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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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의 승려인 일연(一然)이 고려 충렬왕 7년(1281년)[1]인각사(麟角寺)에서 편찬한 삼국 시대의 역사서이다.[2] 원판(原版)은 전하지 않으며 2003년에 조선 초기의 간행본과 중종 임신본이 각각 대한민국의 국보 제306호와 제306-2호로 지정되었다.

구성[편집]

전체 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5권 내에 다시 9편으로 나뉘어 있다. 권수는 편목의 유형에 따라 구분한 것이 아니라 분량에 따라 편의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제일(第一)이 붙어 있는 것이 왕력과 기이 두 편인 바, 왕력은 후대에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1. 권1 왕력(王曆) 제1 : 간략한 제왕의 연대기로 중국 역대 왕조를 기준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를 대상으로 하여 기원전 57년부터 936년 고려 태조에 의한 후삼국시대의 통일기까지를 시간적 폭으로 한 연대표이다.
  2. 권1 기이(紀異) 제1 :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칠십이국, 낙랑군,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오가야, 부여, 이서국, 고구려, 백제 등 고조선으로부터 남북국시대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총 36조로 이루어져 있다.
  3. 권2 기이(紀異) 제2 : 통일신라의 출현과 이후 역대왕들 그리고 기타 등등을 다루고 있으며 총 24조. 고조선에서 고려 건국 이전까지 존재했던 여러 국가와 여러 왕(특히 신라왕)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다.
  4. 권3 흥법(興法) 제3 : 삼국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고 흥성하는 과정을 기록했다. 총 8조.
  5. 권3 탑상(塔像) 제4 : 불교의 흥성에 따라 삼국(특히 신라)에 주목할만한 사탑이나 불상을 조성했던 사실을 기록했다. 총 29조.
  6. 권4 의해(義解) 제5 : 신라의 고승들이 보여주었던 뛰어난 행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심을 천명하였다. 총 14조.
  7. 권5 신주(神呪) 제6 : 신라 밀교계통 고승들의 기이한 행적을 통해 불교와 무속의 융합 및 호국 불교의 모습 소개. 총 3조.
  8. 권5 감통(感通) 제7 : 불심이 남달랐던 일반 신자와 승려들의 기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의 가피력을 천명하였다. 총 10조.
  9. 권5 피은(避隱) 제8 : 구도 과정에서 세상을 등지고 홀로 불법을 닦은 승려들의 행적. 총 10조.
  10. 권5 효선(孝善) 제9 : 세속적 윤리인 효와 불교적 윤리(윤회, 인과응보)의 결합을 통해 신라인의 효행 사례 기록. 총 5조.

내용[편집]

삼국유사에는 삼국과 가락국(駕洛國 : 가야)의 왕대와 연대, 고조선 이하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신화·전설·신앙 및 역사, 불교에 관한 기록, 고승들에 대한 설화, 밀교 승려들에 대한 행적, 고승들의 행정, 효행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모든 설화는 삼국 시대의 것이지만, 유동하던 이야기가 고려 시대에 와서 문자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흘러 다니던 설화의 내용이 일연이라는 개인에 의해 작품화된 셈이므로 고려의 설화문학으로 취급될 수 있다.[3] 삼국유사에 수록된 설화의 주제는 주로 신라와 불교를 중심으로 편찬되어 있다. 고대사 연구에서 《삼국사기》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단군 신화를 비롯하여 이두로 쓰인 향가 14수가 기록되어 있어 국어 국문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향가는 《균여전》에만 11수(首)가 수록되어 있을 뿐, 다른 전적에는 전혀 전하지 않기 때문에 향가 연구에서 삼국유사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4] 또한 《제왕운기》와 더불어 단군 신화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으로 고려 후기, 대몽항쟁 과정에서 급부상한 단군 신앙과 동족 의식을 반영한다.[5]

고조선조[편집]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1 고조선조는 삼국유사의 첫머리이자 단군 관계 사료로써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해당 조에서는 위서와 고기, 당배구전, 통전의 4개 문헌을 인용하고 있다. 이 4개 문헌 가운데 확인 가능한 것은 당배구전(신당서 권100 열전제25 배구)이며, 나머지는 그 인용 문헌의 기록이 서로 맞지 않거나(통전) 인용했다고 밝힌 문헌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고기), 혹은 현존하는 기록에서는 인용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단군신화 기록은 서두에 "위서에 이르기를"(魏書云)이라고 적고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자가 있어서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으니,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현존하는 《위서》에는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는 일제 시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한 단군신화 자체에 대한 일연의 위조설로 이어졌다.[6]

이러한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1946년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상)》에서 삼국유사에는 위지와 후위서라는 별도의 전거가 분명히 있으므로 진수의 위지(전위서) 내지 위수의 위서(후위서)는 아니고 그밖의 조위의 사서로는 왕침이 지은 것이 있다며 이것이 고조선조에서 말한 위서가 아닐까 추단하였으며[7] 정인보의 이 설은 이후 북한 학계에서 주목되어 주류 학설이 되었다. 1954년 최남선은 《증보 삼국유사》 해제에서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위서에 대해 탁발위(북위)의 위서(후위서), 조위의 위서(위지), 내지는 지나(중국) 문적의 범칭일 가능성을 차례로 거론하고[8] "고기와 위서를 무엇인가고 의심까지 할 수는 있으려니와 망칭과 허구로 단정치 못할 것을 누구든지 생각할 것이오, 더구나 이러한 이유로써 전하는 사실그것의 전통적 근거를 의심하려 함은 고의가 아니면 고견'[9]이라고 혹평하면서도 "이미 실물이 없고 증빙 또한 없는 상황에서 지단하기는 곤란하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후 1930년대 이후 한국 학자들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행했다. 《삼국유사》가 언급한 위서에 대한 연구는 크게 일서설과 의탁설이 있는데[10] 일연이 《삼국유사》 고조선조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해당 서적의 이름을 헷갈렸거나 후대의 전승과정에서 서적의 이름이 잘못 표기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의탁설은 일연이 단군 전승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 《위서》라는 공신력 있는 서적의 이름을 의탁했다는 것으로 일본의 사학자 이노우에 히데오가 1980년 《아시아 공론》에서 주장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그 시대적 배경과 구성>에서 주장하였다.[11] 박대재는 2001년 '삼국유사 고조선조 인용 위서론'에서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는 북제의 위수가 지은 '후위서(後魏書)'라 불리는 《위서》이고 본래 위수가 편찬했던 대로의 《위서》가 아니라 북송 시대의 교감본이며, 《위서》의 복잡한 개수, 교감 과정이나 《삼국유사》 속의 다른 '위서' 인용 부분 및 일본측에 남아 있는 《한원》의 《위서》 인용 부분에도 현존 《위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북송 교감본 《위서》와 그 이전 고본 《위서》 사이에는 내용상 상당한 출입이 있었을 것이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연이 인용했을 고본과는 달리 단군조선 관계 기사가 들어 있지 않은 (현존하는 것과 같은) 교감본 《위서》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았다.[12]

진지왕에 대한 기록[편집]

삼국사기는 신라의 진지왕이 재위 4년만에 사망하고 진평왕이 뒤를 이었다고 적었지만, 삼국유사는 진지왕이 황음무도한 정사를 펴다 국인에 의해서 폐위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간본[편집]

조선초 간행본(선초본[鮮初本])[편집]

국보 제306호[편집]

삼국유사 권3~5
대한민국국보
삼국유사.jpg
지정번호 국보 제306호
(2003년 2월 3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제작시기 조선
비고 권3~5 1책

이 간본은 삼국유사 권3~5까지의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인데, 푸른 비단으로 개장(改裝)한 표지 위에 큰 글자로 “三國遺事”라는 제첨(題籤)을 하고, 작은 글자로 “乙亥 昔珠”라고 적혀 있다. 본문은 책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내용이 손상된 경우는 보사(補寫)되어 있는데 앞부분 6장이 결락된 3권은 50장, 4권은 31장, 끝의 4장이 결락된 5권은 26장으로 도합 107장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책의 광곽(匡郭)의 길이는 정덕본(正德本)에 비하여 대체로 평균 1cm 내외가 크고, 변란(邊欄)은 모두 쌍변이다. 반면에 정덕본은 쌍변과 단변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고려왕들의 어휘(御諱)에 대한 피휘대상자, 이를테면 “隆(太祖의 父)”을 “豊”으로 대자피휘한 것 과 “武(惠宗의 諱)”를 결획피휘한 경우가 있으나, 대부분의 대상자에 피휘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내용면에서는 정덕본의 여러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조선 중종7년(1512년, 임신년) 경주에서 간행된 정덕본보다 앞선, 14 세기말(조선초)에 간행된 현존하는 삼국유사 중 가장 빠른 간본으로 조선초기 서지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정덕본 삼국유사의 오류(誤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13]

보물 제419-2호[편집]

삼국유사 권2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419-2호
(2002년 10월 19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 60-17
성암고서박물관
비고 권2 1책

권 2 기이(紀異)만 있는 잔본(殘本) 1책으로, 본문 49장 가운데 17~20장의 4장은 영인하여 보완하였는데, 표지는 후대의 개장으로 卍字문양이며 장정은 5침의 홍사(紅絲)로 맨 선장본(線裝本)이다. 앞 표지 이면(裏面)중앙에 “黃馬仲陽月買得 泥山南氏家藏”이란 묵서가 있고, 그 옆에는“黃馬二陽月買得 開 日藏”이라는 부기(附記)가 있으며 뒤 표지 이면에는“니산장(泥山藏)”이란 묵서가 있어, 무오(戊午)년 2월에 남씨가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보면 전체 49장 중 24장은 광곽(匡郭)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1cm이상 길고, 변란(邊欄)은 정덕본이 쌍변(雙邊)과 단변(單邊)이 혼재되어 있는 데 반하여 모두 쌍변이다. 내용면에서는 고려왕(高麗王)들의 이름자를 피해 쓰는 피휘(避諱)가 적용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조선초기 간행본임을 알 수 있으며 정덕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의 오류를 교정해 줄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가장 귀중한 사서 중의 하나로, 이 책은 현존하고 있는 삼국유사 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조선초기 간본의 서지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도 양호하다.[14]

범어사본(보물 제419-3호)[편집]

삼국유사 권4~5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419-3호
(2002년 10월 19일 지정)
소재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소유자 범어사
비고 권4~5 1책

이 책은 14세기말(조선초) 경주에서 간행된 것으로 삼국유사의 현존본 중 가장 빠른 간본인 동시에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초기본들의 훼손된 부분과 결락된 부분을 보완함은 물론 동시에 정덕본의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귀중한 책이다. 삼국유사 권제4~5까지 2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4가 31장, 권5는 전체 30장에서 2장(제26-27) 이 결락된 28장의 도합 59장인데 첫장 상단의 묵서 기록으로 보아 광무11년(1907년) 오성월(吳腥月)이 입수하여 범어사에 기증한 책임을 알 수 있다. 형태적인 면에서 광곽의 길이가 정덕본에 비하여 대체로 크고, 변란도 모두가 쌍변이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정덕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가 보이고 특히, 고려왕들의 어휘(御諱)대부분에 피휘(避諱)가 적용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조선초기의 간행본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조선초 판본 중 유일하게 권4의 이혜동진(二惠同塵)·자장정률(慈藏定律)·원효불기(元曉不 )·의상전교(義湘傳敎) 등의 편에 구결(口訣)로 현토(懸吐)가 되어 있으며, 권제5의 제27-30장 이 있는 것은 범어사본이 유일하다.[14]

정덕본(임신본)[편집]

조선 중종 7년인 임신년(1512년) 당시 경상감영이 소재하고 있던 경주(慶州)에서 부사 이계복에 의해 삼국사기와 함께 간행된 것이다. 이계복은 삼국사기와 함께 삼국유사의 초판본 완질을 구하여 그것을 여러 고을에 나누어 판각하여 모으도록 하였다. 이때 원각 판본 가운데 마멸이 심한 부분은 번각본으로 교체하였는데, 정덕본 가운데는 당시 원각판과 함께 마모된 부분을 교체하여 간행했던 번각판이 섞여있으며, 번각판의 경우는 어느 고을에서 새긴 것이냐에 따라서 그 글씨체가 달라졌다.

중종임신본은 현재 한국에 전하는 삼국유사의 판본으로써 가장 완전한 것으로 평가했지만, 오자와 결자, 탈자가 포함되었고 전도되거나 체제나 협주 방식이 잘못 기재되고 문장이 서로 뒤바뀐 내용이 많으며 같은 중종임신본끼리도 소장본에 따라서 출입이 잦다는 지적이 있다.

규장각본(국보 제306-2호)[편집]

삼국유사
(三國遺事)
대한민국국보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in museum.jpg
지정번호 국보 제306-2호
(2003년 4월 14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관악구 서림동 산56-1
서울대학교
비고 권1~5 2책

규장각본은 중종 임신간본 가운데 비교적 일찍 발간된 것이다. 왕력(王曆)과 권제1~권제5까지 5권을 2책으로 묶은 것으로, 왕력 15장, 권제일 37장, 권제이 49장, 권제3 56장, 권제4 31장, 권제5 30장, 발문(跋文)1장 등 총219장이다. 형태적인 면으로 볼 때, 본문 전체를 일일이 배접하고 표제(表題)에는 큰 글자로 '三國遺事'라 묵서되어 있으며, 표지는 개장한 것으로 격자 무늬 한지에 주사(朱絲)를 이용한 오침철장(五針綴裝)이다. 발문 1장을 제외한 전체 218장 중에서 匡郭의 길이가 鮮初本에 비하여 평균 1cm 내외 짧고, 邊欄은 선초본이 모두 雙邊인 데 반하여 이 책을 포함한 중종 임신간본은 雙邊과 單邊이 뒤섞여 있다.

이 책은 황의돈 교수 소장이었으나 뒤에 통문관을 거쳐 서울대학교로 이관된 것이며,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정덕본 삼국유사로서는 낙장이 없는 유일한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내에 현존하는 다른 중종 임신간본을 대상으로 四周 匡郭과 문자의 마멸도를 비교한 결과 이 책은 匡郭과 문자의 결락 또는 마멸된 부분이 가장 적고 인쇄도 선명하여 16세기 전기(前期)에 인출(印出)된 것으로 판단된다. 내용면에서는 중종 임신간본 간행시 선초본의 착오를 수정한 것 못지 않게 새로운 오류를 일으킨 것도 적지 않아 조선 초기 간본과 문자상 많은 차이를 보인다.

1975년 한국의 민족문화추진회는 이 규장각본을 반으로 축소 영인하여 한국고전총서1 교감 삼국유사로 출간하였다. 이때 두주 형식으로 여러 판본을 대교하거나 인용된 원전의 내용을 찾아서 교감하였는데, 교감을 두주로 붙였기 때문에 영인된 서울대 소장본은 현재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판본이다.

고려대 소장본[편집]

삼국유사 권3~5
대한민국보물
지정번호 보물 제419-4호
(2002년 10월 19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
소유자 고려대학교
비고 권3~5 1책

삼국유사의 권제3~권제5까지 3권을 1책으로 묶은 것으로, 권3의 첫부분 10장, 권5의 18장 후면부터 31장(발문)까지 모두 23장이 결락되었다. 표지는 개장(改裝)한 것으로 홍사(紅絲)를 이용한 오침철장(五針綴裝)이며, 최남선의 소장이었다가 후에 고려대학교에 기증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이용하고 있는 중종 임신간본 가운데서 규장각본과 함께 비교적 초기에 인출한 선본(善本)에 속하며, 중종임신본의 서지적인 특징 및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정덕본 중에서는 유일하게 구결(口訣)로 현토(懸吐)되어 있어서 독해에 도움을 준다.[14]

국외 소장 삼국유사[편집]

일본 덴리 대학에는 안정복이 동사강목 편찬 당시 참조한 것으로 알려진 순암수택본 삼국유사와 봉좌문고 소장본 삼국유사, 간다 집안 소장본 삼국유사가 전해지고 있다. 와타나베가 일본으로 가져간 유점사본 삼국유사의 경우는 고려대 도서관에 보관중인 최남선 소장본(광문회본)과 마찬가지로 3권에서 5권에 이르는 결락본이다.

덴리대 소장 순암수택본 삼국유사는 1916년 이마니시 류가 수집한 것으로 책표지 상단에 '선상공가장서', 하단에 '남부의근추기'라는 장서 도장이 찍혀 있으며, 조선 중기의 문인 김부의(1525~1582)의 아버지 김연(1487~1544)이 소장했다가 안정복에게로 건너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순암수택본은 중종 임신간본이 간행된 해에서 멀지 않은 1544년에 간행되었는데, 낙장이 없는 5권의 완질본이기는 하지만 심하게 가필되었거나 윤필된 부분이 많고(특히 왕력편에 상당한 내용이 첨가되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본이나 고려대 만송문고 소장본에서 결락되었거나 오자 또는 결획된 부분을 첨가하거나 바로잡기도 했지만 규장각본이나 만송문고본에 분명히 같은 글자로 나와 있는 것을 첨가하거나 다른 글자로 고치기도 해서 중종임신간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무리한 경우도 없지 않다.

기타[편집]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 제18호는, 최남선에 힘입어, 《삼국유사》 전체를 게재하게 하였다.[15]

삼국사기와의 비교[편집]

삼국사기》가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야사에 해당하는데, 이는 일연이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존중하면서 《삼국사기》에 채 실리지 못한 단군조선, 가야, 이서국 등의 기록과 수많은 불교 설화 및 향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우선 역사서술의 체재를 삼국사기와 달리하고 있다. 정사로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되어 있으나, 개인의 저술인 삼국유사는 내용별로 편목을 나누어 옛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기술된 옛 이야이기의 주제들은 체재상의 제약없이 저자에 의하여 자유로이 선택된 것들이다. 삼국유사의 편목 중에는 중국 고승전의 체제를 방불케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대로는 아니다. 가령 탑상조 같은 것은 그 예이다. 삼국사기도 일정한 목적 밑에 기사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편찬자들의 해석을 가미하고 있기는 하지만 정사로서의 기전체의 성질상 기존 사료의 재편성이 주된 작업이었다. 이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주제나 사료의 선정이 훨씬 자유로웠다.[16] 논자에 따라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비교하기 적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같은 불교사서인 고승전과 비교해야 온당하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시대를 구분하는 방법에서도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는 상대, 중대, 하대의 3시기로 구분하며, 성골이 아닌 진골이 집권하기 시작한 태종무열왕부터를 중대로 삼았고 진골과 그 방계왕족간의 왕위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한 선덕왕 이후를 하대로 보았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의 3시기로 구분하며, 불교식 왕명과 중앙관제를 도입하고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한 법흥왕을 중고의 시작으로 삼고, 중국식 시호를 받기 시작한 태종무열왕 이후를 하고로 보았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삼국사기의 3시기 구분법을 중심으로 신라사를 연구하는데, 삼국유사의 상고와 중고가 삼국사기의 상대 안에 포함되므로 상고와 중고를 추가로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조작설[편집]

古記云昔有 桓囯謂帝釋也 庻子桓雄...(《고기》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

— 《삼국유사》(규장각본)〈권제1〉고조선 조(條)

《삼국유사》의 고조선 관련 기록에서 환인(桓因)이 원래 환국(桓國)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문정창의 주장에 따르면 일제 하에서 《삼국유사》 정덕본을 영인하면서, 이마니시 류가 주동이 되어 한국의 역사를 날조하면서 ‘환인’으로 고쳤다는 것이다.[17] 책에는 붓으로 덧칠하여 원래의 글자를 바꾼 흔적이 있으며 1904년 일본 도쿄 제국대학에서 출간된 《삼국유사》에는 해당 구절이 “昔有桓國(석유환국)”으로 인쇄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와 같은 시대에 쓰여진 《제왕운기》에서도 ‘환국’이 아니라 ‘환인’ 또는 ‘상제환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평양 조(條)에서 인용된 《단군고기(檀君古記)》에도 ‘因’ 으로 표기되어 있다. 정덕본이 판각(1512년)되기 이전에 편찬된 《단종실록(노산군일기)》단종 즉위년(1452년) 6월 28일 기록에는 “《三國遺史》, 有曰 ‘《古記》云 “昔有桓因庶子桓雄...(《삼국유사》에 이르기를 ‘《고기》에서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덕본 이전의 《삼국유사》에도 환인(桓因)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쿄 제국대학본 《삼국유사》에도 “昔有桓國(석유환국)”에 이어 “謂帝釋也(위제석야)”라는 할주가 붙어 있어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석은 불교용어로 제석환인은 불교의 신인 인드라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환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그 자리에 들어갈 수가 없다.[18]

최남선은 정덕본보다 고본(古本)인 “송석하본(宋錫夏本, 석남본)”을 비롯하여 “광문회본(光文會本),”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 등을 교감하여 정덕본의 “囯”자가 원래 “因”의 이체자(異體字)인 “口 + 土”(口자의 내부에 土 가 들어 있는 형태) 또는 “𡆮”으로 새겨야 하는 것을 실수하여 囯으로 잘못 새긴 오자(誤字)임을 고증하였다.[19] 최남선의 고증 이래 한국사학계에서는 환국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삼국유사 권3~5 국보 제306호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삼국유사,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09101&cid=40942&categoryId=33382]
  3. 구인환 (2002). 《삼국유사》. 신원문화사. 417쪽. 89-359-1060-0. 
  4. 구인환 (2002). 《삼국유사》. 신원문화사. 426쪽. 89-359-1060-0. 
  5. 정구복 (1999). 《한국중세사학사(Ⅰ)》. 집문당. 291쪽. 8930307485. 
  6. 나가 미치요, 1884 <조선고사고> 《사학잡지》5-3, 이마니시 류, 1929 <단군고> 《청구설총》1; 《조선고사의 연구》(근택서점, 경성)
  7. 정인보(1946년) <시조단군> 《조선사연구(상)》(서울신문사, 서울) 34쪽. 다만 위당이 말한 것과 같은 조위계 위서로는 왕침의 위서 외에도 하후담, 손해, 완적 등의 위서가 추가로 확인되는데, 하후담은 같은 시기 완성된 진수의 삼국지를 보고 자신의 책을 파기해버렸으며, 손해의 위서는 656년 편찬된 수서 경적지에도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완적의 위서 또한 유지기(661~721)가 사통을 집필했던 710년 무렵에는 이미 망일되어 책의 제목만이 전해지는 상태였다. 더구나 왕침의 위서의 경우 그 내용 가운데 일부가 배송지의 진수 편 위서 주석을 통해 인용되기는 했으나, 마지막 권인 오환선비동이전에서는 오환과 선비 부분에서만 왕침의 위서를 전재하고 동이전에서는 한 마디도 인용하지 않았음을 들어 과연 왕침의 위서에 동이열전이라는 항목이 존재하기는 했는지 의심스럽고, 왕침 자신이 조협의 당여로써 조위 왕실과 연고가 있었던 데다 왕침이 위서를 집필하던 와중인 정원 2년(255년)에 마찬가지로 조협의 당여로써 사마씨에 대항해 관구검과 문흠이 난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사건도 있었던 점 등을 들어, 막 조협의 당여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간신히 복직된 왕침으로써는 반란을 일으킨 관구검과 그에 의해 개척된 동이에 대한 사실을 직서하기는 매우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애초부터 왕침의 위서에는 동이열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박대재(2001년) '삼국유사 고조선조 인용 위서론' 《한국사연구》112, 한국사연구회, 8~13쪽).
  8. 최남선(1954) 《증보 삼국유사》(민중서관, 서울) 42~48쪽
  9. 최남선(1954) 《증보 삼국유사》(민중서관, 서울) 44
  10. '2천년 전'이라는 문구와 고조선조에 이어지는 위만조선에 대한 기록에서 위만衛滿을 위만魏滿으로 표기하였던 것에 주목해 단군설화를 뒤에 이어지는 위만조선의 출자 설화로써 간주하기도 한다(정중환(1977)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조에 인용된 위서에 대하여> 《대구사학》12, 13합집, 20쪽)
  11. 이노우에 히데오(1980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그 시대적 배경과 구성>《아시아 공론》9-5;1982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연구》(동북아세아연구회 편, 중앙출판)62
  12. 박대재(2001년) '삼국유사 고조선조 인용 위서론' 《한국사연구》112, 한국사연구회, 16~31쪽
  13. 문화재청고시 제2003-6호,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지정 Archived 2015년 4월 2일 - 웨이백 머신》, 문화재청장, 2003-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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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고운기,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현암사, 2009) 24~25쪽. ISBN 978-89-323-1536-2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에다 일연(一然)의『삼국유사(三國遺事)』 를 실은 것이었다.”
  16. 이기백,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三國遺事의 史學史的 意義) 진단학회, 《진단학보 36》, 1973.12, “三國遺事는 우선 歷史叙述의 體裁를 三國史記와 달리하고 있다. 正史로서 편찬된 三國史記는 紀傳體로 되어 있으나, 個人의 著述인 三國遺事는 內容別로 篇目을 나누어 故事를 記述하고 있다. 記述된 故事의 主題들은 體裁上의 制約 없이 著者에 의하여 자유로이 선택된 것들이다. 三國遺事의 篇目 중에는 中國高層傳의 體制를 방불케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반드시 그대로는 아니다. 가령 塔像條 같은 것은 그 例이다. 三國史記도 일정한 目的 밑에 記事를 선택하고 이에 대한 編纂者들의 解釋을 加味하고 있기는 하지만 正史로서의 紀傳體의 성 질상 旣存史料의 再編成이 主된 作業이었 다. 이에 대 해서 三國遺事는 主題나 史料의 選定이 훨씬 自由로왔다.”
  17. 문정창, 《군국일본조선강점 삼륙년사》 중·하, 백문당, 1965년.
  18. 이가원・ 허경진 역 《삼국유사》(한길사, 2006) 64~65쪽
  19.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1938년 / 최남선, 《신정 삼국유사》, 1954년 / 중화민국교육부, 異體字字典, 2000년 [1]

참고 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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