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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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
高麗 顯宗
지위
고려 제8대 국왕
재위 1009년 ~ 1031년
전임자 목종
후임자 덕종
섭정 강조 (1009년 ~ 1010년)
이름
왕순(王詢)
신상정보
출생일 992년 8월 1일 (음력 7월 1일)
사망일 1031년 6월 17일 (음력 5월 25일) (40세)
부친 안종
모친 헌정왕후 황보씨
배우자 원정왕후
원화왕후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용왕후
원목왕후
원평왕후
종교 불교

현종(顯宗, 992년 8월 1일(음력 7월 1일)[1] ~ 1031년 6월 17일(음력 5월 25일[1])은 고려 제8대 국왕(재위: 1009년 ~ 1031년)이다. 는 순(詢), 는 안세(安世), 보위 즉위 이전의 작위는 대량원군이었고, 묘호현종(顯宗), 시호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묘호는 선릉(宣陵), 불교 승려 시절 법명선재(禪齋)이다. 태조의 아들 안종(安宗)헌정왕후 황보씨(皇甫氏)의 아들이다.

안종 왕욱경종의 계비 헌정왕후의 사통으로 출생하여 암살 위기를 모면하고 1009년 강조의 정변으로 5촌 조카이자 이종사촌 형인 목종이 폐위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후 거란의 두 차례 침입으로 피난을 다녀오기도 했다.

1009년 2월부터 1031년 6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009년 2월부터 이듬해 1010년 11월까지 강조(康兆)가 섭정하였고 1010년 11월부터 1031년 6월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편집]

즉위 전[편집]

출생과 고아 시절[편집]

992년 태조 왕건의 아들 안종 왕욱-아버지-과 대종 왕욱(역시 태조 왕건의 아들)의 딸이자 태조 왕건의 손녀인 헌정왕후-어머니-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981년 경종이 붕어하면서 그의 제4비인 헌정왕후 황보씨(대종의 딸)는 궁에서 나와 살았다. 이때 그 이웃에 왕욱(王郁, 태조의 아들, 헌정왕후의 숙부)이 살았는데, 두 사람은 자주 왕래하다보니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결국 정을 통해 헌정왕후는 왕욱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헌정왕후와 현종은 모자간이면서도 사촌 남매간이 된다. 992년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고는 곧바로 죽었다. 이 아이가 왕순(현종)이다.

후일 왕순성종의 명에 의해 보모(혹은 유모)에게 맡겨졌다. 어느날 고려 성종의 명으로 왕순이 궁에 들어와 고려 성종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때 왕순고려 성종의 무릎 위로 기어올라오며 '아비, 아비'라고 불렀다. 이때 고려 성종은 눈물을 흘리며 왕순을 아버지 왕욱에게 보냈다. 왕순은 아버지 왕욱이 사망하는 996년까지 귀양지 사수현(泗水縣, 현 사천시)에서 함께 살았고, 왕욱이 사망한 이듬해인 997년개경으로 돌아왔다.

출가와 탄압[편집]

현종은 12세 때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천추태후(千秋太后)가 김치양(金致陽)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그를 숭교사(崇敎寺)에 보내 승려로 만들었다. 이모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승려가 되었지만 이후 숭교사에 자객들이 자주 들이닥치자 고려 목종과 숭교사 내 승려들의 도움으로 1006년에 신혈사(神穴寺, 현재 서울 진관사)로 거처를 옮겨갔다.

여러 차례 김치양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내 자신의 목숨을 노리자 신혈사의 주지승인 진관대사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땅굴을 파 그를 그 곳에 대피시킨 뒤 그 위에 침대를 배치하는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1009년(고려 목종 12년) 서북면순검사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하고 옹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재위 초기에는 1009년 2월부터 이듬해 1010년 11월까지 강조(康兆)가 실권을 잡았다.

즉위[편집]

거란의 재침입[편집]

다음해 거란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하자 강조에게 30만 군대로 방어하게 했으나 강조가 패하고 개경이 점령당하는 바람에 나주지채문의 호종을 받아 피난갔다가 환도했다. 이 때의 피난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몽진으로 기록된다. 현종은 창화현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 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았으며 나중에 공주를 나오면서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때에 공주에서 머물다 김은부의 딸과 관계를 맺어 나중에 그의 딸들이 왕후가 된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고려의 중앙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각처의 장수들에 의해서 거란을 물리치게 된다.

무인세력과의 갈등[편집]

1014년 11월 거란의 침입으로 파괴된 궁궐을 수축하고 거란과의 전쟁으로 크게 불어난 재정 적자를 보전하기 위하여 무신과 군인들의 영업전을 빼앗았다. 이에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이 높았던 상장군 최질, 김훈등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 정책을 실행한 문신들을 잡아 대궐로 난입하여 현종앞에서 이들에게 매질을 하고는 거란과의 전공이 높은데도 상을 받기는커녕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공이 높으면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현종은 일단 수락하였다.

1015년 현종은 이자림과 모의하여, 공이 높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면서 잔치를 열어 고위 무신들을 불렀다. 잔치가 무르익어 무신들이 술에 취하게 되자 이들을 주살했다. 19명의 장군들이 살해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문치가 확고해졌다. 요사에 따르면 거란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3차 침공에 대한 주장이 거란 조정에서 힘을 얻게 되었다.

거란의 제3차 침입[편집]

1018년 거란이 현종의 입조(入朝)를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으나 강감찬(姜邯贊)이 귀주(龜州)에서 거란군을 대파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1022년 향리의 장의 명칭을 군현에서는 호장(戶長), 향·부곡 등에서는 장(長)으로 간소화시키고, 1024년에는 개경을 확장하여 5부(部) 35방(坊) 314리(里)로 정했다. 또한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켰으며, 최초로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선례를 만들었다.

생애 후반[편집]

경제 정책으로는 농상(農桑)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감목양마법(監牧養馬法)을 제정했으며 조세의 균등을 기하고 양창수렴법(養倉收斂法)을 실시했다. 세력 기반이 취약했던 그는 자신의 외가와 가까운 구 신라계 인사들을 중용하여 요직에 발탁하였다.

거란과 변방 야인들의 침입에 대응하여 송나라와의 외교를 강화하는 한편, 취약한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왕족과 호족들을 경계하였다.

1031년에 4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능은 경기도 개풍에 있는 선릉(宣陵)이며, 시호는 원문(元文)이다.

가계[편집]

선대
부인 및 자녀

성종과의 관계[편집]

현종은 성종의 외조카(헌정왕후의 아들)이자 사촌 동생(왕욱의 아들)이며, 성종은 현종을 자신의 친자와 같이 양육하였다. 한편 성종의 제2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제1비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제3비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제2비 원화왕후가 되었다. 따라서 현종은 태조의 손자 자격이 아닌,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2]

현종이 등장한 작품[편집]

각주[편집]

  1. 《고려사》〈세가〉권5
  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1996) 참조
전임
목종
제8대 고려 왕
1009년 - 1031년
후임
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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