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
우산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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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山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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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왕 ?~? | 우해왕[1] | |||
역사 | ||||
• 512년 6월 • 930년 8월 • 1018년 11월 • 1022년 | 신라에 복속 고려에 복속 여진족 해적의 침입 고려에 흡수 |
우산국(于山國)은 신라시대에 현재의 경상북도 울릉군인 울릉도와 부속섬을 다스리던 나라다.
역사[편집]
첫 등장[편집]
244년 왕기가 위궁을 토벌하러 옥저 동해안에 도착했고 노인에게 동해에 사람이 사느냐 물으니 바다 동쪽에 섬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으나 여자만 있고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2]
신라의 복속[편집]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때, 무력에 의한 항복보다는 교묘한 계책을 써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나무 사자를 만들어 배에 나눠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르러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를 놓아 모두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자 512년 6월 항복해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3]
고려에 복속 그리고 여진족 해적의 침입과 멸망[편집]
930년 우산국은 백길(白吉),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면서 복속을 원했고 태조는 두 명에게 관직을 내렸다.[4] 1018년(현종 9년) 고려는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략을 받아 농사를 못하게 되자, 이원구(李元龜)를 보내 농기구를 보냈고[5] 1019년(현종 10년) 여진족으로부터 도망쳐온 자들을 모두 돌아가게 했다.[6] 1022년(현종 13년) 우산국 백성 중 여진족에게 노략질 당하여 망명온 자들을 예주에 거주하게 하고 호적에 편입되면서[7] 멸망하였다.
각주[편집]
- ↑ 조은희. “「우해왕과 풍미녀의 전설」”. 《디지털울릉문화대전》. 2017년 12월 1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12월 13일에 확인함.
- ↑ 진수 (3세기). 〈왕기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궁을 추격〉. 《三國志》 [삼국지]. 권30 동이전. 2017년 6월 6일에 확인함.
- ↑ 김부식 (1145년). 〈지증(智證) 마립간(麻立干) 13년(十三年) 우산국을 정벌하다 (음력 512년 6월)〉. 《三國史記》 [삼국사기]. 제4권(卷第四)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第四). 2017년 8월 5일에 확인함.
- ↑ 〈태조(太祖) 13년(十三年) 우릉도에서 공물을 바치다〉. 《高麗史》 [고려사]. 권1(第一) 세가(世家) 권제1(卷第一). 1451년. 2017년 12월 13일에 확인함.
- ↑ 〈현종(顯宗) 9년(九年) 우산국에 농기구를 하사하다〉. 《高麗史》 [고려사]. 권4(第四) 세가(世家) 권제4(卷第四). 1451년. 2017년 12월 13일에 확인함.
- ↑ 〈현종(顯宗) 10년(十年) 우산국 사람들을 돌려보내다〉. 《高麗史》 [고려사]. 권4(第四) 세가(世家) 권제4(卷第四). 1451년. 2017년 12월 13일에 확인함.
- ↑ 〈현종(顯宗) 13년(十三年) 우산국 피난민을 호적에 편입하다〉. 《高麗史》 [고려사]. 권4(第四) 세가(世家) 권제4(卷第四). 1451년. 2017년 12월 13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