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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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왕
백제의 제32대 국왕
본명 부여풍(扶餘豊)
재위 660년~663년
부왕 의자왕
이전 왕 의자왕
다음 왕 (왕조 멸망)

풍왕 부여풍(豊王 扶餘豊, 623년?~668년?)은 백제(百濟)의 제32대 국왕이다. 풍장(豊璋), 풍장왕(豊障王)이라고도 한다. 의자왕(義慈王)의 아들로 왜(倭)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파견되어 체류하다가 660년 백제(百濟)가 멸망하자 텐지 천황(天智天皇)과 보황녀(甫皇女)가 지원해준 왜군(倭軍)을 대동하고 귀국, 복신(福信)이 이끄는 부흥군(復興軍)에 의해 백제왕(百濟王) 재위:660년~663년으로 추대되었으나, 663년 백강 전투(白江戰鬪)에서 부흥군(復興軍)이 (羅)·(唐) 연합군(聯合軍)에게 패배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에서는 그를 백제(百濟)의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와 속일본기(続日本紀 )에서는 그를 마지막 왕으로 보았다. 한국에서는 조선(朝鮮) 후기에 와서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그를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보는 견해도 대두되었다.

생애[편집]

일본 생활[편집]

의자왕(義慈王)의 아들로 정비 소생이다. 부여 효(扶餘 孝), 부여 태(扶餘 泰), 부여 용(扶餘 勇), 부여 융(扶餘 隆), 부여 연(扶餘 演) 등은 그의 형이었다. 또한 백제(百濟) 멸망 후 일본(日本)에 정착한 선광왕(禪廣王/善光王)은 그의 형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부여풍(扶餘豊)은 631년 외교사절로 왜국(倭國)에 30년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 의자왕(百濟 義慈王)이 630년 왕자 풍왕(王子 豊王)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1] 고 적고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 [2] 고 기록한다.[3]

백제 부흥군[편집]

서기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2천 명의 왕족과 귀족, 백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무왕의 조카인 좌평 복신흑치상지, 도침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백제 부흥군에 의해 백제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어 왜국의 원병과 함께 백제로 왔다. 의자왕을 비롯한 2천 명의 왕족과 귀족, 백성이 당나라로 끌려간 소식이 일본에 알려지자 일본텐지 천황은 그에게 귀국하여 부왕의 왕위를 이으라 하고, 구원병을 따로 내주어 함께 백제로 보냈다.

그러나 복신도침을 살해하고 전권을 장악하게 되자 부여풍은 제사만을 맡게 되었다. 663년 복신과의 알력으로 복신을 죽이고, 고구려와 왜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나 당 연합군에 맞섰으나 9월에 백강 전투에서 대패하고, 몇 사람의 근신만을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도주하였다. 고구려로 망명한 뒤 왜국에 남아있던 아우 부여용(扶餘勇)과 몰래 내응하기도 했으나, 668년고구려신라-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한 후, 당나라에 끌려가 중국 남부 지방으로 유형되었다고 한다.[4]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았다.

백제국왕 인정 논란[편집]

기존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같은 한국의 역사 기록에서는 백제의 마지막 왕을 31대 의자왕으로 보았고, 한국의 현행 국사교과서 역시 백제의 왕대를 서술함에 의자왕을 마지막 왕으로 잡아 연대를 작성했다. 따라서 정식 즉위식을 치르지 못한, 중앙정부가 붕괴된 상태에서 복신이나 도침 같은 부흥군 지도부에 의해 추대된 부여풍은 정식 백제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국학의 발전과 함께, 대의명분을 밝히고 정통과 비정통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백제 부흥군의 활동을 백제 역사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이 대두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안정복의 《동사강목》으로, 백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에 맞서 항쟁한 660년부터 663년까지의 3년간을 부여풍의 재위기간으로 보고 백제의 멸망을 663년으로 기록하였다.[5]

가계[편집]

무왕
武王
의자왕
義慈王
부여융[6]
扶餘隆
은고
恩古
부여태
扶餘泰[7]
부여교기
扶餘翹岐
부여효
扶餘孝
부여연
扶餘演
부여풍
扶餘豊
부여사
扶餘絲
부여용
扶餘勇
부여충승
扶餘忠勝
부여충지
扶餘忠志
부여선광
扶餘善光

풍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참고[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卷第廿三 舒明天皇〉. 《일본서기(日本書紀)》. 720. 三年...三月庚申朔、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爲質。 
  2. 김부식 (1145). 〈본기 권28 의자왕(義慈王)〉. 《삼국사기(三國史記)》. 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 
  3. KBS역사스페셜 (2001). 《역사스페셜3》. 효형출판. 76쪽. ISBN 89-86361-55-8. 『일본서기』는 “서명기(舒明紀) 3년(631), 백제 의자왕(白濟 義慈王)이 왕자 풍장(王子 豊長)을 보내 질(質)로 삼았다(百濟王義慈入王子豐章爲質)”고 적고 있다〔『일본서기』의 서명기(舒明紀) 3년은 무왕(武王) 32년으로, 이때는 아직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하지 않았다〕. 여기서 ‘인질(人質)’이라는 의미의 ‘질(質 )’이다. 「백제본기」도 660년 “일찍이 왜에 질(質)로 가 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고 기록한다. 왜에 있던 부여풍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인데 여기에도 역시 ‘질(質)’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백제 왕자 부여풍631년에서 660년까지 30년간 왜에 인질로 있었다. 
  4. 자치통감』권제201, "以高藏政非己出,赦以爲司平太常伯、員外同正.(중략)扶餘豐流嶺南." 혹은 도망쳐서 어디로 갔는지 알수 없다고 한 기록도 있다.(《신당서》)
  5. 《동사강목》제4상(上), 계해(663)조 "백제는 모두 32왕, 681년 만에 망하였다."
  6. 장남은 부여융 아니면 부여효이다.
  7. 의자왕의 차남이 확실하며 나머지 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외부 링크[편집]

전 대
의자왕
제32대 백제 국왕
660년 - 663년
(왕조 멸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