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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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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
薛仁貴
설인귀
설인귀
인귀(仁貴)
출생일 614년
사망일 683년
국적 당나라
성별 남성
충성 당나라
복무 당나라군
근무 당나라 육군

설인귀(薛仁貴, 614년 ~ 683년)은 당나라 초기의 명장 중의 하나이다. 이름은 설례(薛禮)였으며, 자는 인귀(仁貴)로, 통상 설인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경력 중에는 고구려 원정이 있었고, 670년대의 토번 원정과 신라 원정에서는 패하였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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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궁성의 북문을 수비한 우령군중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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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絳州) 용문 출생으로 아버지는 설궤(薛軌)이며,[1] 어려서 가난해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고 한다.

당 태종 정관 19년/고구려 보장왕 4년(645년) 태종고구려를 공격할 때, 아내 류씨(柳氏)의 권유로 장사귀(張士貴)의 군졸로 응모, 낭장(郎将) 유군앙(劉君昂)을 고구려군의 포위를 뚫고 구해내면서 이름을 떨쳤고, 안시성 공방전에서 안시성을 구원하러 출정한 고구려 장군 고연수의 군을 상대로 사람들의 눈에 띄는 흰옷에 창을 들고 두 개의 활을 쥐고 선봉에 서서 공을 세웠고, 이것이 태종의 눈에 띄어 금백(金帛)을 하사받고 유격장군(遊擊將軍) ・ 운천부과의(雲泉府果毅)로 발탁되었다. 당군이 안시성에서 퇴각한 뒤에는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郎将)으로 전임, 장안 궁성의 북문 수비를 맡게 되었다.

당 고종 때인 영휘(永徽) 5년654년 고종이 만년궁(万年宮)으로 행차해 있었을 때 한밤중에 홍수가 나서 현무문(玄武門)까지 물에 잠겼을 때 숙위들이 거의가 도망가서 흩어진 사이에, 설인귀는 「천자가 위급한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할까?」라며 문을 올라가 큰소리로 외쳐 궁중에 경고하였고, 고종이 잠에서 깨어 궁을 빠져나왔을 때 고종의 침소가 물에 잠겼다. 설인귀 덕분에 목숨을 구한 고종은 그를 충신이라며 칭찬하였다고 한다.

현경(顕慶) 2년(657년) 소정방(蘇定方)이 서튀르크(西突厥)의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를 공격할 때 설인귀를 대의명분 없는 전쟁은 있을 수 없다며 아사나하로에게 붙잡혀 있던 아사나니숙(阿史那泥孰)의 처자를 탈환해 은덕을 보이자는 진언을 올렸고, 그의 작전은 성공하였다.

현경 3년(658년) 정명진(程名振)의 부장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의 귀단성(貴端城)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현경 4년/보장왕 18년(659년)에 양건방(梁建方) ・ 글필하력(契苾何力) 등과 함께 횡산(橫山)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温沙門)을 상대하여 승리하였고, 적중에 단독으로 돌진해 들어 가서 공적을 세웠다. 또한 고구려의 석성(石城)에서 단기(単騎)로 돌격해서 적의 궁수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또한 신문릉(辛文陵)과 함께 거란을 흑산(黒山)에서 격파하고 그 왕인 아복고(阿卜固)를 사로잡아 동도(東都)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그 공적으로 설인귀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将軍)에 임명되었고 하동현남(河東県男)에 봉해졌다.

용삭 원년(661년) 철륵도행군부총관(鉄勒道行軍副総管)으로 임명되었다. 출발 전에 당 고종 앞에서 화살을 쏘아 한 번에 다섯 벌의 갑옷을 꿰었고, 고종이 이에 경탄하였다고 한다. 용삭 2년(662년) 튀르크의 10여 만 군사가 당군을 공격해 그 정예 기병 수십 기가 당군에 도전해 왔을 때 설인귀는 세 발의 화살을 쏘아 세 사람을 죽였다. 이에 당군의 사기가 올랐고 거꾸로 튀르크군은 사기를 잃어 당군에 항복하였다. 이때 설인귀는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해서 투항한 튀르크 병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당의 군중에서는 「장군이 세 화살로 천산(天山)을 평정하니 장사들은 장가(長歌) 부르며 한관(漢関)에 들어 오네」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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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乾封) 원년/고구려 보장왕 25년(666년)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죽고 그 장남 연남생(淵男生)이 아우 연남건(淵男建) ·연남산에게 쫓겨 당으로 망명해 오자 당 고종은 방동선(龐同善) 등을 보내어 그를 위무하였는데, 연남건이 연남생의 당 망명을 막으려 하자 설인귀는 고종의 명을 받들어 건봉 2년(667년) 고구려 신성(新城)에 도착, 이적(李勣)의 휘하에 들어 갔다. 설인귀는 남건이 보낸 고구려 군사의 야습을 격퇴하고 남소(南蘇)·목저(木底)·창암(蒼巖) 등 3성을 함락시키고 연남생의 군과 합류하였다. 총장 원년(668년)에 정예 2천 명을 거느리고 부여성(扶余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연해 지방을 경략하며 이적의 군과 합류하였다. 나·당 연합군에게 고구려가 망한 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의 행정구역이었던 5부, 176성, 697,000의 민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로써 통치하게 하였다. 설인귀는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평양에 주둔하라는 명을 받고 좌무위대장군에 임명되어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해졌다. 하지만 고구려 부흥군의 거센 저항과 이들을 지원하는 신라의 반격으로 평양에 위치해 있던 안동도호부는 요동성을 거쳐 신성으로 옮겨가야 했다.

함형 원년(670년) 티베트에 멸망당했던 토욕혼(吐谷渾)을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토번 침공이 결정되었는데, 설인귀는 라사도행군대총관(邏娑道行軍大総管)으로 임명되어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真) ・ 곽대봉(郭待封) 등을 거느리고 대비천(大非川)에서 오해성(烏海城)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곽대봉이 설인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운송하던 군수물자를 천천히 운반하다 티베트군에게 포착되어 양식과 무기 보급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설인귀는 할 수 없이 대비천으로 물러났지만 그곳에서 티베트의 가르친링(論欽陵)이 이끄는 40만 군사의 습격으로 대패하였다(대비천 전투). 설인귀는 가르친링과 화약을 맺고 돌아올 수 있었고, 토욕혼의 옛 땅은 티베트에 넘어갔다. 설인귀는 이 일로 관직을 잃고 서인으로 떨어졌다.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한 신라군에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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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의 지원을 받아 봉기하면서(나당전쟁) 함형 2년/신라 문무왕 11년(671년) 설인귀는 계림도행군총관(鷄林道行軍總管)으로 재기용되어 신라를 침입했고, 이때 설인귀는 앞서 당의 병사를 청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놓고 이제 와서 백제 땅을 점거하고 고구려 유민을 지원해 당에 맞서려 드는 신라를 비방하는 편지를 문무왕에게 보냈으며, 문무왕은 이에 대해 당병이 신라를 도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면 패강(대동강) 이남은 모두 신라의 영토로 인정하기로 했음에도 백제를 멸망시켜 놓고도 그대로 백제 땅에 머무르며 웅진도독부를 내세워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려 들었던 과거 당의 태도를 지적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후 설인귀는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소환되어 상주(象州)로 유배되었다가 훗날에 사면을 받아 귀환할 수 있었다. 상원(上元) 2년/신라 문무왕 12년(675년) 당은 신라의 천성(泉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의봉 원년/신라 문무왕 13년(676년) 11월 설인귀가 이끄는 병선이 기벌포를 침범하였는데, 신라의 사찬(沙飡) 시득이 이끄는 신라 함선이 이를 맞아 싸웠다. 처음에는 신라군이 패하였으나, 이어 크고 작은 22번에 걸친 싸움 끝에 당나라 수군 4,000여 명이 죽었다.[2]

개요 원년(681년) 과주자사(瓜州刺史) ・ 우령군위장군(右領軍衛将軍)에 검교대주도독(検校代州都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당의 북쪽 변경을 공격한 튀르크의 아사덕원진(阿史徳元珍)을 운주(雲州)에서 격퇴했다.

영순 2년(683년) 일흔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우효위대장군(左驍衛大将軍) ・ 유주도독(幽州都督)이 추증되었다.

《구당서》(舊唐書) ‧ 경적지(經籍志)와 《신당서》(新唐書) ‧ 예문지(藝文志)에는 모두 설인귀의 저작으로 「《주역신주본의》(周易新注本義) 14권」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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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10년(671년) 7월 26일에 승려인 임윤법사(琳潤法師)를 통해 문무왕에게 항의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한국의 《삼국사기》와 중국의 《전당문》에 실려 있다.

해석문은 다음과 같다.

행군총관(行軍總管) 설인귀(薛仁貴)는 신라 왕께 편지를 바칩니다. 맑은 바람 만 리 길, 큰 바다 삼천리를 황제의 명을 받고 정할 일이 있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왕께서는〕 삿된 마음을 조금 움직여서 변경의 성들에 무력(武力)을 쓴다고 하는데, 유야(由也)의 한 마디 말을 저버리고 후생(侯生)의 한 번 허락을 잃으신 것입니다.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어, 꽃과 꽃받침의 그늘이 크게 벌어지고 서로 그리워하는 달이 헛되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저런 말을 더하면 실로 한숨과 탄식만 더할 뿐입니다.

선왕(先王)인 개부(開府)께서는 한 나라의 다스림을 꾀하시고 나라 안 모든 지역의 일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노략질을 경계하였습니다. 천리 땅 곳곳에서 여러 차례 다툼이 있어서 누에치는 아낙네는 제때에 뽕잎을 따지 못하고 농사짓는 농부는 밭 갈 시기를 잃었습니다. (선왕께서는) 나이가 이순(耳順)이 다 되어 해가 지는 만년임에도 배타고 바다를 건너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멀리 양후(陽侯)의 험난함을 건너서 마음을 중국 땅에 기울여서 천자가 계신 대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외롭고 약함을 모두 늘어놓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명확하게 말하여 마음속에 품은 것은 모두 드러내었으니, 듣는 사람이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는 기개가 천하에서 으뜸이고 정신은 우주에 왕성하여 반고(盤古)가 아홉 번을 변화하고 거령(巨靈)이 손바닥을 한 번 씀과 같았습니다. 쓰러지는 자를 떠받치고 약한 사람을 구하기에 날마다 쉼이 없어서 선왕을 애처롭게 여겨 받아들이고 그 요청한 바를 가엾게 생각하여 들어주었습니다. 가벼운 수레와 날쌘 말, 아름다운 옷과 좋은 약으로 하루 동안에도 자주 만나 특별한 대우를 하였습니다. (선왕께서도) 또한 이러한 은혜를 입고서 마주쳐 군사를 내어 떨치니 그 맞음이 물고기가 물을 만남과 같았고 쇠와 돌에 새긴 것보다 분명하였습니다. 봉황 자물쇠 1,000겹과 학 대문[鶴關] 10,000 호(戶)되는 궁궐에서 연이어 머물며 술을 마시고 금빛으로 빛나는 대궐의 계단에서 웃고 이야기하면서 군사 문제를 함께 의논하여 기일을 정해 응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루아침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바다와 육지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떨쳤습니다. 이때에 변방의 풀에 꽃이 피고 느릅나무註 021에 새 열매가 맺혔습니다. (지난번) 주필의 싸움에서 문제(文帝)께서 몸소 나가 백성들을 안부를 묻고 불쌍한 사람을 진휼하였으니, (이는) 의로움이 깊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얼마 뒤에 산과 바다가 모양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은 후에 성인(聖人)께서 계승하셨고 왕께서도 또한 가업(家業)을 잇게 되었습니다. 서로 바위와 칡처럼 의지하여 토벌하는 군사를 함께 일으켜서 무기를 깨끗이 하고 말을 훈련시켰으니, 이는 모두 선인(先人)들의 뜻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 중국은 피로하였으나, 천자의 곳간은 때때로 열려 곡식과 풀을 날라 날마다 대주었습니다. 조그만 신라 땅 때문에 중국의 군사를 일으켜 이익됨이 적고 쓸모없음에 애쓰게 되었으니, 어찌 그칠 줄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선군(先君)의 신의를 잃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강한 적이 이미 없어졌고 원수와 같은 사람들은 나라를 잃게 되어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이 또한 가졌습니다.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른 데에 옮기지 말고, 안과 바깥이 서로 의지하여 병기를 녹이고 허술한 곳을 변화시켜 자연스럽게 후손에게 좋은 방책을 전해 주고 자손을 현명하게 도와주면, 훌륭한 역사가가 이를 칭찬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께서는 편안히 할 수 있는 터전을 버리고 떳떳하고 정당한 방책을 지키기를 꺼리어, 멀리는 천자의 명령을 어기고 가깝게는 아버지의 말씀을 저버리고서 천시(天時)를 마음대로 해치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속이면서 한쪽 모퉁이 땅 구석진 곳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었습니다. 과부들이 군량의 수레를 끌고 어린 아이가 둔전(屯田)을 경작하니, 지키려 해도 버틸 수 없고 나아가려 해도 항거(抗拒)할 수 없습니다. 얻은 것으로 잃어버린 것을 보충하고 있는 것으로 없어진 것을 채우려고 하였으나 크고 작은 것이 짝이 맞지 않고 순리를 거스르고 차례를 어겼으니, (마치) 활을 당겨 나아가면서 발 앞의 마른 우물에 빠질 줄을 모르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나아가면서 참새가 자기를 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왕께서는 살아 계실 때 일찍이 천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바르지 못한 생각을 품고서 거짓으로 정성스런 예절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사욕(私欲)을 좇으려 하고, 천자의 지극한 공적을 탐하여 구차하게 앞에서는 은혜를 바라고 뒤에 가서 반역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이는 선왕의 좋지 않은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황하의 물이 띠처럼 될 때처럼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을 지키고 의리와 분수를 서릿발처럼 지켰어야 하는데, 임금의 명령을 어기었으니 불충(不忠)이요 아버지의 마음을 배신하였으니 불효(不孝)이므로, 한 몸에 이 두 가지 오명(汚名)을 안고서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부자(父子)가 하루아침에 떨쳐 일어나게 된 것은 모두 천자의 마음이 멀리까지 미치고 위엄과 힘이 서로 도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릇 주(州)와 군(郡)이 마침내 연이어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따라 거듭 책명을 받고서 신하라 칭하고는 앉아서 경서(經書)를 읽고 시(詩)와 예(禮)를 자세히 익혔습니다. 의리를 듣고도 따르지 않고 착함을 보고도 가볍게 여기며, 권모술수의 말을 듣고서 눈과 귀의 혼을 번거롭게 하면 높은 가문의 기틀을 소홀히 하게 되고 귀신들이 엿보는 꾸짖음을 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왕의 성대한 위업을 받들어 계승한다고 하면서 다른 생각을 품고, 안으로는 의심스러운 신하를 없애고 밖으로는 강한 군대를 불러들였으니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고구려의 안승(安勝)은 나이가 아직 어리고 남아 있는 고을과 성읍에는 사람이 반으로 줄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심을 품고서 나라를 맡을 무거운 뜻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귀(仁貴)는 누선(樓船)에 돛을 활짝 펴서 달고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 해안을 순시할 때, 그가 지난날에 활에 상한 새의 신세인 것을 불쌍히 여겨 차마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깥의 응원 세력이라고 여겼으니 이것은 어떤 잘못입니까?

황제의 은혜와 혜택은 끝이 없고 어진 풍모는 멀리 미쳐 사랑은 햇볕처럼 따뜻하고 빛남은 봄꽃과 같았습니다. (황제가) 멀리서 이런 소식을 들으시고도 쉽게 믿지 않으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령하여 가서 사정을 살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왕께서는 사신을 보내 서로 묻지도 않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우리 군사를 먹이지도 않으며, 마침내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어귀에 무기를 감추어 벌레처럼 숲 사이에서 다니고 무성한 언덕에서 숨차게 기어올라 몰래 후회할 칼날을 내었지만 버틸 기세가 없었습니다. 대군이 아직 출발하기 전에 작고 날쌘 군대가 행렬을 갖추어 바다를 바라보고 강에 뜨자 물고기도 놀라고 새도 도망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세로 보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가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니, 미혹에 빠져 날뛰기를 바라건대 그칠 줄 아십시오.

무릇 큰일을 이루려는 사람은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고상한 절의를 지키려는 사람은 뛰어난 행실에 의지함이니, 반드시 난새와 봉황도 길들이지 않으면 승냥이와 이리 같은 엿보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高) 장군(將軍)의 중국인 기병과 이근행(李謹行)의 번방(蕃邦) 군사, 오(吳)·초(楚)지방의 수군,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사나운 군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고 (왕의)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에게는 가슴에 남는 병이 될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피로한 자들에게 노래 부르게 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려면, 그 이유를 모두 논하고 이런저런 점을 분명하게 밝히십시오. 인귀는 일찍이 임금의 수레를 함께 탔고 직접 위임을 받들었으니 이러한 일을 기록하여 보고한다면 일이 반드시 잘 해결될 것인데, 어찌하여 초조해 하며 스스로 머뭇거립니까?

오호라! 옛날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잘하다가 끝에 가서는 나빠진 것이 한스럽고, 근본은 같았는데 끝이 달라진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바람은 높고 날씨는 추워져 잎은 떨어지고 세월은 슬픈데,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상처만 마음에 남게 됩니다. 왕께서는 지혜가 깨끗하고 밝으시고 위풍과 정신이 맑고 수려하시니, 겸손한 뜻으로 돌아가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제사를 제때에 받을 것이요, 사직[茅苴]이 바뀌지 않게 될 것이니, 길함을 가려 복을 받을 것이 왕에게는 좋은 계책입니다.

삼엄한 싸움 중에도 사신은 다니는 법이므로, 이제 왕의 승려인 임윤(琳潤)을 시켜 편지를 가져가게 하면서 한두 가지 생각을 폅니다.
《삼국사기》 권 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文武王) 하, 문무왕 11년(671년) 가을 7월 26일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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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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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란 설안도 설눌 설숭 설악 설평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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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남 설눌(薛訥:649~720)[3]
    • 손자 설직(薛直)
      • 아들 설견(薛堅) - 명주자사(洺州刺史)
  • 아들 신혹(愼惑)
    • 손자 설광(薛光)
      • 아들 설웅(薛雄)[4]
  • 아들 초경(楚卿)
  • 아들 초진(楚珍)
  • 아들 초옥(楚玉)[5]
    • 아들 설고(薛嵩)[6]
      • 아들 설평(薛平)[7]
        • 아들 설종(薛從)[8]
    • 아들 설악(薛崿)[9]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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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의 고사는 널리 민간에 유포되어 원대(元代) 장국빈(張国賓)에 의해 잡극(雑劇) 「설인귀포금환향」(薛仁貴衣錦還郷)이 집필되었다. 또한 청대(清代) 작자 미상의 통속소설 《설인귀정동》(薛仁貴征東)이 집필되기도 하였다. 설인귀정동은 18세기 이후 조선에도 《백포소장설인귀전》(白袍少將薛仁貴傳)(축약된 제목이 《설인귀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유포되었다.

신격화된 설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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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세종실록》지리지 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주 적성현(현재의 한국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감악산의 산신은 설인귀라고 지목하고 있으며, 신라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웠으며 이후 감악산의 산신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지 전승에서는 설인귀가 실은 한국 사람이었고 후에 중국에 넘어가서 장군으로 출세하였으며 훗날 자신이 태어난 본국으로 돌아와서 감악산에 좌정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북한신의주 압록강변에도 설례묘(薛禮廟)라는 이름의 사당이 있었는데 이곳에 설례 즉 설인귀를 모셨다고 한다.

설인귀가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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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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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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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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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당서(新唐書)》
  2. 《삼국사기》신라본기.
  3. 자를 신언(慎言)이라 하였고, 당 현종 개원 초에 아버지 설인귀와 마찬가지로 안동경략사를 맡아 거란과 싸웠으며, 튀르크를 대파한 공으로 과거 아버지의 봉작이었던 평양군공에 봉해졌고 좌우림대장군(左羽林大将軍) ・ 삭방행군대총관(朔方行軍大総管) 등을 지내고 72세로 졸하였으며 시호는 소정(昭定)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의 인물상에 대해서는 《설당연의》(說唐演義)의 등장인물 설정산(薛丁山)의 원형이 되었다.
  4. 위주자사(卫州刺史)가 되었는데 훗날 위박절도사 전승사(田承嗣)가 설웅을 꾀어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설웅은 따르지 않았고 전승사의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5. 자를 요(瑶)라 하였고 개원(開元) 연간에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서 파면되었다. 《신당서》 재상세계표(宰相世系表)에는 설초옥의 관직이 우우림장군에 이르렀으며 분양현백에 봉해졌다고 되어 있다.
  6. 안사의 난 때에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 고평군왕(高平郡王)에 봉해졌다가 후에 평양군왕(平陽郡王)으로 고쳐 봉해졌으며, 대력 7년에 졸해서 태보(太保)가 추증되었다고 한다.
  7. 자를 단서(坦途)라 하였고 사도(司徒)로써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위국공(魏国公)에 봉해졌고 나이 여든에 졸해서 태부(太傅)가 추증되었다고 한다.
  8. 자는 순지(順之)로 관직이 좌령군위상장군(左領軍衛上將軍)에 이르렀고 공부상서가 추증되었으며 아버지와 함께 당대의 명신이라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9. 대력 7년에 형의 절도사직을 이었으나 대력 10년에 부장 배지청(裴志清)에게 쫓겨나서 병마를 거느리고 전승사에게로 달아났으며, 훗날 입조해서 죄를 청했지만 조정은 그의 죄를 사면하였다고 한다. 설고의 족자인 설택(薛擇)은 상주자사(相州刺史)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