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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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주요 성씨(KNSO, 2000)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그 외

(金)씨는 성씨의 하나이다. 한국의 김(金)씨는 대부분 신라 김씨 등 신라계와 김해 김씨가야계에서 유래한다. 여진족이나 일본에서 조선에 귀화하여 김씨 성을 받은 기록도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기원전 태고 때 소호가 김(金)씨였고, 한나라 때 한 무제흉노족에게 김(金)씨 성을 사성했다고도 한다. 한편 중국, 홍콩, 대만 등 중화권에서는 김(琻), 김(鍂)으로 발음되는 여러 다른 김씨가 존재하나, 대한민국에도 존재하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1] 김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0,689,959명으로 조사되어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신라계 김씨[편집]

신화에 따르면, 신라 김씨의 시조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실제로는 법흥왕 때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증대되면서 대내외적으로 사용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년)에 당나라에서 간행된 《북제서》에 진흥왕의 성을 김(金)으로 처음으로 기록하였다. 5세기 내물왕씨 세력이 사라지고, 씨가 집권하였다. 삼국통일 이후 무열왕계인 문무왕의 직계 자손들이 왕위를 세습하였는데, 혜공왕무열왕계 중에서 문무왕의 직계혈통의 계보가 끊어졌으며, 사다함 후손이자 내물왕의 10세손인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하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선덕왕이 후사없이 붕어하자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인 김주원을 따돌리고 원성왕으로 즉위했다. 그 이후 경순왕까지 원성왕계가 왕이 되었으므로 현존 신라 김씨는 대부분 원성왕김경신의 후손이다.

신라계 김씨의 분화는 경순왕 이후로 판단된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조차도 자신을 신라계 김씨로 인식하였을 뿐, 본관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이 없다(현재 김부식은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고려 시대만 하더라도 본관은 출신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본관 의식이 생겨나고, 본관별 가계도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 본관의 뿌리를 대보공 김알지나 무열왕, 신무왕 등으로 삼는 경우가 있지만, 계대를 정확하게 고증할 수는 없고, 이는 후대에 자신의 본관 시조로 삼은 것일 뿐이다.[2]

  • 부안 김씨(扶安 金氏) 또는 (부령 김씨) 시조는 신라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박씨 소생의 첫째왕자로 태자(太子)에 책봉(冊封)되었다. 세칭 마의태자라 부르며,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으나, 일부 문헌(文獻)에 의하면 김일(金鎰)이라 한다. 그는 935년(경순왕 9년) 10월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하려 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종묘(宗廟)에 곡을 하고 처자를 죽이고 개골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고 전한다.[3] 후손 김경수(金景修)가 비로소 고려조에 출사하여 문과에 급제 이부상서 우복야 벼슬에 오르고, 그의 아들 김춘(金春)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책봉되어, 후손들이 부령(扶寧)의 개칭인 부안(扶安)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시조와 후손 김경수(金景修) 사이의 150여년에 이르는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가문을 중흥시킨 김경수(金景修)의 5세손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년~1278년)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 이부상서(吏部尙書) 김경수(金景修),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 김춘(金春),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김구(金坵), 조선조 부안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된 운강(雲江) 김계(金啓)는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과 도의(道義)를 강론(講論)하였으며, 유천서원(柳川書院) 배향 김굉(金鋐)·김명(金銘)·농암 김택삼(金宅三), 창의일문칠절(唱義一門七節)의 한 분인 충경(忠景) 김익복(金益福), 동림서원(東林書院) 배향 김서경(金瑞慶) 등이 있다.
  • 울산 김씨(蔚山 金氏)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박씨 소생의 둘째왕자로, 학성(鶴城,현 울산광역시) 일대를 식읍으로 받고,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으나 《하서 김인후 가장(家狀)》,《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등에 등에서 언급된다. 935년(신라 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 태조에게 양국하려 하자 형인 태자와 함께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종묘에 곡을 하고,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과 함께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의 겨울산)에 들어 갔다. 이후 일설에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사(法水寺)에 머물면서 해인사(海印寺)에도 드나들며 여생을 보냈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그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14세손 김환(金環)이 고려조에 출사하여 충숙왕 때 삼중대광 광록대부에 오르고 학성군(鶴城君)에 봉군되어 후손들이 학성(鶴城)의 개칭인 울산(蔚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17세손 조선 개국원종공신 김온(金穩)까지의 분파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 김온(金穩)의 후손들만 기사보(己巳譜)에 합보(合譜)한다 하였으니 김온(金穩)이 중시조가 되는 까닭이다. 인물은 고려조의 김환, 김계흥, 김황, 조선조의 김인후, 김경수, 김기하, 김희서, 김녹휴, 김익중, 대한민국의 김성수, 김병로, 김연수, 김상협, 김종인 등이 있다.
  • 경주 김씨(慶州 金氏) 시조는 신라 경순왕과 왕비 죽방부인 박씨 소생의 3남 김명종(金鳴鍾-추정)과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1남 김은열(金殷說)이 대표적이며,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이다. 고려조에서 영분공(永棼公)과 경주군(慶州君)에 각 봉해졌는데, 김명종(金鳴鍾)을 시조로 하는 영분공파(永棼公派) 및 김은열(金殷說)을 시조로 하는 은열공파(殷說公派)와 조상에 대한 계통은 확실하지 않으나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김장유), 태사공파(太師公派. 김인관)로 세계(世系)를 이어오는 계통 등 크게 5개파로 갈라져 후대로 내려오면서 10여개의 지파(支派)가 생겨났다. 구안동, 전주, 김녕, 밀양등으로 분관하기도 하였다. 김씨 본관 중에서는 김해 김씨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 김인경(金仁鏡), 조선조 김한구, 정안왕후, 김귀주, 정순왕후, 김정희, 김관주, 대한제국 때 김홍집, 김춘희 김도태, 김정록, 김동훈등이 있다.[4]
  • 의성 김씨(義城 金氏) 시조는 김석(金錫)으로 신라 경순왕과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2남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이다. 고려조에서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어 후손들이 의성(義城)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 의하면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의 4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신라김씨 2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등의 문헌에는 5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개국과 함께 8세손 김공우(金公瑀)대에 크게 번창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조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김성일(金誠一), 김우옹(金宇顒), 대한제국 김창숙(金昌淑) 등이 있다.[5]
  • 후 강릉 김씨(後江陵 金氏) 시조는 김건(金鍵)으로 신라 경순왕과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3남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이다. 고려조에서 강릉군(江陵君)에 책봉되어 후손들이 강릉(江陵)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강서 김씨(江西 金氏), 청주 김씨(淸州 金氏), 홍주 김씨(洪州 金氏) 등으로 분관 되었다.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을 시조로 하는 선 강릉 김씨와 구분하기 위해, 후강릉 김씨(後江陵 金氏)라 부르기도 한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 정종 때의 학자 김반(金泮)으로 강릉에서 출생하여 대제학(大提學)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경서(經書)에 정통했다. 1399년(정종 1)에 급제, 성균관에 재직 40년 동안 많은 명사들이 그 문하에서 나왔으며, 벼슬은 대사성에 이르렀다. 당시 김구(金鉤) 김말(金末)과 함께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었다. 만년에 강서(江西에 살다가 사망했다.[6]
  • 언양 김씨(彦陽 金氏) 시조는 김선(金鐥)으로 신라 경순왕과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4남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이다. 고려조에서 언양군(彦陽君)에 책봉되어 후손들이 언양(彦陽)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 김취려(金就礪), 조선조 김천일(金千鎰), 대한민국 김동조(金東祚) 등이 있다.
  • 삼척 김씨(三陟 金氏) 시조 김위옹(金渭翁)은 신라(新羅) 경순왕의 손자로, 고려때 검교사농경겸 어사대부ㆍ은청광록대부ㆍ상주국 좌승상에 이르렀고, 삼한벽상공신에 책록되어 실직군(悉直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실직군왕(悉直郡王)에 추봉되었다. 시조의 아버지는 경순왕과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5남인 김추(金錘)이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으로 일선군(一善君)/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다. 실직(悉直)은 삼척(三陟)의 옛 이름인 관계로, 후손들이 삼척(三陟)을 관향으로 삼고, 김위옹(金渭翁)을 시조(始祖)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 김인궤(金仁軌), 조선조 김양보(金良輔), 김기문(金起文), 대한민국 김건 (1929년)(金建) 등이 있다.[7]
  • 선산 김씨(善山 金氏) 시조 김추(金錘)는 신라 경순왕과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5남이며,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이다. 고려조에 상서령 일선군(一善君)/삼척군(三陟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일선(一善)의 현재 지명인 선산(善山)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8] 그리고 후대에 삼척(三陟), 온양(溫陽), 희천(熙川), 진주(晉州), 원주(原州)등으로 분관(分貫)하였다고 한다.[9] 선산 김씨는 고려시대 크게 성창(盛昌)한 명문사족(名門士族)으로 많은 후손이 공경 장상(公卿 將相)에 올라 명문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손들이 개경을 중심으로 세거하면서 고려 발전에 지도적 역할을 다하며 크게 공헌 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말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문(金文), 중서령(中書令) 김성원(金成元), 정순대부 광주목사(正順大夫 廣州牧使) 화의군(和義君) 김기(金起), 조선조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성부(金成富), 좌의정(左議政) 화의부원군(和義府院君) 김성룡(金成龍), 고려말 별장동정(別將同正) 김성여(金成呂), 김성조 , 김관용 등이 있다.
  • 통천 김씨(通川 金氏) 시조 김교(金較)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이다. 그는 고려 광종 때 통천군(通川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통천(通川)을 본관으로 하였다. 일설에 그의 아버지는 경순왕의 첫째아들인 태자의 차남이라 한다. 통천 김씨(通川 金氏) 족보 초간본에 전란으로 인해 상계 계대를 전승할 수 없어 시조 통천군(通川君) 김교(金較), 평장공(平章公) 김이청(金以淸), 첨의정승공(僉議政丞公) 김위(金渭) 3대는 별책으로 쓰고, 12세손 고려 말 상서공 광정대부 판도판서 문한학사에 오른 김원등(金遠登)을 중시조로 모셔 계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세종 때 등과한 문신으로 호는 송재(松齋)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원등(金遠登)의 후으로 정언(正言), 남포현감(藍浦縣監)을 역임한 김훈(金勛), 중종(中宗)때 문과 합격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오른 김권(金權), 호가 서암(西岩)으로 과거 급제(及第) 후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난 수행 중 적을 만나 순절한 김여련(金汝鍊) 등이 있다.
  • 나주 김씨(羅州 金氏)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신라 경순왕의 손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나주군(羅州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슬하에 중륜(重輪)·성륜(聖輪)·인륜(仁輪)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아들 계자(季子) 인륜(仁輪)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나주(羅州)를 관향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일설에 그의 아버지는 신라 경순왕의 막내 아들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으며, 신라가 망하자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불가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10] 13세손 김인충(金仁忠)은 고려조에 좌령랑장(左領郎將)을 역임하고 고려가 망하자 1403년(태종 3)에 제주목 애월읍 고내봉 부근인 구엄리에 정착하였는데, 후손들이 그를 제주 입도조(濟州 入道祖)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에 제주시 노형동에서 시제를 모시고 있다. 14세손 김대경(金臺卿)은 자(字)가 중시(仲始), 호(號)가 월당(月塘)으로,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문충(文忠)의 시호(諡號)를 받아 금성 김씨(錦城 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안로 김씨(安老 金氏), 교하 김씨(交河 金氏), 금성 김씨(錦城 金氏), 상음 김씨(霜陰金氏), 해주 김씨(海州 金氏) 등으로 분관 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 김인충(金仁忠), 김대경(金臺卿), 조선조 도총관 김충수(金忠秀)는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워 호조참판에 올랐으며, 정유재란 때는 부인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대한민국 김계원(金桂元), 김의택(金義澤) 등이 있다.
  • 안로 김씨(安老 金氏) 시조 김지경(金之敬)은 경순왕 후예로 그 계통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설에 나주 김씨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후손이거나, 그의 후손 호장 중윤을 지낸 김득장(金得章)의 후손이라고 한다. 후손들이 누대에 걸쳐 나주(羅州)의 속현인 안로(安老)에 세거하면서 관향을 안로(安老)로 하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호장(戶長) 김득장(金得章)의 아들 김극순(金克淳)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고, 상서(尙書)를 지낸 김요선(金堯瑄)과 그의 아들 김수연(金守淵)이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으며, 후손 김가구(金可久)는 충목왕(忠穆王) 때 문과(文科)에 올라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 판서(禮儀 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총관(摠管) 김정준(金廷俊)도 명성을 날렸다.[11] [12]
  • 교하 김씨(交河 金氏) 시조 김맹정(金孟貞)은 나주 김씨 시조 김운발(金雲發)의 7세손이다. 그는 신라 종실의 후예로 고려 인종(仁宗)때 장군으로 1135년(고려 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교하군(交河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교하(交河)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교하(交河)는 현재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교하(交河)·탄현면(炭縣面) 일대를 말한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조 김승귀(金承貴), 김용례(金庸禮), 김실로(金實老), 조선조 김정석(金廷碩), 김성구(金成九), 김희신(金喜臣) 등이 있다.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 평장사(平章事) 김숙승(金叔承)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경순왕 손자이다. 경순왕의 8대손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이 고려 삼별초난을 평정하여, 벼슬이 추충정난정원공신에 올랐으며, 상락군(上洛郡) 개국공(開國公)에 봉해지고, 안동(安東)을 식읍으로 받아 후손들이 안동(安東)을 본관으로 하고 그를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구 안동김씨’를 일명 ‘상락 김씨(上洛 金氏)’라고도 하며, 안동의 고호(古號)가 '석릉(石陵)'으로 고대에는 '석릉 김씨(石陵 金氏)'라고도 하였다. 2000년 인구통계에 대략 45만명으로 나타났다. 인물로는 김방경(金方慶), 김시민(金時敏), 김시양(金時讓), 김자점(金自點), 김득신 (시인), 백범(白凡) 김구(金九) 등이 있다.[13]
  •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시조는 고려 태사 김선평(金宣平)이다. 그는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 안동의 옛 이름) 성주로 왕건을 도와 후백제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고려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태사(太師)에 봉해졌다. ‘신 안동 김씨’는 안동(安東)의 호족으로 전할 뿐, 조선씨족통보에 구체적인 연원은 없다. 조선조에 들어와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이 정승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인조 때 척화파(斥和派)로 유명한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후손들이 두드러져 1명의 정승과 14명의 판서를 배출하였다. 우선 관계를 살펴보면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 등 15명의 정승과 7명의 대제학, 3명의 왕비(순조비 순원왕후, 헌종비 효현왕후, 철종비 철인왕후), 50여명의 판서를 배출하여 ‘신 안동 김씨’가 명족(名族)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 세력은 조선조말 세도 정치를 주도하여 조선 개혁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여 조선을 몰락하게 한 요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들을 흔히 ‘장동 김씨(壯洞 金氏)’, ‘장김(壯金)’이라 부른다. 이들 ‘장동 김씨’(壯洞 金氏)는 한양의 장동(壯洞. 오늘날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일대) 지역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신 안동 김씨’ 세력의 분파일 뿐 경상도(慶尙道)나 안동(安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2000년 인구통계에 대략 5만명으로 나타났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조 김번(金璠), 김극효(金克孝),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김수항(金壽恒),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원행(金元行), 김조순(金祖淳),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좌근(金左根), 김삿갓(金炳淵), 김병학(金炳學), 김옥균(金玉均), 김좌진(金佐鎭)등이 있다.
  • 청도 김씨(淸道 金氏) 시조 김지대(金之岱)는 신라 경순왕 후손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世孫)이다. 그는 1190년 고려 19대 명종(明宗)때 시중(侍中)을 지낸 김여흥(金余興, 水原金氏)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인물로는 조선시대 좌참찬 김점(金漸), 대사간 김난상(金鸞祥), 임란공신 김희방(金希邦), 성리학자 김응하(金應夏)·익동(翊東),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 등이 있다.
  • 전주 김씨(全州 金氏) 시조는 문장공 김태서(金台瑞)이다. 그는 경순왕의 후손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문하시랑평장사와 보문각대제학을 지냈다. 전주 김씨는 인구수가 적어서 이합집산 가능성이 없는 단일 신라 본관이다. 고려 고종 41년(1254)에 몽골경주에 침략한 이후 경주가 폐허가 되자 김태서(金台瑞)가 식솔들을 거느리고 전주로 이거하였다. 이후 김태서(金台瑞)는 완산군(完山君(전주군(全州君)))에 봉해졌고 후에 전주를 관향으로 삼았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 원종의 장인이자 장익공(莊翼公)에 추시된 김약선, 대몽 항쟁과 이연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운 김경손, 문학가 김동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김일성, 대한민국 정치인 김재순, 교육자 김연준 등이 있다.
  • 청풍 김씨(淸風 金氏) 시조는 김대유(金大猷)이다. 그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대장군 김순웅(金順雄)의 12세손으로, 고려 말에 문하시중을 지내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청풍(淸風,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일대의 옛 지명)을 관향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2명을 배출했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 문신이자 기묘명현(己卯名賢)·성리학자·대사성 김식(金湜), 김구(金構), 영의정(領議政) 김육(金堉), 판서 김좌명(金佐明), 현종의 국구 김우명(金佑明),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우의정 김석주(金錫胄), 정조 국구·판서 김시묵(金時默), 판서 김원식(金元植), 우의정 김구(金構), 그의 아들 김재로(金在魯)와 손자 김치인(金致仁)의 부자 영의정,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성리학자 김종후(金鍾厚), 대제학 김유(金辣), 판서 김취로(金取魯),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영의정 김상로(金尙魯), 판서 김종정(金鍾正), 김규식(金奎植), 소설가 김유정(金裕貞)등이 있다.[15]
  • 강릉 김씨(江陵 金氏) 시조는 명주 군왕(溟州 郡王) 김주원(金周元)이다. 그는 신라 김알지의 21세손이며, 태종무열왕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이다. 신라 혜공왕 13년 이찬으로 시중이 되었고, 신라 선덕왕 6년 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들의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큰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그 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명주(溟州)에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강릉)을 중심으로 울진, 평해, 삼척 등 동해안 일대를 다스리게 하고 명주 군왕(溟州 郡王)에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명주(溟州)의 현재명인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슬하에 3형제로 장자 종기(宗基)의 손자 양(陽)의 자손이 무전(無傳)하고, 차자 헌창(憲昌)부자(父子)는 반란으로 자살하여 무후(無后)하고, 3자 신(身)이 유일한 강릉김씨로 증손 3형제가 분파되었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 초 명주(溟州) 장군으로 끝까지 항거하다 왕건에게 설득되어 협력하여 후백제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후손들은 고려조에서는 왕씨가 되었다가 조선 개국기에 왕씨가 탄압을 받자 원래 성씨인 김(金)씨로 복성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신라 왕족 김헌창(金憲昌), 고려조 김순식(金順式), 김인존(金仁存), 조선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대한제국 김해경(金海卿), 대한민국 김동환, 김해경, 김진만, 김윤기(金允起), 김준기(金俊起), 김진선(金振兟) 김택기 등이 있다.[16]
  • 순천 김씨(順天 金氏)의 시조 김총(金摠)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825년(신라 헌덕왕 17년)에 태어나 태봉의 인가별감(引駕別監)으로 공을 세워 평양군(순천의 옛 지명)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본관을 순천(順天)으로 하였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 때에 6진을 개척한 김종서, 인조반정을 통해 훈로(勳老)가 된 김류, 대한민국 김종철, 김종식, 김승연, 김호연 등이 있다.
  • 광산 김씨(光山 金氏)의 시조는 김흥광(金興光)으로 그는 신라 신무왕(神武王)의 3남이다. 그러나 경주 김씨 대동보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광산 김씨에 대한 연원이 없다. 그래서 호남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세력들이 연합한 본관으로 추정하는 관점이 있다. 문중에서는 신라 왕자인 김흥광(金興光)의 광산 도피설을 제시하고 있다.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金長生)은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전수받았다. 특히 그의 예학은 아들 김집(金集)에게 이어지고 송시열, 송준길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의 태두가 되었다. 그의 후손에서 7명의 대제학(大提學)이 배출되고, 1688년(숙종 14)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연산(連山) 돈암서원(豚岩書院) 등 10여개의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김집(金集)은 예학(禮學)의 학문을 더욱 깊이 연구하고 체계를 세워 예학파(禮學派)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문묘(文廟)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때부터 광산 김씨가 명족(名族)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전성기를 누렸다. '광김(光金)'이라 부른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조 충남 연산(連山)의 김국광(金國光), 김계휘(金繼輝),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김만기(金萬基), 김만중(金萬重), 대한민국 김동한, 김수환, 김춘수, 김우중, 김용준, 김황식, 김효석, 김병조 등이 있다.[17]
  • 선산 김씨(善山 金氏) 또는 일선 김씨(一善 金氏)[18] 시조는 통일신라 문성왕의 7세손으로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김선궁(金宣弓)을 시조로 한다. 그는 일선리(一善吏)에 재임 중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 정벌차 숭선(嵩善. 선산(善山))에 머물면서 장사(壯士)를 모집하니 큰 공을 세워, 태조 왕건이 어궁(御弓)을 하사하자 이름을 선궁(宣弓)이라 하였다. 삼한통합 익찬공신에 책봉 되었다.[19] 이후 세계가 불명확 하여 김기(金起)를 1세조로 한다.주요 인물로는 김원숭, 문화왕후, 김숙자, 김종직, 김효원, 김윤환, 김동리 등이 있다. 김원숭(金元崇)은 부정적인 인물이므로 김선궁(金宣弓)계 , 김한충(金漢忠)계 모두 관련성을 부정한다.
  • 선산 김씨(善山 金氏)는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한다. 신라 경순왕의 사촌 김유렴(金裕廉)이 신라가 망할 때 왕건을 따라와 개성에 거주하였는데, 김유렴(金裕廉)의 후손인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한충(金漢忠)을 시조로 하는 계통은 남한의 인구조사에서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가야계 김씨[편집]

가야 김씨의 상징적 시조는 가야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김수로(金首露)이다. 석이정전(釋利貞傳)에 따르면 가야산의 하늘의 신(神)인 이비가(夷毗訶)에 감응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명은 고령 대가야 시조 뇌질주일(惱室朱日)이고, 다른 한명은 김해 금관가야(金官伽倻) 시조 뇌질청예(惱窒靑裔)이다. 고성 소가야 시조는 김말로(金末露)이다. 5세기 금관 가야진한 사로국과 전쟁을 하였는데, 고구려의 공격으로 멸망하여 남해 해안 등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부 세력이 6세기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어 대가야의 이뇌왕, 월광태자가 진흥왕에게 투항하여 가야 소국은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김해 김씨는 가야 수로계를 선김(先金), 신라계를 후김(後金)으로 구분하여 불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가야계 선김, 신라계 후김, 일본계 사성김으로 나뉘었다. 가야 왕손이라는 족보에 의하면 연안 김씨, 고성 김씨 등도 가야계 이다. 고려 시대 한반도 전역에 많은 가야 김씨 본파가 있었으나, 조선 시대 김해로 통합, 몇몇은 지역으로 통합되었다고 한다. 김유신 자손들은 신라 후기 충청도 지역에 주로 거주하였다.[20] 따라서 김해가 본래 관향은 아니었고 가야 김씨로 불리었다.

김해 김씨의 실존 시조는 장군 김유신(金庾信)이다. 주요 인물로는 조선김홍도, 김만덕, 대한제국 때 김기창, 김활란, 김한규, 김형원, 김원군, 김인승, 김경주 등이 있다.

고려 김씨[편집]

성씨가 보급되기 시작한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김씨도 많다. 동주 김씨고려사에 따르면 황해도 호족 출신 김행파(金行波)가 왕건에게 김씨 성을 하사 받았다. 후손으로는 천추태후의 정부 김치양(金致陽)이 있다. 삼별초 장군 김통정의 경우 본래 성씨는 질, 진이었는데 진이 김과 같아서 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몽골이 고려를 내정 간섭하던 시대에 한국은 한문 발음의 체계에 변이되는 과도기로 중세 중국어 발음과 광둥어, 몽골식 발음이 혼재하였다.

고려 중반에 시작된 본관으로는 연안 김씨(김섬한), 해주 김씨(2계통- 김사렴, 김문동), 해풍 김씨(개풍 김씨,김숭선)가 있다. 연안 김씨는 김섬한의 형이 강릉에 유배되었다고 전하므로 강릉, 경주 김씨 계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주, 해풍(개풍)은 경순왕 후손이라고 한다.

흉노계 김씨[편집]

몽골흉노족 출신 김일제(金日磾)는 한 무제에게 김(金)씨를 사성받았다. 후한말 인물 김위, 김선김일제 후손이라고 전한다.

여진족 김씨[편집]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에 귀화한 김씨 중 가장 많은 것은 여진족에 뿌리를 둔 김씨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귀화한 여진족 중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

6진(六鎭) 개척 당시 세종은 귀화한 여진족 수백 명에게 김씨 성을 하사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세조 때 기록에 나타난 귀화 여진족의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세종 때- 김거파(金巨波) 김고도개(金古道介) 김구음파(金仇音波) 김권로(金權老) 김대두마(金大豆麻) 김도을온(金道乙溫) 김생아(金生阿) 김소응거(金所應巨) 김속응합(金速應哈) 김시구(金時具) 김아을사(金阿乙沙) 김오광아(金吾光阿) 김자환(金自還) 김파보하(金波寶下) 김파을대(金波乙大) 김희주(金希主) 등.
  • 세조 때- 김걸도혁(金乞都革) 김공소(金公疎) 김교합(金咬哈) 김다롱합(金多弄哈) 김마상개(金麻尙介) 김우리개(金于里介) 김상미(金尙美) 김아도을치(金阿都乙赤) 김아라(金阿喇) 김아랑합(金阿郞哈) 김아을가(金阿乙加) 김역류(金易留) 김우두(金于豆) 김우허내(金右虛乃) 김유리가(金留里加) 김윤적(金允績) 김이랑합(金伊郞哈) 김인을개(金引乙介) 김입성(金入成) 김주창개(金主昌介) 김지하리(金之下里) 김차독(金箚禿) 김지칭가(金只稱哥) 김자라노(金者羅老).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때 이전에도 김씨 성을 하사받은 여진족들이 있다. 김고시가물(金高時加勿) 김광수(金光秀) 김대첩목아(金大帖木兒) 김동개(金同介) 등이 그들이다.

조선에 귀순한 여진족들에게 김씨 성을 내린 것은 12세기 여진족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귀화한 여진족으로 김씨 성을 가지고 관직에 나간 사람이 많이 있다. 광해군(光海君) 때는 여진족이 조선 어디서든 살 수가 있어서 곳곳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하나도 없다. 현재 여진족을 조상으로 하는 김씨가 적은 것은 모화사상(慕華思想) 때문일 것이다. 족보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나오기 시작한 조선 중기 이후는 모화사상이 팽배해 있을 때였다. 당시 만주 오랑캐라고 하면 멸시의 대상이었다. 설사 여진족이나 거란족 귀화인을 조상으로 둔 귀화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감추었을 것이다.[21]

  • 청나라 멸망 후 왕족이 만주족 성씨 애신각라(愛新覺羅, 아이신교로[22])에서 아이신이 금을 뜻하여 한식 성씨 김(金, 진)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 김씨[편집]

  • 중국 태고 때 인물인 소호금천씨는 김(金)씨였다. 중국 한족(漢族) 김씨들의 상당 수는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모시기도 한다. 한무제 어머니인 효경황후 왕지의 전 남편은 김(金)씨였다.
  • 초나라와 관련이 있는 오월의 전(錢)씨는 진와 유사하게 발음되고 뜻도 금과 같이 돈(황금)을 뜻하여 전류의 자손들이 김(金)으로 개성하였다. 초나라 근(靳)도 진으로 발음되어 진(金)씨가 되었다고 믿어 지기도 한다. 원나라 때 일부 호족에게 김씨로 재본성하였다. 송나라 때 중국에 들어온 유태인들이 김(金), 리(李), 애(艾), 장(张)씨 성을 등을 득성했다고 한다. 김(金)의 중국 남방 지방 광둥어는 감, 금이다.
  • 여남 김씨 족보에는 6세기 동위 문무관 김응이 왕에게서 김씨 성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기록에는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아 실존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족보에 따르면 755년 동위 관리 김응 후손 김충(金忠)은 당나라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 오다가 경북 영덕에 표착하였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은 김충(金忠)에게 남민(南敏)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남민(南敏)은 신라 여성과 결혼하고 영양으로 이거하여 영양 남씨를 창본하였다. 아들 김석중(金錫中)은 영양에 옮겨 정착하여 영양 김씨를 창본하였다. 이후 세보가 소실되어 영양 김씨는 김충황(金忠晃)을 1세조로 하였다. 다른 문헌에 영양 김씨의 시조는 고려조에 전서를 지낸 김윤철(金允轍)이다.


일본계 김씨[편집]

김해 김씨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왜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에 귀화한 사야가(김충선)이다. 김충선(金忠善), 김성인(金誠仁)은 조선 선조, 정유재란 때 귀화한 일본인 장수다.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워서 성과 이름이 하사되었다. 김충선은 경북 우록동에 정착하였다. 아들 김경원(金敬元), 김경신(金敬信), 김우상(金右祥), 김계인(金繼仁), 김경인(金敬仁)과 손자 김진영(金振英)이 벼슬에 올랐으며, 후손 김여삼(金汝三), 김용하(金龍河)는 효행으로 유명하였다. 김성인(金誠仁)은 경북 청도에 정착하였다. 후손으로는 김귀성(金貴成), 김흥발(金興發), 김득추(金得秋), 김수태(金守泰) 등이 있다. 본관은 김해, 우록, 함박이다. 일본계 김해 김씨는 2000년 대한민국에 약 20만 명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일월록(日月錄)》이라는 문헌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귀순한 일본인으로는 김상의(金尙義)라는 사람도 있다. 일본 성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김충선이나 김상의에 앞서 귀화한 일본계 김씨들도 있다. 조선 세종 때 귀화한 김호심파(金好心波), 성종 때 귀화한 김삼보라사야문(金三甫羅沙也文)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일본에서 쓰던 이름에 김씨 성을 붙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후손도 적지 않겠지만, 현재 일본계 귀화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은 김충선을 시조로 하는 김해 김씨김성인(金誠仁)을 시조로 하는 함박 김씨 뿐이다.

한편, 일본은 삼국시대 부터 를 김(金)으로 적어 왔다.

발음 / 표기[편집]

한국어로 金의 일반적인 표기와 발음은 “금”이지만, 김포(金浦), 김천(金泉), 김포공항과 같은 일부 지명, 장소나 성씨를 표기할 때는 “김”이라고 발음한다.

중국어로 금(金)을 , 광둥어로는 금(金)을 , 또는 으로 발음한다.

본관[편집]

각주[편집]

  1. 참고 : 김(琻),김(鍂)은 궉(鴌)씨 등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옥편에는 없는 한자이며, 중국대옥편과 같은 전문옥편 등에나 나오는 한자들이다. 참고로 한글2007과 같은 워드프로그램에서도 '김'을 입력 후 한자변환으로 찾을 수 있다. 궉도 마찬가지.
  2.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8> 김해김씨(金海金氏), 세계일보, 2011년 5월 24일.
  3. 김정현(金丁鉉. 역사저술가):《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1]]
  4. 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경주김씨(慶州金氏)[[2]]
  5.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의성김씨(義城金氏)[[3]]
  6. 청주 김씨 :  : 김정(金錠)계 청주김씨에서는 시조의 휘(諱)가 김정(金錠)이며, 그는 경순왕의 여섯째 아들이다고 한다.
  7.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삼척김씨(三陟金氏)[[4]]
  8. 시조 김추(金錘)는 삼척 김씨 시조와 동일인으로 시조에 대한 정통성을 놓고 족보 위작 등을 거론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9.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선산김씨(善山金氏)(들성 김추계)[[5]]
  10. 그러나 1784년(정조 8)에 발견되었다는 경순왕 4남 김은열(金殷說) 묘지석을 탁본하였는데 탁본에는 이름이 김굉(金鍠)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경주김씨 후손 개성유수 김정집(金鼎集)이 1849년(헌종 15)에 세운 묘비에는 고려 평장사 김황(金湟), 고려 태조의 외손(낙랑공주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11. 「신라김씨연원도(新羅金氏淵源圖)」에는 김지경(金之敬)이 경순왕의 둘째 아들의 15세손으로 나타나 있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호장 중윤(戶長 中尹)을 지낸 김득장(金得章)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2. 일설에 시조 김지경(金之敬)은 김우발(金雨發)의 아들이다고 한다.[[6]]
  13. 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안동김씨(安東金氏)(구파)[[7]]
  14. 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김녕김씨(金寧金氏)[[8]]
  15.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청풍김씨(淸風金氏)[[9]]
  16. 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강릉김씨(江陵金氏)[[10]]
  17. 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광산김씨(光山金氏)[[11]]
  18. 관향에 대한 정통성을 놓고 김추(金錘)계와 김선궁(金宣弓)계는 족보 위작 등을 거론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19. 정복규의 한국 성씨를 찾아서-선산김씨(善山金氏)(일선 김선궁)[[12]]
  20. 정복규에 한국 성(性)씨를 찾아서-김해김씨(金海金氏)[[13]]
  21. 金丁鉉 姓氏연구가, 우리나라엔 金씨가 왜 그렇게 많을까, 월간조선, 2013년 6월
  22. 최근 KBS에서 푸이의 성을 아이신줘러라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