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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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
370년대469년
450년경 훈족의 영토
450년경 훈족의 영토
정치
공용어 훈족어
고트어
다양한 부족어
정부 형태 부족 연합
왕 또는 족장
370년대?
395년경-?
400년경-409년
412년경-?
420년대쯤-430년
430년-435년
435년–445년
445년–453년
453년-469년
469년-?

발람베르?
Kursich와 Basich
울딘
Charaton
옥타르루가
루가
아틸라블레다
아틸라
뎅기지크에르나크
에르나크
역사
 • 카스피해 북서쪽에 훈족이 출현 370년대 이전
 • 알라니족고트족을 정복 370년대
 • 아틸라블레다
부족 연합의 공동 지배자가 됨
437년
 • 블레다 사후, 아틸라가
단독 지배자가 됨
445년
 • 카탈라우눔 전투 451년
 • 이탈리아 침공 452년
 • 네다오 전투 454년
 • 아틸라의 아들, 뎅기지크 사망 469년

훈족(-族, Huns)은 4-6세기 중앙 아시아코카서스에서 거주했던 유목민족이다. 유럽의 전승에 따르면, 훈족들은 당시에 스키티아라고 알려진 지역의 일부였던 볼가강 동쪽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훈족의 정착은 인도이란계 민족알라니족들의 서쪽으로 이주에도 관련이 있다.[1] 370년에, 훈족들은 볼가강에 이르렀고, 로마 제국의 국경 밖에 살고 있던 고트족과 다른 게르만들을 정복하고, 많은 게르만족들을 로마 영토로 도망치게 한, 이들은 430년에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유럽에 거대한 영토를 세웠다. 특히나 아틸라 왕의 지도하에서, 훈족들은 동로마 제국에 잦고 파괴적인 약탈을 벌였다. 451년에는 서로마 제국갈리아 속주를 침입하여,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로마와 서고트 연합군과 교전했으며, 452년에는 이탈리아를 침입했다. 453년에 아틸라가 죽은 후로, 훈족들은 로마를 향한 위협을 멈추었고 네다오 전투 패배 후로 영토의 상당량을 상실했다. 훈족의 후예들이나 비슷한 명칭을 가진 후계자들은 대략 4-6세기에 동유럽과 중앙 아시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남쪽과 동쪽, 서쪽의 이웃한 민족들에게 기록되었다. 훈족의 변형적 명칭들은 코카서스에서는 8세기 초까지 기록되었다.

18세기에 프랑스 학자 조제프 드 기네는 훈족 그리고 기원전 3세기 중국의 북방 민족인 흉노족과의 연관성을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2] 기네 이후로, 상당한 학문적 노력들이 이 연관성을 연구하는데 사용되었으나, 아직까지 논란으로 남아있다. 훈족과 다른 민족들에 대한 관계는 총괄하여, 역시나 논란에 있는 이란계 훈족으로 알려져있다.

훈족의 문화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최종적으로 훈족과 관련되었다는 유적지들은 극히 적다. 훈족들은 청동으로 된 가마솥을 사용했고 인위적인 두개골 변형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틸라 시대의 훈족의 신앙이나 종교에 대한 비문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점복이나 샤먼의 존재 같은 풍습들은 존재한다. 훈족들이 고유의 언어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오직 세 단어이자 인명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경제적으로 이들은 유목 목축의 형태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로마와의 접촉이 늘어남에 따라, 훈족의 경제는 조공, 약탈, 교역을 통하여 로마와 점차 엮이게 되었다. 훈족들은 유럽으로 진입할 때는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가지지 않고, 로마인들과의 전쟁에서 통일된 부족 지도 체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훈족들은 다양한 언어를 가진 여러 민족들을 지배했으며, 피지배 민족들 일부는 자기들만의 지도자를 유지했다. 훈족의 핵심 군사 기술은 궁기병이었다.

훈족들은 서로마 제국의 붕괴에 기여를 한 요소인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자극했을 것이다.[3][4] 훈족에 대한 기억은 여러 기독교 성인들의 삶에도 살아있는데, 거기서 훈족들은 게르만 신화의 인물들에 대한 적이나 동맹 역할로 나오는 게르만족 영웅 전설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인들에게서는 적대 인물 역할을 한다. 헝가리에서는 헝가리인, 특히나 세케이인계가 훈족들의 후손이라는 중세 연대기를 바탕으로 한 전설이 발전했다. 하지만 주요 학계는 헝가리인과 훈족들 사이의 밀접한 관련을 부인한다.[5][6][7][8]

기원[편집]

유라시아 스텝 벨트 (지도에서 틀:Colorsample).

훈족의 기원과 이들과 다른 유목민족들간의 관련은 명확하지 않다.[9][10] 학자들은 훈족이 중앙 아시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만 이들의 구체적 기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고전 사료들은 훈족들이 370년 무렵에 갑자스럽게 유럽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11] 가장 일반적으로, 훈족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로마 저술가들의 시도들에서는 이들을 단순히 이전의 유목민족들과 동일시 했다.[12] 로마 작가들은 또한 훈족들이 케르치 해협을 건너 크리미아로 들어간, 야생 사슴이나 잃어버린 소들을 찾다가 고트족의 영토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고트족들의 땅이 좋은 것을 알게된 훈족들은 고트족을 공격했다.[13] 요르다네스의 《게티카》에서 고트족들이 훈족들을 "사악한 영들"[14]과 고트족 마녀들의 자식이라 생각한다고 나타난다.[15][16]

흉노족과 훈족이라 불렸던 민족들에 대한 연관성[편집]

훈족의 발생지라고 믿어졌던, 기원전 205년경 묵돌선우 통치하 흉노족의 영토와 영항

18세기에 조제프 드 기네 이래로, 현대 역사가들은 4세기에 유럽 경계에 나타난 훈족을 기원전 3세기와 서기 2세기 사이 오늘날 몽골 영토에서 중국을 침입했던 흉노족과 관련시켰다.[2] 중국의 한나라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여, 흉노족의 북방 일파가 북서쪽으로 물러났고, 이들의 후손이 유라시아를 통해 이주했으며 따라서 이들이 훈족과의 일부 문화적, 유전적 연속성을 가졌을 수도 있다.[17] 학자들은 또한 흉노족, 훈족, 그리고 “훈족”으로 알려지거나 훈족에서 정체성을 가졌다고 여겨진 “이란계 훈족”, “서융”, “키다라인”, 그리고 가장 유명한 “에프탈” (또는 백훈족) 등 수 많은 중앙 아시아 민족들 간의 관계를 분석했다.[18]

오토 J. 멘헨헬펜은 저술 자료 연구를 주요 기반으로 삼는 전통적인 연구법에 도전하고, 고고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최초의 인물이었다.[19] 멘헨헬펜의 연구 이래로, 훈족의 선조라는 흉노족의 정체성은 논란이 되었다.[17][20][21][22][23] 추가적으로, 일부 학자들은 유럽계 훈족이 있는 “이란계 훈족”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21][24] 월터 폴 (Walter Pohl)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대한 유목민 전사들의 연합은 인종적으로 동일하지 않았고, 명성을 이유로 다른 민족들이나, 생활 방식 또는 지정학적 기원을 외부인들이 묘사하기 위해서 같은 이름이 사용되었다. [...] 이에 대한 예시로 흉노족, 에프탈, 아틸라의 훈족 사이의 정체성이나 혈연적 관계에 대해 추측하는 것은 쓸데없다. 우리 모두가 확실히 말하는 훈족이라는 명칭이란, 고대 시대에서는 저명한 유목 전사들의 지배 계층으로 묘사한다.[25]

최근 학계에서, 특히 김현진과 에티엔 드 라 배지에르 (Etienne de la Vaissière)는 훈족과 흉노족이 한 민족이고 같다라는 이론을 부활시켰다. 드 라 배지에르는 고대 중국과 인도의 사료들이 흉노와 훈을 서로를 번역하는데 사용했고,[26] 다양한 "이란계 훈족" 들은 흉노족과 유사하게 여겨진다고 주장했다.[27] 김현진은 훈족이라는 용어가 "주로 민족 그룹이 아니라, 정치적 범주"라고 여겼고,[28] 흉노족과 "이란계 훈족" 사이뿐만 아니라[29][30] 흉노족과 유럽계 훈족 사이 간에 근본적인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연속성을 주장한다.[31]

명칭과 어원[편집]

훈족 (Hun)이라는 명칭은 고전 유럽의 사료에서 그리스어로 우노이 (Οὖννοι)와 라틴어로 훈니 (Hunni) 또는 쿠니 (Chuni)로 나타난다.[32][33] 이오아네스 말랄라스는 훈족의 명칭을 우나 (Οὖννα)라고 기록했다.[34] 훈족과 일치 여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또다른 가능한 그리스어 명칭으로는 쿠노이 (Χοὖνοι)일 수도 있다.[35] 고전 사료들은 훈족이라는 명칭 대신에 오래되고 관련 없는 유목민들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고, 마사게타이, 스키타이인, 킴메르라 칭했다.[36]

훈족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다양하게 제시된 어원들은 일반적으로 최소한 훈족이라 알려진 다양한 유라시아 민족의 명칭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 훈족의 명칭이 튀르크어 왼(ön), 외나(öna, 성장이라는 뜻), 쿤(qun, 대식가), 퀸(kün), 귄(gün), "아마 '사람들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37] 퀸(qun, 힘), 휜(hün, 사나운)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수 많은 제시된 튀르크어 유래 가설들이 존재한다.[37] 오토 멘헨헬펜은 이 튀르크어 유래 가설들을 "단순한 추측"이라며 부정했다.[38] 멘헨헬펜은 hūnarā (기술), hūnaravant- (숙련된) 등 아베스타어에 가까운 단어에서 온, 이란어군 유래를 제시하고, 훈족이라는 명칭이 본래는 민족 보다는 계층을 지칭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39] 로베르트 베르너 (Robert Werner)는 토하라어 ku (개 )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고, 중국인들이 흉노족을 훈족의 토템 동물이었던 개라고 부른 사실을 바탕으로 주장했다. 그는 마사게타이의 명칭에 있는 사카족의 요소가 개를 뜻한다는 점을 주목하며, 마사게타이의 명칭과도 비교했다.[40] 해럴드 베일리 (Harold Bailey), S. 파를라토 (Parlato), 잼시드 코스키 (Jamsheed Choksy) 같은 다른 이들은 아베스타어에 가까운 이란어군 단어 Ẋyaona에서 유래했고, "적대감, 적"을 뜻하는 단어가 일반화되었다고 주장했다.[41] 크리스토퍼 앳우드 (Christopher Atwood)는 음운과 기록적 근거의 가능성을 모두 부정했다.[42] 언어학으로 접근하지 않은, 앳우드는 흉노족의 명칭과 같거나 유사하게 발음되는, 몽골옹기강에서 훈족의 명칭 유래를 가져왔고, 민족적 이름 보다는 가문이나 왕조의 이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43]

생김새[편집]

훈족들에 대한 고대 기술들은 로마인의 관점에서 이질적인 외모를 강조하는 것이 같았다. 이 기술들은 훈족들을 괴물로서 보통 묘사했다.[44][45][46] 요르다네스는 훈족이 작은 키에, 적갈색의 피부를 지녔다고 강조했다.[47] 여러 작가들은 훈족들이 눈이 작고 평평한 코를 지녔다고 언급했다.[46] 로마인 작가 프리스코스는 아틸라의 목격자 기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넓은 가슴과 큰 머리를 가진, 작은 키에, 그의 눈은 작았고, 그의 턱수염은 얇고 새치가 나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혈통을 나타내는, 납작한 코와 적갈색 피부를 지녔다."[48]

많은 학자들은 이 묘사들을 동아시아인 ("몽골로이드")들의 인종적 특징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로 받아들였다.[45][46] 멘헨헬펜은 많은 훈족들이 일부 동아시아인적인 인종 특징들을 지녔음에도, 그들이 야쿠트족이나 퉁구스족 같이 아시아인으로서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 논했다.[49] 그는 주목했다 notes that 당연하게 여기지던 훈족들의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훈족 중 일부만이 동아시아적 특징을 지닌, 인종적으로 뒤섞인 민족 단위임을 나타낸다는 것을 주목했다.[50] 김현진은 유사하게 동종의 인종적 그룹으로 훈족을 바라보는 것에 경고하고,[51] 훈족들이 "부분적으로나 대다수가 몽골로이드 (최소한 처음에는)."라고 주장했다[52] 일부 고고학자들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훈족들이 "몽골로이드" 특징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실패했다고 했고,[53] 일부 학자들은 훈족들의 생김새는 주로 "코카서스 인종"이라 논쟁한다.[54] 다른 고고학자들은 "몽골로이드" 특징들이 훈족 귀족들의 무덤에서 주로 발견되었다고 주장했으나,[55] 그 무덤에는 훈족의 정치 체제에 흡수된 게르만족 지도자들도 포함했다.[56] 김현진은 샬롱 전투 (451년)을 언급하며, 아틸라의 "대다수" 측근들과 군대가 유럽을 기원했던 것으로 나타났고, 반면 아틸라 그 자신은 동아시아인의 특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였다고 하며, 훈족의 구성이 유럽에 있던 시기에 서서히 더욱 코카서스화가 되었다고 주장했다.[57]

역사[편집]

아틸라 이전[편집]

훈족의 서쪽으로 이동을 추정한 경로

로마인들은 훈족의 폰토스 스텝 지역 침략이 수 천명의 고트족들을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도나우강 하류로 이동한 376년에 훈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58] 훈족들은 로마 제국으로 도망쳐온 많은 민족들과 함께, 알라니족, 그레우퉁기족 또는 서고트족의 대부분, 대부분의 테르빙기족 또는 동고트족을 정복했다.[59] 395년에 훈족들은 동로마 제국에 최초의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60] 훈족들은 트라키아를 공격했고, 아르메니아를 휩쓸었고, 카파도키아를 약탈했다. 이들은 시리아 일부 지역에도 진출하여, 안티오키아를 위협했고, 에우프라텐시스 속주를 거쳐갔다.[61] 같은 시기에, 훈족들은 사산 제국도 침공했다. 침공은 수도인 크테시폰 인근까지 접근하며,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페르시아인들의 반격에 극심한 패배를 당했다.[61]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에서 잠깐 방향을 돌리던 시기에, 훈족들은 서쪽 너머에 있는 부족들을 위협했을 것이다.[62] 동시대 사료들에서 처음으로 이름이 인식된 최초의 훈족인 울딘[63]은 이탈리아를 방어한 라다가이수스에 맞서 훈족과 알라니족을 이끌었다. 울딘은 도나우강 인근에서 동로마인들에게 문제를 일으킨 고트족 반군을 진압하고, 400-401년 쯤에 고트족 가이나스를 처형한 것으로 처음으로 알려졌다. 동로마인들은 408년에 다시 울딘의 훈족으로부터 압박을 느끼기 시작했다. 울딘은 도나우강을 건너 트라키아를 악탈했다. 동로마인들은 울딘을 매수하려 노력했지만, 그의 요구액이 너무 높아서 대신에 그들은 울딘의 부하들을 매수했다. 이는 울딘의 무리에 많은 이탈을 야기했다. 울딘도 도나우강을 다시 넘어 도주했고, 이후로 그는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64]

훈족 용병들이 4세기와 5세기에 고트족들뿐만 아니라 동, 서로마에 몇 차례 고용되었다는 것이 언급되었다.[65] 433년에 판노니아 지역의 일부를 서로마 제국마기스테르 밀리툼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가 훈족들에게 넘겨주기도 했다.[22]

아틸라 통치기[편집]

19세기 아틸라의 묘사. 체르토사 디 파비아 건물의 파사드에 있는 메달리온. 라틴어 비문은 이 사람이 바로 신의 채찍, 아틸라라고 적혀있다.

434년부터 아틸라블레다 형제가 훈족을 같이 다스렸다. 아틸라와 블레다는 자신들의 숙부 루길라만큼이나 야망찬 이들이었다. 435년에 이들은 동로마에게 훈족들의 무역 권한과 로마로부터 매년 조공을 받기로 한 마르구스 조약을 서명하도록 강요했다.[66] 로마인들이 440년에 조약을 어기자, 아틸라와 블레다는 로마의 요새이자 도나우강의 기슭에 있는 상업지인 카스트라 콘스탄티아스 (Castra Constantias)를 공격했다.[67] 훈족과 로마인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고, 훈족들은 약한 로마군을 압도하고, 마르구스 (Margus), 싱기두눔, 비미나키움 등의 도시들을 파괴했다. 441년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2년 뒤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조공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고 전쟁이 재개됐다. 이후 전쟁에서, 훈족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접근했고 케르소네소스 전투에서 로마군에 패배하기 전까지 몇몇 도시들을 약탈했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훈족의 요구를 들어주고 443년 가을에 두 훈족 왕들과 아나톨리포스 조약을 맺었다. 블레다는 445년에 죽고, 아틸라는 훈족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447년에 아틸라는 발칸 반도와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그 전쟁은 로마인들이 아틸라에게 연간 2,100 파운드의 금을 지불하는 데 동의하므로써 449년에 종결되었다. 동로마 제국 곳곳을 약탈한 훈족들은 서로마 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약혼 반지를 보내고 원로원 의원에게 약혼하는 자신을 구해달라는 도움을 요청했다. 아틸라는 그녀를 자신의 신부라 주장하고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의 절반을 요구했다.[68] 추가적으로, 그가 잘리어 프랑크인의 왕에 대한 정당한 후계자라는 분쟁이 일어났다. 451년에 아틸라의 군대가 갈리아를 침입했다. 갈리아에 들어오자마자, 훈족들은 맨처음 메츠를 공격했고, 그러고나서 아틸라의 군대는 파리와 트루아를 지나쳐 오를레앙에 포위 공격을 가하면서,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오를레앙을 구원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로마와 서고트족 연합군은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훈족을 격퇴시켰다.

라파엘로교황 레오와 아틸라 간의 회담성 베드로사도 바울의 호위를 받는 교황 레오 1세이 로마 외각에서 훈족의 왕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한다.

다음 해에, 아틸라는 호노리아와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다시 요구했다.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들어온 아틸라는 많은 도시들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로마가 약탈되는 것을 피하고 싶어하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는 만토바 인근 민치오강에서 아틸라를 만난 교황 레오 1세뿐만 아니라 고위 관리 겐나디우스 아비에누스 (Gennadius Avienus)와 트리게티우스 (Trigetius) 등 세 명의 대사를 파견했고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고 황제와 강화 협상을 맺을 것이라는 약속을 얻어냈다. 새로 즉위한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조공 지불을 중단했고, 이는 아틸라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계획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453년에 아틸라는 자신의 결혼식 중이던 밤에 출혈로 사망한다.[49]

아틸라의 사후[편집]

453년에 아틸라가 사망하자, 훈 제국은 봉신화된 게르만족과 훈족 지배층 간의 내부 권력 갈등을 마주했다. 아틸라가 총애하던 아들이자 아카치리족의 통치자였던 엘라라크가 이끄는 훈족은 훈 제국을 무너트리려는 게르만족의 연합을 이끈 게피드족의 왕 아르다리크네다오 전투에서 교전했다. 같은 해에 발라미르 휘하의 아말리계 고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고, 전해진 바에 의하면 전투에서 훈족을 물리쳤다고 한다.[69] 하지만, 이것들이 카르파티아 지역에서 훈족 제국의 완전한 붕괴를 일으키지는 못 했으나, 많은 게르만족 봉신들의 상실을 낳았다. 동시에, 훈족들은 오그후르족, 사라구르족, 사비르족을 포함해서, 동쪽으로부터 오그후르계 투르크어인들의 늘어나는 도래를 처리했다. 463년에, 사라구르족은 아카치리 또는 아카티르 훈족을 패배시키고 폰토스 지역의 지배권을 주장했다.[70]

뎅기지크 휘하의 서쪽의 훈족들은 훈족의 동맹인 사다게스족의 전쟁에서 발라미르에게 패하며 어려움을 겪었다.[71] 그의 군사 작전은 또한 이주해오는 오그후르인들에게 집중을 하길 원하던, 아카치리 훈족의 통치자 에르나크에게 반대되기도 했다.[70] 뎅기지크는 에르나크의 도움 없이 467년에 로마를 공격했다. 그는 로마군에게 둘러쌓여 포위됐고, 로마인들이 땅과 자신의 굶주린 군대에 식량을 가져다준다면 항복하겠다는 조약을 맺었다. 협상 기간에, 로마군에서 복무하던 훈족 Chelchel은 고트족들이 훈족 주군들을 공격하게끔 설득했다. 아스파르 장군 휘하의 로마군은 불켈라리이의 도움으로, 서로 싸우던 고트족과 훈족들을 공격해서 물리쳤다.[72] 469년에, 뎅기지크는 트라키아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73]

뎅기지크가 죽은 후, 훈족들은 불가르족 같은 다른 민족들이게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73] 그러나 김현진은 에르나크 휘하의 훈족들은 쿠티구르족, 우티구르계 훈족 불가르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70] 이 결론은 여전히 논쟁의 주제 거리이다. 일부 학자들은 고대 사료에서 또다른 민족 그룹을 순수 혈통인 북 코카서스 훈족들인, 훈족으로서 인식했다고 또한 주장했다.[74][75] 훈족 이후의 스텝 지역 민족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아틸라의 후손이라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다양한 유목 민족들은 이후에도 비잔틴과 서구의 사료들에서 훈족이라 불렸다.[76]

삶의 방식과 경제[편집]

목축 유목[편집]

훈족들은 전통적으로 가축들에 의존하고 자신들의 가축들을 방목하기 위해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이동시켰던 목축 유목민으로 묘사되었다.[77][78][79] 그러나 김현진은, "유목민"이라는 용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유목민이라는 용어가 완전하게 영토의 개념이 없이, 방랑하는 민족 그룹을 뜻한다면 '유목민'이라는 용어는 훈족에게 적용될 수가 없다. 이른바 모든 유라시아 스텝 역사의 '유목민'들은 목초지를 찾아 움직이지만 고정된 영토내에서 움직이는 목축민들로서 확실히 분별된 이들이다.[52]

멘헨헬펜은 목축 유목민 (또는 "준유목민")들은 일반적으로 여름 목초지와 월동지 사이를 교대로 돌아다닌다고 언급했다: 목초지는 각양각색이었을 것이며, 월동 장소는 항상 같았을 것이다.[80] 사실 이런 내용은 요르다네스가 훈족계 부족인 알치아기리족 (Altziagiri)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며, 이들은 크림 반도케르소네소스에서 목축을 했고 멘헨헬펜이 주장한 시바시 같은 장소들이 있는 북쪽으로 더 나아가 월동을 했다.[81] 고대 사료들은 소, 말, 염소, 비록 고대 사료에서는 언급되지는 않지만 "말들 이상으로 훨씬 스텝 유목민에 기초적이고"[82] 가축의 큰 부분을 차지했음이 틀림없는 양을 포함해서 다양한 동물들로 구성했다.[81] 추가적으로, 멘헨헬펜은 훈족이 사마르티아인에서도 입증된, 오늘날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인 자신들의 영토의 일부에 소규모 쌍봉낙타 무리를 유지했었을 것이라 주장한다.[83]

아미아누스는 멘헨헬펜이 주장한거와 같이, 훈족 식단의 대부분이 가축들에서 획득한 고기에서 온다고 기록했다.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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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과 활, 그리고 기동성은 다른 국가들 보다 훨씬 더 우수했는데, 말은 후에 훈족이 훈 제국을 세웠을 때 교역에 주요 수출품목이 된다. 말이 우수할뿐만 아니라 훈족민들의 말을 다루는 솜씨 또한 훌륭하다 못해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걷는 것 다음으로 바로 말타는 법을 배우고, 말의 위에서 식사와 수면을 취하고 심지어 용변까지 말위에서 처리했다. 일상생활을 모두 말 위에서 보내다보니 말 위에서의 생활이 당연히 익숙해질 따름이다. 이 관습은 유럽의 국가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는데 사절단이 훈족에게 방문할 때마다 훈족의 수장들은 대부분 말 위에서 그들을 반기고 심지어 국사를 논의할 때 조차도 말 위에서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우수한 기동력은 당연한 것 일 수 밖에 없었다.

또 그들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 였던 활과 활을 쏘는 솜씨는 그들의 기마술만큼이나 우수했는데 최대 사정거리는 약 300m쯤 사살가능거리는 약 150m쯤이나 되었다.

아틸라의 지휘 아래 훈 제국이 세워진 뒤 그들은 교역을 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주요 수출품은 이었고 주요 수입품은 금과 은, 인도에서의 진주, 비단과 대추야자와 인도산 후추 등의 사치품들이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처리할 때 귀한 사람의 경우 매장을 하고 보통사람의 경우 화장하였다. 귀한 사람의 경우 매장할 때 귀한 사치품들과 금으로 된 화살촉 등의 무기들이 나오기도 했다. 훈족이란 단어는 영국과 미국에서 2차세계 대전때 독일 나치를 뜻하는 야만적인 군대를 지칭하는 단어로도 쓰였다.

같이 읽기[편집]

참조[편집]

  1. Sinor 1990, 180쪽.
  2. de la Vaissière 2015, 175, 180쪽.
  3. Sinor 1990, 177쪽.
  4. Heather 1995, 16쪽.
  5. Szűcs 1999, xliv쪽.
  6. Engel 2002, 2쪽.
  7. Lendvai 2003, 7쪽.
  8. Maenchen-Helfen 1973, 386쪽.
  9. Heather 2010, 502쪽.
  10. de la Vaissière 2015, 176쪽.
  11. de la Vaissière 2015, 177쪽.
  12. Maenchen-Helfen 1973, 7쪽.
  13. Thompson 1996, 20쪽.
  14. Getica 24:121
  15. Maenchen-Helfen 197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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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Wright 2011, 60쪽.
  18. Pohl 1999, 501쪽.
  19. de la Vaissière 2015, 175쪽.
  20. Thompson 1996, 1쪽.
  21. Schottky 2004.
  22. Sinor 1990, 1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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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Sinor 1990, 200쪽.
  25. Pohl 1999, 501-502쪽.
  26. de la Vaissière 2015, 178-180쪽.
  27. de la Vaissière 2015, 181-183쪽.
  28. Kim 2015, 46쪽.
  29. Kim 2013, 31쪽.
  30. Kim 2015, 6-8쪽.
  31. Kim 2015, 39, 44-53쪽.
  32. Doerfer 1973, 8쪽.
  33. Werner 1967, 528쪽.
  34. Atwood 2012, 31쪽.
  35. Kim 2015, 66쪽.
  36. Maenchen-Helfen 1973, 4-9쪽.
  37. Maenchen-Helfen 1959, 237쪽.
  38. Maenchen-Helfen 1959, 236쪽.
  39. Maenchen-Helfen 1959, 237-238쪽.
  40. Werner 1967, 555쪽.
  41. Atwood 2012, 30쪽.
  42. Atwood 2012, 40쪽.
  43. Atwood 2015, 45-47쪽.
  44. Thompson 1996, 56-57쪽.
  45. Sinor 1990, 202쪽.
  46. Maenchen-Helfen 1973, 363쪽.
  47. Maenchen-Helfen 1973, 362쪽.
  48. Sinor 1997, 336쪽.
  49. Maenchen-Helfen 1973, 364쪽.
  50. Maenchen-Helfen 1973, 364-367쪽.
  51. Kim 2015, 7쪽.
  52. Kim 2015, 4쪽.
  53. Crubézy & 1990 pp-195-196.
  54. Kim 2013, 187쪽.
  55. Molnár 외. 2014, 7쪽.
  56. Molnár 외. 2014, 6쪽.
  57. Kim 2015, 99쪽.
  58. Heather 2005, 153-154쪽.
  59. Heather, 151-152쪽.
  60. Thompson 1996, 30-31쪽.
  61. Sinor 1990, 184쪽.
  62. Thompson 1996, 32-33쪽.
  63. Thompson 1996, 33쪽.
  64. Sinner 1990, 185쪽.
  65. Sinor 1990, 181쪽.
  66. Thompson 1999, 136쪽.
  67. Thompson 1996, 87-89쪽.
  68. Halsall 2007, 251–252쪽.
  69. Heather 1990, 124쪽.
  70. Kim 2013, 123쪽.
  71. Heather 1990, 125쪽.
  72. Maenchen-Helfen 1973, 165–168쪽.
  73. Maenchen-Helfen 1973, 168쪽.
  74. Kim 2015, 136쪽.
  75. Sinor 2005, 4228쪽.
  76. Róna-Tas 1999, 309쪽.
  77. Maenchen-Helfen 1973, 169–179쪽.
  78. Thompson 1996, 46-47쪽.
  79. Kim 2015, 2쪽.
  80. Maenchen-Helfen 1973, 170–171쪽.
  81. Maenchen-Helfen 1973, 171쪽.
  82. Thompson 1996, 47쪽.
  83. Maenchen-Helfen 1973, 172–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