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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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순왕
新羅 敬順王
신라 경순왕 실제 어진
신라 경순왕 실제 어진
지위
신라의 제56대 국왕
재위 927년 ~ 935년
전임자 경애왕
후임자 태조왕
섭정 김웅렴 (927.11.02.~928.02.29.)
태자 (928.02.29.~ 929.12.01.)
이름
김부(金傅)
묘호 없음
시호 경순(敬順)
신상정보
출생일 ? (896년경 전후)
사망일 978년 4월 4일 (고려 경종 3년)
매장지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現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왕조 신라
가문 신라 왕조
부친 신흥왕, 대아찬 김효종
모친 계아태후
배우자 죽방부인
자녀 마의태자, 김덕지
종교 불교

경순왕(敬順王. ? ~ 978년)은 신라의 제56대 군주(재위: 927년 ~ 935년)이다. 성은 이고, 이름은 부이며, 시호는 경순이다.[1]

신라 김씨 또는 계림 김씨 시조 대보공 김알지의 27세손이며, 문성왕의 증손이다. 아버지는 신흥왕에 추존된 김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 왕후는 죽방부인으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왕자의 이름은 사기에 전하지 않는다. 첫째 왕자를 후대에 마의태자라 하며, 둘째 왕자는 문헌에 김덕지라 한다.

신라 왕족으로 경명왕경애왕의 친척(이종사촌)이다. 제54대 경명왕 때부터 고려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는데, 924년 제55대 왕에 등극한 경애왕도 형 경명왕의 친고려 정책을 이어받아 927년 음력 정월에 고려가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도왔다. 그러자 927년 음력 11월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과 왕비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죽게 하고, 경순왕의 친척인 김부로 왕위를 계승시키니 그가 경순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이다.

935년 11월 재위 8년 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하고, 고려 왕건의 딸인 안정숙의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신란궁을 받았다. 고려 조정으로부터 정승 상주국 낙랑왕에 봉해졌는데 그 품위가 태자보다 높았다.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금성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경순왕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 장단에 있다.[2]

생애[편집]

포석정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 군에게 경애왕이 붙잡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자 그가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은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견훤경애왕에게 자살을 강요하여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은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 김효종을 신흥왕에, 할아버지 각간(角干) 김인경을 의흥왕에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 시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경순왕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3]

931년 고려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 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와 이리를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했다.[3]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경순왕은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고려 귀순 및 멸망[편집]

935년 10월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 하기로 결심했다. 슬하의 두 왕자 태자김덕지 및 신하 이순유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이들의 반대를 씹고 935년 11월 시랑 김봉휴를 시켜 국서를 고려 왕건에게 바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는 멸망했다.

고려 귀순 후[편집]

935년 11월 고려 태조 왕건은 태상 왕철 등을 보내 경순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에 가는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935년 12월 고려 태조도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영접하여 위로하며, 궁궐 동쪽의 제일 좋은 구역인 유화궁(지금의 정승원)을 하사하고,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에 봉하고 식읍 8,000호를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봉토로 삼도록 하고, 경주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 지배 계층에 대한 유화 정책 일환으로 결혼 정책을 추진하여 경순왕은 고려 태조의 첫째 딸인 낙랑공주 왕씨와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를 후실로 맞이하여 살았다.

고려 태조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을 후비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안종으로 추존된 왕욱을 왕욱을 두었는데 그는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의 아버지이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 딸은 고려 태조의 손자인 경종에게 출가하였는데, 그녀가 헌숙왕후 김씨다. 이 일로 경종은 경순왕을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의 위인 상보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사망[편집]

978년(고려 경종 3) 무인년 4월 4일에 붕어하였다. 경순이라 시호를 올리고, 왕으로 예우하여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원래 경순왕의 시신은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하며 반대하여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경순왕의 묘소는 실전되었다가, 1727년(영조 3) 후손 안동인 김굉이 『경순대왕장지』] 라는 6자가 각자된 지석을 발견하고, 1746년(영조 23) 10월 14일 동지 김응호가 경기도 장단에서 경순왕 『지석』(誌石) 및 『신도비』가 나왔음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김성운 강원·충청감사), 김응호 (첨정) 등으로 하여금 능묘를 봉축하고 묘비를 다시 세우게 하고, 장단부사 심봉징(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였다.[4]

그로부터 장단부에서는 매년 3월 1일과 10월 1일에 춘추 향사를 올리고, 관군으로 하여금 수호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이 유지 보존되었다.[1]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 제향 되었다.

1748년 경순왕릉 인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 마을 민가에서 경주 김씨 후손 김빈과 김굉 등이 『경순왕릉 신도비』도 발견하였는데, 비석의 재질은 화강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가운데 차돌이 드러나 있다. 비문은 자연 풍화 등으로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경순왕, 시월여친지국 정도만 남아 있다..[1]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132㎝, 폭이 67㎝, 두께가 15-18㎝이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변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로 이전하였다가, 1986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고 비각 및 재실을 새로 건립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경순왕 가계에 대해 정사 《삼국사기》· 《고려사》· 《동국여지승람》등에 왕후 죽방부인과의 사이에 두 왕자를 두었다고 하며, 이들 왕자들의 이름은 사서에 전하지 않으며, 단지 왕태자, 왕자라고만 적혀있다.


경순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TV 드라마[편집]

영정[편집]

경순왕 영정 (1794년, 이명기작)

경순왕의 어진을 처음 제작한 것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 초였다.[9]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린 이 어진은 강원 원주시 고자암에 봉안해 놓았다.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모한 작품 5점이 전하고 있다. 5점은 1677년(숙종 2년) 강원 원주의 고자암에서 제작한 것,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린 것,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의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 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 본의 초본 등이다.

이들 어진 5점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돼 오다 2007년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위탁 보관해 왔지만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9]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10]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왕조의 종말 - 중앙일보] 2011년 11월 23일자
  2. [박종인의 땅의 歷史 고랑포 좁은 물길에서 1500년 역사를 보았다 - 조선일보]
  3. 경순왕:네이트 한국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앞면은 『신라경순왕지릉』, 뒷면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후당 천성 2년 무자(戊子: 928년)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청태 을미(: 935년)에는 고려에 나라를 넘겼다. 송나라가 태평하고 나라가 번성하던 경종 3년(: 978년) 4월4일에 세상을 떠나니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왕으로 예우해서 장단 남쪽 고○ 8리 계좌 언덕에 장사지냈다.", 영조 23년(丁卯: 1747)에 다시 세웠다.
  5. 조선조 말 1814년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정비 죽방부인을 전비로, 후비를 낙랑공주 왕씨라 하였는데, 이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비라 하였을 뿐이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맞아들인 후배들은 신라의 왕비도 아니고, 그 슬하의 자녀들도 왕자나 공주가 아니다.
  6. 《고려사》에 등장하며, 어머니는 모른다.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 죽방부인 박씨 소생이라 하는데, 역사학계에선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까우나,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된 것은 아니다.
  7.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신라경순왕전비
  8. 고려 태조성무부인 박씨 소생의 딸로, 외조부 호족 박지윤이다.
  9.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년 06월 02일자
  10.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경남매일 2008년 12월 08일

외부 링크[편집]

전 대
경애왕
제56대 신라 국왕
927년 - 935년
후 대
(왕조 멸망)
(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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