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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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성(道薩城)은 고구려의 성곽으로 신라 진흥왕이 공취하여 고구려의 10군을 점령하는 교두보를 구축하였다.
도살성의 소재지
[편집]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 직티리와 단성면 가산리 접경지역 도락산(道樂山)에 소재하며, 좌표는 N36 51.399 E128 18.627이다.
도살성의 전적사료
[편집]- 도살성(道薩城)[1]은 미상으로 분류되어 지리적인 위치의 비정은 충북 괴산군 도안면 니성산성(二城山城)[2]과 충남 천안[3]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삼국항쟁의 전적과 지리적으로 불합리하다.
- 도살성(道薩城)과 관련 전적사료는 이사부(異斯夫) 열전에, 진흥왕 11년(550)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쳐서 빼앗자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진흥왕은 두 나라 병사가 피로에 지친 틈을 타서 이사부에게 병사를 내어 그것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갑사(甲士)가 머무르게 주둔하여 지켰다. 이때 고구려에서 병사를 보내 와서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사부가 그것을 추격하여 대승하였다.[4]라는 사료에서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과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신라가 공취하여 죽령(竹嶺) 이북과 고현(高峴) 이내 고구려의 강역 10군을 점령할 수 있었다.
- 진흥왕 12년(551) 봄 3월에, 왕이 순수(循守)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서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니문(尼文)이 음악을 안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그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 지은 노래를 연주하였다.[5]라는 사료에서 진흥왕이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공취한 지역은 청풍강 유역에 도살성(道薩城)을 점령하면서 낭성(娘城)을 순수하여 하림궁(河臨宮)에서 우륵(于勒)이 새로 지은 청풍체(淸風體) 하림조(河臨調)를 경청하였다.[6]
도살성의 지리적 위치와 명칭의 정립
[편집]- 도살성(道薩城)은 1만 명의 대군의 주둔지, 도살성(道薩城)은 불교(佛敎)에서 득도(得道)의 도(道)와 보살(菩薩)의 살(薩)에서 불교와 관련한 성곽의 명칭으로써 백제의 금현성(金峴城)과 신라 진흥왕이 순수한 낭성(娘城) 하림궁(河臨宮)과 연접성이 있어야 한다.
-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는 성곽은 충북 단양군 도락산(道樂山)에 독락성(獨樂城)은 수천명을 수용하는 피난처[7]로 장기간 농성할 수 있으며, 산상봉에 광덕암(廣德庵)이 있다.[8] 또한 불암천(佛巖川)은 단양군 남쪽 20리에 있다.[9]라는 사료에서 불암천은 성곽의 외곽에 지금의 선암계곡으로 변천했다.
- 권상하(1641~1721)의 기문에, 상선암(上仙巖)에 제(題)하다. 1685년 여름에 독락성(獨樂城) 아래에 이르러 나무꾼에게 물어 본 뒤에 이른바 차일암(遮日巖)이란 곳을 찾았는데, 유심하고 기이하여 참으로 호로병 속의 세계였다.[10]라는 사료에서 지금의 상선암은 독락성의 서벽에 위치한 것으로 고증된다.
- 독락산성(獨樂山城), 독락성(獨樂城), 도락산성(道樂山城), 도락성(道樂城)은 삼국시대에 쌓아진 것이라고 하며, 그 둘레는 10여 정(町)에 달하고 10만 병사가 머무를 수 있는 큰 성이라 하는데 지금 성안에는 광덕암이 있다.[11]라는 자료에서 장기간 농성(籠城)의 요건을 갖춘 곳으로 불교의 관련 지명과 지리적, 역사적, 음운학적으로 도살성(道薩城)에 부합한다.[12]
신라가 공취한 고구려의 도살성
[편집]- 도살성(道薩城)은 고로봉형산성(栲栳峰形山城)으로 자연성벽을 포함하여 온 둘레는 약 4km 가운데 북쪽에 가산리 방면 계곡에 800m, 동쪽에 광덕사 입구에 600m의 석축이 남아있다.
- 도살성(道薩城)은 지리적으로 소백산맥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전략적인 요충지로 삼국시대 국경지대로 영남과 한강유역으로 진출을 공수(攻守)하는 관방유적으로 제천시 덕산면 신현리 금현성(金峴城)과 연접성을 지닌다.
- 도살성(道薩城)은 남쪽으로 대규모 왕궁지에서 문경, 예천, 충주, 청풍, 단양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웅거한 성곽이다.
- 도살성(道薩城)은 남쪽으로 벌령(伐嶺), 문경 동로면, 남남서쪽으로 황장산(黃腸山), 북쪽으로 적성(赤城), 북동쪽으로 공문성(貢文城), 서북서쪽으로 모녀치(毛女峙)와 연계한다.[13]
- 신라가 550년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공취하여 551년 3월에 청풍강 유역에 점령지역인 낭성을 순수하면서 하림궁에서 악성 우륵을 만나고, 죽령 이북의 고구려 10군 점령할 수 있는 교두보를 구축하였다.[14]
각주
[편집]- ↑ 《삼국사기》
- ↑ 민덕식《高句麗 道西縣城考》(1983)
- ↑ 이병도《국역 삼국사기》(1977)
- ↑ 《三國史記 卷第四十四 列傳 第四 異斯夫》眞興王 在位十一年大寳元年百濟拔髙句麗道薩城 髙句麗䧟百濟金峴城主 乘兩國兵疲命 異斯夫出兵擊之取二城増築留申士 戍之時髙句麗遣兵來攻金峴城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 ↑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眞興王 十二年春三月 王巡守 次娘城聞 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特喚之王駐河臨宮令奏其樂二人各製新歌奏之.
- ↑ 《청풍 성열현인 악성 우륵의 사료집성》(2013)
- ↑ 《대동지지(大東地志)》
- ↑ 《문화유적총람上》
- ↑ 《신증동국여지승람》
- ↑ 《국역 한수재집》
- ↑ 《양백지간의 산성봉수》(2000)
- ↑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2013)
- ↑ 《충북지방 성곽의 보존 및 활용방안》(2013)
- ↑ 《청풍 성열현인 악성 우륵의 사료집성》(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