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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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순왕
新羅 敬順王
신라 경순왕 영정
신라 경순왕 영정
지위
신라의 제56대 국왕
재위 927년 ~ 935년
이름
김부(金傅)
시호 경순
신상정보
출생일 ?
사망일 978년 4월 4일 (고려 경종 3년)
매장지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現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왕조 신라
가문 신라 왕조
부친 신흥대왕, 대아찬 김효종
모친 계아태후
배우자 죽방부인
자녀 태자, 김덕지, 헌숙왕후
종교 불교

경순왕(敬順王. ? ~ 978년)은 신라 제56대 군주(재위: 927년 ~ 935년)이다. 성은 (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1]

신라 김씨 또는 계림 김씨 시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7세손이며, 문성왕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존(追尊)된 김효종(金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왕자의 이름은 사기(史記)에 전하지 않는다. 첫째 왕자를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하며, 둘째 왕자는 문헌(文獻)에 김덕지(金德摯)라 한다.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경애왕의 친척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죽게 하고, 그의 친척인 김부(金傳)를 왕위를 계승시키니 그가 경순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이다.

935년 11월 재위 8년 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왕건의 딸인 안정숙의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았다. 고려 조정으로부터 정승(正承)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해졌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금성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장단에 있다.[2]

본관[편집]

삼국사기》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3월 밤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 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의 7대손 미추왕(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11월 나라를 고려 태조 에게 손국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경순왕은 성은 (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飡) 김효종(金孝宗)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金氏)이다.[3]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 신라 왕에 재위하였다. 가계는 신라 문성왕(文聖王)→상대등 김안(金安)→각간 김민공(金敏恭)→추존 의흥왕(懿興王) 김실홍(金實虹) 일명 김인경(金仁慶))→추존 신흥대왕(神興大王) 김효종(金孝宗)→경순왕(敬順王)으로 이어진다.

왕후(王后)는 죽방부인(竹房夫人)으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왕자의 이름은 사기(史記)에 전하지 않는데, 후대에 첫째 왕자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 하며, 둘째 왕자를 문헌(文獻)에 김덕지(金德摯)라 한다.

신라의 마지막 왕[편집]

포석정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 군에게 경애왕이 붙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자 그가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견훤경애왕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배경은 미상이며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있었는지, 화백 회의 추대를 받아서 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경순왕 영정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

그는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 김효종을 신흥왕(神興王)에, 할아버지 각간(角干) 김실홍을 의흥왕(懿興王)에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 시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4]

931년 고려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 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4]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그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고려 귀순 및 멸망[편집]

935년 10월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슬하의 두 왕자 태자김덕지 및 신하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935년 11월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국서를 고려 왕건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는 멸망했다. 이에 두 왕자는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망국의 한을 달랬다.

고려 귀순 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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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 (金傅)
지위
낙랑왕(樂浪王)
이름
존호 상보(尙父)
시호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
신상정보
배우자 낙랑공주 왕씨
공주 왕씨(公主 王氏)
자녀 헌숙왕후 - 고려 경종 왕주(王伷)에게 출가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은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935년 12월 고려 태조 도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인 유화궁(柳花宮)(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하사하고,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 정승(政丞)에 봉하고 식읍(食邑) 8,000호를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봉토로 삼도록 하고, 경주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 지배 계층에 대한 유화 정책 일환으로 결혼 정책을 추진하여 경순왕은 고려 태조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 왕씨와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를 후실로 맞이하여 살았다.

고려 태조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후비(后妃)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안종(安宗)으로 추존된 왕욱(王郁)을 왕욱(王郁)을 두었는데 그는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의 아버지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 딸은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하였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인 상보(尙父)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에 붕어(崩御)하였다.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가족 관계[편집]

경순왕 가계에 대해 정사(正史)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에 왕후(王后) 죽방부인(竹房夫人)과의 사이에 두 왕자(王子)를 두었다고 하며, 이들 왕자들의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으며, 단지 왕태자(王太子), 왕자(王子)라 할 뿐이다. 또 야사(野史)인 삼국유사에는 태자(麻衣太子), 계자(季子)라 하고 계자(季子)의 승명(僧名)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첫째 왕자는 935년 (경순왕 9) 10월 부왕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려하자 불가함을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매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삼고, 흰 마의(麻衣)을 입고 초식(草食)하다 생을 마쳤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마의(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또 둘째 왕자도 부왕 경순왕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자, 처자를 버리고 형 태자를 따라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후 문헌(文獻)에 김덕지(金德摯)라 한다. 이들 후손은 울산 김씨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5] [6] 일설에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7], [8]

자녀 등장[편집]

《김은열 묘지문》 등장[편집]

조선 후기 1784년 「김은열 묘지석」이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근기(謹記)한 《김은열 묘지문》에 형제를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하며, 제2자 굉(鍠)과 제4자 은열(殷說)는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이듬해 1785년 김사목이 이를 원용하여 경주 김씨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형제를 일(鎰), 황(湟), 명종(鳴鍾),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하여,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 아들들의 이름 및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묘지문》 진위 여부[편집]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아들들 일(鎰) · 황(湟) · 은열(殷說) 등의 이름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묘지명 형태도 배위(配位) 관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후 1785년 김사목은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追記)하면서 제2자 김굉(金鍠)을 김황(金湟)으로, 제3자 김명(金鳴)을 김명종(金鳴鐘)으로, 제5자 김중석(金重錫)을 김석(金錫)으로, 제8자 김종(金鐘)을 김추(金錘)로 개명하고, 제4자 김은열(金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또 제2자 김황(金湟))과 제4자 김은열(金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공(功)이 있는 신하(臣下)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성북 십리 밖 오룡산(五龍山) 남쪽 삼십리 주변을 하사(下賜)해 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김사목을 비롯한 경주 김씨 일문들은 자신들의 족보류에 경순왕의 자녀들 이름을 개명(改名)하고, 시호를 작호(作號)하며, 내용을 추기(追記) 변조(變造)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여 현재 이러한 문헌들은 사료(史料)로서의 신빙성(信憑性)이 거의 없다 할 것이다.

《김은열 묘지명》[편집]

  • 1자 : 김일(金鎰)
  • 2자 : 김굉(金鍠) - 김황(金湟)으로 개명
  • 3자 : 김명(金鳴) - 김명종(金鳴鍾)으로 개명
  • 4자 : 김은열(金殷說)
  • 5자 : 김중석(金重錫)
  • 6자 : 김건(金鍵)
  • 7자 : 김선(金鐥)
  • 8자 : 김종(金鐘)

《신라경순왕전비》[편집]

1814년 후손 강릉김씨 김계락(金啓洛)이 찬하여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경순왕은 전비(前妃) 박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며, 딸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하며, 후비(后妃) 왕씨와는 5남 2녀를 두었는데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며, 장녀(長女)는 이금서(李金書), 차녀(次女)는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전비(前妃) 박씨 소생의 셋째 왕자로 김영분(金永芬)을 추가하고,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은 누락하고, 제5자 '김중석'(金重錫)을 '김석'(金錫)으로, 제8자 '김종'(金鐘)을 '김추'(金錘)로 개명하였다. 또 2녀를 추가하였다. 이후부터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태자를 '김일'(金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를 '김황'(金湟))이라 하며, 셋째왕자를 '김명종'(金鳴鍾)이라하며 영분공(永芬公)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 전비 박씨
    • 1자 : 태자(太子)
    • 2자 : 차자(次子)
    • 3자 : 영분공(永芬公) - 아들 추록(追錄)
    • 1녀 : 고려 경종에게 출가
  • 후비 왕씨
    • 1자 : 김은열(金殷說)
    • 2자 : 김중석(金重錫) - 김석(金錫)으로 개명
    • 3자 : 김건(金鍵)
    • 4자 : 김선(金鐥)
    • 5자 : 김종(金鐘) - 김추(金錘)로 개명
    • 1녀 :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
    • 2녀 : 황경(黃瓊)에게 출가

《김씨 분관록》[편집]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崇惠殿) 건립 때 각 김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金氏 分貫錄)을 편찬하면서, 그의 증조부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개성유수 김정집(金鼎集)이 근기한 《김은열 묘지명》을 모두 배척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편집]

1908년 칙명(勅命)으로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경순왕 적장자들은 별자(別子), 계자(季子)라 기록 하고, 자(子) 김영분(金永芬)과 《김은열 묘지명》을 원용하여 8자(子)들을 별도 추기(追記)하고 있다.

  • 별자(別子) : 사실명(史失名), 개골산 입산, 문헌 김덕지(金德摯) - 울산 김씨 시조
  • 계자(季子) : 사실명(史失名), 승명 범공(梵空) - 개골산 입산한 왕자와 동일인이라 함
  • 자(子) : 김영분(金永芬)
  • 제1자 : 김일(金鎰)[13]
  • 제2자 : 김황(金湟) - 평장사(平章事)[14] [15] [16]
  • 제3자 : 김명종(金鳴鍾)- 경주 김씨 파조[17]
  • 제4자 : 김은열(金殷說) - 경주 김씨 파조, 평장사(平章事), 대안군(大安君)[18]
  • 제5자 : 김석(金錫) - 의성 김씨 시조[19]
  • 제6자 : 김건(金鍵) - 강릉군(江陵君)[20]
  • 제7자 : 김선(金鐥) - 언양 김씨 시조[21]
  • 제8자 : 김추(金錘) - 일선군(一善君)[22]

《조선씨족통보》[편집]

1924년 윤창현은 《조선씨족통보》를 간행하면서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김일(金鎰), 2자 김황(金湟), 3자 김명종(金鳴鍾), 6자 김건(金鍵), 8자 김추(金錘)는 누락하고, 제3자로 김영분(金永芬)을 추기(追記)하였다.

문헌 왜곡[편집]

1814년 김계락(金啓洛)이 찬한 《신라경순왕전비문》에 전비 박씨 소생의 셋째 왕자로 김영분(金永芬)을 추가하고, 《김은열 묘지문》에 나오는 1자 일(鎰), 2자 황(湟), 3자 명종(鳴鍾)은 누락하고, 제5자 '김중석'(金重錫)을 '김석'(金錫)으로, 제8자 '김종'(金鐘)을 '김추'(金錘)로 개명하였다. 또 2녀를 추가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이러한 김계락(金啓洛)의 《신라경순왕전비문》을 재차 왜곡하여 전비 죽방부인 소생의 태자(太子)를 김일(金鎰)이라 하고, 둘째 왕자를 김황(金湟)이라 하며, 셋째 왕자로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이라 한다. 하지만 정작 《김은열 묘지문》 원본에는 제2자 김황(金湟)과 제4자 김은열(金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이라 하고 있다.

또 작금(昨今)에 와서 경주 김씨 일문에서는 경순왕은 죽방부인과의 사이에 셋째 왕자로 '김영분'(金永芬)을 하나 더 두었는데, 《김은열 묘지문》에 나오는 제3자 김명종(金鳴鍾)과 동일인이라 하며, 한다. 경주 김씨 영분공파에서는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묘지문 원문에는 제2자와 제4자는 고려 외손이라 하고 있으며, 이들은 사서(史書) 및 문헌(文獻)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702년에 간행된 ‘경주김씨 영분공파’ 족보에 영분공(永芬公) 이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1785년 「김은열 묘지명」이 발견되기 전까지 계속 되다가, 묘지문 발견 이후부터 어떠한 객관적인 자료 제시도 없이 ‘김영분’(金永芬)을 ‘김명종’(金鳴鍾)과 동일인이라 하며 경순왕 제3자로 추록하기 시작했다.

또 2녀를 더 두었는데, 장수 황씨 황경(黃瓊)과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11] [23][24]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 1934년 경주 김씨 종인(宗人)이라는 김경대(金景大)가 간행한 《신라삼성연원보》에 경순왕은 송희부인(松希夫人) 석씨(昔氏)를 맞이하여 5남을 두었으며, 슬하에 14남 5녀를 더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라삼성연원보》를 날조된 위보로 단정하고, 사학계(史學界)는 물론 많은 신라계 김씨 가문들에서는 이러한 위보를 근거로 제작된 일부 경주 김씨 족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25]

그러나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崇惠殿) 건립 때 각 문중들이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분관록》(金氏分貫錄)을 편찬하면서, 그의 증조부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개성유수 김정집(金鼎集)이 근기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모두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김은열 묘지명》을 검증해 볼 때 정사(正史)에 뒷받침 되지 않고, 다만 조선 후기에 족보 편찬 과정에서 위조(僞造)된 지석(誌石)을 바탕으로 가탁(假託) 내지 조작(造作)된 사실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족보 위조 현상[편집]

박(朴)· 석(昔)· 김(金) 등 특정 성씨를 제외한 일반 성씨들은 고려 건국 과정에 고려 조정의 유화 정책 일환으로 사성(賜姓)이 내려졌으며 이러한 정책은 조선 초기에도 계승되어 일반 양민들도 성씨를 갖게 되었다. 1690년(숙종 15) 인구 비율은 양반 8%, 평민 50%, 노비 42%였다. 전 국민의 42%를 차지하고 있는 노비와 천민 등은 조선 후기까지 성씨를 가질 수 없는 계층인 무성층(無姓層)이었다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붕괴되고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누구나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현상으로 인해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족보 위조(僞造) 현상이 심해지는바, 고려· 조선조에 경순왕 후손 및 중국을 조상으로 하는 가문의 후손들에게 군역· 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지고,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특전을 누린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분제 변화와 더불어 인쇄 기술의 발달로 더욱 기승을 부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들어 극에 달한다.

이때 우후죽순처럼 간행된 족보들은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근거 없이 무슨 시호와 군호를 붙여 미화하고 상계를 경순왕대 까지 끌어 올려 표기한 경우가 만연했으며, 또 상계 선조를 중국 사람으로 붙이거나 가짜 지석(誌石)을 발굴하거나 명문 족보의 선대(先代) 무후(無後) 손(系)과 연결하거나, 형제수를 늘려 끼우거나, 한 대수를 삽입해서 연접하는 등의 협잡을 자행하는 등 가공 인물을 만들어 자신의 조상으로 만드는 족보 위조가 성행하였다.

1776년(영조 52) 이전 역사서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문예전고(文藝典故) 족보(族譜)편에 『우리나라 족보는 가정 년간(嘉靖 年間) 1522년 ~ 1566년) 문화 유씨 족보가 가장 먼저 창시되었는데, 미세한 데까지 두루 미쳐서 외가도 자세하게 기재하였다. 때문에 이후 족보를 꾸미는 집에서는 그 족보를 고정(考訂)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 별집 제14권 여술보(藜述補)》

그런데 최근 신라계 어느 김씨 문중에서는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자신들을 마의태자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의 족보에다 마의태자를 시조로 표기해 놓았다. 그리고 마의태자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는 신라가 망할 때 마의태자가 몇 살이었고, 부인(夫人)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없다. 그때 부인(夫人)이 있었다면 어린 자식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자라서 뒷날 후손들을 두었을 것이다. 그 후손들은 본관 제도가 등장한 고려에서 어느 김씨 성의 본관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의 기록은 그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金富軾)을 마의태자 직계 후손으로 기록해 놓은 족보도 있다. 김부식마의태자의 직계 후손이었다면 왜 《삼국사기》를 지으면서, 마의태자의 이름과 행적, 부인과 아들들에 대해 언급해 놓지 않았을까? 이러한 족보 역시 위보(僞譜)라 할 것이다. [26]

경순왕 후손 중 대표적으로 뛰어난 인물인 김부식 마저도 삼국사기 등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신라 왕가의 후손이라고만 했지 어느 왕자 후손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면서 하루하루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고 하고 있다.

위보 판별 기준[편집]

위보(僞譜)를 판별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는데, 부인(夫人)에 대한 기록이 없고, 조상이 어느 왕조에 탄생하였는지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이 그저 막연하게 조상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에다 1세(一世), 2세(二世)니 하는 대수(代數)만 표기해 놓았으며, 무슨 높은 벼슬을 하였다고 하면서 어느 왕조에 임명되었는지 출처는 없다. 또 벼슬 이름과 실재 했던 벼슬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라면 그 족보는 의심해 봐야 한다. 겉은 화려하지만 그 내용은 엉망진창이다.

또 지금의 족보는 대개 17세기 이후 그것도 소수의 양반 문중에서 간행한 것인데 어찌 그 먼 옛날 삼국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세계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 옛날 봉건국가 시대에는 다산(多産)을 풍요로 알았는데 대부분 일련 세계(一連 世系. 한 조상에서 한 자손으로 이어짐)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 산아(産兒) 제한을 하였을리는 만무 하는데…

또 조선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문중의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전의 조상들의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으니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족보의 정당성[편집]

보학(譜學)을 조금만 공부한 식자(識者)들이라면 이 같은 족보들은 엉터리 족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격하여 상인(常人) 계층은 족보 제작을 엄두도 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설사 만든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족보를 편찬할 때 조상들의 이름· 출생· 부인(妻)· 사망· 묘소 등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시한 것은 조산님들 생전의 벼슬· 시호(諡號)· 군호(君號) 등이었다. 시호나 군호를 받았다는 기록들은 후손들에게 큰 자랑이고 문중의 긍지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각 명문(名門)에서는 이러한 긍지를 가지고 사실 그대로 가승(家乘)을 이어 왔는바, 명문(名門)은 족보를 만들 때 선조에 대해 오류가 하나라도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글자 하나라도 잘못되면 떠들 썩 하는데 하물며 어느 누가 감히 선조의 행적을 위조할 수 있단 말인가? 예를 들어 어느 관직 하나만 하더라도 없는 것을 있다 한다든가, 한 계급 올린다든가, 하는 일들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문(名門) 족보에는 가짜 내용이 등재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만약 가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면 명문이 될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작태를 행한다면 만고에 불효요,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다. 따라서 명문(名門)의 자손들은 선조의 벼슬보다 인품과 학덕을 더 사모하고 그 선조들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선행이나 효행의 가치를 더 자랑스럽게 여기며 족보의 진실을 사수하였던 것이다.

족보에 기재된 조상들의 행적을 예쁘게 포장하여 남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닐 바에는, 역사 기록과 선대 조상들이 남기신 가전(家傳)을 바탕으로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를 후세에 충실히 전승시켜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 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 객관적인 씨족사가 완성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후[편집]

1904년작 경순왕 영정 초본

978년(고려 경종 3)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원래 그의 시신은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하여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가, 1727년(영조 3) 후손 안동인 김굉(金硡)이 『경순대왕장지』(敬順大王藏之)] 라는 6자가 각자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1746년(영조 23) 10월 14일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가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에서 경순왕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음을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김성운(金聖運 강원·충청감사), 김응호(金應豪 첨정) 등으로 하여금 능묘(陵墓)를 봉축하고 묘비를 다시 세우게 하고, 장단부사 심봉징(沈鳳徵)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다.<ref〉앞면은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 뒷면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乙未: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戊寅: 978년) 4월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영조 23년(丁卯: 1747)에 다시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ref>

그로부터 장단부에서는 매년 3월1일과 10월1일에 춘추 향사(享祀)를 올리고, 관군(官軍)으로 하여금 수호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이 유지 보존되었다. [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 되었다.

1748년 경순왕릉 인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경주 김씨 후손 김빈(金礗)과 김굉(金硡) 등이 『경순왕릉 심도비』(敬順王陵 神道碑)도 발견하였는데, 비석의 재질은 화강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가운데 차돌이 드러나 있다. 비문은 자연 풍화 등으로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경순왕(敬順王), 김(金), 시월여친지국(十月輿櫬至國)" 정도만 남아 일을 뿐이다.[1]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132㎝, 폭이 67㎝, 두께가 15-18㎝이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변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로 이전하였다가, 1986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고 비각 및 재실을 새로 건립하였다.

경순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TV 드라마[편집]

기타[편집]

경순왕 영정 (1794년, 이명기작)

경순왕의 어진을 처음 제작한 것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 초였다.[27]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린 이 어진은 강원 원주시 고자암에 봉안해 놓았다.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모한 작품 5점이 전하고 있다. 5점은 1677년(숙종 2년) 강원 원주의 고자암에서 제작한 것,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린 것,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의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 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 본의 초본 등이다.

이들 어진 5점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돼 오다 2007년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위탁 보관해 왔지만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27]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28]

참고[편집]

각주[편집]

  1. 장례 행렬이 고랑포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 오마이뉴스 2008년 08월 29일자
  2. DMZ의 봄을 보러 가다 (2) - 오마이뉴스
  3. 성은 김(金)씨이다. 출처: 한국고대인명사전 - 헌강왕(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73670&cid=42953&categoryId=42953)
  4. 경순왕: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 1561년 고암 양자징(梁子澂) 찬한 하서 김인후 『가장』(家狀)에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 왕자로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기술함
  6. 1682년 우암 송시열 찬(撰)한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경순왕 별자(別子)로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져 울산김씨 시조가 되었는데 학성(鶴城)은 울산(蔚山)의 별호라 한다고 기술함.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기록
  7. 야사(野史) 삼국유사 에 경순왕 계자(季子)는 사기에 이름 누락, “신라가 망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해인사(海印寺)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승명을 범공(梵空)이라 하였다.
  8. 《증보문헌비고》에 “경순왕 김부(金傅)가 고려에 항복할 때에, 한 왕자가 힘써 간(諫)하여도 따르지 아니하니, 왕자는 슬피 울며 왕을 하직하고, 곧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고 하는데, 사기(史記)에는 그 이름이 누락되었으니, 어찌 범공(梵空)이 아니겠습니까?”라며, 개골산에 입산한 왕자(王子)와 범공(梵空)을 동일인이라 한다.
  9. 조선조 말 1814년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정비(正妃) 죽방부인(竹房夫人)을 전비(前妃)로, 후비(後妃)를 낙랑공주 왕씨라 하였는데, 이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비(後妃)라 하였을 뿐이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맞아들인 후배(後配)들은 신라의 왕비(王妃)도 아니고, 그 슬하의 자녀들도 왕자(王子)나 공주(公主)가 아니다.
  10. 《고려사》에 등장하며,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죽방부인 박씨 소생이라 하는데, 역사학계에선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까우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
  11.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12. 고려 태조성무부인 박씨 소생의 딸로, 외조부 호족 박지윤(朴智胤)이다.
  13. 작금에 와서 경순왕 태자와 동일인이라 주장하나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등의 문헌은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14. 작금에 와서 나주 김씨 일문에서 죽방부인 소생의 계자(季子)와 동일인이라 주장하나 사서(史書) 및 《증보문헌비고》와 《조선씨족통보》등에는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15. 또 「김은열 묘지명」에도 경순왕 제2자 김황(金湟)과 제4자 김은열(金殷說)은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고려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공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도 하사(下賜)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 계자(季子)란 막내아들을 의미하는데, 제2자 김황(金湟)이 계자(막내 아들)라 한다면 죽방부인 소생이라는 제3자 김영분(金永芬)과의 서차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7. 작금에 와서 죽방부인 소생의 셋째 왕자 김영분(金永芬)과 동일인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사서(史書)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 문헌(文獻)에도 별도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18. 일설에 제2자(第二子)라 한다.
  19. 작금에 와서 김중석(金重錫)과 김석(金錫)은 동일인이라 한다.
  20. 작금에 와서 강릉 김씨 시조라 한다. 그러나 사서(史書)와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21. 일설에 제6자(第六子)라 한다.
  22. 작금에 와서 김종(金鐘)을 김추(金錘)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23.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24.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
  25. 《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월간조선》 2015년 2월호, 김정현
  26. 《신라삼성연원보》를 날조된 위보로 단정하고, 이러한 위보를 근거로 제작된 일부 경주 김씨 족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월간조선》 2015년 2월호, 김정현
  27.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년 06월 02일자
  28.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경남매일 2008년 12월 08일

외부 링크[편집]

전 대
경애왕
제56대 신라 국왕
927년 - 935년
후 대
(왕조 멸망)
(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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