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씨
![]() 경주 김씨 종문 | |
관향 | 경상북도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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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김알지(金閼智) |
중시조 | 김봉모(또는 김은열), 김인관, 김순웅, 김예겸(또는 김영분, 또는 김명종), 김장유, 김위영, 김여진, 김소 |
주요 인물 | 김원정, 김부식, 김돈중, 김인경, 김약선, 김균, 김맹성, 김홍익, 김홍욱, 김흥경, 김한신, 김귀주, 김관주, 김노경, 김도희, 김정희, 김홍집, 김정렬, 김근태, 김관진, 김문수, 김동철, 김동연, 김조원, 김성태, 김두관, 김학용, 김태흠, 김민석, 김종민 |
인구(2015년) | 1,888,121명 (4위) |
경주 김씨(慶州 金氏)는 경상북도 경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혹칭 계림 김씨(鷄林 金氏) 또는 신라 김씨(新羅 金氏)라고도 한다.
역사[편집]
《삼국사기》에 의하면, 탈해 이사금 9년(65년)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게 하니, 숲속 나뭇가지에 황금빛 궤가 걸려 있고 궤에서 빛이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왕이 친히 가서 궤를 열어 보니 용모가 수려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탈해왕은 이 아이를 길렀는데 금궤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을 김(金)이라 했으며, 성장하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알지(閼智)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시조 김알지(金閼智)는 신화적 인물이다.
《삼국사기》〈미추왕조〉 세보(世譜)에 의하면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味鄒)를 낳았다고 하였다. 김알지의 7대손인 미추 이사금이 비로소 김씨 최초 왕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신라 13대 왕이다. 이후 56대 경순왕대 까지 김씨 왕조가 계속되었다.
이후 신라계 김씨 분화는 600여 관향으로 나뉘어졌는데, 이중 현재 소목 관계가 뚜렷하게 현존하는 본관(本貫)은 경순왕 이후 50여개이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조차도 자신을 신라계 김씨로 인식하였을 뿐, 본관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1] 즉,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본관(本貫)은 출신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본관 의식이 생겨나고 본관별 가계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 본관의 뿌리를 태보공 김알지나 무열왕, 신무왕 등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계대를 정확하게 고증할 수는 없고 이는 후대에 자신들의 본관 시조로 삼은 것일 뿐이다.[2]
본관[편집]
경주(慶州)는 경상북도 남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사로(斯盧)· 사라(斯羅)라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65년(탈해왕 9)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삼았다가, 307년(기림왕 10)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하였다.
935년(태조 18)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 항복하자,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식읍으로 주고 그를 사심관으로 삼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성종 6)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목종 11) 낙랑군(樂浪郡)이라 개칭하다가 1030년(현종 21)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1202년(신종 5) 경주 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고종 6) 동경으로 환원되었다. 1308년(충렬왕 10) 계림부(鷄林府)로 개편하였다.
1413년(태종 13) 경주(慶州)로 개칭하고, 1415년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蔚山)으로 이전하였다. 1637년(인조 15)에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대구부 경주군(慶州郡)이 되었다가,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경주시(慶州市)로 승격되었다.
분파[편집]
《씨족원류》 및 《김씨 분관록》 등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조선조에 들어와 신라 김씨(新羅 金氏) 일부 후손들이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고, 경주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하였다. 이들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수십 개의 지파로 나누어졌다.
파조 이전의 상계(上系)는 각종 병란(兵亂) 및 외적의 침입 등으로 인해 문헌(文獻)과 유적(遺蹟)이 멸실되어 자세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벽상공신내사령공파[편집]
- 파조 김예겸(金禮謙) : 고려 초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내사령(內史令)을 지냈다.[3] 손자 김의진(金義珍)은 평장사였으며 시호가 양신(良愼)이다. 6세손 김인경(金仁鏡)도 문과 급제 후 평장사였으며 시호가 정숙(貞肅)이다.
- 인물 : 김의진, 김인경
평장사공파[편집]
- 파조 김봉모(金鳳毛) : 고려 신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정평(靖平)의 시호를 받았다.[4]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문과 출신으로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시호가 문장공(文莊公)이다. 손자 김약선(金若先)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이고, 시호가 장익공(莊翼公)이며, 고려 원종의 비(妃)인 순경왕후(順敬王后)의 아버지이다.
태사공파[편집]
- 파조 김인관(金仁琯) : 고려 예종 때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역임했다.[5] 8세손 김자수(金自粹)는 안동출신으로 고려조에 문과 급제하고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이후 조선 태종이 형조 판서를 제배(除拜) 하며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자진(自盡)하여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자결 하였다. 호가 상촌(桑村)이다. 상촌의 후손들이 안동, 서산, 보령, 옥천, 영동, 음성, 경기도 광주, 순천 등에 터를 잡아 살게 되면서 계파가 세를 이루었다. 안동 타양서원, 영동 초강서원, 음성 지천서원, 등 여러 곳에 배향되었다. 김자수의 현손 김세필(金世弼)은 문과 급제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이었으며 호당(湖堂)에 뽑혔다. 기묘년에 사화를 입어 관직을 종용하고, 음성에 은거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시호가 문간(文簡)이며, 지천서원에 배향되었다.
판도판서공파[편집]
- 파조 김장유(金將有) : 고려 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다.[6] 6세손 김정(金淨)은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糖)에 선정되고, 순창군수,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충북 보은 상현서원에 배향되었다.
- 인물 : 김정
장군공파[편집]
- 파조 김순웅(金順雄) : 고려 초 장군(將軍)을 역임했다.[7] 아들 김인위(金因渭)는 평장사(平章事) 참지정서(參知政事)이고, 손자 김원정(金元鼎)도 평장사(平章事)이다. 김원정의 10세손 김균(金稛)은 벼슬이 찬성(贊成)이었고,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지고 제숙(齊肅)의 시호를 받았다.
호장공파[편집]
- 파조 김위영(金魏英) : 고려 초 호장(戶長)을 역임했다.[8] 증손자 김부일(金富佾)은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태위(太尉)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었으며, 동생 김부식(金富軾)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이었고,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인종 묘실(仁宗廟室)에 배향되었다. 동생 김부의(金富儀)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공(司空)이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이다.[9]
상서공파[편집]
목사공파[편집]
판서공파[편집]
판서공파[편집]
직장공파[편집]
- 파조 김수구(金壽龜) : 상의원 직장(尙衣院 直長)을 역임했다.[14]
상호군파[편집]
경순왕 자녀 대두[편집]
족보 위조[편집]
고려· 조선 왕조 대에 경순왕 후손들에 대한 군역· 부역 면제 등의 특전이 계속 내려졌는데, 이를 기화(奇貨)로 보계(譜系)를 위조하여 경순왕 후손으로서 특전을 누린 이들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족보 위조(僞造) 현상이 심해졌다.
이러한 보계(譜系) 위조 현상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들어 극에 달한다. 족보를 우후죽순 발간하면서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슨 시호와 군호를 붙여 미화하고 상계를 경순왕대 까지 끌어 올려 표기한 경우가 만연했다.
《김은열 묘지명》[편집]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김은열 묘지석》을 우연히 발견하여 김노규(金魯奎)가 기사한 《김은열 묘지명》에 경순왕은 고려에 고려에 항복 후 8자들을 더 두었는데 「일·굉·명·은열·중석·건·선·종(鎰·鍠·鳴·殷說·重錫·鍵·鐥·鐘)」이라 한다. 또 제2자 '굉'(鍠)과 제4자 '은열'(殷說)은 국구(國舅. 고려 경종 장인)의 아들로 고려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장지(葬地)를 특사하니 성북 10리 밖 오룡산 남쪽 기슭 30리 주변이라 하였다.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편집]
1785년 경주 김씨 김사목(金思穆)이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김노규가 찬한 《묘지명》을 바탕으로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일·황·명종·은열·중석·건·선·종(鎰·湟·鳴鍾·殷說·重錫·鍵·鐥·鐘)」이라 한다. 여기서 제2자 '굉'(鍠)을 '황'(湟)으로, 제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제4자 '은열'(殷說)의 시호(諡號)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하였다. 또 2자 '황'(湟)과 4자 '은열'(殷說)은 국생(國甥. 고려 태조의 사위)의 아들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이라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및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묘지명》 의문[편집]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등재된 《김은열 묘지명》은 찬(撰)한 사람도 없으며, 배위(配位)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되어 있을 뿐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녀들 또한 《고려사》등의 문헌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후손이라는 김사목이 족보에 옮기면서 2자 '굉'(鍠)을 '황'(湟)으로, 3자 '명'(鳴)을 '명종'(鳴鍾)으로 개명하고, 4자 '은열'(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으로 작호(爵號)까지 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신라경순왕전비》[편집]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경순왕은 전비 박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차자·영분공자(太子·次子·永芬公子)」이요, 장녀는 고려 경종의 왕비라 한다. 후비 왕씨와의 사이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은열·석·건·선·추(殷說·錫·鍵鍵·鐥·錘)」요, 차녀들은 이금서(李金書)·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전비 박씨 소생의 3자로 영분공자를 추가하고, 《김은열 묘지명》에 나오는 「1자 일·2자 황·3자 명종(鎰·湟·鳴鍾)」을 배척하고, 「5자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8자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였다. 또 2녀를 추가하였다.[16]
《김씨 분관록》[편집]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 건립 때 각 김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金氏 分貫錄)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증조부 김사목(金思穆)이 근기한 《김은열 묘지명》을 배척하고, 「경순왕의 아들 의성군 석(錫), 언양군 선(鐥), 삼척군 추(錘)」는 의성 김씨·언양 김씨·삼척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다.[17]
《증보문헌비고》[편집]
1907년 칙명(勅命)으로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 경순왕의 왕자들은 역사에 이름이 실명(失名)인데, 태자(太子)·별자(別子)라 한다. 또 다른 아들 김영분(金永芬)을 두었다고 하였다.
《김은열 묘지명》을 원용하여 경순왕 8자들을 소개하며 일(鎰), 황(湟. 평장사), 명종(鳴鍾), 은열(殷說. 대안군, 평장사), 석(錫. 의성 김씨 시조), 건(鍵. 강릉군), 선(鐥. 언양 김씨 시조), 추(錘. 일선군)라 하였다.
여기서도 경순왕의 왕자들과 8자(子)들을 별도 인물이라 하였다.[18] 또 5자 '석'(錫)은 의성 김씨 시조, 6자 '건'(鍵)은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지고, 7자 '선'(鐥)은 언양 김씨 시조, 8자 '추'(錘)는 일선군(一善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상계 소원[편집]
영분공파(추정) - 벽상공신내사령공파[편집]
대안군파(추정) - 평장사공파[편집]
- 경순왕의 4자로 추정되는 인물인 김은열(金殷說)을 파조로 소원(遡源) 시켰다.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평장사(平章事) 시중시랑(侍中侍郞)을 역임하고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에 봉해졌다고 한다.[21]
지파[편집]
- 벽상공신 내사령공파(壁上功臣 內史令公派) - 영분공파(추정)
- 두계공파(杜溪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현손 김충유[24]
- 수은공파(樹隱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현손 김충한
- 시어사공파(侍御使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현손 김충보
- 참찬공파(參贊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현손 김충익
- 밀직공파(密直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김충원
- 병판공파(兵判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김남보
-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현손 김남분
- 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 - 평장사 김인경의 6세손 김천서
- 강릉공파(江陵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5세손 김서
- 부사공파(府使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현손 김상한
- 현감공파(縣監公派) - 평장사 김인경의 현손 김정심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 대안군파(추정)
- 충선공파(忠宣公派) - 후손 김혼
- 백촌공파(白村公派) - 후손 김문기
- 병판공파(兵判公派) - 후손 김덕재
- 참판공파(參判公派) - 후손 김광재
- 익화군파(益和君派) - 후손 김인찬
- 태사공파(太師公派)
- 전서공파(典書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9세손 김자정
- 도사공파(都事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후손 김초
- 감사공파(監司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후손 김초
- 상촌공파(桑村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9세손 김자수
- 판관공파(判官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후손 김영년
- 좌랑공파(佐郞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후손 김영원
- 사승공파(司丞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후손 김영전
- 공평공파(恭平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후손 김영유
- 우재공파(愚齋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10세손 김한
- 송재공파(松齋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11세손 김수량
- 남곡공파(南谷公派) - 태사공 김인관의 16세손 김의[25]
-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 판군기감사공파(判軍器監事公派) - 판서공 김장유의 손자 김을식
- 감사공파(監司公派) - 판서공 김장유의 손자 김을돈
- 직장공파(直長公派) - 판서공 김장유의 손자 김을당
- 공조판서공파(工曹判書公派) - 판서공 김장유의 손자 김을귀
- 이조참의공파(吏曹參議公派) - 판서공 김장유의 손자 김원기
- 장군공파(將軍公派)
- 호장공파(戶長公派)
- 태사공파(太射公派) - 호장 김위영의 손자 김부일(金富佾)
-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 - 호장 김위영의 손자 김부식(金富軾)
- 사공공파(司空公派) - 호장 김위영의 손자 김부의(金富儀)
- 상서공파(尙書公派) - 파조 김여진(金麗珍)
- 목사공파(牧使公派) - 파조 김소(金邵)
집성촌[편집]
-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도웅리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오전리
- 경기도 광주시 청산면 금동리
-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창대리
-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일원
-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
-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외천리
-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죽청리
- 충청남도 연기군 금남면 대박리
- 전라북도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
-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장포리
-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옥산리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평동리
-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염곡리
-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용전리
-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덕재리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왕릉리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구련리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
-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리
-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초음리
-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구혜리
- 평안북도 운산군 위연면 답상하동
- 평안북도 영변군 봉산면 귀산동
- 함경남도 정평군 신상면 복흥동
항렬자[편집]
- 태사공파 상촌공파(파조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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