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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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고려
高句麗/高麗

기원전 37년668년
국기
Military Flag of Goguryeo (Ssangyeongchong).svg
군기 (왼쪽: 5세기 중엽) / 군기 (오른쪽: 5세기 말)
그 외 고구려의 깃발들에 대해서는 본문을 참고할 것.
붉은색이 고구려.
붉은색이 고구려.
수도 졸본 (BC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586년)
장안성 (586년 ~ 668년)
정치
공용어 고구려어 (고대 한국어)
정부 형태 군주제
 • 동명성왕(초대) BC 37년 ~ BC 19년
 • 보장왕(말대) 642년 ~ 668년

기타
국교 불교, 도교, 무속신앙
현재 국가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기 중화인민공화국
몽골의 기 몽골[1]
러시아의 기 러시아

국호[편집]

한국의 역사
韓國史
Gyeongbokgung Palace.png
선사
시대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토기 시대)
청동기 시대 (민무늬토기 시대)
고조선
시대
단군조선
(?~기원전 194년)
위만조선
(기원전 194년~기원전 108년)
(辰)
(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고구려
(기원전 37년~
668년)
백제
(기원전 18년~660년)
신라
(기원전 57년~ )
가야
(42~
562년)
 
남북국
시대
발해
(698~926년)
통일신라
(676년~ )
후삼국
시대
태봉
(901~918년)
후백제
(892~936년)
신라
( ~935년)
통일
왕조
시대
고려 고려
(918~1392년)
조선 조선
(1392~1897년)
대한제국 대한제국
(1897~1910년)
식민지
시대
일제 강점기
(1910~1945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
(1919~1945년)
현대 군정기 한국 (1945~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8년~현재)
대한민국 대한민국
(1948년~현재)
v  d  e  h

고구려는 건국 초기 졸본부여에서 세력을 키운 주몽(추모라고도 하며 성씨는 해 또는 고)가 건국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며 국호를 고구려 스스로 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미 기원전 107년 기록에 . 그 후 국내외 사료에 남은 기록대로 편의에 의하여 '고려' 등을 혼용하였으며 고구려 후기의 주요 사료의 기록에는 '고려(高麗)'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어 장수왕 무렵에 고려로 공식 국호를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고구려 후기를 기록한 사료가 전기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유일 수도 있으며 한국 학계에서 고구려로 이름을 통일하여 부른다. 중국 측의 사료에는 예(濊)/맥/고리/구려/평양((平凉)/요동(遼東) 등으로도 고구려를 호칭하기도 했다. 훗날 대조영의 대진국(발해)의 경우도 국서에는 이라고 자칭한 유물 있으며 왕건이 개국한 고려와도 구별하기 위해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고구려(高句麗)로 통용하며(조선의 경우와 같음) 국호의 경우, 사료와 연구 부족으로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출처 필요]

=

정치 제도[편집]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적인 지배 체제에서 벗어나 고대 국가로서의 관료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은 대체로 율령 정치가 시작된 소수림왕 때의 일이며, 그것이 더욱 정비된 것은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고구려의 중심 세력은 본래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왕은 부족 연맹장이 되었다. 왕은 선출에서 세습제로 변하였는데 초기는 소노부에서 동명성왕 이후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한다.

초기에는 국왕 밑에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주부(主簿)·우대(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皁衣)·선인(先人) 등을 두었는데, 이 관계(官階)는 그 후 발전 과정을 통하여 427년 평양천도 이후에 재정비되었다. 관료의 등급은 대체로 12등급으로 분화·발달되었는데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대사자(大使者)·소형(小兄)·제형(諸兄)·선인(仙人) 등으로 나뉘었다. ‘형’은 연장자로, 가부장적(家夫長的) 족장의 뜻을 나타내며 부족 연맹에서 고대 국가로 전환하면서 여러 족장 세력을 이러한 관등에 흡수한 것 같다. ‘사자’가 붙은 것은 씨족원으로부터 등용된 것으로 공부(貢賦) 징수의 직역(職役)을 뜻하는 것 같다. 대대로막리지(莫離支)는 수상격인 고구려 최고의 관직으로 대대로가 평시 행정 담당의 수상이다. 막리지 밑에는 고추대가(古雛大加)·중외대부(中畏大夫)·대주부(大主簿)등을 두었는데 각각 내정(內政)·외정(外政)·재정(財政)을 맡아보았다.

지방은 동·서·남·북·중의 5부(部)로 나누고, 5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부왕(副王)급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2]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각 내부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하여야 했다. 원래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을 여러 성(170)은 고구려 왕국의 사적·행정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었고 또 부세(賦稅) 등 지방민에 대한 통치가 행해지기 마련이었다.

고구려에는 귀족 회의의 하나인 제가 회의도 있었다.

지방제도[편집]

행정 조직[편집]

초기의 5부족은 그대로 행정구역으로 발전, 수도와 지방을 5부로 나누었다. 계루부(桂婁部)는 내부(內部)[3]·소노부(消奴部)는 서부(西部)[4]·절노부(絶奴部)는 북부(北部)[5]·순노부(順奴部)는 동부(東部)[6]·관노부(灌奴部)는 남부(南部)[7]라 하였다. 5부 밑에는 성(城)이 있었다.

부에는 욕살(褥薩)이라는 군관(軍官)과 처려근지(處閭近支)[2]라는 행정관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각 부 내의 여러 성주(城主)를 통솔했다.

그 밑에 각 이원(吏員)이 있어 사무를 분장하였다. 문무의 구별이 체계화되지 못하였던 고구려는 부족 세력의 근거지였던 여러 성을 행정적·군사적 단위로 편성하였던 것같다.

5부를 중심으로 하여 기내(畿內)의 뜻인 듯한 내평(內評)과 기외(畿外)의 지방을 의미하는 외평(外評) 제도가 있었다. 또한 평양 천도 후에는 평양 이외에 국내성(國內城, 통구)과 한성(漢城, 재령)의 별경(別京)이 있어 삼경제(三京制)가 성되었다.

군사 제도[편집]

군제(軍制)는 국민개병제와 비슷한 형태로서 국왕이 최고 사령관으로 군사조직도 일원적으로 편제되어, 국내성·평양·한성(漢城: 재령)의 3경(三京)과 각 성에 상비군을 두고, 변방에 순라군을 두었다. 군관으로는 대모달(大模達)·말객(末客) 등이 있으며, 상비군의 보충은 경당(扃堂)이라는 청년 단체가 맡았다.

군사 무기[편집]

주요 발사 무기로는 고구려에서 국궁과 각궁을 사용했다. 또한 석궁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성을 방어할때는 투석병이 있었다. 도끼창(미늘창)을병이했다. 고구려의 보병은 창과 칼 두 가지 무기를 사용했다. 첫 번째는 짧은 양날 변형으로 생긴 창으로 대부분 던지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른 하나는 단일 양날 검으로 한나라의 영향력을 받은 칼자루 안에 있었다. 투구는 중앙 아시아 민족이 사용하는 날개 달린 가죽 및 말꼬리 장식과 유사했다. 갑옷은 미늘갑옷이라 군인이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또한 신발은 밑에 뾰족하게 된 송곳이 박혀있어 적을 밟을 때 사용했다.

사회 및 경제[편집]

형법[편집]

고구려에서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행한 형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뒤에 다시 목을 베었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적에게 항복한 자나 전쟁에서 패한 자 역시 사형에 처하였고, 도둑은 12배를 물게 하였다. 1책12법이라고도 하며 부여와의 공통점이다. 고구려에서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남의 가축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는 그 자식을 노비로 만들어 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중대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가 모여서 논의하는 제가 회의를 통하여 처벌하였다. 이렇게 엄격한 형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법률을 어기거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 자가 드물었다.

신분제[편집]

고구려의 사회 계급은 귀족·평민(호민, 하호)·노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린 계층은 왕족인 고씨를 비롯하여 5부 출신의 귀족이었다. 이들은 그 지위를 세습하면서 높은 관직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또한 각기 넓은 토지를 소유하였으며, 조의·선인·대사자·상가·고추가 등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일반 백성인 평민은 읍락의 지배계층인 호민(豪民)과 피지배계층인 하호(下戶)로 구분되며, 이들은 대부분 농민이었고, 토지 경작과 함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지며, 토목공사에도 동원되었다. 고구려의 천민인 노비는 포로·죄인·채무자·귀화인 또는 몰락한 평민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신분 계급에 따라 집과 의관(衣冠)에 차이가 있었다.

하호[편집]

주로 생산 활동에 종사한 피지배층 하호는 고구려 본족(本族) 중의 범죄자·낙오자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피정복민이었으며 전쟁 때 포로가 된 한족도 있었다.

이들 하호는 신분적으로 노예와 구별되었으나 사회 경제적 위치는 노예에 준(準)하는 예속민으로서 대부분 정복당한 원주지에 살면서 농경을 포함한 생산 활동을 거의 전담하였고, 일부는 고구려에 이주되어 토지의 개척과 농경 등에 사역(使役)되었다. 또 전시에는 지배자의 사병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토지 제도[편집]

영역 내의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라는 의미에서 토지 국유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 원칙에 입각하여 토지는 분배되었다. 왕실 직속령(直屬領)이었던 것은 물론 전쟁시의 뛰어난 훈공에 의해서 국왕으로부터의 상사(賞賜) 형식으로 수여되는 사전(賜田)이나 식읍(食邑)은 귀족의 대토지 소유의 원천이 되었다. 사전(賜田)은 세습적인 상속이 인정되었고, 식읍은 자손에게 상속될 수 없었으며, 이들 토지 수급자(受給者)는 국가에 조세(租稅)를 납부하였다. 귀족에 의한 토지의 사적지배(사유화 과정)는 족장(귀족)·사원(寺院)을 중심으로 장원(莊園)이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귀족은 토지뿐 아니라 경작하는 예민(隸民)까지 마음대로 지배하였다.

경제[편집]

고구려의 산업은 농업을 위주로 했으며, 국가에서는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농사를 담당한 것은 피지배계급인 일반 농민이었다.

고구려의 세제(稅制)는 세(稅)와 조(組)가 있었는데, 인두세(人頭稅)에 해당하는 세로 포목 5필에 곡식 5섬을 받았고, 조는 민호(民戶)를 3등급으로 나누어 상호가 1섬·중호가 7말·하호는 5말을 내었다.

풍습[편집]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 졸본에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곳은 산간지역으로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외 정복 활동에 눈을 돌렸고 사회 기풍도 씩씩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 사람은 절할 때에도 한쪽 다리를 꿇고 다른 쪽은 펴서 몸을 일으키기 쉬운 자세를 취하였고, 걸을 때도 뛰는 듯이 행동을 빨리 하였다.

고구려 지배층의 혼인풍습으로는 형사취수제와 함께 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는데, 3세기 들어 사라졌다. 형사취수제는 부여와의 공통점이다. 초기에는 남자가 처가 옆에 마련한 서옥(사위집)에 들어갈 때에 돈과 옷감 등을 예물로 처가에 주었으나[8], 그 이후 남녀 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하여 결혼했는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다른 예물은 주지 않았다. 만약 신부 집에서 재물을 받은 경우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9]. 그리고 건국 시조인 동명성왕과 그 어머니 유화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고, 10월에는 추수감사제인 동맹이라는 제천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10]

《삼국지》〈위서〉동이전 고구려조에 따르면, 동맹 때에는 “나라 동쪽에 큰 수혈(隧穴)이 있어, 10월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고 수신(隧神)을 제사지내며,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모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수신은 주몽의 어머니로 민족적인 신앙의 대상이며, 목수는 나무로 만든 곡신(穀神)을 의미한다. 전 부족적인 제례(祭禮)였던 이 의식에서는 부족원이 무리를 지어 연일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사람이 모여 사냥을 하고,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인구[편집]

  •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69만호[11][12]라고 되어 있고, 구당서에는 69만 7천호[13]라고 되어있다.

문화[편집]

5-6세기 고구려 지붕 기와의 와당

고구려의 문화는 고구려인의 강건한 기질을 잘 나타낸다.

복식[편집]

지배층의 복식은 한나라(漢)·흉노에서 수입한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되었고, 전사(戰士)는 머리에 쓴 적[관(冠)]에다 깃털을 꽂는 이른바 절풍(折風)을 썼는데 많이 꽂혀있을수록 높은신분을 나타낸다 고구려인은 또한 거대한 분묘와 석총(石塚)을 만들었고, 많은 물건을 시체와 함께 부장하였다.

한문학[편집]

한자와 한문학은 삼국 중에서 가장 이르게 들여왔으며, 372년(소수림왕 2년)에는 이미 국가에서 유학(儒學)의 교육 기관으로 "태학"(太學)을 세웠고,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扃堂)을 세워 미혼의 자제에게 독서(讀書)·궁술(弓術)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인 사이에는 유교의 경전(經典)이나, 사기(史記)·한서(漢書) 등의 사서(史書)가 읽혀졌다. 옥편(玉篇)·자통(字統)과 같은 사전류(辭典類)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文選)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한자의 사용에 따라서 국가적인 사서(史書)의 편찬도 일찍부터 행하여졌다. 그리하여 일찍이《유기(留記)》105권이 편찬되었으며, 이것을 600년(영양왕 11년)에 이문진(李文眞)으로 하여금 간략히 하여 《신집(新集)》5권을 편찬케 하였다. 한자 사용의 근거는 통구의 모두루 묘지(牟頭婁墓誌: 414년)의 비문(碑文)과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약 1,800자(字)의 비문으로 능히 알 수 있고, 특히 광개토왕의 비문은 중요한 사료(史料)가 되고 그 고굴(告掘)한 예서(隸書)의 자체(字體)는 서예(書藝)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시가[편집]

고구려의 시가로는 유리왕(瑠璃王)이 지은 〈황조가(黃鳥歌)〉와 정법사(定法師)의 〈영고석(詠孤石)〉,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주는 시)〉등이 한시(漢詩)로서 전하고, 그 밖에 〈내원성가(來遠城歌)〉 〈연양가(延陽歌)〉 등이 그 이름만 《고려사》〈악지〉(樂志)에 전한다.

종교[편집]

고구려의 종교는 원시 신앙과 불교·도교로 대별할 수 있는데 원시 신앙으로는 자연물 숭배, 천신(天神)·지신(地神)·조상신(祖上神)의 3신(三神) 숭배와 샤머니즘(shamanism)적 신앙이 있었고, 특히 나라에서는 부여신(河伯女)과 고등신(高登神: 주몽)을 시조신(始祖神)으로 해마다 4회 제사를 지냈다.

불교의 전래는 372년(소수림왕 2)에 전진(前秦)에서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佛像)과 불경을 전래한 것이 그 시초이며,[14] 그 2년 뒤에는 다시 동진(晋)에서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15],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건립하여 위의 두 불승(佛僧)을 거주케 함으로써[16] 국가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였다.

불교를 왕실에서 이와 같이 환영하였던 까닭은 불교가 때마침 국민에 대한 사상 통일의 요구에 부합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지녔던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왕실에 크게 영합되었기 때문이다.

곧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한편, 도교(道敎)는 고구려 말기인 624년(영류왕 7년)에 당 고조(唐高組)가 양국 간의 친선정책으로 도사(道士)를 보내와 전한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고구려 사신도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 도교가 전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과 미술[편집]

고구려는 건축·미술에서는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는데, 대부분의 유적이 통구와 평양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궁실(宮室)이나 사찰(寺刹) 등 건축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분의 구조를 통하여 당시의 귀족 계급의 호화로운 건축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으로는 석총(石塚)과 토총(土塚)의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석재(石材)를 피라미드식으로 쌓아 올린 장군총(將軍塚)은 통구 지방에 남아 있는 고구려 석총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관(棺)을 안치한 큰 석실(石室)을 축조하고 그 위에 봉토(封土)를 덮은 토총 형식의 대표적인 것은 평양 부근의 쌍영총(雙楹塚)이다. 이와 같은 석실(石室)의 구조와 벽화(壁畵)에 의해서 고구려인의 건축술과 미술의 기량을 엿볼 수 있다. 곧 쌍영총의 현실(玄室)과 전실(前室) 사이에 세워진 각(角)의 두 석주(石柱)와 투팔천정(鬪八天井), 또 그림으로 나타낸 천정의 장식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엿보게 한다.

고분 벽화[편집]

강서대묘 사신도

고구려의 고분 벽화는 고구려인의 신앙·사상이나 풍속·복식(服飾) 등을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삼국시대 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쌍영총의 섬세·화려한 필치로 그려진 인물화나 무용총(舞踊塚)의 무인(舞人)·가인(歌人)의 그림은 고구려인의 풍속·복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청룡(靑龍)·백호(白虎) 등이 그려진 강서대묘(大墓)의 사신도(四神圖)는 강건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잘 나타낸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밖에 수렵총(狩獵塚)·각저총(角抵塚)·수산리 고분·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가 건축·미술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불교 미술[편집]

고구려의 불교 미술은 중국의 북위(北魏)풍의 영향으로 불상이나 불화(佛畵) 또는 탑파(塔婆) 등의 미술품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족이나 유물은 극히 드물다. 1940년에 평양 근처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118호)이나 어느 왕의 연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연가(延嘉)7년이라는 고구려 연호가 새겨진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19호)[17] 이 국내에 남아 있을 뿐이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은 장수왕(長壽王: 재위 422~491),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 491~519) 또는 안원왕(安原王: 재위 531~545)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65년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에서 발견되었다.

이 외에 중국 요령성 의현에서 출토된 고구려 금동불상도 있다. 이 불상은 을유년에 제작되었다고 새겨져 있으며, '대고구려국'이라는 국명이 적혀 있는데, 을유년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크게 논의된 바는 없다. 이 불상 자체가 극히 최근에야 국내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구려 문화는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고구려의 화공(畵工)·학승(學僧)이 일본으로 가서 불교문화를 전하는 데 공현하였다. 특히 승려이자 화가인 담징(曇徵)이 그린 벽화는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

음악[편집]

고구려인은 가무(歌舞)를 즐겼으나 더 이상의 문헌적 고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양원왕때의 국상인 왕산악(王山岳)이 진(晋)의 칠현금(七鉉琴)을 개량(改良)하여 거문고를 만들었다 하고 100여 곡(曲)의 악곡(樂曲)을 지었다고 전한다.

깃발[편집]

송나라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한반도에 깃발 문화는 소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깃발은 그 종류가 많지 않았고, 대부분 단순하고 무늬도 없었다.[18]

문화 교류[편집]

중국[편집]

중국의 북조 및 북방 초원의 여러 민족과 교섭, 바다를 통해 남조와도 교류했다고 한다.

일본[편집]

불교를 전파했으며, 고구려의 승려인 혜자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한,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은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을 전파하고, 호류 사 벽화를 남겨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대외 관계[편집]

고구려와 현대의 역사 분쟁[편집]

중국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 고구려 등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바 있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도 고구려의 역사의 계승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하였으나, 2006년에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 역사재단에 통합되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주몽·연개소문 등 고구려를 주제로 한 여러 역사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의 화살은 고구려에서 빗겨난 발해사에 집중되었다.

기타[편집]

고구려(高句麗)의 한국어 독음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라는 의견이 있다.[19] 이는 麗의 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발음된다는 음운 법칙에서 비롯되었다.[20][21][22][23]

그러나 조선시대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라 나타나고[24]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25]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26][27][28]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한편 장수왕 3년(414년), 69년(481년)에 각각 설치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고려태왕(高麗太王),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을 근거로 고구려에선 왕을 '태왕'이라고 칭했다는 의견이 있다.

고구려 왕위 계보[편집]

1
동명성왕 추모
東明聖王 鄒牟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
2
유리명왕 유리
琉璃明王 類利
기원전 19년 ~ 기원후 18년
3
대무신왕 무휼
大武神王 武恤
18년 ~ 44년
4
민중왕 해색주
閔中王 解色朱
44년 ~ 48년
재사
再思
5
모본왕 해우
慕本王 解憂
48년 ~ 53년
6
태조대왕
太祖大王 宮

53년 ~ 146년
7
차대왕 수성
次大王 遂成
146년 ~ 165년
8
신대왕 백고
新大王 伯固
165년 ~ 179년
9
고국천왕 남무
故國川王 男武
179년 ~ 197년
10
산상왕 연우
山上王 延優
197년 ~ 227년
11
동천왕 위궁
東川王 位宮
227년 ~ 248년
12
중천왕 연불
中川王 然弗
248년 ~ 270년
13
서천왕 약로
西川王 藥盧
270년 ~ 292년
14
봉상왕 상부
烽上王 相夫
292년 ~ 300년
돌고
咄固
15
미천왕 을불
美川王 乙弗
300년 ~ 331년
16
고국원왕 사유
故國原王 斯由
331년 ~ 371년
17
소수림왕 구부
小獸林王 丘夫
371년 ~ 384년
18
고국양왕 이련
故國壤王 伊連
384년 ~ 391년
19
광개토왕 담덕
廣開土王 談德
391년 ~ 412년
20
장수왕 거련
長壽王 巨連
412년 ~ 491년
조다
助多
21
문자명왕 나운
文咨明王 羅雲
491년 ~ 519년
22
안장왕 흥안
安藏王 興安
519년 ~ 531년
23
안원왕 보연
安原王 寶延
531년 ~ 545년
24
양원왕 평성
陽原王 平成
545년 ~ 559년
25
평원왕 양성
平原王 陽成
559년 ~ 590년
26
영양왕
嬰陽王 元
590년 ~ 618년
27
영류왕 건무
榮留王 建武
618년 ~ 642년
대양
大陽
28
보장왕
寶藏王 藏
642년 ~ 668년

참고자료[편집]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두산백과,몽골 다리강가,2009년.
  2. 일명 도사(道使)
  3. 또는 황부(黃部)
  4. 또는 우부(右部)
  5. 또는 후부(後部)
  6. 또는 좌부(左部)
  7. 또는 전부(前部)
  8. 《삼국지》〈위서〉동이전
  9. 《북사》열전
  10. 국사 편찬 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교육 인적 자원부, 서울 2004. 189쪽.
  11. [유레카] 인구 5000만명 / 정남기
  12. [고구려인] 당신도 고구려인일 수 있다
  13. 경계해야될 ‘오만’
  14.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二年 夏六月 秦王苻堅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15.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四年 僧阿道來 
  16. 김부식 (1145). 〈본기 권18 소수림왕〉. 《삼국사기》. 五年 春二月...始創肖門寺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17.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
  18. 이영희(주저자). (2014). 우리나라 의장기(儀仗旗)의 디자인 연구. 커뮤니케이션 디자인학연구, 48(0), 76-86.
  19.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261쪽쪽. ISBN 89-7474-870-3. 
  20. 《획수로 찾는 실용옥편사전》(2002년 1월 10일) 923쪽
  21. 《고금한한자전》(1995년 11월 15일) 150쪽
  22. 《한한대사전》(1996년 5월 25일) p. 1772~1773
  23. 《한·일·영·중 겸용 한한대사전》(1992년 3월 10일) 1195쪽
  24. 《삼강행실도》, 1434년(세종 16) 초간, 중종 연간에 언해, 경남 유형문화재 제160호
  25. “東人變呼音呂” (김정호, 《대동지지》〈방여총지〉권4, 19세기)
  26. 《한국한자어사전》 권4(1996년 11월 3일) 991쪽
  27. 두산동아(옛 동아출판사 포함)에서 펴낸 《동아백년옥편(탁상판)》(초판 7쇄, 2003년 1월 10일) 2264쪽
  28. 《동아 한한대사전》(1982년 10월 25일) 2181쪽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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