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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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순왕
新羅 敬順王
신라의 제56대 국왕
신라 경순왕 영정
신라 경순왕 영정
본명 김부(金傅)
재위 927년 ~ 935년
종교 불교
매장지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왕후 죽방왕후
낙랑공주 (고려)
부친 이찬 김효종
모후 계아태후
이전 왕 경애왕
왕가 신라 왕조
왕조 신라
시호 경순왕

경순왕(敬順王, ?~ 978년)은 신라 제56대 군주이다.[1] 성은 (金)이며, 이름은 (傅)이고 시호(諡號)는 경순(敬順)이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 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8세이며, 문성왕의 내손(來孫. 5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왕비(王妃)는 죽방부인 박씨이며, 슬하에 태자(太子)와 계자(季子) 범공(梵空) 2명의 왕자를 두었으며, 신라 양국 후에는 후실(後室)로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를 맞이 하였다.

그는 신라의 왕족으로 경명왕경애왕의 이종 6촌 동생이다. 이종 6촌 형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암살되면서 왕위에 올라 927년부터 935년까지 재위하였다.

그러나 재위 8년만에 나라를 고려에 평화적으로 양국할 것을 결정하고, 태조 왕건에게 자신의 사촌 누이인 신성왕후와의 결혼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으로부터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그의 능은 신라 왕릉 중에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경기도에 있다.[2]

본관[편집]

삼국사기》에 의하면 65년(탈해왕 9) 3월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사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 이름을 삼았다.

신라 김씨(新羅 金氏)[또는 계림 김씨(鷄林 金氏)]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7세손인 미추왕(신라13대)에 이르러 비로서 왕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알지의 28세손)이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손국(遜國)하기 까지 38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포석정

경순왕은 신라 문성왕의 내손(來孫. 5세손)으로 휘(諱)가 부(傅)이며, 아버지는 이찬을 지낸 김효종(金孝宗)이고, 어머니는 신라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3]

가계는 문성왕-안(安)-민공(敏恭)-실홍(實虹)-효종(孝宗)으로 이어진다. 후일 그가 왕건에게 소개한 자신의 백부 딸 신성왕후 친정아버지는 억렴(億廉)으로, 문성왕-안(安)-민공(敏恭)-실홍(實虹)-억렴(億廉)-신정왕후로 이어진다. 본래 왕위 계승 위치에 있지 않았으나, 927년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피살을 당하면서 외사촌들(경명왕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신라 왕[편집]

경순왕 영정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

927년 신라를 침공한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경애왕이 피살되고, 그는 신라 56대 왕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 배경은 미상이며, 왕위에 오를 당시 경애왕의 자녀들이 미성년자였는지, 화백 회의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 했는가에 대한 진위 여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즉위 초 아버지 이찬(伊湌) 효종(孝宗)을 신흥왕(神興王)으로, 할아버지 실홍(實虹)을 의흥왕(懿興王)으로 각각 추존하였다.

재위시에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4]

931년 왕건의 알현이 있었는데 수십일을 머물면서 왕건은 부하 군병들에게 정숙하여 조금도 범법하지 못하게 하니, 왕경의 사녀(士女)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시랑과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4] 왕건 일행이 경주를 방문한 어느 날에는 왕건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수 없음을 하소연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고려에 귀순[편집]

935년 11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소집하여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결정하고,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에 태자(太子)와 계자(季子) 범공(梵空)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강하게 반대하였다. 일설에는 그가 고려에 귀순을 결심했을 때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 왕건은 신라의 항복을 받아들여 경순왕(敬順王)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서라벌을 경주로 고쳐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키면서 신라는 멸망했다.

최후[편집]

경순왕은 자신의 백부 김억렴(金億廉)의 딸을 태조 왕건에게 소개했는데, 그녀는 고려 태조의 신성왕후가 되었으며, 태조 왕건신명순성왕후 소생인 장녀인 낙랑공주 왕씨(樂浪公主 王氏)를 경순왕(敬順王)에게 시집보냈다.

경순왕(敬順王)은 고려 태조로부터 정승공(政承公)에 봉작되어 품위(品位)가 태자(太子) 이상으로 대우받았으며, 시종들도 전부 등록시키고 토지와 녹봉을 넉넉히 받았는데 1년 녹봉이 1,000석이었다. 또 신란궁(神鸞宮)을 하사받았다. 신라국이 폐지되고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 받고, 경주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한편 그는 고려 태조 사후 혜종, 정종, 광종, 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첫째딸 헌숙왕후경종의 정비가 되었다. 경종은 그를 장인으로 특별히 배려하여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978년 4월 4일에 붕어(崩御)하였다.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사후[편집]

고려 고려 5대 경종 재위 3년(978)에 경순(敬順)의 시호(諡號)를 올렸다. 왕으로 예우하고 능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장사 지냈다.[1] 그가 죽자 그의 시신을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이장하려 하였으나, 고려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수 없다고 하며 반대함으로써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묘자리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묘소는 임진왜란 이후 실전되었다가 1747년(영조 23년) 다시 되찾아 정비하게 되었다.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崇惠殿),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敬天廟) 등에 제향되었다.

1904년작 경순왕 영정 초본

현재의 경순왕릉비는 1747년(영조 23)에 다시 세워졌다.[1]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746년 10월14일 장단에서 경순왕의 지석과 신도비가 나왔음을 아뢰는 동지 김응호의 상소가 있고,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경순왕의 묘를 수치(修治)한다. 여기서 수치란 고쳐 새롭게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1748년 1월29일에는 고려 왕릉의 예에 준해서 경순왕릉에도 수총군(守塚軍) 5명을 두어 지키게 한다. 이렇게 해서 경순왕릉은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 보존될 수 있었다.[1]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인근 고랑포 마을 민가에서 후손 경주김씨 김빈(金礗)과 김굉(金硡) 등이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1] 1974년 이 비는 고랑포 초등학교로 이전되었다가, 1973년 이후 이루어진 경순왕릉 정화에 따라 1987년 현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132㎝, 폭이 67㎝, 두께가 15-18㎝이다.[1]

가계[편집]

2왕자설[편집]

정설(定說)로, 경순왕 가계에 대해 정사(正史) 《삼국사기》 및 야사(野史) 《삼국유사》등에는 왕비(王妃) 죽방부인 박씨(朴氏) 사이에 2왕자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금강산에 입산한 태자(太子)이고, 막내 아들은 화엄종(華嚴宗) 귀의(歸依)하여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중이 된 범공(梵空)스님으로, 휘(諱)는 실명(失名)이라 한다.

7왕자 3공주설[편집]

이설(異說)로, 경순왕 왕자 서차에 대해 고보(古譜) 및 1782년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에 왕비(王妃) 죽방부인 박씨 소생으로 휘(諱)는 실명(失名)으로 태자와 계자 2왕자를 두었다고 한다. 또 후비(後妃)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은열, 석, 건, 선, 추 5남과 3녀를 두었다고 한다. 고려·조선 왕조에서는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부역 면제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의 특전을 누린이들도 있었다.[5]

8왕자 3공주설[편집]

이설(異說)로, 1784년(정조 8)에 경순왕 4남 김은열(金殷說)의 묘지석(墓誌石)이 발견되었는데, 묘지석(墓誌石) 탁본(拓本)을 장단 사람으로부터 후손 경기도 관찰사(京畿道 觀察使) 김사목(金思穆)이 구입하여 소장하고 묘지석(墓誌石)은 다시 묻었다고 하며, 그의 손자 김정집(金鼎集)이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부임하여 1849년(헌종 15) 묘비(墓碑)를 세웠는데, 그 묘비(墓碑)에 경순왕은 왕비(王妃)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 사이에 3왕자(일, 굉, 명종)와 1공주를 두었다. 제1 후실(後室) 낙랑공주(樂浪公主) 사이에 5남(은열, 석, 건, 선, 추) 2녀를 두었으며, 제2 후실로 부인 왕씨(夫人 王氏)를 두었다고 한다. 또 이를 바탕으로 1814년(순조 14년)에 강릉인 김계락(金啓洛)이 짓고, 경주인 김노경(金魯敬)이 써서 건립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비명(碑銘)에 경순왕 후손을 8왕자 3공주라 기록하고 있다.

14왕자 3공주설[편집]

잡설(雜說)로,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는 각 성씨 문중(門中)에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족보를 발간하던 때였는데, 1934년 김경대(金景大)가 간행한 《신라삼성연원보》에는 경순왕의 자녀에 대해 송희부인 소생으로 5남(전, 요, 곤, 영, 분)을, 죽방부인 소생으로 3남(일, 굉, 종) 1녀를, 낙랑공주 소생으로 5남(감, 석, 건, 선 추) 2녀를, 별빈(別嬪) 소생으로 1남(덕지)을 두어 14남 3녀라 기록하고 있는바, 이러한 《신라삼성연원보》를 날조된 위보(僞譜)로 단정하고, 날조된 위보(僞譜)를 근거로 제작된 일부 경주 김씨(慶州 金氏) 족보에 의문을 제기하기 하는 학자도 있다.[6]

9왕자 3공주설[편집]

잡설(雜說)로, 작금(昨今)에 와서는 일부 경순왕 후손 대종회에서는 이러한 날조된 위보(僞譜)등을 비판없이 인용하여, 화엄종에 귀의하여 중이 된 별자(別子. 제후의 적장자 이외 아들) 범공(梵空) 덕지(德摯) 왕자를, 경순왕 후실(後室) 낙랑공주의 일명인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를 '별빈 안씨'(別嬪 安氏)로 내세워 제9자라 하고, 또 모비(母妃) 관계도 불확실한 영분공(永棼公) 김명종(金鳴鍾)을 경순왕 제3자라 하며, 그동안 경순왕 제4자로 알려진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서차를 제5자라 기록하고 있다.[7]

가계도[편집]

  • 아버지 : 신흥왕(神興王) 김효종(金孝宗), 문성왕 현손(玄孫)
  • 어머니 : 헌강왕(憲康王) 딸 계아태후(桂娥太后)[8]
    • 왕비(王妃) :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9]
      • 첫째 : 휘(諱)는 실명(失名), 문헌에 김일(金鎰), 태자(太子) 책봉, 부안 김씨 시조
      • 둘째 : 휘(諱)는 실명(失名), 문헌에 김덕지(金德摯),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책봉, 승명 범공(梵空), 울산 김씨 시조
      • 셋째 : 김명종(金鳴鍾), 고려조 영분공(永棼公) 책봉, 경주 김씨(영분공파) 시조 - 추정
    • 제1 후실(後室) :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10]
      • 넷째 : 김은열(金殷說), 고려조 경주군(慶州君) 책봉, 경주 김씨(은열공파) 시조
      • 다섯째 : 김석(金錫), 고려조 의성군(義城君) 책봉, 의성 김씨 시조(일부 문헌에 경순왕 제4자로 기록)
      • 여섯째 : 김건(金鍵), 고려조 강릉군(江陵君) 책봉, 후 강릉 김씨 시조[11]
      • 일곱째 : 김선(金鐥), 고려조 언양군(彦陽君) 책봉, 언양 김씨 시조
      • 여덟째 : 김추(金錘), 고려조 일선군(一善君)/삼척군(三陟君) 책봉, 삼척 김씨 시조(또는 선산 김씨 시조)
      • 장녀 : 고려 경종 왕주(王伷)에게 출가, 시호 헌숙왕후(獻肅王后) - 추정
      • 차녀 : 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
    • 제2 후실(後室) : 부인 왕씨(夫人 王氏)[12]

경순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TV 드라마[편집]

기타[편집]

경순왕 영정 (1794년, 이명기작)

경순왕의 어진을 처음 제작한 것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 초였다.[13]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린 이 어진은 강원 원주시 고자암에 봉안해 놓았다.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모한 작품 5점이 전하고 있다. 5점은 1677년(숙종 2년) 강원 원주의 고자암에서 제작한 것,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린 것,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의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 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 본의 초본 등이다. 이들 어진 5점은 경순왕 사당인 경북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돼 오다 2007년 그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위탁 보관해 왔지만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13]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14]

참고[편집]

각주[편집]

  1. 장례 행렬이 고랑포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 오마이뉴스 2008년 08월 29일자
  2. DMZ의 봄을 보러 가다 (2) - 오마이뉴스
  3. 성은 김(金)씨이다. 출처: 한국고대인명사전 - 헌강왕(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73670&cid=42953&categoryId=42953)
  4. 경순왕:네이트 한국학
  5.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특전 : 백성의 생명을 왕위보다 더 중하게 여기어 제왕의 자리를 양위한 경순왕(敬順王)은 위인(偉人)으로 추증 받았는바, 이에 고려•조선 왕조에서는 경순왕의 후손에게 군역•부역을 면제시키고, 서얼이라도 천역(賤役) 일에 동원시키는 것을 재삼 고려해서 시행하라는 특전이 내려졌는바,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왕실(王室)의 후예임을 내세워 종친부(宗親府)와 충훈부(忠勳府)에 뇌물을 바치고, 실무를 맡은 하리(下吏)가 문안(文案)을 만들어 당상관(堂上官)의 수압(手押)을 받은 후에 이를 발급 받아 경순왕 후손임을 내세워 특전을 누렸다.
  6. 《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월간조선》 2015년 2월호, 김정현
  7. 순흥 안씨의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는 고려 신종(재위:1197-1204)때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고 신호위 상장군에 추증된 사람으로, 증손이 안향(安珦)이다. 또 순흥(順興)이라는 지명이 처음 생긴 것은 고려말 충목왕 때이며, 그 전에는 순흥안씨(順興安氏)는 흥주안씨(興州安氏)로 불리었다.
  8. 김씨라는 설과 박씨라는 설이 있다.
  9. 예부시랑(禮部侍郞) 박광우의 딸이라고 전하는데 정사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 박광우는 죽산 박씨(竹山 朴氏)로 되어 있는데, 죽산(竹山)은 경기도 안성(安城) 지역의 옛 지명으로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와는 지역적 차이가 있다. 신라 진골 출신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사후 고려에서 소원왕후(昭元王后) 시호를 올렸다고 한다.(출처 필요)
  10. 태조 왕건신명순성왕후 소생의 딸
  11. 청주 김씨 : 김정(金錠)계 청주김씨에서는 시조의 휘(諱)가 김정(金錠)이며, 그는 경순왕의 여섯째 아들이다고 한다.
  12. 태조 왕건성무부인 박씨 소생의 딸
  13.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년 06월 02일자
  14.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경남매일 2008년 12월 08일

바깥 고리[편집]

전 대
경애왕
제56대 신라 국왕
927년 - 935년
후 대
(왕조 멸망)
(고려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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