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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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 신검왕
後百濟 神劍王
후백제의 2대 황제
본명 견신검(甄神劍)
재위 935년 11월 15일(음력 10월 17일)~936년 9월 26일(음력 9월 8일)
종교 불교
출생일 885년
사망일 936년 11월 15일(음력 10월 17일)
부왕 견훤
모후 왕비 박씨
이전 왕 견훤
연호 정개

신검(神劍,? ~ 936년 9월 26일(음력 9월 8일), 재위: 935년 11월 15일(음력 10월 17일)~936년 9월 26일(음력 9월 8일)은 후백제(後百濟)의 두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생애[편집]

신검은 후백제의 제1대 왕인 견훤의 맏아들이었다.

924년 7월에 아우인 양검과 함께 고려의 조물성을 공격하여 그 장수인 애선(哀宣)을 죽였으나, 또다른 장수인 왕충(王忠)이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이득 없이 돌아갔다.

933년 5월에는 총군(統軍)이 되어 혜산성(槥山城)·아불진(阿弗鎭)을 거쳐 신라의 서라벌을 공격하려 했으나, 사탄(槎灘)에서 장사 80인을 거느리고 들이닥친 고려의 장수 유금필에게 패하였다. 7일 후에 서라벌에서 돌아오던 유금필과 다시 자도(子道)에서 싸웠으나, 또다시 패하여 금달(今達)·환궁(奐弓) 등 7인이 사로잡혔고 많은 병사를 잃었다.

이후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이자 신검의 이복 아우로 추정되는 금강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두 아우인 양검 · 용검 등의 권유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에 이찬 능환(能奐)을 비롯한 몇몇 후백제의 관료들도 동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935년(태조(高麗 太祖) 18년) 음력 3월견훤금산사(金山寺) 유폐하고 금강을 살해한 후 대리 집정을 하다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후백제 제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신검은 견훤금산사에 유폐 감금하였는데, 약 3개월 뒤에 견훤은 가까스로 탈출하여 고려송악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견훤고려태조(太祖)인 태조에게 반역을 꾀한 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였다. 태조견훤의 요청을 받아들여 936년에 군대를 이끌고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으로 갔다.

신검의 군사들이 이에 맞서기 위해 나서 일리천 전투를 벌였으나, 견훤의 사위인 매제 박영규견훤을 내쫓은 신검에게 불만을 품고 고려로 귀화하면서 초기부터 전세가 불리해졌다. 게다가 고려군 앞에 나타난 견훤을 보자 후백제의 병사들은 대항의 의지를 잃고 말았다. 결국 싸우기도 전에 애술(哀述)을 비롯한 많은 장수들이 항복하였고, 신검도 황산까지 밀려나 황산 전투를 벌였으나 할 수 없이 항복하였다.

견훤은 신검이 아버지인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죄를 벌하여 달라고 태조 왕건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반역의 책임이 신검을 부추긴 신검의 아우 양검용검, 그리고 능환 등에게 있다고 하여 그들에게만 벌을 내렸다. 결국 능환이 처형되고 양검용검진주로 귀양을 간 뒤 살해됐다.

이후 신검의 행적은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 견훤열전의 주석에서는 신검을 포함한 3형제가 모두 벌을 받아 죽었다는 내용을 전하는데, 실제로 신검은 이후로 기록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최후에는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가족 관계[편집]

신검이 등장한 작품[편집]

TV 드라마[편집]

참고문헌[편집]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성립(成立)과 호족연합정권(豪族聯合政權)(하현강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7)
  • 후삼국(後三國)의 성립(成立) (박한설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6)
  • 후백제(後百濟) 금강(金剛)에 관하여 (박한설 대구사학 7 8합집 1973
전 대
견훤
제2대 후백제 국왕
935년 - 936년
후 대
(왕조 멸망)
(고려 태조 왕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