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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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순왕
新羅 敬順王
신라의 제56대 국왕
신라 경순왕 영정
신라 경순왕 영정
본명 김부(金傅)
재위 927년 ~ 935년
종교 불교
출생일  ?
사망일 978년 4월 4일 (고려 경종 3년)
매장지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왕후 죽방왕후
자녀 태자, 김덕지
부친 이찬 김효종
모후 계아태후
왕가 신라 왕조
왕조 신라
시호 경순


경순왕(敬順王. ? ~ 978년)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재위: 927년 ~ 935년)이다. 성은 (金)이요,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1]

신라 김씨(또는 계림 김씨) 시조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27세손이며, 문성왕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존(追尊)된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이며,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는데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덕지(金德摯)이다.

그는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경애왕의 친척 동생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 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그의 친척 동생인 경순왕을 왕으로 세워 왕위에 올라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935년 11월 그는 재위 8년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군되었다. 또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지고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고, 금성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2]

본관[편집]

삼국사기》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을 삼았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왕(신라 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손국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경순왕은 이름이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文聖王)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대아찬(大阿飡)을 지낸 김효종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3]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가계는 신라 문성왕(文聖王)-상대등 '김안'(金安)-각간 '김민공'(金敏恭)-추존 의흥왕 '김실홍'(金實虹. 일명 仁慶)-추존 신흥왕 김효종(金孝宗)-경순왕(敬順王)으로 이어진다.

왕비는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이며,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는데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둘째가 김덕지(金德摯)이다.

신라 왕[편집]

포석정

927년 신라를 침공한 견훤후백제군에게 경애왕이 피살되고, 그가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927년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피살 당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배경은 미상이며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있었는지, 화백 회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 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경순왕 영정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

그는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大阿飡) 효종을 신흥왕(神興王)으로, 할아버지 각간(角干) 김실홍을 의흥왕(懿興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시에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4]

931년 고려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4]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그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고려 귀순 및 멸망[편집]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두왕자는 양국(讓國)에 반대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태자(太子)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는데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며, 둘째아들 덕지(德摯) 왕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고려 귀순 후[편집]

935년 11월 고려 태조는 태상(太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태조 왕건이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내주어 머물도록 하였다.

태조 왕건은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기 때문에 이름을 고쳐 신란공주(神鸞公主)라 하고, 시호는 효목(孝穆)이라 했다.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도 아내로 삼게 하였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태조 왕건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왕욱(王郁)을 두었으며, 왕욱(王郁)의 아들이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978년(고려 경종 3)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인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사후[편집]

1904년작 경순왕 영정 초본

978년(고려 경종 3) 경순(敬順)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 다시 되찾아 정비하였다.[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영조 22) 10월 14일 경기도(京畿道) 장단(長湍. 현 연천군 장남면)에서 경순왕의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하고 묘비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1748년(영조 24) 1월 29일에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하여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을 유지 보존할 수 있었다.[1]

경순왕릉비는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있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 경주 김씨 김빈(金礗)과 김굉(金硡) 등이 발견한 것으로, 비문 내용은 10여자 정도 남아 있는데 자연풍화 등으로 많이 훼손되어 거의 알아 볼 수 없다.[1] 이후 한국전쟁 당시 경순왕릉에서 300m 떨어진 고랑포리 시가 지역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87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석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크기는 높이 132cm, 너비 65cm, 두께 16cm 이며, 상태는 1면만 겨우 남아 10여개의 문자만 판독되고, 내용은 거의 알 수 없다.[1]

가족 관계[편집]

자녀에 대해[편집]

정설(定說) - 2왕자 · 1녀설[편집]

경순왕 가계에 대해 《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여지승람》에 왕비 죽방부인 박씨 사이에 두왕자를 두었는데 이름은 사실명(史失名)이다. 935년 10월 이들 왕자는 신라의 고려 항복에 대해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큰아들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麻衣. 삼베옷)를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일생을 마쳤다 하여 후대에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른다. 막내아들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수사(法水寺)·해인사(海印寺)에 주석(駐錫)하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한다. 1561년 막내아들 이름이 김덕지(金德摯)로 밝혀진다.[9] [10]

고려에 항복 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승공(正丞公) 상보령(尙父令)에 봉해지고 식읍과 녹봉을 더 받았다.

이설(異說) - 2왕자 · 5남3녀설[편집]

경순왕 가계에 대해 고보(古譜) 및 1782년 편찬된 《증보문헌비고》등에 왕비 죽방부인 박씨와의 슬하에 두왕자를 두었는데, 첫째가 태자(太子)이고, 막내가 덕지(德摯) 왕자이다. 이들 두왕자는 경순왕이 935년 10월 고려에 항복하자 이에 반대하여 속세를 등지고 개골산에 입산하여 일생을 마쳤기 때문에 경순왕은 고려 귀순 후 왕자가 없었다.

고려 귀순 후 경순왕은 고려 태조의 첫째딸인 낙랑공주 왕씨와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夫人 王氏)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슬하에 첫째딸은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景宗)에게 출가시키고, 아들 '은열(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 5남을 2녀를 두었다고 세보(世譜)에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다른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잡설(雜說) - 3왕자 · 5남3녀설[편집]

1784년(정조 8)에 「김은열 묘지명」이 발견되어 이를 탁본 후 다시 묻었다고 하는데, 현재 명문(銘文)의 실물이나 탁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명문(銘文)을 경주 김씨 후손 김사목(金思穆)이 장단 사람으로부터 얻어 확인해 보니 형은 '일(鎰)·굉(鍠)·명종(鳴鍾)'이고, 아우는 '중석(重錫)·건(鍵)·선(鐥)·종(鍾)'이며,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라 한다며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묘지명에 나타난 '김은열'의 이름들은 묘지명 기록 외에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 없으며 묘지명도 완전한 형태가 아니다.

1814년(순조 14년) 비문 글을 홍문관제학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예조참판 경주인 김노경(金魯敬)이 쓰고, 경주 김씨 일문에 의해 건립된 「신라경순왕전비」에 "왕은 전비 박씨와 3남 1녀를, 후비 왕씨와 5남 2녀를 두었다. 태자(太子)·차자(次子)·영분공(永芬公)과 아들 은열(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를 두고, 장녀는 고려 경종 비이고, 차녀는 장수인 황경(黃瓊), 차녀는 경주인 이금서(李金書)에게 각 출가하였다.[11] [12]

이후 후손 김사목경주 김씨 족보를 수보(修普)하면서 근기한 「김은열 묘지명」에 형은 '일(鎰), 차(次), 명종(鳴鍾)'이요,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추(錘)'라 변조한다.

1849년(헌종 15) 김사목의 손자 김정집(金鼎集)이 개성유수로 부임하여 건립한「김은열 묘지명」에 형은 '일(鎰)·황(湟)·명종(鳴鍾)'이요. 아우는 '중석(重錫)·건(鍵)·선(鐥)·추(錘)'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라 한다. 또 2자와 4자는 『敬順王第二子第四子以國甥之子有功之臣, 特賜葬地城北十里之外五龍山』라 한다. 즉 후궁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고려 태조의 외손이며, 국가에 공이 있는 신하여서 평장사(平章事)에 제수하고 특별히 장지를 성 북쪽 10리 밖에 오룡산 남쪽 기슭에 사급(賜給)하여 주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김은열 묘지명(金殷說 墓誌銘)」에 나타난 '김은열'(金殷說)은 위의 기록 외에 『고려사』 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명문(銘文)의 실물이나 탁본이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묘지명 형식도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단지 가계, 죽은 해, 장례일과 장지, 형제와 아들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묘지문(墓誌文)도 경주 김씨 후손들이라는 종족의 족보에만 수록되어 있으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서도 축약하거나 위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설인 둘째아들이 신라 멸망 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였는데, 이름을 차(次)라 하더니, 이후 굉(鍠), 황(湟)으로 변조하고, 또 모비(母妃) 관계도 불확실한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을 등장시켜 경순왕 제3자라 하고, 그동안 경순왕 제4자로 알려진 의성군 '김석'(金錫)을 '김중석'(金重錫)으로 변조하고, 서차도 제5자라 한다. 또 제8자를 '김종'(金鍾)이라 하더니 '김추'(金錘)로 개명(改名)하였다.

이와 같은 족보 위조 현상은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더욱 심해지는바, 이런 현상은 고려·조선 왕조대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이들이 있었다.[13] [14]

잡설(雜說) - 3왕자 · 11남3녀설[편집]

일제 강점기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각 성씨 문중에서 우후죽순처럼 족보를 발간하는데, 이러한 과정에 족보의 위·변조는 극에 달한다. 1934년 김경대(金景大)가 간행한 《신라삼성연원보》에 첫째부인으로 송희부인 석씨를 등장시켜 그의 소생으로 '전(佺)·요(瑤)·곤(琨)·영(英)·분(奮)' 5남을 두고,

왕으로 등극할때 죽방부인 박씨를 맞이하여 '일(鎰)·굉(鍠)·종(鍾)' 3남을 두었으며, 고려 귀순 후 태조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 왕씨를 맞이하여 '감(鑑)·석(錫)·건(鍵)·선(鐥)·추(錘)' 5남을 두고, 별자(別子) 김덕지(金德摯)를 측자(側子)라 표기하여 슬하에 14남 3녀를 두었다고 한다.

3녀는 고려 경종헌숙왕후, 장수인 황경, 경주인 이금서에게 각 출가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신라삼성연원보》를 날조된 위보로 단정하고, 이러한 위보를 근거로 제작된 일부 경주 김씨 족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15]

잡설(雜說) - 3왕자 · 6남3녀설[편집]

작금(昨今)에 와서는 경순왕 후손들 이라는 집안에서는 이러한 날조된 위보를 비판없이 인용하여, 전비 죽방부인 소생으로 '일(鎰)·황(湟)·명종(鳴鍾)' 3왕자 1공주를 두고, 후비 낙랑공주 왕씨 사이에 '은열(殷說)·석(錫)·건(鍵)·선(鐥)·추(錘)' 5남 2녀를 두었으며, 별빈 안씨(別嬪 安氏) 소생으로 1남 덕지(德摯)를 두었다고 한다.[16]

문헌(文獻)에 둘째 왕자 덕지(德摯)는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려 할 때 반대를 극력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형과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 이후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문헌(文獻)은 그를 경순왕 별자(別子)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적장자의 아우 별자(別子)를 오역(誤譯)하여 후비 안정숙의공주(일명 낙랑공주)를 '별빈 안씨'로 내세워 제9자라 하는바, 어떻게 제9자가 후비 낙랑공주 소생들 보다 먼저 태어나 고려에 항복하는 것에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 문헌(文獻)의 기록도 잘못 되었다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경순왕의 적자(嫡子)들에 대해 처음에는 태자(太子)·차자(次子)라 기록 하더니, 조선조 말에 들어오면서 김일(金鎰), '김굉'(金鍠)으로 개명(改名)하고, 작금에 와서는 '김황'(金湟)으로 또 개명(改名) 하더니, 차자(次子)와 제4자는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국가에 공이 있는 신하여서 평장사(平章事)를 제수하고, 특별히 장지를 성 북쪽 10리 밖에 오룡산 남쪽 기슭에 사급(賜給)하여 주었다고 한다.

또 모비(母妃) 관계도 불확실한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을 경순왕 제3자라 하고, 그동안 경순왕 제4자로 알려진 의성군 '김석'(金錫)을 '김중석'(金重錫)이라 개명(改名)하고, 서차도 제5자로 위조하였다.

경순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TV 드라마[편집]

기타[편집]

경순왕 영정 (1794년, 이명기작)

경순왕의 어진을 처음 제작한 것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 초였다.[17]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린 이 어진은 강원 원주시 고자암에 봉안해 놓았다.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모한 작품 5점이 전하고 있다. 5점은 1677년(숙종 2년) 강원 원주의 고자암에서 제작한 것,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린 것,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의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 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 본의 초본 등이다.

이들 어진 5점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돼 오다 2007년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위탁 보관해 왔지만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17]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18]

참고[편집]

각주[편집]

  1. 장례 행렬이 고랑포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 오마이뉴스 2008년 08월 29일자
  2. DMZ의 봄을 보러 가다 (2) - 오마이뉴스
  3. 성은 김(金)씨이다. 출처: 한국고대인명사전 - 헌강왕(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73670&cid=42953&categoryId=42953)
  4. 경순왕:네이트 한국학
  5. 부왕 경순왕의 식읍(食邑)을 습봉함
  6. 일부 문헌에 경순왕 제4자 또는 제5자로 기록됨
  7. 일설에 죽방부인 소생이라 하나, 고려 경종(955~981)의 연대로 보아 낙랑공주 소생이 타당함
  8. 태조 왕건성무부인 박씨 소생의 딸, 외조부 호족 박지윤(朴智胤)
  9.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가장(家狀): 문인 양자징(梁子澂)이 찬한 가장(家狀)에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경순왕의 왕자(王子)로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0. 1682년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신도비문(神道碑文):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한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경순왕의 별자(別子)로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져 울산 김씨 시조가 되었는데, 학성(鶴城)은 울산(蔚山)의 별호라 한다. 별자 종법(別子 宗法): 별자(別子)란 제후(諸侯)의 적장자 아우로 별도 분가하여 그 자손의 조상이 된 사람을 말한다.
  11. 경주 김씨 후손 김재명(金再鳴)이 묘지석 탁본 및 세계(世系)와 사적을 가지고와 홍문관제학 강릉인 김계락(金啓洛)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12.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1]
  13.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특전 : 백성의 생명을 왕위보다 더 중하게 여기어 제왕의 자리를 양위한 경순왕(敬順王)은 위인(偉人)으로 추증 받았는바, 이에 고려ㆍ조선 왕조에서는 경순왕의 후손에게 군역•부역을 면제시키고, 서얼이라도 천역(賤役) 일에 동원시키는 것을 재삼 고려해서 시행하라는 특전이 내려졌는바,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왕실(王室)의 후예임을 내세워 종친부(宗親府)와 충훈부(忠勳府)에 뇌물을 바치고, 실무를 맡은 하리(下吏)가 문안(文案)을 만들어 당상관(堂上官)의 수압(手押)을 받은 후에 이를 발급 받아 경순왕 후손임을 내세워 특전을 누렸다.
  14. 연려실기술(1776년 이전)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족보(族譜):우리나라의 족보는 가정 년간(嘉靖 年間, 1522년~1566년)의 문화 유씨(文化 柳氏)의 족보가 가장 먼저 창시되었는데, 미세한 데까지 두루 미쳐서 외가도 자세하게 기재하였다. 때문에 뒤에 족보를 꾸미는 집에서 그 족보를 고정(考訂)하였다. 《여술보(藜述補)》
  15. 《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월간조선》 2015년 2월호, 김정현
  16. 순흥 안씨의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 신종(재위:1197-1204)때 흥위위 보승별장을 지내고 신호위 상장군에 추증된 사람으로, 증손이 안향(安珦)이다. 또 순흥(順興)이라는 지명이 처음 생긴 것은 고려말 충목왕 때이며, 그 전에는 순흥안씨(順興安氏)는 흥주안씨(興州安氏)로 불리었다.
  17.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년 06월 02일자
  18.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경남매일 2008년 12월 08일

외부 링크[편집]

전 대
경애왕
제56대 신라 국왕
927년 - 935년
후 대
(왕조 멸망)
(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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