 2004), 《》(Alone 2007), 《포비아》(4bia 2008). 태국 영화는 동남아시아와 아시아의 다른 국가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피막》(Pee Mak 2013)[31] 이 영화는 태국 영화 산업에 참신함을 만들어 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와 피막 같은 공포 영화를 전 세계적으로 판매 3,300 만 달러. (특히 아시아에서).[32] 또한 《배드 지니어스》(Bad Genius 2017)는 아시아에서 인기가 있습니다. 4,200 만 달러을 초과했습니다. 태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태국 영화이다.[33][34]

라콘 (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은 태국과 태국 이외의 지역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35][36], 《타인의 비밀》(Kluen Cheewit 2017), 《왕세녀》(The Crown Princess 2018). 또는 십대 라콘, 《더 기프티드》(The Gifted 2018), 《2gether: The Series》(2020).[37]

태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영화는 꽤 잘 자랐습니다. 또한 인기있는 댄스 아티스트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타타 영 은 댄스 팝 아티스트 2004-2007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리사 은 댄스 팝 아티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38]

스포츠[편집]

부아 카우(Buakaw), 유명한 국제 무에타이 개업자인.

축구가 무에 타이를 대신하여 인기를 얻고 있으며 이제는 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태국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잉글리쉬 프리미어 리그의 팀을 텔레비전을 통해 응원하는 장면은 낯설지가 않게 되었다.

또 한 가지 과거에 인기 있었던 스포츠로 날리기가 있었다. 그 밖에 킥복싱, 칼싸움, 닭싸움 등의 오락이 있다.[39]

무어이 타이(무에타이, 태국식 권투)는 태국의 국가적인 스포츠이다. 태국 사람들은 그냥 "무어이"라고 부르는 격투기이다. 과거에, 무어이는 궁정 병사들이 전장에서 무장 해제되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배웠다. 병사들이 제대한 뒤 그들 상당수는 불교 승려가 되었고 사찰에 머물렀다. 태국 사람들의 삶은 불교, 사찰과 가깝게 관련되어 있는데 태국 사람들은 자녀들을 사찰에 보내 승려 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무어이는 사찰의 교과목 중 하나이다.[40].

무어이 타이는 1990년대에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격투기가 있지만 무어이 타이는 팔꿈치를 포함한 때리기 공격, 던지기 공격, 무릎 공격을 허용하는 규칙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각주[편집]

  1. 이 곳은 나중에 말레이시아 북부의 주가 된다.
  2. 이는 다시 4개의 구역으로 세분된다.
  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타이의 역사·주민
  4. 태국 시위대-경찰 충돌...2명 사망·300여 명 부상
  5. 태국 공항 점거 7일째
  6. 泰 내각 총사퇴… 공항 점거도 풀기로(종합)
  7. <태국 집권당 해체...항공기 운항 재개 합의>(종합2보)
  8. 태국 시위대 "공항 점거농성 3일 해제"
  9. `레드 셔츠` 격렬 시위…태국은 `準전시 상태`
  10. 잉락 친나왓, 태국 총리로 공식 취임
  1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타이의 자연
  12. 김성기 (2000). 《코스따라 세계여행 동남아시아》. 민서출판사. ISBN 978-89-422-0046-7.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13.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타이의 기후
  14. http://www.asaninst.org/contents/8%EB%85%84%EC%97%90-19%EB%B2%88-%ED%83%9C%EA%B5%AD-%EC%BF%A0%EB%8D%B0%ED%83%80-%EC%8B%AC%EC%B8%B5-%EB%B6%84%EC%84%9D/
  15. http://www.asaninst.org/contents/8%EB%85%84%EC%97%90-19%EB%B2%88-%ED%83%9C%EA%B5%AD-%EC%BF%A0%EB%8D%B0%ED%83%80-%EC%8B%AC%EC%B8%B5-%EB%B6%84%EC%84%9D/
  16. 한국태국학회, 《태국의 이해》 (동남아학총서2),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5)33쪽
  17. CIA world factbook - Thailand
  18. CIA world factbook - Greater Mekong Subregion
  19. “IRRI country profile”. 2008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8월 1일에 확인함. 
  20.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타이의 산업
  21.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타이의 교통·도시
  22. “해외안전여행 : 국가별 안전정보”.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2010년 11월 15일에 확인함. 방콕을 비롯한 파타야, 푸켓 등 주요 관광지에서는 소매치기 오토바이 날치기 등이 빈번히 발생하는 바, 소지품 관리에 유의해야 하며 귀중품, 고가 카메라 등을 눈에 띄게 휴대하고 다니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중략… 수도 방콕 시내의 경우 유흥가 밀집 지역인 팟퐁, 나나 지역은 마약이 불법적으로 유통되는 만큼 유흥업소 출입시 유의하여야 합니다. 
  23. 태국 형법 제112조: 국왕, 왕비, 왕위 계승자 또는 섭정을 비방, 모욕하거나 위협한 자는 최저 3년, 최고 15년까지의 징역에 처한다. (มาตรา ๑๑๒ ผู้ใดหมิ่นประมาท ดูหมิ่น หรือแสดงความอาฆาตมาดร้าย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 พระราชินี รัชทายาท หรือผู้สำเร็จราชการแทนพระองค์ ต้องระวางโทษจำคุกตั้งแต่สามปีถึงสิบห้าปี)
  24. (연합뉴스 인용) (2008년 11월 4일). “태국 군부, 국왕모독죄로 탁신 고발 검토”. 조선닷컴. 2011년 5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15일에 확인함. 입헌군주제인 태국에서는 국왕과 왕실에 대한 모독은 중죄로 다스려 유죄로 판명될 경우 징역 3년에서 최고 15년형에 처해진다. 이 법은 종종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5. 전성옥(연합뉴스 인용) (2006년 12월 22일). “태국국왕 초상화 먹칠 스위스인 ‘75년 징역’ 위기”. 한겨레신문사. 2010년 11월 15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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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타이의 역사·주민
  28.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타이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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