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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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
สยาม

1350년~1932년
국기
국기
문장
문장
아유타야 왕조 시대의 영역
아유타야 왕조 시대의 영역
톤부리 왕조 ~ 라타나코신 왕조 시대의 영역
수도아유타야(1350년 ~ 1767년)
톤부리(1767년 ~ 1782년)
라타나코신(1782년 ~ 1932년)
정치
정치체제군주제

1350년 ~ 1369년
1448년 ~ 1488년
1548년 ~ 1564년
1590년 ~ 1605년
1656년 ~ 1688년
1758년 ~ 1767년
1767년 ~ 1782년
1782년 ~ 1809년
1809년 ~ 1824년
1824년 ~ 1851년
1851년 ~ 1868년
1868년 ~ 1910년
1910년 ~ 1925년
1925년 ~ 1932년

라마티보디 1세(초대)
볼로마토라이로카나토
마하 차크라패드
나레수안
라마티버디 3세
보로마라차 3세
보로마라차 4세
라마 1세
라마 2세
라마 3세
라마 4세
라마 5세
라마 6세
라마 7세(말대)
역사
 • 아유타야 시대1350년 ~ 1767년
 • 톤부리 시대1767년 ~ 1782년
 • 라타나코신 시대1782년 ~ 1932년
지리
위치태국
인문
공용어태국어
민족타이인
종교
국교상좌부 불교
기타 종교힌두교
대승 불교
기타
현재 국가태국 태국

시암(태국어: สยาม 사얌[*]) 또는 섬라국(暹羅國)은 아유타야 시대부터 라타나코신 시대까지의 태국이다. 1936년 이후 국호를 시암에서 타이로 바꾸면서 오늘날의 타이 왕국이 되었다.

역사[편집]

아유타야 시대 (1351년 ~ 1757년)[편집]

아유타야 왕조 시절의 불상

시암의 첫 번째 왕조는 아유타야 왕조이다. 아유타야 왕조중국인도, 유럽을 잇는 중간에 위치하는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왕가를 중심으로 독점 무역을 했다. 주로 중국에 쌀을 수출하여 국력을 기르고, 조선, 일본, 류큐국 등과 안남 등의 동아시아 국가, 동남아시아의 크고 작은 섬들, 아랍, 페르시아나 서양과 활발하게 무역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부를 바탕으로 아유타야에서는 당시 번영하고 있던 크메르 문화를 흡수하면서, 중국, 유럽, 페르시아 등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독자적이고 화려한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이 왕조의 첫째 왕 라마티보디 1세상좌부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였으며 힌두교 법률서와 태국의 전통 풍습에 기초해 다르마샤스트라라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후 14세기말까지 아유타야 왕조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하였지만, 동남아 지역을 완전히 압도할 만큼의 인구는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쇠퇴하고 있던 크메르 왕조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베트남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라마티보디는 말년 1362년 앙코르 왕조를 공격해 아유타야의 영토의 확장을 꾀하였다. 그러나 아유타야는 앙코르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 15세기에는 말레이 반도말라카 왕국이 아유타야의 고민거리가 된다. 말레이 반도에서는 말라카나 탄브라린가 이남의 말레이 반도 여러 도시가 15세기 초기부터 이슬람교으로 개종 하게 되어,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유타야는 말레이 반도 남부를 잃지만, 말레이 반도 북부를 계속 장악하여 고급품을 거래해온 온 중국 상인에 의해 국내의 경제는 활기를 유지하게 된다. 한편, 서쪽의 버마는 지역의 패권을 노리며, 16세기경부터 집요하게 아유타야를 침략하여 아유타야의 골칫거리가 되게 된다. 버마 따웅우 왕조의 군주 바인나웅1569년에 아유타야 왕 마힌트라티랏을 패망시켰으나 나레수안 대왕에 의해서 아유타야는 재건되었다. 이후 꼰바웅 왕조가 국력을 축적하게 되면서 아유타야는 다시 버마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는다. 결국 1767년꼰바웅 왕조에 의해 아유타야 왕조는 멸망하게 된다.

톤부리 시대 (1767년 ~ 1782년)[편집]

아유타야 왕조가 붕괴한 이후 시암은 버마의 지배를 받았지만 짠타부리에서 시작된 저항 운동을 지휘한 딱신의 활약으로 시암은 1년이 지나지 않아 버마로부터 독립하였으며, 그후 1768년 8월 딱신이 짜오프라야강(메남)의 어귀에서 20km 떨어진 짜오프라야강 서안의 도시인 톤부리를 시암의 새로운 수도로 삼은 후 왕으로 즉위함으로서 톤부리 왕조가 개창되었다. 왕이 된 딱신은 청조에 사자를 보내 책봉을 요구하였지만 건륭제는 딱신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청조와의 교섭은1769년에 호전되어 교역을 재개하였고, 무기나 철, 유황 등의 전략 물자 획득의 길을 열었다. 그는 시암 중부를 빠르게 재통일하였으며, 1769년 서쪽 캄보디아를 정벌하였고, 그 이후 남쪽으로 진격을 하여 페낭테렝가누 주를 포함한 말레이 반도에 대한 시암의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시암 내의 수도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딱신은 1774년 버마를 기습하였다. 1776년에는 치앙마이를 함락했고, 톤부리와 란나 왕국을 영구 통일했다. 1778년 톤부리는 비엔티안을 함락하여 라오스에 대한 지배권을 태국으로 종속시켰다. 톤부리 왕조 말기 딱신 왕을 도왔던 장군 짜오 프라야 마하카삿트 슥크 차크리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딱신 왕을 폐위 및 처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톤부리 왕조는 막을 내렸다.

라타나코신 시대 (1782년 ~ 1936년)[편집]

차크리 왕조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건물 지붕

1782년 차크리 장군이 라마 1세로 즉위하면서 차크리 왕조의 첫째 왕이 되었다. 같은 해 그는 톤부리에서 짜오프라야강 건너편에 있는 방콕에 수도를 건설했다. 라마 1세를 이어 왕이 된 후계자들은 1826년 영국이 이웃 버마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제국주의의 위협에 갈수록 신경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암은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으로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 1833년에는 미국과 시암(1939년 이전과 1945년-1949년에 사용되었던 태국의 옛 이름) 간에 외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 몽쿳(라마 4세, 1851년-1868년)와 그의 아들 출라롱콘(라마 5세, 1868년-1910년) 즉위하에서 시암은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굳게 다졌다. 태국인들은 이들 왕들의 능력 있는 외교력과 태국 정부의 근대화 개혁 때문에 태국이 남아시아·동남아시아를 통틀어 식민지화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여긴다.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은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을 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케다의 일부였던 파타니(Pattani) 주와 얄라(Yala) 주, 나라티왓(Narathiwat) 주, 사툰(Satun) 주가 시암령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중앙집권제 정책을 실시하여 왕정을 강화하는 동시에 서구 열강과의 협상을 통해 국경선을 정하였으며,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중산층을 통합한 교육의 확대 등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였다. 1932년 군사 쿠데타 이후 국명을 시암에서 타이로 바뀌면서 오늘날의 타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