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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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강화회담 또는 베르사유 평화회담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이 패배한 동맹국에 관련하여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한 회담이었다. 32개국에서 온 정치가들과 민족주의 세력이 참여한 가운데 국제연맹 창립과 같은 중요 결정을 비롯하여 패배한 5개국과의 조약 체결,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의 해외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위임통치하는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수립, 독일에 대한 보복, 그리고 민족경계를 반영한 국경 재수립 등이 이 회담에서 논의되었다.

주요 결과는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 체결이었다. 조약의 제231조에 따르면 독일과 그 동맹국의 공격성이 전쟁에 대한 죄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시야는 독일에게 굴욕감을 주고, 독일에 대한 광범위한 보복조치에 대한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회담을 통제했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이탈리아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가 회의를 주도했다.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145회 이상 만나 모든 주요 결정을 내렸고, 이후 다른 사람들이 이를 승인했다.[1] 회담은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었고, 마이클 네이베르크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공식적인 평화 과정은 로잔 조약이 체결되던 1923년 7월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다.[2]


전반적인 결과[편집]


회담은 1919년 1월 18일에 열렸다.[3] 이 날짜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1871년 독일 황제였던 빌헬름 1세베르사유 궁전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임을 선포한 날이었기 때문이다.[4] 또한 이 날은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수립된 날짜이기도 했다.[5] 5개의 민족주의자 대표단이 참석했으나 이들 대부분은 무시되었고, 27개국에서 온 사절단이 52번의 위원회에 배정되었는데 이들은 전쟁 포로에서 해저 케이블, 국제 항공법, 전쟁에 대한 책임에 관해 수많은 전문가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준비중이었다. 중요한 권고는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으로 15개의 조항과 440개의 항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불가리아 왕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같은 다른 패전국에 대한 조약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주요 5개국으로써 회의를 통제했으며, 5개국 중 일본만이 옛 총리를 파견해 작은 역할만을 수행했다. 그리고 빅 4의 지도자들이 회의를 지배했다.[6] 빅 4가 이미 결정한 의견들은 공식 회담의 참석자들에게 승인받았다. 1920년 1월 21일 회담은 국제 연맹 총회 첫 개회로 마무리 되었다.[7][8]


5개의 주요 조약이 체결되었다.


중국의 산둥 문제[편집]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화민국 대표는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에서 강탈한 제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7개 조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9]

  1. 중국에 설치된 세력범위의 포기
  2. 중국에 주둔하는 각국 군대의 철수
  3. 각국이 중국에서 경영하는 우편전보사업의 폐지
  4. 영사재판권의 철회
  5. 조차지의 반환
  6. 조세의 반환
  7. 관세 자주권의 승인.[9]

그리고 여기에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조목이 부가되어 있었다.[9] 이 요구 조건 속에는 패전국인 독일이 산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 강화회담에 앞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하여 중화민국의 요구를 찬성, 지지함으로써 중국 국민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10] 그런데, 일본은 21개조 요구 가운데 산둥 문제에 관한 것과 돤치루이 정권이 1918년에 일본과 교환한 산둥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데다가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주기로 일본과 약속했었으므로, 4월 21일의 회담에서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와의 비밀협정을 통하여 이에 구 독일 권익은 완전히 일본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10] 물론 우드로 윌슨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굴복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10] 산둥 반도 문제에 관한 파리강화회담의 결정을 알리는 전보가 1919년 4월 30일 베이징(北京)에 퍼졌고, 이어 5월 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었고, 이는 5·4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5·4 운동)

베트남의 청원[편집]

1919년 파리 강화회담이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베트남의 청년 호찌민이 찾아왔다.[11]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11]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요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11]

각주[편집]

  1. Rene Albrecht-Carrie, Diplomatic History of Europe Since the Congress of Vienna (1958) p. 363
  2. Michael S. Neiberg (2017). 《The Treaty of Versailles: A Concise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ix쪽. ISBN 978-0-19-065918-9. 
  3. Erik Goldstein The First World War Peace Settlements, 1919–1925 p49 Routledge (2013)
  4. Goldstein, Erik (2013년 10월 11일). 《The First World War Peace Settlements, 1919-1925》 (영어). Routledge. ISBN 9781317883678. 
  5. Ziolkowski, Theodore (2007). 〈6: The God That Failed〉. 《Modes of Faith: Secular Surrogates for Lost Religious Belief》. Accessible Publishing Systems PTY, Ltd (2011에 출판됨). 231쪽. ISBN 9781459627376. 2017년 2월 19일에 확인함. [...] Ebert persuaded the various councils to set elections for 19 January 1919 (the day following a date symbolic in Prussian history ever since the Kingdom of Prussia was established on 18 January 1701). 
  6. Meehan, John David (2005). 〈4: Failure at Geneva〉. 《The Dominion and the Rising Sun: Canada Encounters Japan, 1929-41》. Vancouver: UBC Press. 76–77쪽. ISBN 9780774811217. 2017년 2월 19일에 확인함. As the first non-European nation to achieve great-power status, Japan took its place alongside the other Big Five at Versailles, even if it was often a silent partner. 
  7. Antony Lentin, "Germany: a New Carthage?" History Today (2012) 62#1 pp. 22–27 online
  8. Paul Birdsall, Versailles Twenty Years After (1941) is a convenient history and analysis of the conference. Longer and more recent is Margaret Macmillan, Peacemakers: The Paris Peace Conference of 1919 and Its Attempt to End War (2002), also published as Paris 1919: Six Months That Changed the World (2003); a good short overview is Alan Sharp, The Versailles Settlement: Peacemaking after the First World War, 1919–1923 (2nd ed.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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