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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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욱(金弘郁, 1602년 ~ 1654년)은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자는 문숙(文叔)이고 호는 학주(鶴洲)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충청도 관찰사 당시 대동법을 시행하였으며 청감염철소(請減鹽鐵疏)를 올려 염전업자에 대한 세금 감면을 청원하였으며, 잠곡 김육대동법을 적극 지지하였다. 소현세자민회빈 강씨의 복권을 주장했다가 효종에 의해 장살되었다. 당색으로는 서인이며, 정순왕후의 5대조이자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한성부에서 찰방을 지낸 김적(金積)의 아들로 태어났다. 1624년(인조 2년) 그 해의 증광과 생원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생원, 진사가 되었다.

관료 생활 초반[편집]

1635년(인조 1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承文院) 등을 거쳐 예문관검열(檢閱)로 재직 중 시강원설서를 겸임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그 중에서도 산림 계열에 속했다. 1636년 병자호란인조의 남한산성 피난길을 호종하여 다녀왔다. 이때 청나라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인조의 항복 이후 당진현감으로 나갔으나 관찰사와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그 뒤 복직하여 대교(待敎),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냈다.

공신 세력과의 갈등[편집]

그 뒤 1641년 수찬이 된 뒤 교리·헌납을 거쳐 1645년 이조좌랑이 되었을 때, 서인 공신인 김자점(金自點)의 뜻에 거슬려 사직하였다. 그 뒤 김자점 일파가 숙청당하고 공신세력이 몰락하면서 1648년 복직하였다. 그 해 홍문관 응교가 되어 관기숙청(官紀肅淸)과 민생고의 해결책을 상소하였다.

지방관 생활과 대동법 시행[편집]

잠곡 김육대동법을 주장하자 이를 적극 찬성하였다. 효종 즉위 초 승지(承旨)를 거쳐 1651년 공충도 관찰사로 제수되었으며, 충청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 뒤 내직에 돌아와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다시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이때 청감염철소(請減鹽鐵疏)를 올려 서산·태안 지방의 철물·소금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바쳐야 하는 세금 부담이 너무 과중해 염전업자들이 염전을 중단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많고 생산이 감축된 실정에 있으니 이를 탕감해 줄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효종이 들어주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1654년(효종 5년) 6월 17일 그는 소현세자의 장남 경선군 석철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효종은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대가 능히 말하니 진실로 가상하다. 유념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여 그 상소를 문제삼는 의견을 물리치고 특별하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 김홍욱은 홍우원의 주장에 적극 동의하다가 이듬해 소현세자빈 강씨의 옥사가 무고임을 주장한다.

구언과 최후[편집]

1655년 효종 즉위 후 5년 되던 해에 김홍욱은 구언에 의해 황해감사로 재직 중, 민회빈 강씨 옥사의 조작을 탄원하여 인한재응지소(因旱災應旨疏)를 올려 강빈의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강빈의 신원회복과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의 석방을 요구하였다.[1] 효종은 즉위 초부터 소현세자 문제에 대한 발언을 엄금하였는데 그 이야기를 꺼낸다며 국문장을 열고 그를 직접 국문하였으며, 중신들의 만류와 산림의 반대, 김집과 그 문하생들의 사면 탄원서와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 일가의 무죄가 입증되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한 효종에 의해 김홍욱을 국문 끝에 장살로 살해하였다.[2][3] 죽음에 이르러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4]

사후[편집]

강빈 복권 여론[편집]

1654년남인 홍우원은 홍문관 수찬이 되었는데, 그는 당색을 초월하여 김홍욱의 사면, 복권여론을 주청하였다. 홍우원은 강빈 옥사의 허위를 직언하다 장살당한 김홍욱의 신원(伸寃)과 복권을 주장하다가 파직당하였다. 뒤에 효종은 그를 신원(伸寃)하였다. 1718년(숙종 44) 이조판서추증되고 1721년(경종 1) 서산(瑞山)의 성암서원(聖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이후 영조 즉위 초 서원철폐령에 의해 성암서원은 철폐되었으나 정순왕후에 대한 배려로 특별히 복설되기도 했다. 충청북도 음성 지천 서원(陰城 知川書院)에 제향되었다.[5]

저서[편집]

  • 학주집(鶴洲集)

가족 관계[편집]

  • 할아버지 : 김호윤(金好尹)
    • 아버지 : 김적(金積)
    • 어머니 : 최원(崔遠, 화순최씨)의 딸
      • 형님 : 김홍익(金弘翼, 1581 ~ 1636)
      • 부인 : 오정(吳靖)의 딸
        • 장남 : 김세진(金世珍)
          • 손자 : 김두성(金斗星)
          • 손자 : 김두정(金斗井)
          • 손자 : 김두규(金斗奎)
          • 손자 : 김두벽(金斗壁)
          • 손녀 : 박전(朴錪)에게 출가
          • 손녀 : 윤명원(尹明遠)에게 출가
        • 차남 : 김계진(金季珍)
          • 손자 : 김두광(金斗光)
        • 장녀 : 이기직(李基稷)에게 출가
        • 차녀 : 한성열(韓聖悅)에게 출가
        • 삼녀 : 조지한(趙持韓)에게 출가
        • 사녀 : 이기서(李基敍)에게 출가
        • 오녀 : 박상주(朴尙胄)에게 출가

기타[편집]

그가 죽기 전에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고 한 말은 후세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6][7]

일찍이 조지운이 감사 김홍욱(金弘郁) 상에서 조문을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이 들어오는지라 뒷걸음치며 물러나 길을 양보하였다. 그러자 정두경이 눈을 흘겨보며 말하였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조지운이 아버지의 이름을 들어 대답하자, 정두경이 말하였다.“성상께서 김문숙을 죽였으니, 이는 성세(聖世)의 누로다. 아깝도다. 아까워.”그때에 상께서 몰래 대궐 안의 사람을 보내어 조문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였던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감히 조문을 못하였다. 정두경은 짐짓 일부러 이런 말을 발설하여 그 사람들로 하여금 아뢰도록 하게 한 것이었다.[8]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각주[편집]

  1. 그에 의하면 심한 가뭄이 소현세자빈을 사사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고 그 원통함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2.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 249~251 페이지 참고
  3.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 163 페이지 참고
  4. 성암서원
  5. 문화유산학술연구정보지식포털
  6. 김홍욱
  7. 김홍욱
  8. 이희준, 《계서야담》 (유화수 외 역, 국학자료원, 2003) 636~637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