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김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부령(부안) 김씨
관향 전라북도 부안군
시조 태자공(太子公)
주요 중시조 김구(金坵)
주요 집성촌 전라북도 부안군
전라남도 곡성군
전라북도 장수군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북도 정읍시
주요 인물 김직손, 김서성, 김규하, 김택술
인구(2015년) 69,157명

扶寧(扶安) 金氏전라북도 부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신라김씨의 적통으로서 유일하게 김알지(대보공)를 원시조(遠始祖)로 할 수 있다.

역사[편집]

扶寧(扶安) 金氏의 관시조(貫祖)는 신라 경순왕의 태자이시며 국성(國姓), 금성 김씨(金城 金氏) 마지막 왕이며 휘는 단정할 수 없다.  진한이 본래 박석김 삼성으로부터 말미암아 웅패(雄覇)의 뜻을 품고서 국가의 차림을 갖춘 것은 가장 빠르지 않았으나 여러 개국공신들(지백호 등) 이 받들어 광좌(匡佐) 하고 또 대의(大義)가 날로 새로워지며(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일민(逸民)이 넉넉해져 바야흐로 벽강(辟彊) 하게 되었다. 당초 조선 때에 기씨(箕氏)가 동래(東來)한 바 하나라(夏) 의 뜻이 전해져, 오랑캐 나라의 임금있는 것이 중원의 없는 것만 못하다는 말을 꺾어넘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국적(國敵) 십제(十濟) 를 쳐 부수고 구려(句䴡)에 설욕하는 한편, 사직을 다하는 바로써 삼한(三韓)을 통일하니 마침내 통일왕조(通一王朝) 신라(新羅)가 되었다. 진흥왕 이래로 화랑(花郞)이 성치(星馳) 하였는데 효종랑(孝宗郞) 같은 분들이 일어나 특히 음덕(陰德)을 행하였고 무열왕(진골 김춘추)이 가야를 부려 이윽고 나라의 문약(文弱)함을 극복하고 그 태자 문무왕이 바로 창업(創業)을 입공(立功) 하였다. 그런데 천년사직(千年社稷)이 하룻날에 하사(下賜)되자 경순대왕(慶順大王)이 검서(黔庶)의 불편함을 자신의 팔다리(股肱)가 저린 것과 같이 생각한 것과 별개로 재간(材幹)의 뜻을 품은 여러 지사(志士)들과 사사(死士. 죽기로 맹세한 사람들)의 추대로 태자공께서 자신의 나라북쪽으로 가서 차건의 불궤지심(不軌之心)을 능히 손절시키려 하시니 이것이 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금부리에 남아있는 반란진압 터이다. 본래 군왕(君王)은 오직 성토(誠討) 하여 친히 나서지 않는 바이나, 시대가 강구요(康衢謠)를 부르지 아니하고 육두노(六頭奴) 들의 아첨준동(阿諂蠢動)으로 골족(내물대왕계 성골과 태종계 진골)이 그 편함을 편히 여기지 않게되어 이에 근왕군(僅王軍)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이들은 수 년을 지새울 늠균(廩囷), 융장(戎藏)을 갖추고 남하(南下)하였으며 국적(國賊) 이훤(이아자개의 아들)이 차건의 발밑에 긴 이후에도 왕국 내 도적들을 토격(討檄)하였는데 부상(扶桑)에서 해가 더이상 그 불길을 씻지 아니하고 기린이 발꿈치를 들어올리지 못하고 대붕과 봉황새가 천하를 배회하지 않자, 용어(龍馭)하였다고 전한다.  획린(獲麟) 이후에는 고법(古法)에 따라 3대가 출사하지 아니하고 의(義)에 따라 세상에 나오니 이부상서 김공(휘 경수)이 그 분이다. 적자(嫡子) 부령부원군 김공(휘 춘) 이래로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 등 청요직(淸要職)을 지내며 마침내 문정공(文貞公) 대(代)에 이르러 가장 창성하였다. 장남 문한공[파보(派譜)상 충선공 병기)은 단서철권(丹書鐵券)을 가졌고, 중자 김종우가 권세가 기철의 딸을 취하면서 나라권력이 절정(絶頂)에 이르게 된다. 

«북정록»이 소실되기는 하였으나, 때는 무졸(武卒)이 전단(專亶)하던 때로 문도(文道)가 약해지려던 참이었는데, 서량군(西凉軍) 무리(후한의 동탁, 이각, 곽범을 말함.)의 짓과도 같았다. 때문에 이규보 등은 오히려 조직에 충성하여 교육을 보존하려 애쓰려 했지만서도 당고(黨錮)의 암흑기를 거쳐 관군 장수 최영과 울루스부카(Ulus-Buqa)의 아들 성계가 병마를 쥐고 국토를 나다니기에 이르렀다. 역성혁명이 이루어진 뒤 이씨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신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3대를 관로(官路)에 나서지 아니하고 사림(士林)의 자격으로 공인(公人)이 되었으니 이것이 부령(부안) 김씨이다.


고려시대 평장사를 지낸 문정공 지포 선생(諱 坵)을 중시조(中祖)로 삼고 있다. 이때부터 부안김씨는 전성기의 번성함을 이어, 전라도와 충청도 당진, 서천, 진천, 청주와 강원도 영월, 황해도 해주, 함경도 일대에서 주로 세거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현재는 전북 부안군 일대와 충청도 당진,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하여 거주하고 있다. 부령 김씨는 소윤공파, 군사공파, 소감공파, 시승공파, 좌부승지공파로 크게 분류한다. 상계를 계고컨대 비조(鼻祖) 대보공 김알지 65대가 즉 37세손 해당한다. 대와 세손이라는 것은 곡부공가에서 표지하는 방식과 같다. 


본관[편집]

태자공의 직계손 상서공(이부상서 좌복야 김공. 휘는 경수)의 자(子) 부령부원군 김공(휘는 춘)에 의하여 "부령김씨"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부안은 부령과 보안이 통합된 때의 지명으로 우리나라 현대행정구역 체계 상으로 전라북도에 속한다. 부풍(扶風)과 낭주(灢州. 약자표기 浪州)라고 하기도 하였는데 각각, 부령과 보안의 미칭(美稱)이다. (혹, 영주瀛州라고 한 것은 변산의 이칭인 영주산을 말하는 것으로 봉래산이라 불리우기도 하였다.)

신라김씨의 필두이자 종가(宗家)이며 유일한 형제로 경순왕의 별자 울주김가가 있다. (사촌이라 주장하곤 하는 나주김가와 통천김가와는 관계가 없고 경주김가의 명종과 은열이는 전혀 다른 계통이다(왕건의 외손자들). 그들은 서얼천외자(庶蘖賤外子)로, 이 왕족의 곁가지에도 붙었던 적이 하나 없다(<신라김씨 교검 기록>). 즉 차건(車建)의 외손(外孫)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여지승람»의 경순왕 기록과 구려(句䴡) 때의 경순왕 태자공 기사에 따르면 적자(嫡子)와 별자(別子)가 있는 것이 실재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답변도 이에 일치한다.


태자공 기사 및 세계 관련[편집]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935년(경순왕 9년)10월 경순왕이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바치는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태자(太子)가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처자(妻子)를 죽이고 동생 덕지(德摯) 왕자와 함께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麻)로 된 옷을 입고 초식을 하다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사기에서 주의할 점은 '태자가 처자를 죽였으며,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삼고, 마(麻)로 된 옷을 입고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다.

처자를 죽였다는 기록에 관하여, 고래(古來)로 처자를 죽이는 상황이면 홀로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다. 처자를 죽이는 경우는 처가 욕을 당하고 자식이 노예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기로에 서 군의 사기양양을 위해 처자가 죽어야만 하는 때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이 아님에도 왕이 목숨을 이으며 자신의 뿌리를 자르는 것은 장구지책(長久之策)이 아닐 뿐더러 모순(矛盾)이다. 태자께서는 처자를 죽였다는 소문으로 그들의 안전을 도모(圖謀)하였거나, 혹은 고려 조정에서 태자공의 후예가 절손(絶孫)되었음을 공표하여 신라 유민들의 저항의지를 말살(抹殺)하려는 의도로 이해함이 사리(事理)상 올바르다. 태자공께서 항려군(抗麗軍)을 이끄시던 강원도 인제군 갑둔리에서 오층석탑이 발굴되었으며 비명(碑銘)에는 '김부수명장존가(金富壽命長存家, '김부의 수가 길고 가문이 존속하기를 기원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탑은 신라 후기의 양식이며 태자공의 생존시기보다 수십년(935년 신라 양국, 경순왕 978년 승하, 탑의 명문상 1036년 조성)이후로 볼 수 있는 바 태자공께서 인제에서 금강산으로 입산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문구(文句)는 태자공의 장수(長壽)를 기리고 후손(들)이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면석에 명문(銘文)이 있었으나 알지 못하는 원인으로 파손·매몰되었다는 안내문이 있어 참으로 애석하다.

계골산(금강산)에 들어갔다는 기록에 관하여, 태자공께서 부왕의 양국 후 금강산이 아닌 강원도 인제군으로 가셨다는 사실은 관련 지명(금부리, 옥새바위, 수거너머, 군량리, 갑둔리, 맹개골 등)과 유적, 현지의 전승 등으로 입증되었다. 이 역시 고려의 입장에서 태자공의 항려(抗麗) 활동을 숨기려는 의도의 기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기는 관련 소문이 잠잠하여진 태자공 승하 150여 년 후(1145년)에 편찬되어 인제에서의 항려 활동을 누락하고 금강산 입산만을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으로 마의를 입고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에 관하여, 이 역시 위의 논리와 같이 태자공의 항려(抗麗)의지를 왜곡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폄훼(貶毁)하는 수사에 불과하다. 설혹 마의를 입고 초식을 하였다 하더라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의지일 수 있으므로 독립의 뜻을 버린 인물로 해석하는 것은 왜곡과 폄훼에 부응(副應)하는 것이다.

결론으로 삼국사기는 고려조정의 의지로 승자의 역사를 쓴 것이며 왜곡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태자공 또는 마의태자라 통칭하나 경순왕이 고려에 양국함과 별개로 신라의 정통성을 이어 고려와 대적하였으니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금부대왕으로 칭함이 옳다. ‘마의태자’는 기록에 없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 이광수의 소설에서 나약한 한 인간을 상징하는 칭호로 사용되어 언급(言及)에 신중(愼重)하여야 한다.

부령(부안)김씨 문중에서는 신라김씨의 우의를 위하여 대외적으로 <김은열 묘지명>을 인정하나 묘지명의 내용이나 형식 등을 볼 때 사실로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 일부 문헌에 태자공의 휘가 '일(金鎰)'이라 하나 확신할 수 없다.

부령(부안)김씨는 태자공의 후예로서 태자공 이후 신분을 감추고 은거(隱居)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 죽방왕후조차 족보상으로 박씨이나 왕후의 부친과 모친 및 그 성을 확정하지 못하는 것이 역사학계의 실상이며, 가승만으로 실전된 선계를 파악하여야 하는 것은 허다한 명문가들의 공통적인 고민이다. 부령(부안)김씨는 태자공 이후 은거하다 휘 경수(景修)가 고려 선종(1084~1094)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아들 춘(春)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책봉되어 이후로 '부령인(扶寧人)'이라 칭하였으며 유서깊은 본관들 역시 그때를 전후하여(가장 오래된 본관 기록은 고려 목종 4년, 1001년)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즉 대부분 가문들의 본관 제도 이전 선조들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매우 부실하며 같은 이유로 휘조차 실전된 경우가 다반사이다.

고려 희종(본관제도가 발생하고 200여년이 지난 즉위년의 문과에서 본관 미상의 인득후가 장원, 본관을 부령으로 삼은 춘(春)의 증손인 김정립이 2위, 역시 본관 부령의 김의가 3위로 기록)과 강종대의 문과급제자만 하더라도 본관이 미상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1/3 이상에 달한다. 즉 명문가라 하더라도 본관도 없고 족보(최초의 족보는 1476년의 안동권씨의 성화보)도 없던 시대의 선조들의 배위나 행적에 관한 기록을 찾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로서 하물며 고려왕조에 저항했던 태자공의 후예라면 선계의 기록을 보전하기가 극히 어려웠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부령(부안)김씨 문중에서는 태자공 이후 경수(景修) 대에 이르기까지 휘 기로(箕輅)와 희보(希寶)로 계대하자는 주장과 기로(箕輅)와 희보(希寶)가 선조가 아닐 수 있으며 4대가 실전되었다는 주장이 혼재(混在)되어 있다.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의 묘지명에 더하여 부김(扶金)이 고려 개경의 귀족으로 가승의 확실함은 참으로 다행한 일로서 문정공의 직계존속(直系尊屬)으로 휘 경수(景修)와 춘(春), 인순(仁順), 작신(作辛), 의(宜)와 직계비속(直系卑屬)으로 문과에 급제한 아들 4형제가 모두 작위가 있는 분들이므로 관련 기록이 발굴될 수 있음을 기대한다. 족보도 역사이니만큼 기록의 신빙성(信憑性)과 상황의 부합 여부에 겸허하여야 하고 논리에 수긍하여야 할 것이다.

문정공 김구(金坵)가 과거에 제 2인으로 급제하여 정원부 사록에 임명되었을 때 동향사람인 황각보가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문정공 집안의 결함을 고변(告變)하여 제주판관으로 전직(轉職)되었다. 고변은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할아버지가 승려였거나 아버지의 무고(誣告)사건일 것이라 추정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왕위까지 좌지우지한 최고권력자 최충헌의 아들이면서 다음 대권을 잡은 최이(최우)조차 고변을 무마(撫摩)하지 못할 정도였다면 왕조나 국가의 정통성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로 관련 기록조차 남기기 어려웠 수 있다. 문정공의 조부인 작신(作辛 또는 作新)은 이부상서와 우복야를 역임한 후 승려로 출가하였고 부친인 의(宜)는 문과에 3위로 급제하고 평장사와 우복야의 벼슬을 하였으며 문정공은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문과에 2위를 하였는데 조부의 신분이나 부친의 사건이 비밀이었다가 임관시에나 밝혀져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조부나 부친의 일이 아닌 가문의 은밀한 진실, 즉 문정공이 고려에 귀부하지 아니한 신라 마지막 태자의 후손이라는 점과 사기(史記)의 기사에 반하여 태자공의 후손이 살아있다는 엄중(嚴重)한 사실이 밝혀져 내륙의 관직에 임명하지 못하고 제주로 보낼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충헌의 집권시기에 이비, 발좌의 난과 같은 신라부흥운동이 발생한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무신정권(武臣政權) 시기가 아니면 가문의 존립이 위태(危殆)하였을 것이다.

역대[편집]

경순왕이 차씨에게 양국하여 안락공 좇음을 효칙한 뒤로 김경수(金景修) 대에 이르러 출사하여 그가 이부상서, 우복야, 합문지후를 역임하고,

경수(景修)의 아들 춘(春)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책봉되었으며,

춘의 아들 인순이 호장, 부령군을 지내었다. 인순의 처부는 평장사 김숭백으로 이전에 중앙에 진입하였음을 넉넉히 추정할 수 있다.

인순의 아들 작신은 이부상서(吏部尙書), 우복야를 역임하고 부령군에 봉해졌으며, 후에 승려로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작신의 아들인 의는 문과 3위(등과록전편에 따르면 고려 희종 즉위년의 문과 갑자방에 본관 부령(扶寧)으로 2위에 휘 정립(金鼎立)과 역시 본관 부령(扶寧)으로 3위에 의(金宜)가 기록되어 있으며 '의'와 '정립'이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음에도 같은 문과에서 2, 3위를 하였다는 국가기록이 있어 이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로 급제하여 증은청광록대부, 중서문하평장사, 상서성우복야를 역임하였고

중시조 문정공(휘는 구)은 의(정립)의 아들로서 초명은 백일, 자는 차산이며 12세(<여좌주김양경전의발계>에서 표기한 바. 일부 기록상 17세-> <동문선>의 오류로 추산)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모두 장원을 믿었으나 문과 2위로 급제하여 예조정랑 및 중서시랑평장사를 비롯하여 참의사, 문학사, 태자이사 등을 지내었다. 문장사에 제수되었을 때 서국의 문서를 검열하였고 서국을 답사하여 <<북정록>>을 저술하였다. <<지포집>>을 비롯하여 시작 100여 수 등은 현존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판관으로 갔을 때에 제주민의 상소를 읽고 농지를 어지럽히는 돌을 빼내어 돌담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으니 여기서 제주돌담이 비롯되었다. 북국의 오랑캐 말을 들여온 자들이 조정에 들어차는 것을 꾸짖고 오랑캐 사신을 직접 물리치었다. 예(禮)·문(文)을 바탕으로, 동수국사(同修國史)의 직분을 가지고 국사(훗날 <<고려사>>)의 세대 편찬에 참여하였고 참녹상서사가 되었다. 한예와 초서체가 으뜸으로 불렸고 부안 대종회의 문정공 지포 시비에 칠언절구 낙리화 등이 새겨졌다. 좌주 김양경(김인경)과의 고사가 화·범(화응, 범질)의 일화에 비견되며 전의발(傳衣鉢)에 임명되어 감탄을 문장으로 엮으신 `의발계(啓)`는 사륙변려의 극을 달리는 절문으로, 문집과 도동서원(1534년 건립, 국내 최초 서원 추정) 관련 전·집에 올라와 있다. 전북대학교 전가람 박사는 ‘안향 성리학 도입설의 근거와 김구(金坵)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 성리학의 도입에 문정공 부자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문정공은 안향보다 32년 앞선 사람으로 약관 22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원나라를 다녀왔으며 성리학의 도입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문정공의 네 아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장자(시호가 충선공이며 휘는 여우)는 단서철권의 특권(그 목판본이 현존하여 군사공파에서 소장하였다.)을 얻었고 완산목부사, 봉익대부, 형부상서, 동지밀직사사, 문한학사를 역임하였다. 차남 휘 종화는 고려문과 장원으로 봉선대부, 전교시부령을 지냈으며, 3남 숙우는 문과 방하 제 2등을 하였다. 장자인 충선공이 유교의 진흥에 힘써 강릉안렴사(江陵按廉使)로 있는 그의 서제 김승인(金承印. 진사 장원, 고려문과, 봉상대부, 예문관직제학, 대사성)에게 학교의 제도를 가르쳐 주면서 세우도록 권하였다. 이에 따라 강릉(江陵)의 서쪽 화부산(花浮山)의 현적암(峴滴岩)아래에 문묘(文廟)를 짓고 향교(鄕校)를 세우니 이것이 우리 나라 향교(鄕校)의 시초(始初)이다.

충선공의 아들 각은 이부상서(吏部尙書), 합문지후,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하고 식은 이부상서를 역임하여 명문의 대를 이었다.

각의 아들 지경은 병부상서를 지내고,

지경의 아들 용수(龍壽)는 판삼사사(判三司事)·동지밀직부사(同知密直副使)·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대제학공의 아들 인정은 중랑장, 신정은 감찰시승(어사중승)을 지내는 등 대대로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중랑장공의 아들인 세영은 봉정대부 한성소윤으로 소윤공파, 광서는 봉정대부 지고부군사로 군사공파, 광신은 전의소감으로 소감공파, 광구는 보승낭장으로 낭장공파로 분파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소윤공과 군사공, 소감공은 "지조가 있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임금을 섬길 수없다."며 벼슬을 버리고 부안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3세가 고절을 지켜 이조(李朝)에 임관하지 아니하고 비로소 다음 세대가 되어 방목에 성명을 올리었다.

오랑캐 3란에서 모두 의의(義儀)를 밝혀 빛내신 선조가 계시니 바로 해옹(海翁先生. 휘는 홍원)이시다. 1588년(선조 21)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3년 후인 선조 24년에 문과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과거를 포기하였다. 임진왜란 시 엄부(嚴父)께서 편치 않으사, 의곡(義穀) 100여 석을 선유사(宣諭使) 윤승훈(尹承勳)를 통해, 의주로 도주한 선조(宣祖)의 행재소 용만(龍灣)으로 보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창의하여 옥구~고군산 일대에 병진(屛陣)하는 한편, 족문(族門)과 함께 변산(邊山)에서 왜노를 토파하였고 황신(黃愼)과 함께 적을 순창(淳昌)까지 추격하여 살상하였다. 왜노가 점차 남으로 회피하자 순천 석보창에서 화약을 매설, 야습으로 격멸시킨다. 이 공이 보고되어 진사에서 곧바로 통정대부(정3품)가 되었다. 도원수 권율이 유정, 이덕형 등과 도래하였을 때 선봉장으로 나서는 이가 없자, 자천(自薦)하여 1천을 이끌었다. 왜란이 끝난 뒤에 대마도 정벌을 조정에 건의하는 한편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錄勳),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에는 현감(縣監) 이홍발 등과 여산(礪山)에서 창의를 도모하였지만,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부안(扶安)의 변산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스스로 해옹(海翁)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영광군수로 임하여 왜노의 역난을 찢어발기신 증이조판서 충경공(휘는 익복)께서는 현감 임계영과 함께 골(骨)터에서 운명하셨다.

증사헌부집의 용암선생(휘는 지순)께서는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이국형(李國馨)‧김원건(金元健) 등과 격문(檄文)을 내어 의병을 모아 창의(倡義)하였다.

또한, 기묘명현으로 불리시는 운강 선생(휘는 계)께서는 실록과 고봉집의 기록과 같이 이황의 상소로 조선왕이 물어오자 `조광조 등의 처사가 부당하다`라 대답하여 기묘피화를 막으신 분이시다. 박순 유희춘 이이(운강 선생의 王父이신 부안 김공의 신도비를 작성하며 예의를 바쳤다.) 기대승 이황 (또는 정철) 등과 도론하셨고 직접 기대승의 제문을 쓰셨으니 이는 <<운강유고>>에 있다. 운강 선생으로부터 3대에 증(贈)이 더해졌으니 조부와 선친께서 모두 참판으로 추증되셨다. 운강 선생의 족숙이신 옹천 선생이 성균3인으로 징소되셨을 때에 조광조가 있었으니 실로 기묘한 인연이다. 25세에 급제하신 이래로 정적토납(政的吐內)을 하지않으시어, 학자들과는 담론을 통하여 두루 잘 지내셨다고 한다(久而敬之). 한학교수(문언문과 백화문 모두에 능통)를 지내셨던 것 등으로, 대중(大中)외교에 선봉을 서셨고 이조참판 등을 지내셨으며 중국에 최소 3번 다녀오신 기록이 남아있다.

전남 곡성군에 수운정(곡성면 동산리)이 있으니 선생께서 사조참판을 역임하셨을 때의 행적이 있는 것이다.


더불어 증왕부(曾王父)되시는 김공(휘는 직손이시다.)께서는 정랑-삼사라는 현관을 거치시며 첨정(僉正)·정언(正言)으로 명성을 품으셨으니 현하봉문(顯河鳳門)이면서 두루 효제와 청렴을 갖춘 왕족의 혈예인 것이다.

고사가 이이의 <正言贈都承旨金公神道碑銘>에 있어서 여기에 그 원문을 적는다. 慶州時。以罪笞府人。因病而斃。公曰。古人有殺一不辜而得天下[蓋]不爲者。吾安可一日苟居。卽自坐所。翩然棄歸。其無繫累如此。時去麗季未遠。喪紀紊廢。雖士大夫。鮮克由禮。鄕人尤甚。公前後居喪。考證典禮。一遵古儀。情文俱盡。鄕人多效之。 경주판관 시절에 죄로 인해 태형을 받은 자가 있었는데, 본디 병이 있어 곧 죽어버렸다.

승지공께서 이르시길, "`고인의 말에, 한번 무고한 자를 살인함으로써 천하를 얻는다하더라도 사람들은 [대개]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했다. 내가 어찌 이 심정으로 하루를 차마 살 것인가?"

하여 스스로 죄를 지어서 번연히 가셨다(관직을 버렸다는 말). 공의 염결(廉潔)함이 이와 같았다. 시세가, 망조한 지 얼마 안되었으므로 상제(喪祭)에 있어 매우 어수선 했는데, 비록 사대부 가문이라 하여도 예에 박식하기는 극히 드물었다. 향인은 더욱 심하여, 이윽고 공께서 당도하시어 典·禮를 고증하셨다.

매우(一) 고례(古之禮儀)를 좇아 지키시니, 문채도 성심도 극진하였다. 곧 향인이 너도나도 본받아 따랐다.

  • 맹가의 말이다.
  • 여계는 곧 여말이다.
  • 전례: <<서>> <<예>> 와 같은 典故와 經禮.

승지공께서는 검열(檢閱)의 직위로 실록을 편수하신 이래로 예문관박사 사헌부감찰 사간원정언으로서 정계를 품비(稟非)하시고, 사부학당 교수로 재직하실 때, 士林의 전복을 막고 조정 중심의 위정을 추구하셨다.


부안김씨는 대대로 녹절(祿節)을 먼저의 것으로 하는 터에 관직욕과는 거리가 먼데, 왜 사마시 이후로 조정이 아닌 향토에 머물렀는지 유추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개 반정과 폭도에 의한 사화와 관련하여서 진출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국난이 있을 때마다 정면에서 맞섰기 때문에 지역의 고문집을 비롯하여 독립유공자 기록 등지에는 의로운 행적들로 가득하다.

  • <<논어>> <헌문> 憲問恥。子曰:「邦有道,穀;邦無道,穀,恥也。」 을 참고하라. [원헌이 수치를 물으니 중니가 말하였다. '나라에 도가 있어 녹을 먹고서 나라에 도가 없는데도 녹을 먹는 짓은 수치이다.']
  • <<논어>> <헌문> 子曰 : 賢者辟世 其次辟地 其次辟色 其次辟言 을 참고하라. [중니가 말하였다. '현자라야 피세(금세를 삼가는 것)하니, 그 다음은 피지(그 지역을 삼가는 것)요, 그 다음은 피색(안색을 삼가는 것)이요, 그 다음은 피언(말을 삼가는 것)이다.']


과환록(과거급제자 등)[편집]

○등재인원

- 高麗朝 15명

- 朝鮮朝 667명

· 문과편 31명, 무과편 55명, 사마편 110명

음사편 502명(소윤공 104명, 군사공 311명, 소감공 87명)

(高麗朝)

□선계편 : 15명

김경수, 김춘, 김인순, 김작신, 김의, 김구, 김여우, 김종화, 김숙우, 김승인, 김격, 김지경, 김용수, 김인정, 김신정

(朝鮮朝)

□문과편:31명

김회신, 김보적, 김보칠, 김직손, 김팽석, 김홍덕, 김팽령, 김석필, 김서성, 김계, 김경덕, 김익복, 김치원, 김현, 김지성, 김명열, 김택, 김승액, 김일좌, 김궤, 김성연, 김대, 김운, 김동직, 김규하, 김한익, 김양묵, 김한정, 김상래, 김헌제, 김용현

□무과편:55명

김관, 김절, 김태지, 김인지, 김우선, 김석손, 김인강, 김여, 김윤손, 김방주, 김응정, 김린, 김상건, 김담, 김립, 김유경, 김기경, 김기원, 김득인, 김우신, 김순, 김옥신, 김이원, 김기룡, 김세정, 김거, 김의건, 김몽두, 김응건, 김용발, 김호발, 김세방, 김득일, 김태검, 김익룡, 김응룡, 김효증, 김시좌, 김기룡, 김진규, 김하운, 김진위, 김수한, 김남전, 김남준, 김신일, 김석황, 김광수, 김한두, 김광하, 김환감, 김낙구, 김련, 김현식, 김병갑

□사마편 : 110명

김진경, 김회신, 김진효, 김연수, 김직손, 김팽석, 김완, 김선, 김팽령, 김종, 김질, 김석필, 김익손, 김석홍, 김척, 김석옥, 김석량, 김응추, 김열, 김경도, 김경문, 김경장, 김우정, 김승정, 김점, 김수복, 김의복, 김원복, 김충복, 김형복, 김우상, 김응권, 김승복, 김전, 김중의, 김응별, 김대련, 김국번, 김횡, 김승복, 김익복, 김파, 김협, 김태복, 김홍원, 김정복, 김대일, 김진명, 김화, 김련, 김명, 김이복, 김여, 김삭, 김대건, 김우세, 김현, 김연, 김지순, 김단, 김정로, 김호, 김국검, 김지명, 김지성, 김처백, 김지백, 김찬, 김만수, 김극흠, 김지중, 김택, 김정욱, 김흡, 김호겸, 김진적, 김추, 김서경, 김일좌, 김홍탁, 김성연, 김수종, 김덕수, 김민학, 김석경, 김석창, 김수겸, 김후, 김운, 김손, 김수함, 김박, 김홍필, 김수민, 김성규, 김복남, 김옥, 김용필, 김취질, 김설, 김경휘, 김성발, 김상성, 김종택, 김륵, 김정수, 김기재, 김형근, 김봉효, 김영술

※ 여말선초(麗末鮮初)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로 선조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매죽당 김종(金宗)이 성균관진사로 수학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과거를 폐하고 낙향하였고 매죽당의 손자이자 주부 경정의 아들인 전(銓). 횡(鋐). 명(銘). 협(鋏) 4형제가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중 죽계공 횡(鋐)은 진사에 장원하고 생원에 2인으로 입격하였으며 전(銓)은 생원 2등 6위(11/100), 협(鋏)은 진사 2등 3위(8/100)의 우수한 성적으로 입격하였고 학덕이 죽계공에 필적하는 화곡공 명(銘)은 사마시조차 응시하지 아니하다 선조 38년(1605년) 환갑(1544년생)에 달하여 권유에 못 이겨 치른 시험에서 사마 양시에 입격하였으나 4형제가 모두 과거를 치르지 아니하였으며 천거에도 벼슬에 나서지 아니하였고 홍원은 18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21세에 문과초시에 합격 후 임진왜란으로 과거를 포기하는 등 소성(小成)을 이룬 후 관직욕보다는 학문의 정진이나 후학의 양성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마 양시에 합격한 인물들이 있어 백패의 숫자는 110개가 넘는다.

□음사편:502명(소윤공104, 군사공 311, 소감공 87)

○소윤공파 : 104명

김세영, 김진, 김자미, 김자현, 김석손, 김덕순, 김영손, 김순손, 김영견, 김붕, 김순양, 김계양, 김응추, 김응백, 김응서, 김응상, 김훈, 김면, 김천히, 김문해, 김상곤, 김인연, 김철, 김경방, 김수인, 김치인, 김찬인, 김정발, 김성필, 김응해, 김응회, 김응위, 김응원, 김일남, 김지혁, 김두창, 김지문 김시재 김시장 김성인, 김태형, 김태기, 김려랑, 김두광, 김수광, 김화채, 김진환, 김진혁, 김인익, 김취억, 김진욱, 김익창, 김왈수, 김동직, 김언택, 김하숙, 김시박, 김경준, 김흥태, 김성재, 김경덕, 김의열, 김시추, 김윤하, 김명례, 김성필, 김홍선, 김홍진, 김도풍, 김하상, 김주상, 김우상, 김규상, 김필상, 김의상, 김석상, 김종갑, 김복민, 김용갑, 김영수, 김기환, 김주용, 김관용, 김계용, 김용균, 김석구, 김우채, 김정오, 김낙진, 김한근, 김한봉, 김한장, 김종순, 김중기, 김철수, 김영욱, 김만술, 김기한, 김문학, 김한문, 김장한, 김창한, 김장명, 김병식

○군사공파 : 311명

김광서, 김당, 김취, 김회윤, 김선, 김차손, 김후손, 김봉손, 김숙손, 김석현, 김석충, 김우, 김국주, 김세주, 김서운, 김서진, 김서규, 김서벽, 김희, 김선, 김쉬, 김개, 김복, 김광, 김경정, 김의정, 김백윤, 김중윤, 김영무, 김윤복, 김설복, 김만복, 김언복, 김인복, 김명복, 김유복, 김효침, 김효순, 김효사, 김효평, 김효길, 김충간, 김경순, 김응규, 김진복, 김장, 김현, 김섬, 김덕구, 김덕린, 김억일, 김중일, 김경명, 김준명, 김증, 김양, 김해, 김지, 김진경, 김산종, 김자겸, 김효남, 김취남, 김진남, 김력, 김즙, 김운학, 김여근, 김로, 김주, 김곡, 김우길, 김류, 김연, 김기, 김진길, 김정길, 김관길, 김이길, 김숭업, 김경허, 김경두, 김극온, 김극량, 김극관, 김극양, 김극명, 김극장, 김이겸, 김항, 김감, 김희수, 김흘, 김응구, 김윤주, 김석보, 김모동, 김동식, 김용열, 김유열, 김선열, 김후열, 김득열, 김상열, 김택량, 김택길, 김택효, 김택삼, 김지강, 김지겸, 김건, 김진해, 김급, 김인, 김의 김한추, 김용환, 김번, 김문, 김공, 김린, 김언, 김증, 김기, 김장, 김오, 김수, 김중, 김훈, 김방, 김보, 김시, 김저, 김신, 김절, 김창, 김세광, 김세융, 김세열, 김세량, 김세기, 김성철, 김진명, 김중백, 김용백, 김진백, 김중석, 김홍도, 김홍유, 김세후, 김진항, 김흥태, 김계문, 김수장, 김수강, 김수태, 김석좌, 김익좌, 김태좌, 김명좌, 김영기, 김재백, 김성, 김오, 김각, 김갑, 김무, 김후, 김참, 김회, 김잠, 김홍, 김후, 김하정, 김하서, 김한주, 김동구, 김황, 김공, 김린, 김효칙, 김수일, 김운종, 김방형, 김일항, 김덕서, 김덕부, 김덕희, 김덕손, 김덕몽, 김덕빈, 김덕렴, 김명항, 김관, 김상신, 김시련, 김익련, 김도만, 김석겸, 김인상, 김구현, 김수희, 김재, 김즙, 김환, 김억, 김영, 김전, 김건, 김격, 김욱, 김우, 김도명, 김종해, 김연장, 김계칠, 김동호, 김명두, 김운복, 김임, 김안택, 김덕중, 김득천, 김태문, 김득손, 김덕후, 김계한, 김태윤, 김종언, 김치각, 김의수, 김정하, 김명하, 김수민, 김이하, 김진하, 김풍하, 김두남, 김사하, 김진백, 김제하, 김주일, 김인형, 김서각, 김복하, 김기후, 김기선, 김명룡, 김홍조, 김학효, 김천주, 김정조, 김수한, 김상순, 김응상, 김복현, 김원진, 김백감, 김정활, 김기창, 김기종, 김옥, 김석황, 김태석, 김석열, 김홍석, 김해석, 김복환, 김성필, 김동규, 김대흥, 김용철, 김도묵, 김순묵, 김팔묵, 김한종, 김한필, 김한섭, 김한규, 김응현, 김원달, 김두일, 김양수, 김규수, 김두봉, 김재국, 김낙련, 김상만, 김낙섭, 김낙규, 김기욱, 김익상, 김낙인, 김낙린, 김낙룡, 김현상, 김낙상, 김진조, 김제진, 김낙두, 김낙철, 김낙기, 김연욱, 김낙희, 김낙종, 김원술, 김임술, 김봉술, 김학술, 김영선, 김이술

○소감공파 : 87명

김광신, 김후, 김곤, 김선우, 김득청, 김윤기, 김윤려, 김국성, 김종, 김유, 김연손, 김개, 김련, 김봉수, 김응기, 김언서, 김덕복, 김윤, 김연, 김황, 김세호, 김광윤, 김용학, 김명행, 김순, 김성괄, 김성탁, 김성휼, 김성흘, 김광익, 김한우, 김방우, 김상우, 김탕우, 김득시, 김변, 김몽우, 김해, 김유, 김길, 김발, 김원룡, 김택룡, 김경룡, 김태룡, 김진룡, 김진, 김감, 김수휘, 김수관, 김수강, 김시일, 김태권, 김시건, 김헌민, 김정익, 김정만, 김정준, 김정우, 김정하, 김정서, 김정홍, 김석종, 김이봉, 김여옥, 김응한, 김흠, 김장, 김한규, 김동좌, 김문필, 김재복, 김여화, 김석재, 김인종, 김덕록, 김수영, 김수철, 김풍희, 김낙동, 김낙봉, 김낙하, 김낙몽, 김훈식, 김해첨, 김인애, 김현배


참고[편집]

고려[편집]

  • 김경수(金景修) : 고려 문종(文宗ㆍ1019~1082)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 김춘(金春) : 김경수((金景修)의 아들로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ㆍ부령은 부안의 옛 지명)에 봉해지고, 부령(扶寧)을 식읍으로 가졌다.
  • 김용수(金龍壽) : 고려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동지밀직부사(同知密直副使)·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 김구(金坵, 1211년 ~ 1278년) : 초명은 백일(百鎰)이며, 자는 차산(次山)으로 호는 지포(止浦)이다. 부풍(扶風) 지지포(知止浦)는 <<대학>>의 장구 知止而後有定의 함의이다. 부안(부령) 김씨 중시조(中始祖)이다.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능했고 고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안북도 정주군 사록(司祿)에 보임되었으나, 동향 황각보(黃閣寶.내시.)의 고변으로 제주판관으로 발령나 1234년(고종 21)부터 1239년(고종 26)까지 재임하였다. 이때 역적 최이(최우)가 경사(京師)로 오길 권했으나 거절하였다고 전한다. 제주 형편이 밭은 적은데 괴석이 많고 이것이 호구의 경계를 넘나드니, 공이 나서서 바로잡았다. 이것을 제주에서는 '제주 돌문화의 은인'이라고 송덕해 오고 있다.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온 뒤로는 8년 동안 한림원에 재직하였다. 문재로써 1263년(원종 4)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추밀원부사·정당문학(政堂文學)·이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라서는 문신들의 저술을 시험해 유능한 자에게 상을 주어 권장할 것을 건의하였다.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거쳐 1274년 충렬왕 즉위 뒤에는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참문학사(參文學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원종 때 이장용(李藏用)·유경과 함께 신종·희종·강종 3대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하였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녹상서사에 오르는 한편 충렬왕이 죽을 때 '탁고'가 되었고 사후에는 청환직인 '평장사'의 직함으로 국장(國葬)하여 명문사대부의 위세를 떨쳤다. 시호는 문정(文貞). 그는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 이부상서(吏部尙書) 김경수(金景修)의 6세손이다. 몽노(몽골 오랑캐)가 고려의 조공이 적다며 핑계를 댔을 때에는 문장으로써 이를 물리쳐 오히려 비단 등 사치품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전북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재실인 경지재(敬止齋)와 그 주변에 묘소가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일에 향사 한다.
  • 김여우(金汝盂) : 시호가 ^충선(忠宣)으로, 문정공(文貞公) 지포선생의 장자이다. 충렬왕이 세자(世子)일 때 그를 모시고 원(元)나라에 들어가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잘 보필하여 세자가 왕위에 오르자 그 공을 치하하고 단권(丹券)을 내리었다. 단서철권은 형벌에 면해지는 특전으로, 3대에까지 이르는 훈공(勳功)이다. 그는 도(道)에 따라 유학(儒學)을 펼치는데 힘쓰고, 우탁(禹倬) 등과 경론을 토론하기도 했다. 유교 진흥에도 힘써 강릉안렴사(江陵按廉使)로 있는 서제(庶弟) 김승인(金承印)에게 학교 제도를 가르쳐 주면서 세우도록 권하였다. 이에 김승인이 강릉(江陵)의 서쪽 화부산(花浮山) 현적암(峴滴岩) 아래에 문묘(文廟)를 짓고 향교(鄕校)를 세우니 이것이 우리나라 향교(鄕校)의 시초(始初)이다. 고려 때 형부상서(刑部尙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했으며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되었다. 형제 네명 모두(김숙우, 김종우, 서제 김승인) 급제하였다.

조선[편집]

창의일문칠절(唱義一門七節) : 한 문벌에서 창의하여 절품(節品)을 빛냄에 일곱 분이시므로 나라에서 국사(國士)의 도(道)로 추증 증직하였다. (唱은 `앞서 이끈다`는 뜻이다.) (선조실록 임진록 창의록 정조실록에 의함.)

  • 충경공 김익복 (당시 능성현령 행 영광군수로 순국) : 임진란 정유재란
  • 子 김류 (당시 학생이었다가 행 자제군관으로 순국) : 왜란
  • 子 김화 (당시 학생) : 갑자란 병자호란
  • 子 김연 (당시 진사) : 갑자란 병자호란 정사년 정축호란
  • 孫 김지순 (당시 참봉) : 정축호란
  • 孫 김지중 (당시 진사) : 정축년 진득 사건
  • 孫 김지백 (당시 교관) : 정축년 진득 사건
  • '고 영광 군수 김익복과 그의 아들 학생 유와 화, 진사 연, 그리고 그의 손자 참봉 지순, 진사 지중, 교관 지백 등 한 가문의 조(祖)·자(子)·손(孫) 7인이 대의(大義)를 일으키어 대절(大節)을 이룬 것이 임진·정유·갑자·병자·정사·정축년 사이에 늠름하게 우뚝한 것이야말로 고사에서도 듣기 어려운 일이다.` -1798년 기사
  • 임진-정유는 왜란, 병자-정축은 호란을 말하고 갑자는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던 때이다. 정사년은 이른바 인목대비 논란을 말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부령(부안)김씨 창의공신록' 휘에 병기한 관직은 창의안(唱義案) 당시를 따르고, 종보(宗譜)에 따라 파조(派祖)의 칭호를 적음. 대괄호는 알려진 최종관품을, 중괄호 안에는 청요직함을 기재하였음.


  • 직장공 김철
  • 자- 부위 김수인 [정로장군]
  • 자- 사의 김득인
  • 자- 봉사 김우인


찰방공 김광 [중직대부] {창락도찰방}

  • 자- 이조판서 김익복
  • 손- 주부 김해
  • 증손- 직장 김이겸
  • 손- 교관 김류
  • 손- 집의 김화
  • 증손- 집의 김지순
  • 손- 교관 김연
  • 증손- 교관 김지중
  • 증손- 집의 김지백
  • 자- 생원 김태복 (호: 옹정. 임진년 창의. 영광성 수호.)
  • 손- 현감 김단


  • 병조판서 김홍원
  • 자- 부사 김명열


  • 학행천참봉 김정길


  • 통덕랑 김택량


  • 군사공팔대손 김권


소감공구대손 김한우

  • 자- 부사 김원룡
  • 자- 부사 김승백


소감공구대손 김탕우

  • 자- 주부 김기룡


좌랑공 김응추

  • 자- 응교 김경덕
  • 자- 진사 김경장


  • 참봉공 김영무
  • 자- 참의 김억일
  • 손- 좌찬성 김극온
  • 자- 주부 김중일
  • 손- 우후 김극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승지공(承旨公) 휘직손(金直孫, 1437년 ~1493년). 자는 자윤(子胤).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회윤(懷允)의 아들이다. 1463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69년 추장문과(秋場文科)에 급제하고, 1472년 검열(檢閱)로 기사관(記事官)이 되어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뒤에 겸교수(兼敎授)·정언(正言)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한산 군수(韓山郡守)를 지낸 후 사도시 첨정(司도寺僉政)에 이르렀다. 도승지공. 역적 유자광, 간신 이극돈의 주장에 맞서 김일손의 처사가 마땅하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 김공 휘숙손(金淑孫) : 통훈대부(通訓大夫) 임실(任實) 전행(前行)현감(縣監)을 지냈다.
  • 옹천(瓮泉) 김공 휘석홍(金錫弘) : 1473년(성종 4)∼1546년(명종 1). 조선 전기 유학자‧문신. 자는 대이(大而). 1493년(성종 24) 21세 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찾아가 이기설(理氣說)을 담론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함께 수학하였다. 1511년(중종 6) 성균관에서 유생 중 뛰어난 사람을 조정에 추천할 때, 조광조‧황택(黃澤)과 함께 천거되었다. 추천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세 고을의 수령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을 남겼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이후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대과를 버림).

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1718년(숙종 44)에 전라북도 부안(扶安)에 있는 도동서원(道洞書院)에 배향되었다.

  • 교리공 김공 석필(金錫弼) : 조선전기의 문신. 자는 공언(公彦).지평 차손(指平 次孫)의 아들. 공신녹권(功臣錄券)이 현전한다. <중종반정에 협찬한 공으로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된 이조정랑 김석필의 것이다. 1507년(중종 2) 책의 형태로 편성, 초주갑인자로 인쇄.> 덕원(德源)에 재임 시에는 청환(淸宦))이었다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 사인공(舍人公) 김공 휘서성(金瑞星) : 1497(연산군 3)∼1548(명종 3). 청수재(淸修齋). 또는 청수길사(淸修吉士). 자는 응경(應卿)으로 할아버지는 병조정랑 직손(直孫)이고, 아버지는 수안군수(遂安郡守) 석홍(錫弘)이다. 1525년(중종 20) 식년문과 을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가 저작·박사를 거쳐 형조·공조의 좌랑이 되었다. 이어 호조·예조·형조의 정랑을 거쳐 1538년 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장령이 되었고 집의·문학·필선 등을 거쳤다. 위에서부터 줄이고 명분없는 소비를 하지 말 것을 지적했다. 1544년에 사재감정(司宰監正)을 맡았던 것은 중종비가 죽어서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부지런하였으며, 기량이 원대하여 명리를 탐내지 않아 청렴결백한 선비로 널리 알려졌다. 언관.
  • 매죽당(梅竹堂) 김공 휘종(金宗) : 생몰년 미상. 호는 매죽당(梅竹堂)으로 조선 중종 때 학자이다. 현감 김숙손(金淑孫)의 아들이며, 정언 김직손(金直孫)의 조카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당대의 명사들이 대거 화를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인 부안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성리(性理)를 깊이 탐구하고, 상을 당하자 가례(家禮)에 따라 삼년 여묘(廬墓)를 마쳤으며 더위와 추위에도 의대를 풀지 않는 등 성리학적 예절을 직접 실천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사성 김식(金湜)에 의해 조정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항상 대나무와 매화를 심고 그 고결함을 사랑하였는데, 조정에서 그 지조를 높게 여겨 옥배(玉杯)와 매죽(梅竹)을 보냈다.
  • 운강(雲江) 김공 휘계(金啓) : 1528(중종23)~1574(선조 7). 조선의 문신. 자는 회숙(晦叔). 호는 운강(雲江), 운보(雲甫), 운부(雲夫). 또, 형언(亨彦). 정언(正言) 직손(直孫)의 손자. 1592년(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헌납(獻納)을 거쳐 1571년(선조 4)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후 동래 부사(東萊府使)를 지내고 1573년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 충청병사, 동지중추부사 겸 우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국공(國功)을 세워 삼대(三代)가 추증 증직 되었다. 명에 갔을 때 그 주씨(주원장의 핏줄들)가 운강공의 용모를 모사케 하여 각국 사신에게 자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과 도의(道義)를 강론(講論)했고, 백광훈(옥봉)이 학형으로 모셨다(-題金晦叔橫灘圖). 문무(文武)를 겸비하였다.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기대승과 절친하여 친구 기대승의 죽음을 바라볼 때에도 <<논어>>의 구절(친구가 죽어 갈 곳이 없으면 내 집에 빈소를 차리리라)과 같았다 한다. 동생 척심정 김점의 딸과 기대승의 장남이 혼사를 맺었고 척심정의 아들이 또 기대승의 동생 기대절의 딸과 혼약을 하였으니 이 또한 <<논어>>의 귀구(공야장이기형지자처지)와 같았다.
  • 죽계(竹溪) 김공 휘횡(金鋐) : 1541년(중종36)∼1590년(선조23년), 호는 죽계(竹溪)이며, 자는 여기(汝器)로, 주부(主簿) 경정(景貞)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6) 33세에 동생 화곡 김명과 연벽(聯壁)하였고, 자신은 그 해 진사시 장원, 생원시 아원으로 양시(兩時)하였다. 오직 학문에만 힘썼는데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만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는 않았다. 유천서원(柳川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 화곡(火谷) 김공 휘명(金銘) : 1545년(인종1년)∼1619년(광해11년), 자는 여신(汝新)이며, 호는 화곡(火谷) 이다. 김횡(金鋐)의 아우로 학행이 뛰어나 율곡(栗谷) 이이(李珥),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도의지교를 맺었으며, 망암(望庵) 변이중(邉以中)과 서신으로 학문을 논하였다.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임진왜란을 만나 장성 문암리에 은거하였다. 저서로 <화곡선생유고(火谷先生遺稿)>가 있다. 유천서원(柳川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전남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제암마을에 「화곡김공유허비(火谷金公遺墟碑)」가 서있다. 만년에 장성으로 거처를 옮긴 뒤 화곡정을 짓고 작시(作詩)했기 때문. 이이(1537~?)가 공을 그리워하며 천경수(千頃水)에 비유하였다. 친형 죽계공과 가까웠던 이정구가 공이 벼슬길에 나오기를 부탁하였으나 거절하였다.
  • 김공 휘수인(金守仁) : 아버지 직장(直長) 김철(金鐵)과 함께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 때 공을 세워 정로장군(定虜將軍)이 되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598)때 전사하였다. 조부 가선대부 김공(휘 훈)이 임진년에 창의하여 녹훈되었으며 아버지 운오공(휘 철) 또한 임진년에 창의하였다. 김천일의 진중으로 향하던 도중 진주성이 함락되어 애통함에 지은 시가 현전한다(여기서 김천일을 극념옹이라 불렀다). 부친 직장공은 기축옥사와 정여립의 난 뒤로는 더욱 환해(宦海)를 멀리하였다고 한다.
  • 득재 김공 휘득인(金得仁) : 1585~1655. 통정대부. 조선 중기의 무신. 정로장군(定盧將軍) 김수인(金守仁)의 아우이다. 무과에 급제,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 아우 우인(友仁)과 함께 강화도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장례원사의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아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주의 차령(車嶺)에 이르러 소모사(召募使) 정홍명(鄭弘溟)과 합세하려 하였으나, 강화 체결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참고문헌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 충경공 김공 휘익복(金益福) : 1551(명종 6)∼?. 자는 계응(季膺)으로 아버지는 찰방 김광(金光)이다. 어려서 노진(盧禛)에게 수학하고, 김장생(金長生)과 학문을 논하였다. 1573년(선조 6) 동족인 죽계공 횡, 승복과 더불어 생원에 1등 4위로 입격하고 158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도사·군수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광군수로,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과 함께 인근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고 결국 군중에서 전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통칭 김능성(金綾城). 왜란 당시 능성현령이었는데 남원부사 윤안성이 '본도는 팔도의 으뜸인데 곽재우 같은 의병이 없는 것이 애석하다'며 은진에서 격문을 돌렸는데, 이미 충경공이 사세에 응하여 창의한 뒤였으므로 '족히 이곳에 인물이 있다'라고 칭해졌다. 경상-충청이 차례로 무너진 일과 호남의 길목을 지켜 '영남사람이 일삼은 도망(이틀만에 모든 길을 내어주고 나흘만에 모든 성이 뚫린 것을 가리킨다)'을 징죄하야 다시는 왜적을 상대로 허둥대는 일이 없어야함을 지적했다. 지금 남보다 먼저 창의하는 것은 양심(良心)을 흥기(興起)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호가 금릉(金陵)으로 전하며 성주와 개령을 지키고 금산-무주 간의 왜적을 막았다. 전라남도 나주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 재간당 김공 휘화(金澕) : 충경공의 이남. 도촌 김연의 형. 1571~1645. 두류산 서쪽 기슭에 재간당을 지어 소요하였다. 역적 이괄의 난과 호노(胡奴)의 준동 때 창의하였다. 생원-진사를 동시 입격하였으나 모든 벼슬을 거부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도 국난에 임하여 일문칠절의 일로 사헌부 집의에 증직되었다. 남원 요계사에 배향되었다. 알려진 기록으로, 왜란 때 공을 세운 유몽인(1559~1623)이 두류산(지리산) 재간당을 방문해 헌시한 것이 있다. 아들 김지순은 공의 동생 도촌거사와 함께 창의하였는데 훗날 70세의 나이로 3년 여묘(이를 七耋廬墓라 한다)를 하여 전라도 유생 김의집 등이 조정에 탄원하였다.
  • 도촌 김공 휘연(金沇) : 1596~1661. 충경공의 삼남. 자는 장원(長源)으로, 광해 때 생원시 1등 5위로 입격하였으나 폐모사건이 발발하여 대과를 버렸다. 아들 김지명, 김지성, 김지중, 김지백이 모두 문명이 있었다. 딸은 병자호란 때 최명길을 탄핵한 이상형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봉현사에 제향되었다. <유두류산기>를 남기기도 한 담허재 김지백(심통성정설을 주창하였다. 김집의 수제자)의 부친.
  • 담허재 김공 휘지백(金之白) : 1623~1671. 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자성(子成)으로, 신독재 김집에게 나아갔으며 1648년 생원이 되고 덕행으로 교관에 천거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또, 진사가 되었다. 1667년 제주 임인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형(仲兄) 김지중과 함께 간하였다. 평생 명나라 숭정(崇禎)의 연호를 썼으며 문장이 아담하기로 이름 높았다. 담허재집에 한시 167수 및 과문(科文) '사자입언(四字立言)'과 논고 심통성정(心通性情) 등이 수록되어 있다.


  • 퇴우당(退憂堂) 김공 휘해(金垓) : 자가 여후(汝厚)이며, 호는 퇴우당(退憂堂)이고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문정공(文貞公)의 후예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옹천 김석홍(甕泉 金錫弘)의 증손이며 판결사(判決使) 김의복(金公諱義福. 舍人公의 子.)의 아들로 부안읍 옹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더니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효우와 학행으로 천거되어 직장(直長)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 일어나서 선조(宣祖)가 용만으로 몽진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서 용만까지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난 후에 그 공으로 호성원종일등공신(扈聖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그리고 1624년(인조2)의 이괄(李适)의 난에도 인조(仁祖)를 호가하였다. 그 공으로 장악원 주부(掌樂院 主簿)에 제수되었다. 이어 1627년(인조5)의 정묘호란에도 군졸과 군량(軍糧)을 모았으며 1636년(인조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이미 나이가 74세가 되는 고령이어서 그의 아들 이겸(以謙)을 시켜 병량을 모아서 군진으로 보냈다. 그는 광해조(光海朝)때에는 벼슬에서 물러나와 근심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퇴우당(退憂堂)이라 편액을 걸고 조용하게 여생을 보냈다. 1637년(인조5)에 75세를 일기로 졸하니, 고을의 사람들이 그의 충효를 추모하여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추배하였다. 묘소는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 일원이며 후손들이 이 소산리를 중심으로 하여 세거하고 있다. 직계(直系)는 헌술(憲述).
  • 수분와(守分窩) 김공 휘단(金湍) : 일명(一名) 김설(金渫)이다. 자는 백급(伯汲)이고 호는 수분와(守分窩)이며 옹촌(甕村) 김석량(金錫良)의 증손이다.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詩烈) 등과 교우하였다. 부안(扶安) 옹정서원(甕井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송준길의 천거로 참봉(參奉)을 거쳐 회덕현감(懷德縣監)을 지내는 중 백성들이 공의 청렴과 인애(仁愛)를 흠모하여 유림이 조정에 탄원한 기록이 전한다. 이때에 수분와 선생이 신령현감을 거쳐 회덕에 당도하였다가 소인배(충청도안찰사)를 거스르고 관직을 버렸다(1656.1.16~1656.10.19). 송준길이 회상하길, 내가 ‘공의 정사가 깨끗하고 근엄했는데도 파직당했으니 매우 억울하다.’는 내용을 진달하니, 마침 함께 입시했던 그때의 안찰사가 부끄러워하며 사과해 마지않았다. `인자한 은혜는 부녀들도 칭송했고\깨끗한 덕은 성상도 알아주셨지요\지난 일 모두 꿈만 같으니\덧없는 인생 슬플 뿐이오\남쪽에서 한줄기 눈물\선인(善人) 위해 거듭 흘리오` 라 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의병을 일으켜. 창의록(倡義錄)에 수록되었다. 참판(參判) 김여옥(金汝鈺)이 공을 ‘한 고을의 뛰어난 선비이자 당대의 큰선비(一鄕善士 當代鴻儒)’라 하였다.
  • 농암 김공 휘택삼(金宅三) : 1619년(광해11년)∼1703년(숙종29년), 호는 농암(聾岩)으로 아버지는 참봉 김곡(金穀)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詩烈)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능하였으며, 우암의 저서 <주자차의(朱子箚疑)>를 교정하였다. 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과도 절친하였다. 저서로 <<聾岩遺稿>>가 있다. 부안군 보안면 영전리 유천서원(柳川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송시열의 수제자로, '관수당 마농암'이라 칭해졌고 이것은 순창에 위치한 한학당 앞에 암각석으로 현전한다(송시열이 제자의 정자를 방문하여 쓴 것. 당시 동생 송시걸이 순창군수이기도 하였다).
  • 만은 김공 휘일좌(金日佐)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여해(汝諧), 호는 만은(晩隱), 본관은 부안(扶安)이다. 김문정공(金文貞公)의 후손으로 진사(進士) 응별(應鱉)의 현손이며 근(瑾)의 아들로 부안에서 태어났다. 1693년(숙종 19) 30세로 문과(文科) 식년방(式年榜)의 을과(乙科) 제4인으로 급제하였다. 그로부터 벼슬길에 나아가서 성균관(成均館)의 학유(學諭), 학록(學錄), 학정(學正), 박사(博士), 사예(司藝), 직강(直講)을 두루 거쳤고 이어 공조좌랑(工曹佐郞), 이조좌랑(吏曹佐郞),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 공조(工曹),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냈고, 다시 예문관(藝文館) 시강원(侍講院), 회덕현감(懷德縣監), 사헌부 장령(掌令), 횡성현감(橫城縣監), 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이 59세였다. 횡성현감 시절, 애민(愛民)이 때에 맞아 향인들이 송덕비를 건립하였다.그가 태어난 칠성암(七星庵) 아래 마을에 전하여 오기를 산천이 빼어나서 3문장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과연 월파 최경(崔勁), 화순 송래백(宋來栢), 만은 김일좌(金日佐)의 3문장이 나와서 세상을 울렸다. 젊어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찾아 그 문인이 되었는데 우암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 담계(澹溪) 김공 휘서경(金瑞慶) : 자는 길부(吉夫)이며, 호는 담계(澹溪)이다. 김윤필(金胤弼)의 아들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부안군 상서면 원촌리 동림마을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김공은 유형원의 학문적 계승자로, 어린 시절 고대 동양 역법의 기초이론 '기삼백'을 혼자서 풀어내는 수리 능력을 보였다. 그는 스승을 갖은 후부터 대학의 격물치지, 논어의 박문약례, 중용의 박학-심문-신사-명변을 학문 목표로 삼고 자연히 과거공부를 멀리하였다. 하지만 부친의 권고로 향시를 쳐 합격한 다음 성균관으로 들어가 문과를 준비하던 중 34세에 거세(去世)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담계 김서경의 반계학 계승과 경세의식'이라는 논문을 참조할 것.) 담계공 후손들에 의하여 <<담계유고>>가 발굴되어 전북향토문화연구회가 번역을 맡아, 우리나라 학계의 유형원이 제자를 두지 않았다는 주장이 일축되었다. 유형원의 제문이 현전한다.
  • 명은 김공 휘수민(金壽民) : 1734~1811. 평생 북향하지 않고 서향하여 앉았다. 당시에 되놈들(청나라) 세력이 흉악했는데, 나라에서 부풍 7인(扶風七人. 조선 때 국찬 된<<존주휘편>>의 '존양지의'의 추증을 말한다.)을 표창할 때에 그 문서가 되놈의 연호로 되어 있자, 유사에게 항의하여 조정으로부터 숭정의 연호를 가져와서 고치게 하였다. 주도(周道)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저작 <<내성지>>는 몽유록계 소설로, 원생몽유록이 춘추대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 한 데 비하여 약 150인의 등장인물이 시연(詩宴)을 거치면서 단종과 건문의 일을 논하는 것을 상세하게 밝혔다(포폄적 성격). 요순탕무와 이기(理氣)를 평하였다. <기동악부>는 고조선에서 조선 후기까지의 사적과 인물에 대한 85편의 영사시(詠史詩)이며, 그의 저술이다. <<명은집>>은 문-사-철 22권 22책으로 구성되어있다.
  • 여초 김공 휘규하(金圭夏) : 1740(영조 16)∼1822(순조 22). 자는 내협(乃協)이며 호는 여초(汝初)이다. 아버지는 진사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홍제민(洪濟民)의 딸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간 뒤, 의영고주부·종부시주부·종묘서령·감찰을 거쳐서, 1798년 장령·정언을 역임했다. 같은 해 용강 현령이 되었는데, 특히 학문을 일으키는 데 힘썼다. 그 뒤 지평·정악원정을 거쳐 1802년(순조 2) 다시 장령이 되었을 때, 시무책 6조와 궁인들의 불공을 금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1806년 장령으로 재직 중 귀향하여, 귀재(歸齋)라는 현판을 달고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1820년 병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정일우수(精一迂叟) 김공 휘익(金翼) : 1746(영조22)~1809(순조 9). 자는 이정(而靜)이며, 호는 정일우수(精一迂叟)이다. 초야에 묻혀 일생을 학문 연구에 전심하여 경서(經書)에 밝았다. 당대 호남의 거유(巨儒)로 문하에서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권농가> 등이 전한다. <<정일우수집>>, <<오상록(五常錄)>> 저. 확은(確隱) 김상성(金相誠)은 공의 아들로, <서호별곡>을 남겼다.
  • 후창(後滄) 김공 휘택술(金澤述, 1884년 ∼ 1954년) : 자는 종현(鍾賢)이며, 호는 후창(後滄)이다. 아버지는 1911년 <<운강유고>> 발간에 참여한 한학자 벽봉 낙진(洛進)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로 석홍(錫洪)의 딸이다. 7세에 여숙(閭塾)에서 수학하고, 15세경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900년 전우(田愚)에게 사사받아 학문의 대도를 배웠는데, 이때 후창이라는 호를 받고, 창동처사(滄東處士)라 하였다. 1925년 동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왜노)의 허가를 얻어 스승의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들의 선봉이 되어 선생의 뜻을 저버린 행위라 성토하였다. 이로 인하여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수차호출을 당하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광복 후 스승의 문집을 수정하여 발간하였다. 그는 도학과 문장이 전우(田愚)의 수재로서 일시의 사표로 칭송되었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그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는데,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부안 계양사(繼陽祠)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후창집(後滄集)》이 있다. 국내 마지막 유학자라고 불리기도 한 전우의 사상적 후계자이며 최익현(면암)이 기병(起兵)하였을 때 가서 위무하였다. 현대에 <두류산유록>이 발굴되었다.
  • 김공 휘수복(金壽福) : 1546년 14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경향이 진동하였다'고 기록한다. 장수현감 등 역임.
  • 좌망공(坐忘公) 김공 휘현(金灦) : 1549년 갑과 1위(莊元). 자(字)는 호호(浩浩)로, 김연연(淵淵. 휘는 灝)의 형이다. 문과책문 '전수화(戰守和)'가 유명하다. 본디 그의 선조는 전라도 부안현 옹정리(甕井里)에서 거주하였으나 그의 조부인 김협(金鋏, 1546~?)이 지당에 사는 남원 진씨(晉氏)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부안을 떠나 이거하였으며 그 후로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만경일기(萬頃日記)»가 귀한 사료로 남는다.
  • 절충장군 김공 : 무과 장원. 都평안도병마. 선산(先山)의 유허비를 계고(稽古)하였음.
  • 좌랑공 김공 휘운(金雲) : 1733년 황감시에서 성균생원으로서 수석이 됨. 직부전시로 문과에 응하여 곧바로 등과하였다. 첨지사.
  • 김공 휘환감 : 1858년 철종 9년 무과 장원(1/875).
  • 찰방공 김공 휘광(金光) : 중직대부. 김광의 5형제 중 중자 승복(지봉 김승복)은 선조 6년에 생원으로 숙자 익복(충경공 김익복)과 함께 연벽하였다. 계자 태복은 선조18년에 생원으로 방목에 기재되었다. 또한 자(子)-손(孫)-증손(曾孫)의 열 한 분이 모두 창의공신이다.


타 가문(자칭 신라인들)과의 관계[편집]

한편 역적 왕건의 준동으로 은열, 명종이라는 자들이 그들의 외손자 되었던 까닭에 고려로부터 비호 받게 됨으로써 오늘날에 가끔 활개치려드는 것도 사실이나 `외손과 사위는 제사를 지낼 수 없다`라는 예기의 법언과 `서자는 감히 친을 친하게 하지 못한다`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통하여 경주김 등은 명백하게 하위계층에 해당한다. 역성혁명이 일어난 시점에 따라서 그 곳에 기어들어가는 것은 義가 될 수 없다.


비고[편집]

이 가문은 先祖의 관직명을 삼가 적을 때에 반드시 청요직으로 써 한다. 보현대사의 명운을 계승하여 열반에 드신 원담거사께서 부령 김씨이시다. 전 국회의원 김형래 씨가 신라김씨 대종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부안 김씨 종중 고문서는 우리나라 보물 900호이다. 군사공파의 선대유물 中 60점은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중이다(의탁). 기타 문반 학자들과 담론한 기록으로, 조광조 김굉필 기대승 이이 이황 유희춘 김인후 김장생 등이 있다. 경서를 논한 것은 전우, 백홍집, 정광필, 노진 등이다. 우반동(보안면 우동리 일대)의 고문서에 간찰이 다수 있어 이와같은 도의지교가 현전한다는 것은 크게 탕탕(蕩蕩)한 일이다.

2009년 행정.외무고등고시 및 견습직원선발 1차시험 언어논리영역 02번에 조선 현종 10년에 부안 김씨 부사(府使) 명열(明說)이 작성한 재산분배 문서가 예문으로 출제 되었다. 당시 사대부 집안의 아들과 딸들이 제사를 윤행(輪行.돌아가면서 행함)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사위와 외손에게 제사를 윤행하지 말도록 하고 딸들에게는 아들의 1/3의 재산을 나누어 준다는 내용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고문서관리학전공 19-1학기 강의교재가 <우반동고문서>를 저본으로 한다.

[편집]

«지포집» «운강유고» «해옹집» «노가암유고» «용암유고» «부안김씨세고» «화곡선생유고»

초록[편집]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문선 조선실록 고봉집 미암집 가정집 율곡집 익재집(역옹패설) 양곡집 연려실기술 일성록 문무과방목(하버드옌칭도서관) 호남창의록 호남삼강록

상계 세계 및 분파[편집]

  • 상계 세계도
  • 분파
  • 소윤공파(少尹公派)
  • 군사공파(軍事公派)
    • 시직공파(侍直公派)
    • 승지공파(承旨公派)
    • 지평공파(持平公派)
    • 사직공파(司直公派)
    • 직장공파(直長公派)
  • 소감공파(小監公派)
  • 시승공파(侍承公派)
  • 좌승지공파(左承旨公派)

집성촌[편집]

  • 전라남도 곡성군 곡성읍 구원리
  •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모산리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내기리
  •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익상리
  •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
  • 전라북도 부안군 주산면 소산리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상입석리
  •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사상리
  •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목동리
  •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강기리
  •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만수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두산리
  •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일원
  • 황해도 장연군 전택면 갈사리

본관 호칭[편집]

성인여세추이(聖人與世追移)라고 하듯, 한민족의 국가(國家), 지명(地名)이 옮겨감에 따라 부령이든 부안이든 부르면 되는 것이고 더욱이 조선의 이산과 그 아비(무수리의 子)의 때에 우리 선조께서 '本扶安 居扶安'이라고 답지에 기재(記載)하신 바, 이미 이방원이 1416년에 부령을 부안으로 고쳐 부르자고 건의하였던 일 이후로도 '本扶寧 居扶安'은 혼기(混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들리기로, 종친회에서 통칭을 부령(부안) 김씨라 정하였던만큼 갑론을박은 헛수고(勞)에 불과하다. 중니(仲尼)가 말한 '선정명(先正名)'은 교화와 수기치인에 있는 것이다.

주(注)[편집]

-재실

복층의 문루를 자랑하는 호남 최고의 제각이라 불리는 취성재는 부안 옹정에 위치해 있다.

-성리학 원조 논고 출처: 부안인터넷신문. 여기서 전북대 김병기교수를 인용함. 지포선생에 대한 재조명과 도동서원 복원이 부안의 인문학적 추진사업으로 꼭 필요하다.  지포 김구선생은 고려말 부안에서 10년동안 유학 교육을 후학들에게 전파함으로써, 고려말 부패한 불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념으로서 유학을 부흥시키고 남송성리학을 수용하는데 커다란 초석을 다지게 했음.  지포 김구는 1240년~1241년까지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다녀왔으며, 안향은 1289년~1290년까지 원나라에 다녀옴(안향보다 약 50년 앞서 성리학을 유입) 지포 김구는 말년에 부안군 변산면 지지포에서 후학 양성을 하였다. 지포 김구의 아들 김여우는 충렬왕으로부터 단권을 하사 받았다. 이때 쿠빌라이 딸과 충렬왕이 혼인함. 강화 교동 印氏는 문정공의 아들 김승인의 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교동인씨는 신라시대의 인서(印瑞)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인빈(印份)이 고려 인종 때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짐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교동으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희종 갑자방에 2위 김정립, 3위 김의와 함께 장원으로 인득후(印得候, 본관 미상)가 기록되어 있어 김의의 손자인 김승인의 후손이라는 설의 신빙성은 높지 않다. 서자 김승인(김여우弟)은 강릉향교를 창건(우리나라 최초) 했다. 쿠빌라이의 스승인 왕악이 서신을 보내옴. 고려 이규보, 이제현 등의 지포 김구 학문에 대한 극찬 훗날 지포 김구의 7세손인 세영과 광서 등 4형제가 不事二君의 대의를 좇아 벼슬을 버리고 부안의 옹정(낡은 터)로 낙향하였다.)



-한국 최초의 서원 (유허지: 부안읍 연곡리 학당고개 일원) 논의 부안 도동서원은 소수서원(백운동서원)보다 7년 앞선 1534년(중종29)에 지방 유림들이 지포 김구를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김여우(金汝盂) 최수손(崔秀孫) 성중엄(成重淹) 최필성(崔弼成) 김석홍(金錫弘) 홍익한(洪翼漢) 김계(金啓) 김해(金垓) 배향하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정공이 초명인 백일 대신 개명한 휘 '구(坵)'와 공자의 이름과의 연관성, 호 차산('次山'첫번째의 산인 공자의 다음 산)의 의미,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도동서원(1534년)과 최초의 향교인 강릉향교(1313년) 건립에서의 김구와 김여우, 김승인의 절대적인 위치로 보아 성리학의 도입에서 김구 부자의 선구적 역할은 입증되고 남음이 있다.


-금 시조 관련

송막기문에 따르면 '여진의 추장은 곧 신라인인데... 휘는 감복이며 3형제이며 형이 있다.'고 되어 있고

  금지에는 '그 처음의 추장은 신라인으로' 기록되었다.

  고려사에는 '평주의 승려 금준(今俊) 또는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가 여진으로 가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고려사절요에는 '평주의 금준 혹은 평주의 중 김행의 아들 극수가 여진으로 갔다는 소문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사 시조 본기에 '금의 시조의 휘는 함보이며 처음 고려에서 나와 올 때 연령이 이미 60여 세였다. 형 아고내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남으며 "후세 자손이 필히 상취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조북맹회편에 '여진의 시조 긍포는 신라로부터 달아나 나와 아촉호에 이르렀는데 돌아갈 곳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만주원류고에는 '신라 왕의 성 김씨가 수십 세를 전해졌고 금이 신라로부터 왔으니, 의심할 바 없이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도 마땅히 여기서 취한 것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 남송의 홍호의 기록, 금나라와 청나라의 정사 등 여러 기록들이 일관되고 서로 부합하는 것, 형이 있다는 사실 및 시조나 가문에 관한 미화나 과장이 없음 등 허구로 볼 여지가 거의 없어 사실로 볼 수 있다. 금나라 왕실이나 청나라 황실 역시 시조의 신라출자 또는 고려출자설을 믿은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사절요의 금준(今俊)의 금(今)씨는 우리나라에서 극히 희소한 성씨로서 이 이야기의 금준이 시조격인 바 가계도나 선계에 관한 전승이나 기록조차 없는 등 설에 불과하여 그가 금(今)씨의 시조이며 여진으로 갔다는 것은 근거가 희박한 이야기이다. 금사에도 금의 시조가 60세가 될 때까지 혼인하지 아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를 떠날 때의 신분은 승려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이전 김씨가 금씨로 불린 사실 및 금나라가 '今' 이 아닌 '金'으로 표기된 점, 청의 황성인 애신각라씨가 청의 망국 후 성을 김씨로 바꾼 점, 금의 국명이 신라왕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 등을 감안하면 김준 또는 김행, 김극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기록상 두 형제가 갔으므로 김준(금준)과 김행(금행)이 형제이며 함께 여진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김행이 3형제인 것은 사실로 생각되며 형 아고내의 말 중 "후세 자손이 유능하다면 반드시 서로 만날 것이다. 나는 가지 않겠다."는 내용 및 동생 보활리가 함께 간 것으로 볼 때 개인의 문제가 아닌 집안의 사정으로 여진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기록으로는 달아나 온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조선(고려사, 고려사절요)의 기록으로는 김행의 신분이나 형제의 여부, 여진으로 간 이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바 고려에서 신분이나 가문의 내력을 숨겨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죄를 범하여 도망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순왕의 태자께서는 고려에 귀부하지 아니하고 고려에 대항하였다. 즉 고려의 입장에서는 전 왕조이었으므로 그 후손들이 얼마나 위태하고 은밀하게 생활하였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반면 경순왕의 서자(庶子) 후손들(은열이 핏줄 김부식 등), 특히 낙랑공주의 몸에서 난 자들은 외가인 고려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고려 초기부터 급히 성장하였다.

결론으로 금의 시조가 고려시대에 넘어간 신라인이라는 것은 고려에 귀부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금의 국명이 신라 왕으로부터 나왔다고 기록된 점, 집안의 사정으로 타국에 갈 수밖에 없었던 점 등 금의 시조는 전승과 같이 태자공 이후 은둔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부령(부안)김씨와 같은 핏줄로 볼 수 있다. 

여타 개국 공신에 오르는 등 고려 초기부터 부귀를 누린 집안의 인물로 볼만한 사정은 없다.


-'헌례고개' 전설

부안에 새로 부임하여오는 원님은 옹정의 부안 김씨들 문장(門長)집에 부임인사부터 하였다고 하며 헌례(獻禮)고개에서 옹정을 향하여 큰 절을 올렸다 하여 절 올리는 고개라는 뜻의 헌례고개라 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멀쩡한 부안김씨' 속담

인물이 많이 배출되어 "멀쩡한 부안 김씨”라는 이 지방만의 속담도 생겨났다.

이 속담에는 아래와 같은 일화가 있다. 지금의 동진대교가 있기 전에는 그 자리에 나루가 있어 배로 강을 건너야만 했다. 이 나루가 바로 부안의 대표적 나루로 이 나룻터에는 뱃사공이 나룻배와 더불어 연중 대기하고 있다가 길손들을 건네주는 일을 해왔다. 그들은 세습하여 뱃사공 노릇을 하였는데 정기적, 항시적으로 이용하는 주민들이 거두어 주는 뱃새경과 외지인들에게서 받는 선임(船賃)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뱃새경은 이용하는 횟수에 관계없이 근처 주민들은 한 가구당 1년에 보리 1말, 또는 5되씩 2회에 걸쳐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특례가 있어 지방의 관원이나 양반에게는 뱃새경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관원이나 양반들을 일일이 다 못 알아보아 시비가 생기는가 하면, 선임 없이 올라타는 나그네, 선임을 깎자고 덤비는 건달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부안사람들이 외지로 출세(出世)하려면 거의가 이 나루터에서 나룻배 신세를 져야 했는데 예로부터 이곳 나루쟁이가 유난히 거칠고 버릇이 없기로 유명하여 이 부안지방 속담에 「동진강 나루쟁이 보다도 후레자식이다」 또는 「후레스럽기가 동진나루쟁이 뺨치겠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을 정도다. 웬만큼 세도 있는 양반이 아니고는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얼른 월천(越川, 갯물이 빠지면 사람을 업어서 개펄을 건너 나룻배까지 태워주는 일)을 하여 주지도 않았다. 그러다가도 술값이라도 몇 푼 주면 겨우 움직이는데, 이 음흉한 나루쟁이가 젊은 여인네나 처녀는 월천을 잘하여 줄 뿐더러 업고 가면서 여인의 엉덩이 밑에 받친 손으로 점잖지 못한 장난질도 곧잘 한다는 것이다.

이 나루터에 부안지방의 산물이 많이 모이고 왜정 때에는 조선통운(朝鮮通運)의 창고도 있었으며 숯장사, 떡장사, 잡화장사에 나루터 잡놈들이 들끓었다고 하는데, 한번은 허름하게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선개(船價, 船賃, 나루삯)도 안내고 배에서 내려 휘적휘적 가버리는 것이었다. 화가 잔뜩 난 나루쟁이가 쫓아가서   「이보시오 당신이 뭔데 선개도 안내고 도망치는 거요?」하고 따지니까   「야 이놈아! 나도 멀쩡한 부안김가다」   하면서 두루마기를 제치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호패를 쓱 보이니, 나루쟁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는 것이다.

부안김씨들이 이 지방의 호족이고 세도가 커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부안 인근에는 '멀쩡한 부안김가’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이른바 의취체폐(衣取體蔽)인 것이다.


-자칭 '경주김씨 태자파' 관련

자칭 경김의 '태자파'는 시조인 선웅의 종가도 아닌 자들이 각 파의 공동 시조(원조)인 선웅을 자기 파의 파조로 삼으면서 만들어졌다. 즉 경김 계림군파라는 선웅의 적종가가 있음에도 일부 종인들이 시조를 파조로 끌어 간 전대미문의 엽기적인 사건이다.

처음에는 장군공파로 분파를 하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대장군공파로 이름을 바꾸었다. 선웅은 대장군의 직에 있지 아니하였다.

이후에는 위보로 판명된 신라삼성연원보를 근거로 시조인 선웅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태자파로 파명을 다시 바꾸었다. 자칭 '태자파'에서 명분으로 삼는 법원의 결정문을 보면 "신라삼성연원보가 진본이며.. 김순웅과 마의태자 김일의 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아니하였지만 김순웅이 김일의 둘째 아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할 것”라 되어 있는 바 신라삼성연원보는 위보이며, 법원의 결정은 순웅의 상계에 관하여 확인된 사실이 없음을 밝혔을 뿐이다. '피노키오'라는 책이 진본이라 해서 피노키오가 실재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숙종대(1661~1720) 후반에 이르러 신분제도가 크게 문란해진 이후 새로 제작된 족보는 신뢰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바 하물며 족보의 위조가 극에 달한 일제강점기인 1934년 개인이 인조20년(1642)으로 발간년도조차 속이고 만든 잡서를 금과옥조로 받드는 자들은 족보장사꾼들과 그 추종자들 뿐이다.

1584년의 갑신보 이래 수백년간 수백, 수천 명의 부령김씨 및 외손들, 사위들, 관계된 여러 명사들이 관여하여 만들어진 부령(부안)김씨 족보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배경도 뚜렷하지 않은 자가 발행년도부터 속인 신라삼성연원보를 근거로 한 것부터 저급하다 할 것이니, 신라삼성연원보를 증거로 제출한 것은 법원을 기망한 소송사기와 다름없다.

잡서를 근거로 실제의 조상을 버리고 다른 집안의 조상을 탐내는 작태는 '대법원 판결'로 논파가 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족보를 위조하여 경김에 들어간 자들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패륜이다. 본래 자신들의 조상이 아니므로 계통에 무심하여 남이 보기에 좋으면 자기 조상으로 삼으려는 자들로 볼 수밖에 없으며,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사와 부합하지 아니하거나 나아가 모순됨에도 위조된 잡서를 근거로 태자공이 자신들의 조상이라 억지를 부리는 등 그 후안무치(厚顔無恥)는 용납될 수 없다.

인구[편집]

  • 1985년 11,263가구 47,696명
  • 2000년 17,391가구 56,318명
  • 2015년 부안 김씨 48,961명 + 부령 김씨 14,386명 + 부녕 김씨 2,397명 + 부영 김씨 3,413명 = 69,157명

2000년 지역별 인구는 서울 16,166명, 부산 1,414명, 대구 414명, 인천 2,997명, 광주 1,391명, 대전 1,577명, 울산 419명, 경기 11,527명, 강원 701명, 충북 676명, 충남 2,391명, 전북 14,308명, 전남 919명, 경북 461명, 경남 809명, 제주 148명이다.

항렬자[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