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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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花郞世記)는 신라의 대학자 김대문에 의해 저술된 신라시대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의 역사를 기록한 이다. 신라 성덕대왕의 재위기간(702년 - 737년) 사이에 쓰였다. 《화랑세기》는 김부식삼국사기를 서술할 때까지 남아 있었으나, 이후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필사본 발견[편집]

1989년 2월에 남당 박창화가 일본 천황가의 보물창고인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서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 한문 필사본이 김해에서 발견되었다. 1995년에는 162쪽 분량의 또 다른 필사본(모본‧母本)이 발견되었다.[1] 이 필사본에는 서기 540년부터 681년까지의 풍월주 32명의 전기가 담겨 있다.[1]

필사되었다고 주장되는 《화랑세기》는 유교적 가치관과 사뭇 다른 신라인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현재까지 박창화가 필사한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화랑도의 구체적인 구조 및 진골정통(성골 참조), 대원신통(진골 참조), 마복자 등 신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기록을 많이 전하고 있다. 문화방송 드라마 《선덕여왕》은 이 필사본을 소재로 삼고 있다.[1]

위서론[편집]

용수 문제[편집]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은 바로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아버지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는 용수와 용춘이 동일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2] 필사본 《화랑세기》는 용수와 용춘이 형제지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용수의 사망시기에 대한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은 황룡사탑의 중수기에 보이는 용수의 사망시기에 대한 기록과 배치된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용수는 생존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전에 용수가 죽었고, 그 처와 아들을 아우인 용춘이 부양하는 책임을 맡았다고 하고 있다.

세종 문제[편집]

삼국유사》에 따르면 세종(世宗)은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임금 구형왕의 장남으로 《삼국사기》에는 노종으로 등장하며,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고 본국을 식읍으로 받자 이를 따라 그 동생 무덕(삼국유사의 무득), 무력과 함께 신라에 귀순하였다. 즉 김유신의 큰할아버지가 되는데, 여기서 세종이라는 이름은 곧 누리+부와 같으므로 세종은 단양적성비의 내례부지(대아간지), 《삼국사기》 〈거칠부전〉의 노부(파진찬), 북한산비의 내부지(일척간), 마운령비의 내부지(이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노리부(이찬 상대등)와 동일인으로 추정되어 대아찬, 파진찬, 이찬으로 승진하는 행적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다.[3]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는 영실(英失)과 보현공주(普賢公主)의 아들 노리부(弩里夫, 사도태후의 오라비), 태종(苔宗)과 지소태후(只召太后)의 아들 세종(6대 풍월주, 미실의 지아비)만이 등장할 뿐, 구형왕의 아들인 세종이나 노리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오히려 작중 15세 유신공의 세계에서는 구형왕의 아들로 무력, 무득만이 등장하고 세종이 누락되어 있다.[4]

이에 대해 진서론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문제가 있으며, 구형왕의 아들 세종과 풍월주 세종이 동명이인이라고 주장한다.[5] 그러나, 이 계보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으므로 오류일 가능성이 희박하며, 김태식은 자신의 저서에서 동시대에 두세 명의 동명이인이 활동했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거칠부와 황종이 서로 싸웠다고 하는 것만큼 무리한 것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6]

박창화의 다른 저술[편집]

박창화가 저술한 다른 책들의 성격도 진위를 판별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그가 지은 것 중 '도홍기', '홍수동기', '어울우동기' 같은 음란 소설이 많다. 그가 쓴 수십권이 넘는 책 중 성이 모티브가 되는 것이 많다. 그리고 박창화가 위서를 만들려 한 예가 있다. 그가 남긴 유고에 '유기추모경'이 있다. 유기고구려 초기에 편찬된 사서의 이름이고 추모주몽의 다른 표기이다. 박창화가 썼으면서 고려 시대의 인물인 황주량이 왕명을 받아 쓴 것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유기추모경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박창화의 다른 유고인 '추모경'은 한지에 쓰여 있고 황주량에 대한 기록이 없다.

금석문[편집]

등장인물 총 420명 중에 다른 사료에서 나타나지 않고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만 보이는 인물은 240여 명인데, 신라 금석문에서 독자적으로 확인되는 인물이 없다. 반면 타 사료에서 발견되는 180명 중 24명은 금석문에서 확인이 되었다. 또한, 필사본에서 신라 왕을 제(帝)나 대제(大帝)라 했지만 이 역시 금석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1][7]

박창화 자신이 존재 부정[편집]

광복 이후에 박창화가 쓴 글에 의하면, 한국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며,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8] 광복 이전에 화랑세기 진본을 필사한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을 할 이유가 없으며, 스스로 생전에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언급을 한 일도 없다.

위서론에 대한 반박[편집]

당시 사용되지 않았던 용어의 사용(모계, 풍월주, 전주 등).


환단고기 등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가장 기본적인 금석학적 비판이다.

환단고기를 언급하는 위서론자가있지만 단어의 사용이 환단고기같이 근대부터 사용된 단어가 화랑세기에 사용된것은 아니다. 入望, 秘訣, 征袍, 野菜, 再從兄弟, 團欒, 邸宅, 典型, 祝福, 遊街,氣像, 穎異, 父系, 母系, 消夜, 彩錢, 享樂, 漁色, 愼色, 巡治, 佛門,舊習, 崇 佛등이 사용되어 이러한 비판을 하고있다 이러한 단어는실재로 당나라때 사용된 단어가 아니라 송나라때 사용되기시작한단어들로 화랑세기가 김대문이 진짜쓴것인지 후대 고려인이 김대문의 이름을 빌려쓴것인지는 알수가 없는것이다 실재로 중국의 의서들이라던지 저서들중 유명인의 이름을 빌어 쓴 저작들이 많다화랑세기도 그것을 간과할수없으며 고려조에도 화랑의 명맥은 완전히 끊긴건은 아니었다.

Ex)황제내경은 황제가 쓴게 아니고 편작심서도 편작이 쓴게 아니다 이것을 책의 권위를 위해 이름을 빌려쓴다는것이다 일단 김대문이 쓴게 아니라 후대 고려때 쓰여진것이라면 저작연대는 더 늦어지리라


  •  본서에만 나오는 인명 중 차후에 금석문에서 확인되는 예가 없음.


특히 화랑세기가 다루는 시대와 거의 같은 시대에 새겨진 울주 천전리 각석에 남아있는 수많은 화랑들의 이름 가운데 화랑세기에 등장해 교차검증된 예가 단 하나도 없다.


신라국 모든 화랑이 천전리에 놀러온다는 논리가 억지라고 본다 그리고 모든 화랑이 자연경관에 이름남기기나 낙서를 즐겨했을까?



  •  본서에서는 서로 다른 인물로 나오는 김용춘과 김용수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동일인으로 확인됨.


1966년 수습되어 1972년 판독한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와 삼국유사의 교차검증 결과. 더욱이 삼국사기의 기록도 이를 뒷받침하는데, 이 시기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같은 이름을 두고 'ㅊ'과 'ㅅ'의 이표기가 많이 보인다. 흠춘(欽春)/흠순(欽純), 관창(官昌)/관상(官狀)이 대표적. 따라서 용춘(龍春)/용수(龍樹)의 문제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청화는 삼국사기를 섭렵하면서 용춘 용수에 대한 설명을 보고도 그리 창작할 이유가 없으며 어디까지나 삼국사기는 화랑세기보다 수백년 늦은 기록이므로 삼국사기까지 불신하는 강단사학계가이럴땐 삼국사기가 정확하다는 저의를 알수가 없다. 또한 어떤 정보의 교차검증에서 사서란 불일치하는 내용이 허다하다. 예를들어 중국사서 신라전에는 신라가 고구려 폐잔병이라더라.진나라 노망자라더라 등등 불일치가 보이는것이 그것이다.또한 현대에도 저자가 잘못 알거나 혹은 다른 저자가 잘못알아 남의 가정 족보도 틀리는 경우도 있고 가까이에는 명나라가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기록한것 이에 대해서는 청화수님의 화랑세기 영상을 참고할것


  •  김해 김씨의 가계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과 상충됨.


법흥왕 19년 금관가야(금관국)의 마지막 군주인 구해(仇亥)/구형(仇衡)이 가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한다. 삼국사기에는 그 아들들을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이라 전하고, 삼국유사에는 세종(世宗)·무도(茂刀)·무득(茂得)이라 전하는데, 화랑세기 김유신조에는 이 가운데 무력(茂力)·무득(茂得)밖에 없다. 사라진 세종(世宗)은 엉뚱하게도 이사부(!)의 아들이자 미실의 남편으로 설정되어 있다. 정작 문무왕은 세종(世宗)이 구형왕의 아들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했는데 말이다! 이것도 모자라 세종의 향찰 표기인 노리부(奴里夫)는 미실의 외삼촌으로 설정되어 있다.


어디까지나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화랑세기보다 늦은 기록으로오히려 역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틀렸을수있다 혹은 단순히 다른 사서간의 다른 정보 혹은 틀린정보에 지나지않을수도있다 아니면 화랑세기가 김대문의 이름을 빌린 고려조에 사찬된 비전문가의 사찬사서거나 족보라면 저자가 잘못알고있을수도있는것이다 그리고 박창화가 삼국유사 삼국사기는 기본으로 탐톡했을텐데 창작이나 위서제작시 이 두개의 사서 그대로 써야 말이 맞을것이나 그렇지않고 오히려다르다


  •  모본을 작성한 후 임의로 수정한 흔적.


논쟁 초기에는 대체로 모본을 축약해 발췌본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었고 애초에 '모본'과 '발췌본'이라는 명칭도 이러한 시각에서 붙여진 것이지만, 2003년 건국대학교 김기흥 교수는 발췌본과 모본의 내용을 비교 분석하여 거꾸로 발췌본을 골격으로 모본을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를 내놓았다.

어떤의도로 그랬는지는 알수없어 단순히 그러한것으로 매도하는것은 현법리적해석으로도 증거로 채택되지않는다.수정의 흔적이필사시 잘못적어 다시 수정한건지 아닌지 모르고 그것으로 매도할수는없다.



  • 무엇보다도 박창화 스스로가 생전에 '김대문 화랑세기 필사본의 존재'를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 필사본은 박창화 본인이 사망하고 한참 동안 보관되고 있다가 먼 훗날에 유족들에 의해 발표된 것이다.

그렇다면 박창화의 유언은 어찌 받아들여야할지.손자에게 화랑세기 필사본이라고 분명밝히고있다




  • 2021년 호림공에 대한 반론

오히려 위 송나라시절 어휘들 入望, 秘訣, 征袍, 野菜, 再從兄弟, 團欒, 邸宅, 典型, 祝福, 遊街, 氣像, 穎異, 父系, 母系, 消夜, 彩錢, 享樂, 漁色, 愼色, 巡治, 佛門, 舊習, 崇 佛을 볼때 화랑세기는 김대문의 이름을 빌린 후대 고려인이 쓴 책일가능성이 높다 즉 혜종조에 쓴 책일수있거나 혜종때 필사되서 다시 피휘된것일수있다.근데 위서론자들은 무림거사를 본명을 대체하는 예명이라고하는데사실 그렇지않다 본명은 무림공으로 호림공이라고 피휘되었고 뒤에 나오는 무림거사로 자칭한다는것은 무림이라는 이름을 자칭한것이 아니라 불교에서 모종의 절차를 거쳐 수여되는 직위인 거사(예전에 현재같이 그냥 거사칭호가 주어지는것이 아님)를 자칭해서 스스로 무림거사라고 자칭했다는것이다 이름에서 변화는없다.즉 무림공이 무림거사라고 자칭했다는것이다.


  • 무림공 지장보살에 대한 반론

지장신앙이 신라에서 먼저 나왔을리는 없다 그래서 시기상 무림공이 존재할때 어떻게 지장보살신앙이 있을수있느냐이다. 하지만김대문 혹은 고려조 김대문의 이름을 빌어쓴 저자는 김교각보다 후대의 사람이며 일본서기에도 이러한 후대의 천황 일본같은 칭호로 선대의 인물을 윤색하는경우가 있었다 지장역시도 후대의 윤색작업이라고 보여진다.


  •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12일 "박창화의 유고를 정리.검토하는 과정에서 기존 화랑세기와는 또 다른 유형의 화랑세기 잔본(殘本)으로 추정되는 문서와 그 안에 수록된 향가 1수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어디까지나 잔본인데 화랑세기랑 연관된거 아닐까 추정되는 원고이며 이 잔본이 현 필사본보다 일찍 씌여졌다는 근거도 추정일뿐이다 이 잔본이 박창화가 필사한 필사본을 근거하여 무언가 재창조하려는 것인지 다른 창작활동을 하려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 正統이라는 단어의 사용

正統의 단어만보면 당대에 사용된것같지않은 단어로 오인할수있다 그러나 여기서 正統은 현대에 사용된 두글자 단어 正統으로씌여진게 아니다 眞骨正統 이 내글자가 하나의 단어이다.왜냐하면 그 대비되는 단어가 大元神統이라는 단어가 있기때문이다 정통이라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神統이라는 대비되는 단어가 있어 저것은 말그대로 진골정의 統이며 대원신의 統이라는 의미일뿐


  • 문무대제라는 표현은 삼국시대 씌이지 않았다

이것은 사회적상황상 박창화의 윤색 개찬이 이루어졌을수있다.필사과정에서 문무대왕을 문무대제라고 옮겼을가능성이 충분히있는것이다 그렇다고 진서의 내용을 흐리는것은 아니다.


  • 풍월주의 단어사용은 조선시대때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일단 한국에 남은 사적과 전적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들이다.고려시대 신라시대 문집 사적등등은 남아있지않고 대부분 실전 되었으며 풍월주가 언제부터 쓰였는지 거슬러 올라가 확인할수있는자료 풀이 너무 없다 그리고 최치원의 난랑비문에 보면 풍류도가보이고 이후 구전으로 풍월주라는 단어가 사용되다가 조선조때 기록된것일수도있어 이것으로 위서근거는 빈약하다

  • 박창화 자신이 존재부정

광복 이후에 박창화가 쓴 글에 의하면, 한국 역사는 삼국사기, 고려사, 이조실록이며, 삼국사기 이전은 약간의 전설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8] 광복 이전에 화랑세기 진본을 필사한 사람이라면 이런 표현을 할 이유가 없으며, 스스로 생전에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언급을 한 일도 없다

이는 사서로서 가치있는것을 언급한것으로 화랑세기의 존재를 부정한 말은 아니다 또 당시 삼국사기의 김부식 역시도 정사이외엔 취급도 안했다고 다른 것들을 소설로 치부하지는 않는다.박창화는 사서로서의 가치를 가진것을 언급한것 뿐이고 김부식도 사서로서 만약 화랑세기가 가치가 있었다면 인용을 많이했겠지만 단지 화랑세기에 나온 명언정도 인용한것 뿐이다 즉 김부식도 화랑세기를 사서로서 큰 가치를 부여하진 않은것이다

박남수 연구원의 화랑세기 잔본에 대한 반론[편집]

지금 쓰고자 하는 글은 상기 논문을 재독한 후, 다시 한번 비판하는 글이다. 논문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화랑세기 잔본'이 1930년에 쓰였던 안쓰였던, '화랑세기 잔본'은 화랑세기 필사본이 창작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 우선 박남수가 화랑세기 잔본이라고 주장하는 글은  「上狀敦牂年紀資料」라는 제목을 가진 책자에 실린 내용으로  "‘花郞의 世系圖’와 ‘花郞世紀殘本’, 그리고 遼史 권37, 志7, 地理志1부터 권39, 志9, 地理志3까지 필사되어 있다."고 한다. (위 논문 57쪽)

이중 화랑세기 잔본이라는 이름은 박남수가 임의로 붙인 명칭이다.

"花郞世紀 殘本은 이른바 ‘母本 花郞世紀 ’와 마찬가지로 그 명칭이 남아 있지 않다. 여기서는 편의상 ‘ 花郞世紀 殘本’이라 칭하기로 한다. 花郞世紀 殘本은 주로 永郞公과 그의 아버지라는 裵長公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 논문 58쪽)


하지만 박남수 스스로 가 말했듯, 글의 구성만 보면 '화랑세기 잔본'이 아니라, "영랑공과 배장공에 관한 전기"라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 그럼에도 박남수는 '임의로' 화랑세기 잔본이라는 이름을 붙여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화랑세기는 '풍월주'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 저술 목적도 이미 이종욱 교수가 밝혔듯, 김흠돌의 난으로 화랑이 폐지되자, 대대로 화랑을 세습해온 가문 출신인 김대문이 정치적 목적에서 화랑 풍월주의 세계를 저술한 책이다.

하지만 영랑은 물론 배장 또한 풍월주가 아니다. 고로 두 사람은 화랑세기에 언급될수는 있어도, 제대로 실릴 자격은 없는 사람들이다. 우선 영랑은 흠돌이 난을 일으켜 화랑 제도가 폐지된 이후 시대에 활동한 사람으로, 논문상의 소개에 따르면 아예 화랑으로 활동한 전력이 없다. 배장에 관해서는 2가지 전기가 따로 전하는데, 화랑으로 활동하였으나 '唐骨無花之論'으로 인해 풍월주가 되지 못했다. 나중에 흠돌의 난 이후 화랑이 폐지된 다음에서야, 국선에 임명되었다고 나올 뿐이다.


"이러한 殘本의 내용은 이미 발견된 花郞世紀 의 마지막 내용인 신문왕 원년(681) 金欽突의 난을 평정한 내용의 속편에 해당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위 논문 71쪽)


또한 위의 내용에서 보듯, 박남수 스스로도 '영랑,배장 전기'가 화랑세기의 뒷 시기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로 두 자료가 공통되는 점은 그저 필사자가 박창화라는 동일 인물이라는 점과 신라시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 뿐이다.

고로 이 자료는 '화랑세기 잔본'이라는 이름 자체가 붙는 것이 옳지 않다. '영랑공과 배장공에 관한 전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설령 박창화가 이 '영랑,배장 전기'를 창작하였다고 하더라도, 시대적으로 약간 겹친다는 이유로 화랑세기와 연관지어 '화랑세기 잔본'이라고 부르는 것을 옳지 않다. 이 '영랑, 배장 전기'는 역대 풍월주의 이야기를 담은 화랑세기 필사본과는 엄연히 다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것은 '삼국유사'가 삼국시대를 다루면서도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 내용들을 다룬다는 이유로, 임의로 '삼국사기 잔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은 행위다.


2. 박남수는 '흠돌의 난'에 관해 화랑세기 필사본과 '영랑,배장전기'에서 서로 교차되는 부분을 비교하면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창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花郞世紀 殘本의 사건과 내용 구성은 영랑의 사례와 같이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보이는 사건 등을 기초로 등장인물의 상관관계를 추구하고, 다시 그 사이 사이에 새로운 가공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위 논문 67쪽)"


이런 방식으로 화랑세기 필사본 전체가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대단히 부실하다. 기존 사서와 화랑세기가 별개의 자료임을 보여주는 예시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구지', '마복자'등의 예를 들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기존 학자들의 예시와 다르게, '미시랑'에 관한 부분을 예로 설명해 보겠다.

삼국유사 탑상편, '미륵선화 미시랑과 진자사(眞慈師)'에 보면, 진흥왕대에 원화를 폐지하면서 설원을 국선으로 삼아 화랑을 만들었다는 유래가 나오고, 진지왕 대에 있었다는 국선 미륵선화 '미시랑'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 부분은 화랑의 유래와 설치, 풍월주, 국선에 관한 부분이므로, 만약 화랑세기를 '창작'하려 한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두 자료가 다르다는 것은 화랑세기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참고해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런 화랑의 설치와 연원에 관해서는 이종욱 교수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서술하였으므로 넘어가고, 본인은 이 기사에 등장하는 '미시랑' 자체에만 집중해서 풀어보겠다.

우선 삼국유사에는 미시랑의 이름은 '미시(未尸)'이며 성은 알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진지왕이 그를 국선으로 삼았으며, 7년이 지난 뒤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기록된 풍월주, 아니 화랑 중에는 '미시'라는 사람이 없다. 대신 비슷한 이름의 여성인 '미실'이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진지왕 때 국선으로 삼은 사람은 '문노'이며, 국선을 거쳤으면서 7년간 화랑의 우두머리 였던 사람도 문노 뿐이다. 하지만 문노의 세계는 가야출신으로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은 알수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대신 아버지의 성을 알지 못해 어머니의 성을 따른 사람은 바로 '설성'으로 7세 풍월주 '설화랑(설원)'의 아버지다. 미륵선화라는 호칭도 바로 이 '설원'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물론 삼국유사에서 미시랑에 관한 내용이 나오기 바로 앞에, 설원은 제일 첫번째 화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기록 또한 화랑세기와 완전히 모순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진흥왕 말년에 풍월주를 폐하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가, 미실의 비리가 드러나 원화인 미실을 폐하고, 설원을 풍월주로 삼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고로 삼국유사에 채록된 미시랑에 관한 설화는 미실+설원+문노의 이야기가 혼합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세 사람은 진지왕의 폐위와 진평왕의 성립과 관련해서 서로 밀접한 정치적 관계를 가지고 있던 사이이지만, 정사에는 실리지 못했다. 따라서 그 후손들에게 구전되는 과정에 내용이 합쳐지고 혼동되고 생략되거나 추가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평왕의 즉위는 579년인데 반해, 삼국유사의 채록 시점은 1200년대로, 무려 7백여년의 간격이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기사 말미에 '미시'라는 이름을 '미륵'과 연관지어 해석한 것은 후세 사람들이 덧붙인 것이라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박남수의 주장대로, '화랑세기 필사본'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창작'되었다면, '미시랑'이 직접 화랑세기에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박창화가 미시랑의 이야기를 해체하여 미실과 문노, 설원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복잡한 설명이다.

진실은 대부분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알아내기는 어려워도 설명은 단순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 박남수는 잔본과 필사본의 선후인과관계를 따지기 위해, '화랑세기 필사본'과 '영랑,배장 전기'가 서로 겹치는 내용인 흠돌의 난을 이용해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吳起公은 殘本과 제1‧2본에서 모두 등장하는 인물이다. 다만 殘本에서는 吳起公이 김대문의 아버지임을 밝히는 어떠한 구절도 나타나지 않는데 대해, 제1‧2본에서는 오기공이 김대문의 아버지로 분명하게 나오고 있다. 만일 殘本이 제1‧2본을 보고 서술된 것이라면, 오기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史書에도 보이지 않는 새로운 인물 裵長이 慈義太后의 舅로서 등장하여, 김흠돌의 난을 평정하고 있다. 또한 잔본을 보고 제1‧2본이 만들어졌다면 오기공 대신 裵長公이 화랑(풍월주)으로 등장했어야 한다. 그러나 殘本에서 裵長은 金仁問과 裵晉公의 딸 錦宮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唐骨로서 등장한다. 이는 花郞世紀 제1‧2본에 등장하는 花郞으로서는 부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오기공이 김흠돌의 난을 평정한 주체로 등장하는 순간 裵長은 퇴장해야 할 인물이었다. 사실 잔본에서 기술하였듯이 배장공은 ‘唐骨無花之論’에 의해 화랑이 될 수없는 인물이었다."(위 논문 85쪽)

(위 글에서 제1본은 화랑세기 '발췌본'이라 부르는 짧은 필사본이며, 제2본은 화랑세기 '필사본'이라 부르는 길고 상세한 필사본이다. 이 두 가지를 합쳐 보통 '화랑세기 필사본'이라 부른다. 이하 동문)


위 내용은 흠돌의 난을 평정한 주체가 누구인가를 놓고 양 자료를 비교하는 부분이다. 위 내용에 따르면, '화랑세기 필사본'과 '영랑, 배장 전기'의 두 부분은 완벽히 상충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잔본에서 裵長公이 김흠돌의 난을 평정하였던 내용을 花郞世紀 제2본에서는 오기공의 행적으로 서술되었던 것이라 상정할 수 있다. 이는 殘本이 花郞世紀 제2본의 저본이 되면서 그 내용의 일부가 수정되었음을 보여준다."(위 논문 85쪽)


여기에 대해 박남수는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원래 배장이 흠돌의 난을 평정한 주체인데, 오기가 거기에 대신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상충되는 두 내용이 어떤 논리로 선후 인과관계로 연결되며, '영랑, 배장 전기'를 바탕으로 화랑세기 필사본을 '창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  즉, 박남수는 왜 박창화가 화랑세기 필사본을 '집필'하면서, 배장에서 오기로 흠돌의 난을 평정한 주체를 바꾸었는지에 대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기존 사료에서 오기에 관한 유일한 자료는 '삼국사기' 권7 문무왕 18년에 북원소경 기사을 설치하고 대아찬 오기에게 지키게 했다는 기사 밖에 없다. 어디에도 오기가 풍월주였고, 예원의 아들이자 김대문의 아버지이며, 흠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다는 내용은 없다. 그렇기에 박남수는 어떠한 기준에서 박창화가 배장에 관한 내용을 오기로 바꾸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보면 두 자료가 상충하는 내용이 서술되었다는 것에서 한쪽을 보고 다른 쪽을 고쳤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한 주장은 처음부터 '화랑세기 필사본'이 잔본을 참조한 '위작'이자 '창작물'이라고 전제하고, 억지로 연결지어 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결론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영랑, 배장 전기'가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본이었고, 박창화가 그걸 참고해 화랑세기 필사본을 창작했다면, 화랑세기 필사본에 배장의 이름은 나와야 한다. 일단 '영랑, 배장 전기'에 따르면, 배장은 화랑이었고, 풍월주의 후보였다가 화랑 내의 당파 싸움에 휘말려 풍월주가 되지 못한 인물이니까 말이다. 심지어 흠돌의 난을 평정한 일에 있어, 오기와 역할면에서 중복된다고 해도 애써 '창작'한 인물이라면 당연히 다른 형태로라도 등장하는 타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두 기록은 서로 선후관계나 인과관계로 볼 수 없는, 전혀 별개의 주장을 담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즉 외국의 시각에서 기록한 당대의 기록인 삼국지와 우리의 시각으로 후대에 정리한 삼국사기 초기기사가 충돌하는 것처럼, '화랑세기 잔본'이 아닌 '영랑,배장 전기'와 '화랑세기 필사본'이기에 당연하게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4. 박남수는 양 기록에 등장하는 '옥두리(玉斗里)'를 통해  '영랑,배장전기'와 '화랑세기 필사본'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을 통해 화랑의 유래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제1본의 서문에 보이는 ‘옛날 燕夫人이 仙徒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는 분명히 잔본의 ‘神仙洞 燕門의 여자들’과 관련될 것이며, 2본에서 玉斗里가 섬겼다는 ‘上仙’은 殘本에서는 ‘白衣檀象’으로 나타난다. 그 표현의 차이가 인정되지만, 상호간에는 거의 동일 관념하에 내용들이 서술되었음을 볼 수 있다." (위 논문 81쪽)


우선 박남수는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았다는 기록과 '연문(燕門)의 여자들'을 연관지어 보았다. 그러나 '연부인'과 '연문'이 연결될 이유는 '연(燕)'이라는 글자 하나 뿐이다.

도리어 '연문'이라는 단어는 화랑의 무리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가문을 지칭하는 용례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영랑,배장 전기'에는 "神力을 통한 鄕歌臣 七人 法山․惠宝․能俊․唐琳․應龍․月明․兪加을 두니, 이들 향가신을 당세에 ‘永門七子’라 하였다.(위 논문 59쪽)"라고 하여, 영랑의 가문을 '영문(永門)'이라 부른 용례가 있다. 또, 화랑세기 필사본의 천광공 조에서도 옥두리가 상선을 두루 모신 덕에, 그 남편인 찰인의 권세를 당할자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찰인과 옥두리의 가문을 '연문'이라고 지칭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옥두리가 섬겼다는 '상선'은 화랑세기 필사본에 분명히 '풍월주 자리에서 물러난 풍월주'라고 누누히 나와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을 뒤져보면, 현 풍월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낭도들이 상선을 찾아가 항의한 내용에서 '상선'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보장이 풍월주에서 물러난 뒤 상선들의 모임에 나가서 고개만 숙이며 '예예'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럼에도 박남수는 '상선'을 '백의단상'과 연관지어 해석하였고, 심지어 '백의단상'조차 '흰 옷을 입힌 단군신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위 논문 81쪽)

이걸 보면, 화랑세기 필사본 전체를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우선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왕족을 인신(人神)으로 섬기는 모습이 여러차례 등장하지만, 그 어디에도 단군에 대한 신앙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삼국사기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에서 단군 관계 기사는 삼국사기 지리지 평양 관련 기사에서 딱 한 줄 나온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상식이다. 그러니 '단상(檀象)'이 단군상의 준말이라는 박남수의 견해가 옳을 경우, 도리어 '영랑,배장 전기'는 화랑세기 필사본과 전혀 다른 계통을 통해 전해진 책이라는 반증이 된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부인'과 '연문', '상선'과 '백의단상' 등, 전혀 서로 관련 없는 단어들을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상호간에는 거의 동일 관념하에 내용들이 서술되었음을 볼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지 궁금하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5. 박남수는 '영랑 배장 전기'에 사용된 용어와 수록된 향가를 근거로 화랑세기 필사본이 창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넷째, 후대의 용어인 ‘按節’과 근대 용어인 ‘邑吏’ 등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위 논문 68쪽)

"‘碧海上白波歌’가 義字末音添記法이나 한자의 音과 訓을 사용하여 향가를 흉내냈다고 하지만, 오히려 한시를 바탕으로 하여 근대 조선어의 음과 훈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하겠다."(위 논문 91쪽)

"이러한 두 시가의 특징은 ‘碧海上白波歌’에서와 같이 漢詩를 짓고 나서 이를 향가 형식으로 옮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波浪歌’가 훨씬 鄕歌에 유사한 점이 인정되므로, ‘碧海上白波歌’의 단계를 거쳐 ‘波浪歌’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위 논문 95쪽)


위에서 언급된 박남수의 주장대로 실제로 후세에 쓰여져 그런 용어가 들어갔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영랑, 배장 전기'에 실린 향가는 한시를 짓고, 그것을 향가 형식으로 옮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용어나 향가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창작되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영랑,배장 전기'는 앞서 다른 근거에서 보듯, 화랑세기 필사본과 다른 계통으로 전해진 자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남수는 스스로 화랑세기 필사본에 실린 '파랑가가 훨씬 향가와 유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영랑, 배장 전기'와 연관성이 없다면, 화랑세기 필사본에 실린 향가는 도리어 진짜 신라의 향가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 : 박남수가 '화랑세기 잔본'이라고 이름 붙인 '영랑,배장 전기'는 화랑세기 필사본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는 별개의 자료이다. 그러므로 '화랑세기 잔본' 즉, '영랑,배장 전기'가 박남수의 주장대로 창작물이라 해도, 화랑세기 필사본이 박창화의 창작물이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5가지 근거를 들어 글을 쓰고 나니, 그 자료를 화랑세기 잔본이라고 이름 지은 의도부터가 불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풍월주도 아닌 두 사람이 등장해서 화랑세기와 별로 상관도 없는 자료를 화랑세기 잔본이라 지어놓고 조목조목 화랑세기 위작설의 근거를 뽑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화랑세기가 박창화가 만들어낸 위작이라는 전제에서 '영랑, 배장 전기'를 읽고 논문집필을 시작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출처:phdmun

진서론[편집]

향가 문제[편집]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향가가 한 수 기록되어 있는데, 진서론자들은 아마추어 역사가인 박창화가 향찰로 향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진서론의 근거로 사용한다.[9] 하지만 이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위서론자들까지 위서론의 근거로 삼고 있는 실정이다.[10]

진서론자들은 《화랑세기》필사본이 박창화가 1930~1940년대 일본 궁내성 왕실도서관(도서료. 오늘날의 서릉부)에서 사무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도서관 내의 《화랑세기》를 필사한 것이라며, 일제강점기 말에는 국어학자들도 향가를 겨우 한두줄 해석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미실이 연인인 사다함에게 보내는 향가인 <송출정가>[11] 등이 향가의 형식을 빌어 창작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1942년에 와서야 양주동 선생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의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을 출판하였다.[12] 진서론자들은 향가에 대한 해석조차 어려운 일제강점기에 아마추어 역사가인 박창화가 향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진서론의 근거로 사용한다.[13]

용수·용춘 형제 문제[편집]

《화랑세기》에 따르면 진지왕(眞智王, ?~579)에게는 용수와 용춘 두 아들이 있었고, 형인 용수가 천명공주(天明公主)와 혼인하여 춘추를 낳았으나 후에 동생 용춘이 천명공주를 아내로 삼고 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14] 이에 따르면 용수와 용춘이 형제인 두 사람이 되나, 기존의 전통적인 사료 및 해석에 의하면 용수는 용춘의 이명(異名)으로 알려져 있다. <대역 화랑세기>의 역주해자인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종욱은 <대역 화랑세기>에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즉위조에는 무열왕이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용춘은 일작 용수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용춘과 용수를 동일인으로 보고 있으나, 《화랑세기》를 통하여 형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14]

노비[편집]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이영훈은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타난 노(奴)와 비(婢)는 현재 알려져 있는 천민(賤民)과 전혀 다른 개념으로, 20세기에 창작해낼 수 없는 내용이라고 주장했다.[15]

구지[편집]

화랑세기에는 무관랑(武官郞)이 월성(月城)의 궁궐 담장을 넘다가 '구지(溝池)'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것은 다른 사료에서 발견되지 않은 기록이다. 구지란 일종의 해자(垓子, 성 주위를 둘러 판 방어용 인공 연못)로 보이는데, 이 구지로 추측되는 연못 유적이 박창화가 사망한 이후에 발견되었다.[16]

이 내용은 삼국사기 사다함(斯多含) 조에 보면 나오는 내용으로 사다함의 친구 무관랑이 해자에 빠져 죽었으며 사다함이 이를 슬퍼하였다는 내용이 있다.[13]

진평왕[편집]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기존 사서 어디에도 생몰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이 13살에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합뉴스의 김태식 기자는 삼국사기를 분석하여 이 기록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17]

각주[편집]

  1. 하지혜 명예기자 (2009년 6월 28일). '선덕여왕' 인기에 '화랑세기' 수면 위로”. 뉴스미션. 2009년 11월 9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삼국사기》 선덕왕 4년(635), "겨울 10월 이찬 수품과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돌며 어루만졌다(冬十月 遣伊湌水品龍樹 一云龍春 巡撫州縣)." 《삼국유사》 탑상4 황룡사구층탑, "공장 아비지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 용춘-용수라고도 쓴다-이 주관하여 소장 200명을 이끌었다(匠名阿非知受命而来経營木石 伊干龍春 一云龍樹 幹蠱率小匠二百人)."
  3. 국립문화재연구소. “금석문”.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4. 대역 화랑세기 243쪽
  5. 대역 화랑세기 242쪽.
  6. 김태식 (2002년 4월 5일). “미완의 문명 1백년 가야사”. 푸른역사. 263면. 
  7. 유석재 기자 (2009년 6월 20일). “신라의 요부 미실, 사실은 가공 인물?”. 조선일보. 2013년 12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1월 4일에 확인함. 
  8. 박남수 (2007). “신발견 박창화(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紀)』잔본(殘本)과 "향가(鄕歌)" 일수(一首)”. 《동국사학》. 
  9. 김태식 기자 (2004년 2월 16일). "「화랑세기」향가, 조작한 흔적 없어"(이도흠 교수)”. 연합뉴스. 2009년 11월 4일에 확인함. 
  10. 정창룡 기자 (2001년 2월 12일). “화랑세기 향가 `송랑가'는 위작”. 매일신문. 2009년 11월 4일에 확인함. 
  11. 대역 화랑세기 464쪽
  12. 김완진. “양주동”.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년 12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13. KBS (1999년 7월 10일). “<KBS 역사스페셜>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테리”. 2005년 3월 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14. 대역 화랑세기 225쪽
  15. 송평인 기자 (2003년 1월 7일). “화랑세기 필사본은 신라시대 작품”. 동아일보. 2011년 5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1월 4일에 확인함. 
  16. 허미경 기자 (2002년 6월 14일). “발굴·연구성과 토대 “이래도 가짜?””. 한겨레신문. 2009년 11월 4일에 확인함. 
  17. 강영두 기자 (2002년 6월 12일). “「화랑세기」는 신라인 김대문의 작품”. 《연합뉴스》. 2009년 11월 4일에 확인함. 

참고 자료[편집]

  • 이종욱 역주해 (2005년 10월 15일). 《대역 화랑세기》. 소나무. 243쪽. ISBN 9788971395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