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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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동방 공화국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Flag of Uruguay.svg Coat of arms of Uruguay.svg
국기 국장
표어 Libertad o Muerte
(자유냐 죽음이냐)
국가 동방인들이여, 자유? 죽음!
Uruguay on the globe (South America centered).svg
수도 몬테비데오 남위 34° 53′ 00″ 서경 56° 10′ 00″ / 남위 34.883333° 서경 56.166667° / -34.883333; -56.166667
정치
공용어 사실상 스페인어
정부 형태 공화제
대통령
부통령
호세 무히카
다닐로 아스토리
역사
독립  
 • 독립 선언
 • 승인
브라질 제국에서 독립
1825년 8월 25일
1828년 8월 28일
지리
면적 176,215km² (90 위)
내수면 비율 1.5%
시간대 UYT (UTC-3)
DST UYST (UTC-2)
인구
2005년 어림 3,477,778명
2002년 조사 3,399,236명 (134위)
인구 밀도 19명/km² (156위)
경제
HDI 0.792 (51위, 2012년 조사)
통화 페소 (UYU)
기타
ISO 3166-1 858, UY, URY
도메인 .uy
국제 전화 +598

우루과이 동방 공화국(스페인어: 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 레푸블리카 오리엔탈 델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 남동부에 있는 공화국이다.

서쪽에는 우루과이 강이 있으며 남서쪽에는 라플라타 강의 하류와 맞닿아 있어 강 사이로 아르헨티나와 만나며, 남동쪽 해안에는 대서양이 있다. 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수리남 다음으로 가장 작은 나라이다.

원래 시스플라티나 주라는 이름으로 브라질의 속주였던 우루과이는 1825~1828년 사이 3년간 브라질 제국을 상대로 저항했고,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받아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었다. 이로 인하여 우루과이는 독립과 동시에 아르헨티나와 영원한 우방국이 되었다. 우루과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며, 대통령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이다.

우루과이 경제는 주로 농업(GDP의 10%이며, 주요 수출품)과 정부 부문 기반을 두고 있다. 국제 투명성 기구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칠레와 더불어)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이며, 정치적/노동 조건도 이 대륙에서 가장 자유롭다. 인구의 94.6%가 유럽계이다.

자연 환경[편집]

지리[편집]

이 나라는 브라질아르헨티나 사이에 있는 나라이다. 국토는 팜파스 지대의 연장으로 대부분의 면적이 초원이며, 높은 산이 없고 숲이 거의 없다.우루과이는 남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작은 독립국이다. 우루과이의 지리적 특징 때문에 낮은 평원과 언덕이 이어지면서 장관을 이룬다. 바닷가에는 비옥한 평야지대가 분포한다. 강을 비롯해 지류가 발달하여 전 국토에 수륙이 발달되어 있고 분지와 삼각지도 많은 편이다. 라플라타 강, 우루과이 강, 리오네그로 강 등이 있다. 여러 석호가 대서양 해안을 따라 발달하였는데 라 플라타 강이 남서쪽에 있고 우루과이 강이 서쪽 국경을 이룬다.

우루과이의 대척점 근처에는 한반도가 있으며 몬테비데오여수가 서로 대척점이다.

기후[편집]

우루과이의 기후는 온화한 편이여서 극도로 덥거나 극도로 추운 날이 거의 없는 편이다.(온대기후)

가장 추운 달은 6월로 1월이 가장 따뜻하다. 강수량은 연중 내내 고루 내리는 편이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다. (1913, 1918, 1963, 1989, 1992, 2007년에만 눈이 왔다.)

행정구역[편집]

우루과이 행정구역도

우루과이는 19개의 주(departamento)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 (square kilometres) 인구[1] 주도
아르티가스 11,928 79,317 아르티가스
카넬로네스 4,536 509,095 카넬로네스
세로 라르고 13,648 89,383 멜로
콜로니아 6,106 120,855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두라스노 11,643 60,926 두라스노
플로레스 5,144 25,609 트리니다드
플로리다 10,417 69,968 플로리다
라바예아 10,016 61,883 미나스
말도나도 4,793 147,391 말도나도
몬테비데오 530 1,342,474 몬테비데오
파이산두 13,922 115,623 파이산두
리오 네그로 9,282 55,657 프라이 벤토스
리베라 9,370 109,267 리베라
로차 10,551 70,614 로차
살토 14,163 126,745 살토
산 호세 4,992 107,644 산 호세 데 마요
소리아노 9,008 87,073 메르세데스
타콰렘보 15,438 94,613 타콰렘보
트레인타 이 트레스   9,676 49,769 트레인타 이 트레스

역사[편집]

콜럼버스 이전 시대와 식민 시대[편집]

우루과이의 원주민 그림. 헨드릭 오트센 저널. 1603년.

유럽 식민화 이전 우루과이에 기록상 남아있는 거주민은 차루아족으로, 파라과이과라니족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난 작은 부족이었다. 차망가 등지에 원주민이 남긴 고대 암각화가 있다.

1516년 현 우루과이 땅에 에스파냐인들이 들어왔다. 원주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했고, 게다가 이 곳에는 금이나 은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와 17세기에 이곳에 식민 정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1603년 에스파냐는 우루과이에 가축을 들여왔고 축산업은 이 지역 부의 원천이 되었다. 우루과이 땅에 첫 영구 식민 정착지는 1624년 에스파냐인들이 리오 네그로소리아노에 세웠다. 1669~71년에 포르투갈인들은 사크라멘토 식민지 요새를 건설했다. 에스파냐가 포르투갈의 브라질 경계 밖 진출을 막으려고 하면서 이 지역의 에스파냐 식민화도 진척됐다.

18세기 초 에스파냐인들은 포르투갈에 대항할 군사 요새를 세울 목적으로 몬테비데오를 건설했다. 몬테비데오는 곧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경쟁하는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다. 19세기 초 우루과이는 영국, 에스파냐, 포르투갈과 계속 전쟁을 치렀으며,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지역의 식민 지배 세력과 싸웠다. 1806년과 1807년에 영국군이 에스파냐와 전쟁을 하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점령하려고 했는데, 1807년 초 몬테비데오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공격하던 10,000여명의 영국군 병력에 같은 해 중순까지 점령되었다.

독립 투쟁[편집]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
시스플라티나 주의 기. 우루과이로서 독립하기 전에 사용되었으며 아르헨티나(과거 리오 데 라 플라타 합주국)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5월의 태양을 이용하여 우루과이의 국기를 제작한 이후 폐기되었다.

1811년 우루과이의 국민 영웅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에스파냐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일으켜 라스 피에드라스 전투에서 같은 해 5월 18일에 식민지배자를 격퇴했다. 1814년 그는 연방 연합을 조직했으며, 여기서 그는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공화주의적인 연방 연합의 영향력과 명성이 계속 커지면서 포르투갈은 이에 우려했고, 호세 아르티가스와 그의 혁명을 분쇄하기 위해 1816년 8월 그들은 (아르헨티나와는 암묵적으로 공모하여) 동부 주를 침략했다. 포르투갈군은 수적, 물질적 우위로 1817년 1월 20일 몬테비데오를 점령했으며, 3년간 지방에서 전쟁을 계속해 결국 타쿠아렘보 전투에서 아르티가스를 패배시켰다. 1821년 리오 데 라 플라타의 동부 주(Provincia Oriental del Río de la Plata, 오늘날의 우루과이)는 브라질에 병합되어 시스플라티나 주가 되었다.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33인의 동부인들이 리오 데 라 플라타 합주국(현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1825년 8월 25일 독립을 선언했다. 500일간의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이 일어났다. 우루과이인들이 자신의 영토를 되찾었을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군대가 브라질 본토까지 쳐들어가는 상황에서 1828년 영국이 중재 아래 몬테비데오 조약을 맺고 우루과이를 독립시켜, 우루과이 동방 공화국(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이 건국됐다. 우루과이의 첫 헌법은 1830년 7월 18일에 제정됐다. 이후 19세기에 우루과이는 이웃 국가의 개입과 갈등, 정치 경제적 동요, 대규모 유럽인들의 이주를 겪는다.

이 시기에 시스플라티나 동시에 리오그란데(히우그란지두술 주)가 브라질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며 자주국임을 선언했지만 리오그란데는 끝내 독립에 실패해서 현재까지 브라질의 주로 남아 있다.

우루과이 내전[편집]

삼국동맹전쟁[편집]

19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발전[편집]

20세기[편집]

1926년 우루과이는 쥘 리메에게 초대월드컵은 자국에서 개최하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2] 가장 좋은 월드컵 유치 조건을 내걸어 1930년 우루과이 독립 100주념을 기념하는 첫 월드컵을 개최했다.

최근[편집]

사람과 언어[편집]

이웃 나라인 아르헨티나처럼 전 인구 중 백인이 88%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스페인이탈리아 계통의 주민이 가장 많으며, 독일, 폴란드,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서 온 이민들의 계통도 소수로 있다. 그 외 메스티소가 8%, 흑인이 4%이며 소수의 인디오들도 있다. 언어는 이웃국인 아르헨티나 처럼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며, 브라질에서 건너온 이민자 중에서는 포르투갈어도 소수 사용자가 있다.

영어대도시, 호텔을 제외하고는 거의 통용이 되지않는다.

최근 들어 우루과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우루과이로 이민 또는 귀화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3]

우루과이가 이토록 살기 좋은 국가로 급부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병역이 모병제이다.
  • 공무원들이 대체로 청렴하다.
  •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 교육 여건이나 복지 여건이 오히려 미국 남부 지역보다 우월하다.
  • 공해가 별로 없어 물과 공기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깨끗하다.

스포츠[편집]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축구 강팀으로, 1924년 하계 올림픽1928년 하계 올림픽에 연속으로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했으며, 1930년 초대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를 누르고, 1950년 제 4회 월드컵에서 스페인, 스웨덴, 브라질을 누르고 우승했다. 1954년 FIFA 월드컵, 1970년 FIFA 월드컵, 2010년 FIFA 월드컵에서는 4위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14차례나 우승하여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과 함께 대회 역사상 가장 성공한 팀으로 꼽힌다. 그러나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은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한 하향세를 보이며 1974년 FIFA 월드컵 이후 16강 이상 오르지 못하고 있으며 지역예선에서 탈락한 월드컵도 무려 5회(1978년 FIFA 월드컵, 1982년 FIFA 월드컵, 1994년 FIFA 월드컵 (브라질,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에 밀려 탈락), 1998년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콜롬비아, 칠레, 페루, 에콰도르에 밀려 탈락), 2006년 FIFA 월드컵 (오스트레일리아에 밀려 탈락))에 달할 정도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오르고(4위를 기록) 2011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상승세를 타고있다.

우루과이는 1930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한 국가로서 FIFA 월드컵의 아버지인 쥘 리메몬테비데오센테나리오 경기장축구의 성지라 칭한 바 있다. 우루과이 정부는 FIFA월드컵 개최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30년 FIFA 월드컵아르헨티나와 같이 공동개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4]

정치[편집]

경제[편집]

우루과이는 스위스와 같이 은행에 돈을 맡긴 사람들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

우루과이는 남미 최고의 경제력을 자랑한다.

군사[편집]

인구 1000명당 상비군 병력 수는 7.1 명으로, 우루과이는 모병제를 함에도 불구하고 군인의 비율이 웬만한 징병제 국가보다도 훨씬 높다. 이 나라는 구형 전차를 모두 퇴역시켰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포병이 없다.

외교[편집]

아르헨티나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브라질을 상대로 아르헨티나-브라질 전쟁을 벌여 승리로 이끌어서 독립한 국가가 우루과이기 때문에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영원한 우방국이다.

대한관계[편집]

대한민국과는 1964년 10월 7일에 수교했다. 양국은 정치, 경제, 문화 및 국제무대에서 전통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오고 있다. 2008년 9월, 우루과이의 대통령 타바레 바스케스가 한국을 방문했다. 양국간 문화[5], 어업, 무역, 경제과학기술, 사증면제협정 등이 체결되었다. 한국은 몬테비데오에 상주 대사관을 두고 있고, 우루과이는 2002년 11월 30일, 우루과이의 경제위기로 주한 대사관을 잠정폐쇄한 바 있으나 2006년 2월에 다시 열었다. 2007년 양국간 교역규모가 1억 1200만 미국달러이고 50여척의 한국 어선이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항을 전진기지로 해 남대서양에서 조업하고 있으며, 현재 50여가구 150여명의 한국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6] 2010년 남아공월드컵 에서는 16강전에서 대한민국과 겨루어 2:1로 승리를 거두었다. 서울 올림픽 때 14명의 선수단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한일 월드컵, 대구 육상 선수권대회 등 대한민국에서 개최한 대회 때 선수를 보낸 적이 있다. 한국과 우루과이를 직접 연결하는 항공편이 없기 때문에 우루과이에 가려면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경유 국가로는 브라질스페인이 있고, 대체로 브라질을 경유한다. 아직까지 우루과이에서는 중등 교육에 한국어 수업을 개설하지 않았다.

관련 사진/그림[편집]

주석[편집]

  1. 2007년 기준
  2. 예를 들면 참가국 대표팀 전원의 여행비용, 숙박비용 및 식비 등 모든 체류비용을 우루과이 정부에서 지급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등
  3. 우루과이로 이민자 ‘우르르’… 환경 좋고 정치·경제 안정
  4. "100주년 월드컵을 남미에서", 연합뉴스 2009-11-19 08:21
  5. 대한민국 정부와 우루과이 정부간의 문화협정(Cultural Agreement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Government of the Oriental Republic of Uruguay) 1971년 5월 14일 서명, 1974년 9월 13일 발효 (대한민국의 조약 513호)
  6. 공관장 인사. 《주 우루과이 대사관》. 2009년 7월 10일에 확인.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