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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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서씨 (利川 徐氏)
관향 경기도 이천시
시조 서신일 (徐神逸)
주요 집성촌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전라남도 무안군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영등리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
함경남도 고원군 군내면
함경남도 홍원군
주요 인물 서필, 서희, 서눌, 서유걸, 원목왕후, 서정, 서균, 서공, 서순, 서견, 서유, 서선, 서진, 서강, 서기, 서경충, 서예원, 서일, 서경원, 서용석, 서정갑, 서한샘, 서길수, 서영명, 서균렬, 서경배, 서기호
인구(2015년) 199,792명
이천서씨 대종회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경기도 이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편집]

《고려사》에 따르면 통일신라서신일(徐神逸)이 교외에 살 때 사슴이 집으로 들어오자 화살을 뽑고 숨겨주었더니, 사냥꾼이 추격해 왔으나 잡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감사하며 “그 사슴은 바로 내 아들인데 그대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다.”라고 말하였다. 서신일이 나이 80세에 서필(徐弼)을 낳았고, 서필, 서희(徐熙), 서눌(徐訥) 3대가 재상(宰相)이 되어 내의령(內議令)·내사령(內史令)·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배향공신이 되었다.[1]

서희의 아들 서유걸(徐維傑)이 좌복야(左僕射), 손자인 서정(徐靖)이 판삼사사(判三司事), 증손자인 서균(徐鈞)이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현손인 서공(徐恭)이 평장사(平章事)에 올랐으며, 서순(徐淳)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역임하는 등 고려의 문벌 귀족으로 성장하였다. 고려 말기의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2]

본관[편집]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한주(漢州)의 황무군(黃武郡)을 통과할 때 서목(徐穆)이 왕건을 인도하여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이천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본관의 유래[편집]

서목(徐穆)은 시조 서신일의 아우인 서신통의 아들이다. 그는 신라 말기에 벼슬에 뜻이 없어 남천(南川 : 현재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복하(福河)를 건너고자 할 때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불어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어서 태조는 서목을 찾아가 강을 건널 방법을 물었다. 이에 서목이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왕건은 남천(南川)을 이천(利川)으로 지명을 고치고 서목을 이천백(利川伯)으로 봉했다.[3]

본관 연혁[편집]

이천부(利川府)는 고구려 때의 읍호(邑號)이며 멸오(滅烏) 또는 황무(荒武)라고도 한다. 568년 신라 진흥왕이 고을을 부(府)로 승격시켜서 군주부(軍主簿)를 두었으며 경덕왕 때 한천(漢川)이라고 고쳤다. 그 뒤 935년 고려 태조후백제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이 고을 사람 서목(徐穆)이 태조를 인도해 복하(福河)의 큰 물을 이롭게 건넜다하여 이천(利川)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로되 태조가 군사를 이 고을에 주둔케 하여 역사(役事)를 할 때에 점을 쳐서 이로움을 얻었으므로 고을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이름지어 내렸다고도 한다. 고려 인종은 감무(監務)를 두어 다스리게 하고 고종 때는 영창(永昌)이라 불렀으며 공양왕조비 신씨(祖妣 申氏)의 고향이라 해서 남천군(南川君)으로 승격시켰으며 조선에 이르러 다시 감무를 두었다. 1444년 조선 세종(26년)에 이르러 호수(戶數)가 1000호 이상이 되므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613년(광해군 5년) 현으로 강등됐고, 1623년(인조 1년) 다시 도호부로 승격됐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 이천군으로 되었고,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음죽군이 폐지돼 이천군에 합병되었다. 1996년에 이천시로 승격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서(徐), 신(申), 안(安), 한(韓), 장(張), 왕(王), 홍(洪), 황(黃)의 여덟 성씨가 살았는데 일곱 성은 모두 전해 내려오는 바가 없으며 오직 서씨만이 뒤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4]

분파[편집]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9세손 린(鱗)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6세손 연(演) 강호공파(江湖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7세손 념(恬) 문한공파(文翰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0세손 선(選) 공도공파(恭度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공도공(恭度公) 서선(徐選) 10세손 기(起) 문목공파(文穆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8세손 윤(玧) 시랑공파(侍郞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0세손 보(輔) 전서공파(典書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3세손 호(皞) 사인공파(舍人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현손(玄孫) 광(珖) 예빈공파(禮賓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증손(曾孫) 익(翼) 부령공파(副令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8세손 학종(鶴踵) 참봉공파(參奉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7세손 첨(詹) 소윤공파(少尹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6세손 릉(稜) 절효공파(節孝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6세손 릉(稜) 후손 휘영우((諱永佑) 목사공파(節孝公後牧使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2세손 눌(訥) 원숙공파(元肅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유(愈) 양경공파(良景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척(陟) 창사공파(倉使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서령공(署令公) 서유위(徐惟偉) 7세손 진(晉) 교리공파(校理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교리공(校理公) 서진(徐晉) 후손 휘인원(諱仁元) 명암공파(嗚嚴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1세손 신(信) 목사공파(牧使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11세손 유(逾) 비인공파(庇仁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직장공파 (直長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사직공파 (司直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부사공파(府使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판서공파(判書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평장공파(平章公派)
  • 상서공(尙書公) 내사령(內史令) 서희(徐熙) 후손 현령공파(縣令公派)

인물[편집]

  • 서희(徐熙, 942년 ~ 998년) : 960년(광종 11)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하여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93년(성종 12)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물리쳤다. 994년 평장사(平章事)로 청천강 이북의 여진족을 축출하였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 서선(徐選, 1367년 ~ 1433년) : 139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427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431년 좌군도총제가 되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 서일(徐一, 1881 ~ 1921년)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다. 본명은 서기학(徐夔學)이며, 아호는 백포(白圃)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1918년 39인의 서명으로 3·1운동의 전주곡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1919년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해 신문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 해 8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총재가 됐고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연성대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했다. 1920년 9월 청산리(靑山里)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헤이룽장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해 각 군단 수령회의를 열고 헤이룽강을 건너 자유시(自由市)를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자는 데 합의하고, 행동통일을 위한 단체로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됐다. 그러나 1921년 8월 토비(土匪)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다수의 청년사병들이 희생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는 마을 뒷산에서 자결했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족보[편집]

이천 서씨의 족보는 1524년 《갑신보(甲申譜)》가 최초로 발간됐다.[5]

1763년 간행된 이천서씨 족보인 《계미보서(癸未譜序)》에는 서씨(徐氏) 성을 지닌 시조가 태어난 관향(貫鄕)을 크게 세 곳으로 꼽고 있다.[6]

“우리나라 서씨(徐氏)의 관향(貫鄕)에 두드러진 것이 세 곳이다. 이천(利川)은 아간공(阿干公)을, 부여(扶餘)는 온조왕(溫祚王)을, 달성(達成)은 소윤공(少尹公)을 선조로 삼았다. (중략)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기자의 40세손 준(準)이 난을 피해 이천 서하성(徐河城)에서 살았으므로 자손이 그 지명을 취해 성을 서씨(徐氏)라 했으니 이것이 노담(老聃)이 성을 얻은 것과 같고 가장 오래된 일이다.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이 난을 피해 남으로 와서 부여성(扶餘城)에 도읍을 정했다. 그의 30세 의자왕에 이르러 신라와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의해 백제가 멸망했다. 그 뒤 태자 부여융은 당나라에 들어가니, 당에서는 부여융의 여(餘)란 글자를 고쳐 서(徐)라는 성을 주었으니 이것이 원백(袁伯)이 성을 전한 것과 같고 가장 근래의 일이다. 달성 서씨(達成 徐氏)의 선조는 고려 말에 일어났으니 선조 윗대에 반드시 성을 얻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따져 볼 길이 없다.

항렬자[편집]

이 항렬자는 을미보(1845년)를 발간할 때 지은 것으로 시조 아간공(阿干公)을 1세로 하여 27세를 기점으로 천간지지(天干地支)에서 22자를 골라 뽑아서 항렬자의 순서로 정했다. 혹시 이름이 서로 겹칠까 염려하여 두 글자씩 뽑았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