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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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高麗 恭愍王
지위
고려국 제5대 황제
재위 1351년~1374년10월 27일
대관식 공민왕(恭愍王)
전임자 충정왕(忠定王)
후임자 우왕(禑王)
섭정 이제현(1355년~1356년)
덕흥군 왕혜(1363년~1364년)
염제신(1364년~1365년)
신돈(1365년~1371년)
경복흥(1372년~1373년)
부왕 충숙왕(忠肅王)
이름
왕기(王祺)
이칭 왕전(王顓)
별호 ?
연호 없음
묘호 공민왕(恭愍王)
시호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
신상정보
출생일 1330년 5월 23일(음력 5월 6일)
출생지 ?
사망일 1374년 10월 27일음력 9월 22일 향년 44세
사망지 ?
매장지 현정릉(玄正陵)
왕조 고려(高麗)
가문 개성(開城)
부친 충숙왕(忠肅王)
모친 공원왕후(恭元王后)
배우자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혜비 이씨(惠妃 李氏) 익비 한씨(益妃 韓氏)
신비 염씨(愼妃 廉氏) 정비 안씨(定妃 安氏)
순정왕후(順靜王后) 반야(般若)
자녀 우왕(禑王)
종교 불교(佛敎)

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1]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이력[편집]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몽골어: ᠪᠠᠢᠠᠨᠲᠥᠮᠥᠷ Bayan Temür, 한국 한자伯顔帖木兒 백안첩목아)이며 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이다.

충숙왕공원왕후 홍씨의 차남이며 충혜왕의 동복 동생이다. 묘호는 없으며 고려에서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고, 에서 받은 시호는 공민(恭愍)이다.

즉위 초반에는 무신 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하였으며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다. 신돈 등을 등용하여 권문세족과 부패 관료와 외척을 정리하고 신진사대부를 중용하는 등의 개혁정책을 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남색과 술, 향락에 탐닉하던 중 1374년 홍륜, 최만생에 의하여 시해되었다. 영명하고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그림과 서예에 능하였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아홉 살에 불과한 아들 모니노(우왕)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모니노의 생모인 반야신돈의 노비라는 점 때문에 후에 정통성 논란이 나타난다.

생애[편집]

즉위 이전[편집]

출생[편집]

1330년 충숙왕공원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나라 황실 출신은 아니었지만 그는 곧 원나라 조정의 압력에 의해서 몽골에 입조하게 된다. 1341년(충혜왕 2) 원나라에 건너갔다.

1344년(충목왕 원년)에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에 봉해졌고, 1349년(충정왕 1년)에 원나라의 황족인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원나라 입조와 귀국[편집]

충혜왕 사후 충목왕충정왕이 연이어 즉위하였으나, 왕권이 불안정한 가운데 권문세족과 외척들이 전횡을 일삼게 되었고, 충정왕의 불안정한 상황과 지위속에서 1351년, 충정왕이 폐위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후 원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고, 왕비인 노국공주 또한 왕의 뜻을 지지하여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개혁[편집]

공민왕은 대륙의 정세가 동요하자 이를 이용하여 원나라의 기반을 끊고 완전한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과감한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원나라의 풍습과 연호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때의 옛 제도로 복구시켰으며, 정동행성쌍성총관부를 철폐하였다. 또한 기철(奇轍)을 비롯한 친원파를 제거하고,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을 공략했다.

1369년(공민왕 18년) 이인임(李仁任), 이성계(李成桂)로 하여금 동녕부를 정벌케 하는 한편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권문세가의 세력을 억압했다.

신돈(辛旽)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였고,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의 침입을 받아 국토가 황폐화되고 국력이 소모되었다.

무신 독재 혁파[편집]

즉위한 지 두 달 뒤인 이듬해 2월부터 그는 전격적으로 개혁작업에 돌입해 2월 초하루에는 무신정권최우가 설치하여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개혁조서를 선포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제반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1352년 8월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날의 임금들이 일심전력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친히 국정을 담당함으로써 견문을 넓혔고 하부의 실정 또한 살필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임금이 친히 나라를 맡기에 걸맞은 시기이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판결송사에 관하여 5일에 한 번씩 반드시 계를 올리도록 하라.

공민왕의 이 명령은 곧 왕의 친정체제 구축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무신정권 이후 왕은 기러기아비에 불과했고, 원나라의 복속체제 아래에서 겨우 서무를 결재하는 권리만 되찾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각 부서의 중요 부위을 직접 챙기며 관계와 민생 전반에 대한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작업은, 무신정권 이후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정치토론장인 서연을 재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공민왕은 8월의 서연에서 원로와 사대부들이 교대로 경서와 사기, 예법 등을 강의할 것과 전답 및 가옥, 노비와 억울한 죄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첨의사와 감찰사를 자신의 눈과 귀로 규정하고, 정치의 옳고 그름을 위해 백성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기탄 없는 보고를 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그동안 권력에 기생하던 성사달 등 부패한 고급관리들이 대거 하옥되었다. 또한 상장군 진보문의 아내 송씨의 간통사건을 적발하는 등, 부정을 일으킨 자들을 색출하여 하옥함으로써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발기를 단속하였다.

권문세족 숙청과 친위세력 강화[편집]

고려 공민왕 영정 (조선후기작, 작자미상)

원나라의 지배력이 대폭 약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은 본격적인 반원 자주화 개혁정치를 폈다.[2] 우선 친원 세력의 우두머리인 기씨 일족을 제거했다. 기씨는 원 순제의 황후가 된 기자오의 딸을 중심으로 횡포를 부리던 인물들로, 기철 등이 있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공격, 원나라가 지배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다. 또한 원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관직 명칭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2]

그러나 1352년 9월 공민왕의 과감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判三司事) 조일신(趙日新)이 정천기(鄭天起), 최화상(崔和尙), 장승량(張升亮) 등과 힘을 합쳐 대신 기원과 최덕림 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에 성공한 조일신은 곧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한달 뒤 조일신은 다시 자신과 함께 거사를 감행했던 최화상과 장승량 등을 죽였다. 이로써 조일신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때 조일신은 좌정승으로 승진하였으며, 판군부 감찰을 겸하며 공신 칭호까지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를 제거할 마음을 품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동행성에서 대신들과 의논한 뒤 김첨수(金添壽)를 시켜 조일신을 연행하는 데 성공했다.

조일신을 제거한 공민왕은 그 측근인 정을보, 이권, 나영걸, 고충절, 이군상 등 28명을 하옥하였다. 이어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개혁적 정권 수립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반원 개혁[편집]

한편 당시 원나라는 피지배층 한족의 반란인 홍건적의 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1354년 음력 7월부터 1356년까지 원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유탁(柳濯) 등은 병력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되었다. 파병군은 고려종정군(高麗從征軍)이라 불렸다. 파병 후 귀국한 장군들이 원나라의 몰락을 상세히 보고하여, 공민왕의 반원개혁에 힘을 실어주었다.

1356년(공민왕 5년) 음력 4월 공민왕은 당시 원나라기황후(奇皇后)를 중심으로 하여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 등과 권겸, 노정 등의 부원 세력을 역모죄로 숙청하였는데, 이를 병신정변(丙申政變)이라 한다. 또한 몽골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문종 당시의 칭제(稱制)로 환원하였으며,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하였다.

1356년 음력 4월, 공민왕은 유인우(柳仁雨)에게 몽골이 빼앗아 백 년 넘게 장악하고 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공격을 명령했다. 쌍성총관부 공격은 공민왕 반원 개혁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때 고려인의 후손으로 총관부에서 대대로 몽골의 작위를 세습하던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몽골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유인우에게 성을 바쳤다. 이를 계기로 이자춘 부자(父子)와, 고려 조정에 협력한 조돈 등이 고려 정계에 등장했다.

같은 해 공민왕은 인당, 최영을 파견하여 압록강 너머 원나라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며, 파사부 등 3참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 최초의 요동 정벌로 평가된다.

왜구, 홍건적의 침입[편집]

1358년(공민왕 7년)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吾乂浦)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쳤다.

1359년(공민왕 8년) 음력 12월부터 1360년(공민왕 9) 음력 2월까지, 홍건적 장수 모거경이 4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모거경은 서경까지 함락시켰으나 안우, 이방실,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게 패해 물러갔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1월부터 1362년 음력 1월까지 반성, 관선생, 사류, 파두반이 이끄는 홍건적 20만 명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여, 수도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러나 곧 고려군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압록강 너머로 패주하였다.

홍건적은 몽골에 반대하는 한족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홍건적 침입의 영향으로 고려의 반원 개혁은 부분 차질을 빚었으며, 고려 조정은 원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한때 관제를 개혁 이전으로 되돌리기도 하였다.

1362년(공민왕 11년) 김용의 음모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가 주살되고 만다. 같은 해 2월부터 7월까지 요동의 몽골 군벌 나하추는 쌍성총관부의 잔당인 조소생과 함께 고려의 동북면에 침공하였다. 그러나 나하추는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쌍성총관부의 잔당 조소생, 탁도경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암살 기도와 여진족 정벌[편집]

이후 원나라에서는 고분고분하지 않는 그를 폐출하고 덕흥군(德興君) 등을 추대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1363년초 그는 왜구 토벌을 계획하였으나 일시 중단하였다.

1363년(공민왕 12년) 음력 3월,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과 내응하여 흥왕사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자 덕흥군은 1364년 음력 1월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최유와 함께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었다.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의 장군이 되었던 최유는 고려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364년(공민왕 13년) 음력 1월, 여진의 대추장 김삼선(金三善), 김삼개(金三介) 형제가 고려의 동북면에 침입하였으나 이성계 휘하의 고려군에게 대패하였다. 또한 같은 달 원의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朴伯也大)가 고려의 서북면 연주(평안북도 영변)을 침입하였다. 이는 원나라가 고려에 행한 최후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최영이 지휘하는 고려군에 의해 참패로 끝났다. 같은 해 음력 5월에는 김속명이 이끄는 고려군이 진해에 침입했던 3천 명의 왜구를 격파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개혁의 실패[편집]

종묘 공민왕 신당에 소장되어 있는 공민왕 부부 영정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은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1365년(공민왕 14),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던 노국대장공주가 드디어 회임을 하였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는 난산 끝에 사망하고 말았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그는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통곡했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노국대장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 추존되었으며, 공민왕은 서거한 왕후를 추모하는 불사(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3] 왕비의 사후 그는 술로써 시름을 달랬다. 그리고 끝없는 상심에 빠졌던 공민왕은 1365년 음력 5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통해 신돈(辛旽)을 등용하였다. 영산 출신 승려였던 신돈은 당시 살아있는 부처라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공민왕은 직접 영산까지 내려가 신돈과 만나 대담하였으며, 신돈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시국을 논하였는데 그의 달변이 왕의 마음에 들게 된다. 왕은 신돈을 환속시킨 뒤 수정리순론도섭리보세공신(守正履順論道燮理保世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책록하고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 판감찰사사(判監察司事)제조승록사사(提調僧錄司事) 겸 판서운관사(判書雲觀使)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임명했다.

공민왕은 개혁추진을 위해 신돈을 기용했다. 그는 어머니가 절의 노비였고, 자신은 중으로서 아버지는 권문세족이었지만 본인은 노비의 몸에서 난 서자였으므로 권문세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신돈의 등용과 제거[편집]

1366년 신돈의 건의로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2] 수상직과 감찰서서운관의 수장직을 겸한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또한 성균관을 다시 설치하였다. 신돈은 민중들에게 '성인' 칭송을 받았다.[2] 결국 신돈의 개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 무인세력은 힘을 잃게 되었고, 이들은 곧 신돈의 정책에 대해 거세게 반발하였다.

1366년(공민왕 15년) 음력 10월 김유(金庾)가 1백 척의 규모의 토벌군을 이끌고 제주도를 공격했으나 패전했다. 당시 제주도는 삼별초의 항쟁에 진압된 뒤 몽골의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으며, 다수의 몽골인들이 주둔하여 친원노선을 걷고 있었다. 이후 약 10여 년 넘게 제주도는 고려 조정에 반발하였다.

1368년(공민왕 17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1370년(공민왕 19년) 1월과 11월, 이성계와 지용수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하였고, 요동의 고려인을 본국으로 송환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영토 확장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371년(공민왕 20년) 음력 7월 신해환국(辛亥換局)으로 신돈이 유배된 후 처형되었다. 이로써 공민왕의 개혁은 사실상 마감되었다. 신돈을 잃은 공민왕도 더 이상 개혁의지를 갖지 못하고 방황[2] 하고 만다. 그해 음력 9월 동녕부를 다시 공격하는 명을 내렸다.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의 제거 이후 개혁정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술과 남색에 빠져 방황하게 된다.

죽음[편집]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1372년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곁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자제위 중 한명인 홍륜(洪倫)이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내시 최만생(崔萬生)이 은밀히 왕에게 보고하자,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 겠다."고 말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최만생은 홍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날 밤에 홍륜은 권진(權瑨), 홍관(洪寬), 한안(韓安), 노선(盧瑄) 등과 더불어 모의하여 술에 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는 '도척이 침입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위사(衛士)들은 벌벌 떨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재상과 백집사들은 변을 듣고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날이 밝을 무렵에 명덕태후강녕대군(江寧大君) 우(禑)를 데리고 내전에 들어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

이인임(李仁任)은 처음에 승려인 중 신조(神照)가 항상 대궐 안에 있었으며, 완력이 있고 남을 속이는 꾀가 많았으므로 그가 난을 일으킨 것이라 여겨 감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풍과 최만생의 옷 위에 피가 뿌려진 흔적이 있음을 보고서, 이에 최만생을 하옥시켜 국문(鞫問)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었다.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하여 변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그들의 삼쪽 또한 멸족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이인임의 섭정이 전개되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 궁녀 한씨의 소생이었으나 실은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에 시달렸으며, 이성계 일파는 이를 사실로 내세워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데도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능묘[편집]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묻힌 현정릉

공민왕의 능은 현릉(玄陵)이며, 노국대장공주의 능인 정릉(正陵)은 그 옆에 나란히 있다.

미술과 서예[편집]

공민왕이 직접 그린 《염제신 상》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

공민왕은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大字)에 뛰어났다.

작품성은 뛰어났고 실물을 거의 완벽하게 묘사하여 당대에도 화제가 되었는데, 인물 묘사도는 섬세하였다는 평이 있다. 작품에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국립현대미술관), 《이양도(二羊圖)》, 《노국대장공주진(眞)》, 《염제신[4]》, 《손홍량 상(孫洪亮象) 》《석가출산상(釋迦出山像)》, 《아방궁도(阿房宮圖)》, 《현릉산수도(玄陵山水圖)》, 《달마절로도강도》, 《동자보현육아백상도(童子普賢六牙白象圖)》 등이 있다.

서예작으로는 경북 봉화군에 있는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과 청량사 유리보전의 현판, 안동 영호루 현판 등이 있다. 이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피난중일 때 직접 써주었다고 한다. 공민왕 15년(1366년)이래 강릉 임영관의 현판은 현재 국보로 지정된 강릉객사문에 남아있다.


사상과 치적[편집]

개혁 정책의 성과[편집]

공민왕은 밖으로 반원 자주화, 안으로는 권문세족 일소를 목표삼아 개혁정치를 펴면서 그 일환으로 성균관을 재건, 유학을 장려하고 때묻지 않은 유능한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였다.[5] 그 결과 비록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의 반격으로 실패했지만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개혁 세력이 중앙 정치무대에 자리잡게 되었다.[5]

우왕에 대한 관점[편집]

그는 신돈이 소개한 신돈의 시비 반야의 소생 우(모니노)를 자신의 친자로 인지하였다. 반야의 임신을 알게 된 그는 신돈에게 명하여 반야를 신돈의 집에서 속량시키고 신돈의 친구인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보내어 순산하게 했다.

그러나 모니노(후의 우왕)의 출산 이후 신돈의 자식이라고 왜곡할 것을 우려했던 공민왕은 반야를 별궁에 감금하고, 모니노는 자신의 후궁인 궁인 한씨가 낳은 자신의 친자라 하여 대내외에 발표하고 강령부원대군에 봉하였다. 그의 예상과 염려대로 후일 정도전 등은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 신씨설을 주장하였다.


평가[편집]

고려사》는 공민왕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왕이 즉위하기 이전에는 총명하고 어질고 후덕하여 백성들의 기대를 모았고,
즉위한 후에는 온갖 힘을 다해 올바른 정치를 이루었으므로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면서 태평성대의 도래를 기대했다.

그러나 노국공주가 죽은 후 슬픔이 지나쳐 모든 일에 뜻을 잃고 정치를 신돈에게 맡기는 바람에 공신과 현신이 참살되거나 내쫓겼으며,
쓸데없는 건축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샀다.

완악한 무뢰배들을 가까이 해 음탕하고 더러운 짓을 함부로 하였고 무시로 술주정을 부리며 좌우의 신하들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또 후사를 두지 못한 것을 근심한 나머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대군으로 삼고서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까 염려해
몰래 폐신을 시켜 후궁을 강간하게 한 다음 임신하게 되면 그 자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려 했다.
패륜적 행동이 이와 같았으니 죽음을 면하려고 한들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 《고려사》 권44, 세가44 공민왕7 


가계[편집]

 고려 제31대 국왕  공민왕 초상.jpg
공민 경효대왕
恭愍 敬孝大王
출생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
고려 고려 개경
사망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44세)
고려 고려 개경 별궁

공민왕의 직계조상[편집]

 
 
 
 
 
 
 
 
 
 
 
 
 
 
 
 
 
 
원종
 
 
 
 
 
 
 
충렬왕
 
 
 
 
 
 
 
 
 
 
 
순경태후 김씨
 
 
 
 
 
 
 
충선왕
 
 
 
 
 
 
 
 
 
 
 
 
 
 
원 세조 쿠빌라이
 
 
 
 
 
 
 
제국대장공주
 
 
 
 
 
 
 
 
 
 
 
예쉬진 카둔
 
 
 
 
 
 
 
아버지 충숙왕
 
 
 
 
 
 
 
 
 
 
 
 
 
 
 
 
 
의비 예쉬진
 
 
 
 
 
 
 
 
 
 
 
 
 
 
   공민왕   
 
 
 
 
 
 
 
 
 
 
 
 
 
 
 
 
 
 
 
 
홍사윤
 
 
 
 
 
 
 
홍진
 
 
 
 
 
 
 
 
 
 
 
강릉 왕씨
 
 
 
 
 
 
 
남양부원군 홍규
 
 
 
 
 
 
 
 
 
 
 
 
 
 
최광
 
 
 
 
 
 
 
창원군부인 최씨
 
 
 
 
 
 
 
 
 
 
 
김씨
 
 
 
 
 
 
 
어머니 명덕태후 홍씨
 
 
 
 
 
 
 
 
 
 
 
 
 
 
 
 
 
김련
 
 
 
 
 
 
 
 
 
 
 
삼한국대부인 김씨
 
 
 
 
 
 
 
 
 
 
 
 
 
 
유홍
 
 
 
 
 
 
 
유씨
 
 
 
 
 
 
 
 
 
 


부모[편집]

생몰년 부모 비고
충숙왕 忠肅王 1294년 - 1339년 충선왕 忠宣王
의비 예쉬진 懿妃 也速眞
 제27대 국왕 
공원왕후 홍씨 恭元王后 洪氏
명덕태후 明德太后
1298년 - 1380년 홍규 洪奎
광주군대부인 김씨 光州郡大夫人 金氏


후비[편집]

이름 /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정비 노국대장공주 魯國大長公主
인덕왕후 仁德王后
보르지긴 부다시리
孛兒只斤 寶塔失里 (패아지근 보탑실리)
  ?   - 1365년 위왕 魏王 베이르테무르 孛羅帖木兒
제2비 혜비 이씨 惠妃 李氏 경주   ?   - 1408년 이제현 李齊賢
수춘국부인 박씨 壽春國夫人 朴氏
 조선 개국 후 혜화궁주로 강등
제3비 익비 한씨 益妃 韓氏 미상  생몰년 미상  덕풍군 德豊君 왕의 王義
제4비 신비 염씨 愼妃 廉氏 파주 염제신 廉悌臣
진한국대부인 辰韓國大夫人 권씨 權氏
제5비 정비 안씨 定妃 安氏 죽산   ?   - 1428년 안극인 安克人  조선 개국 후 의화궁주로 강등
궁인 순정왕후 한씨 順靜王后 韓氏 미상  생몰년 미상  면양부원대군 沔陽府院大君 한준 韓俊
한씨 韓氏
우왕 즉위년(1374년) 왕후로 추존
시비 반야 般若   ?   - 1376년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다 처형됨

왕자[편집]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우왕 禑王
강녕부원대군 江寧府院大君
우 禑
모니노 牟尼奴
1365년 - 1389년 반야 근비 이씨 謹妃 李氏  제32대 국왕 


공민왕이 등장한 작품[편집]

영화[편집]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각주[편집]

  1. 고려사 공민왕 원년 5월 무인일(6일) 왕의 생일을 맞아 내전에 사흘 동안 도량(道場)을 열었다.
  2.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45페이지
  3. “신돈 이야기”. 충청투데이. 2016년 11월 15일. 
  4. 이색의 문집 《목은집》에 공민왕이 염제신의 초상화를 직접 그려서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5.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2페이지

참고 자료[편집]

  • 「한국사 콘서트」, 역성혁명으로 새 나라를 열다, 백유선 저, 두리미디어(2008년, 155~187p)
  • 「한국사 인물통찰」, 유사한 공민왕-신돈 관계, 김종성 저, 역사의아침(2010년, 51~63p)
  •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신진사대부, 신명호 저, 다산초당(2011년, 151~163p)
  •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사대부 세력의 성장"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전임
충정왕
제31대 고려왕
1351년 10월 ~ 1363년
후임
덕흥군
전임
덕흥군
제31대 고려왕(복위)
1364년 ~ 1374년 9월 22일
후임
우왕
전임
충정왕
한반도의 국가 원수
1351년 ~ 1374년
후임
우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