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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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출생 1510년 음력 7월 19일
양력 1510년 8월 23일
조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 자택(現 대한민국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사망 1560년 음력 1월 16일
양력 1560년 2월 11일 (51세)
조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 자택
국적 조선
본관 울산(蔚山)
학력 1540년(중종 35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직업 문관, 성리학자, 도학자, 사상가, 시인, 정치가, 저술가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여흥 윤씨
자녀 김종룡(장남), 김종호(차남), 딸 4명(壻 : 조희문 · 양자징 · 유경렴 · 막내 요사)
부모 아버지 김령
어머니 옥천 조씨 부인
친척 사돈 이항, 진벽, 조임, 양산보, 유희춘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ㆍ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이력[편집]

김인후1510년 (중종 5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참봉 김령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했으며 이미 5~6세에 문자를 이해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기묘 사림의 조원기ㆍ기준박상 등의 아낌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안국최산두송순 등에게 도학과 문학을 배웠다.

특히 그의 나이 10세에 전라도 감사로 부임한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보고 「이는 나의 어린 벗(小友)이다.」 그리고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칭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531년 (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1533년 (중종 28년) 성균관에서 이황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후일 퇴계(退溪)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河西)'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이다.

1540년 (중종 3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사가독서의 은혜를 입어 호당에 들어갔는데, 함께 뽑힌 12명의 명사들과 교유하며 사상적 토론을 통해 성리학 이론을 확립하여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겼다.

1543년 (중종 38년) 4월 홍문관 박사 겸 설서가 되어 세자이던 인종을 가르쳤는데, 이때 세자와 깊은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게 된다. 세자는 그의 학문과 도덕에 깊이 감복하여 입직해 있을 때는 직접 찾아가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몸소 그린 「묵죽도」(墨竹圖)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기묘사화때 죽임을 당한 기묘 제현들의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부모 봉양의 걸양을 청하여 12월에 외직인 옥과 현감으로 나갔다.

1545년 (인종 원년)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며, 이후 인종이 즉위 후 불과 8개월 만에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다시 벼슬할 마음을 갖지 않은 체, 산림에 은둔하여 시와 술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죽을때까지 매년 인종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집 앞 '난산(卵山)'에 올라 하루 종일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한 결 같이 하였다. 이후 성균관 전적·공조 좌랑·홍문관 교리·성균관 직강 등의 벼슬에 제수 되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48년 (명종 3년) 몸을 추스린 그는 순창 점암촌에 초당 훈몽(訓蒙)의 편액을 걸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1557년 (명조 12년) ≪태극도설(太極圖說)≫ ≪서명(西銘)≫ 등의 서(序)에 있어 완색(玩索)을 쌓고 쌓아 읽은 횟수가 천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 관상도(周易觀象圖)≫와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등을 서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 보였다.

1558년 (명종 13년) 학문의 목표를 성경의 실천으로 삼고,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소재 노수신 등과 《사단칠정》, 《태극도설》, 《인심도심》 등의 문제에 대해 논변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고봉퇴계와 《사단칠정논변》의 시비를 벌일 때 그와의 논변을 통해 정립된 이론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이황기대승'의 『사칠 왕복서』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 도의 지교를 맺고, 면앙정의 누정을 중심으로 당대의 유명한 송순을 비롯한 호남의 많은 사림계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호남 시단 형성 및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1560년(명종 15년) 이와 같이 그는 성리학 연구 및 후학 교육에 전념하다가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떠나는 그 순간에도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자녀들에게 명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마지막까지 선비다운 굳은 절개와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도 정통하였다. 시문에 능해 10여권의 시문집이 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ㆍ『주역관상편』ㆍ서명사천도』ㆍ『홍범설시작괘도』ㆍ『백련초해』 등을 남겼다. 제자로는 변성온ㆍ기효간ㆍ조희문ㆍ정철ㆍ오건ㆍ양자징 등이 있다.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서원 등에 제향 되고, 1796년 (정조 20년) 문묘에 배향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불천위의 은혜를 받았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편집]

김인후는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그의 5대조 조선 개국원종공신 김온이 서울에서 살았으나, 태종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때 처가인 여흥 민씨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 정부인 여흥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전라도 장성으로 낙담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

1510년(중종 5년) 7월 19일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하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두터워 부친 참봉공의 사랑이 더 하였다. 5∼6세에 이미 문자를 이해하고 말을 하여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수학[편집]

1514년(중종 9년) 5살 때 부친 참봉공이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눈여겨보기만 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자 참봉공이 화를 내며 「자식을 낳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벙어리인 모양이다. 집안이 말이 아니겠구나.」 하였다. 얼마 후에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벽에 글을 쓰는데 모두 ≪천자문≫에 있는 글자였다. 그래서 참봉공은 비로소 기특히 여기었다. 또 일찍이 아는 사람과 시를 짓는데,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하루는 생파를 손에 들고 겉껍질에서부터 차근차근 벗겨 들어가 그 속심까지 이르고서야 그치니, 이를 본 참봉공이 장난삼아 하는 줄로 알고 나무라자, 그는「자라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515년(중종 10년) 6살 때 정월 보름달을 보고 「상원석(上元夕)의 시를 지었다. 또 어떤 손님이 와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천(天)자로 글제를 삼아 시를 지어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하 크고 또 가물가물, 넓고 넓어 비고 비어, 지구 가를 둘렀도다. 덮어주는 그 중간에, 만물이 다 들었는데, 기나라 사람들은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지.』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래며 특이하게 여기었다.

1517년(중종 12년) 8살 때 조광조의 숙부 조원기가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보고 기특히 여기며 더불어 시를 짓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신동 천하문장(長城神童天下文章)」이라 칭찬했다.

1518년 (중종 13년) 복재 기준이 남녁 시골에 내려왔다가 그의 이름을 듣고서 데려다 보고 칭찬을 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世子)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사필(內賜筆)」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여 보관함에 넣고 보배로 삼았다.

1519년(중종 14년) 10살 때 호남 관찰사로 와 있던 김안국을 찾아뵙고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나의 소우(小友)이다.」고 하였으며, 그 뒤로도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이와 같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문을 잘하여 명성이 전역에 떨쳤다.

1522년 (중종 17년) 시를 잘 짓던 그는 스스로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설 수가 없다(不學詩無以立).」는 말을 성인의 교훈으로 생각하고, ≪시경(詩經)≫을 탐독하였다.

1526년 (중종 21년) 송순을 찾아가 뵙고 수업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왕래하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7년 (중종 22년) 18세 때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는데, 신재는 깊이 탄복하여 매양 「추수 빙호(秋水 氷壺.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 같다)」라고 일컬었다. 또 나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광주 서창에 돌아와 있던 박상을 찾아뵙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학맥과 사상[편집]

이와 같이 그는 조원기·기준·송순·박상등과 사우 관계를 맺고, 김안국최산두에게 수학하였다. 기준김안국최산두는 모두 기묘년 때 화를 당한 인물들로 그가 결코 기묘사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스승 김안국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바, 김굉필은 바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 순의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므로, 그는 도통의 직계이다. 그리하여 조광조와는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는 조광조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등 기묘 사림을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자들의 신원 복원을 주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편집]

1528년(중종 23년)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에게 칠석날 기리는 시험을 보였는데, 그는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대제학 이행이 기특히 여기며 사람이나 글이 모두 옥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혹시 남의 손을 빌리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그를 성균관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시문의 운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은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그때 지은 시권 《칠석부(七夕賦)》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렸다.

1531년(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1] 1533년(중종 28년) 성균관에서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이황과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은 소득이 있었다. 이후 이황은 이때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었다”고 할 만큼 김인후에게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를 지어 주었다.[2]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중종 31년)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머리에 삼베 가마(加麻) 띠를 두르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1년상에 미쳐서는 제문을 지어 스승의 영전에 바쳤다.〔우리나라에서 스승을 위해 상복을 입은 것은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다.〕

1539년 (중종 34년) 여름 4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이미 제술관을 많이 뽑았사오나, 성균관 과시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김인후등을 차출하여 이에 대비케 함이 어떠하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 하였다.

1540년(중종 35년) 10월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다.

1541년 3월 홍문록(弘文錄)에 뽑히다. 4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 되어 호당에 들어갔다. 함께 뽑힌 12인과 「호당수계록」을 만들었다. 그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통해 성리학 이론을 확립하여 이후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겼다. 겨울 10월에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정경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3]

1542년(중종 37년) 가을 7월에 홍문관 저작이 되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맡는 요직인 청요직에 올랐다.

1543년 (중종 38년) 1월 7일 동궁에 불이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봄 2월에 스승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장사때까지 상복을 입고, 기일에는 반드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였다. 스승을 애도하는 글 '만사'가 문집에 전한다.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 시강원 설서로 승진되었으며, 이때에 인종이 동궁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 보도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니,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 다하고, 자주 불러 강론을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또 그가 입직해 있을 때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세자는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표현하고자 아니하였는데 유독 그에게 손수 그린 '묵죽도'(墨竹圖)를 하사하여 뜻을 보였다. 이것은 임금 될 사람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다. 이후에도 『주자대전』(朱子大全) 한 질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와 같은 인종의 그에 대한 신뢰와 배려는 충성심으로 굳고 깊게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 일화는 군신 관계의 모범으로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4]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편집]

1543년 (중종 38년) 여름 6월에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 검토관으로 승진되었다. 그해 동궁에 불이 나는 등 전국이 뒤숭숭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홀로 개연히 상소문을 올려 시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중종에게 수신·자성의 도를 진술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바른 선비들을 《소학(小學)》의 무리라 하여 배척하는 낡은 정치 풍토가 만연해 있는 조정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을 것과, 기묘년에 희생된 사람들이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인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거운 죄를 입었습니다. 그 후에 죄를 지은 사람중에 비록 죽어도 남은 죄(大逆不道)가 있는 자들이 세월이 오래되어 더러는 복직된 자도 있사온데 기묘년 사람들은 오히려 상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사오니, 신은 홀로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기묘년 사람들이 숭상하던 ≪소학(小學)≫, ≪향약(鄕約)≫ 등은 버려 던지고 쓰지 아니합니다. ≪소학≫과 ≪향약≫은 성현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비들이 시속에 빠져 읽어서는 안 될 글이라 하며 버리니 매우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지적 하는데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때는 기묘년으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언급한 것은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이는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5]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 이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8월에 휴가를 청하여 근친하러 귀향하다. 이후 12월에는 부모 봉양의 걸양 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 현감을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6] 이때에 송인수가 호남의 관찰사로 와서 그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 받으며, 정이 매우 두터웠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 즉위하여 1545년(인종 1년) 여름 5월에 조정에서 제술관으로 부름에 드디어 나아갔다. 당시 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내외가 모두 태평성대를 기대했으며, 그에게 인종의 경연의 보도 책임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인종이 건강을 잃자 그는 의약에 함께 참여하기를 청한 바, 약원에서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는 세상의 낌새가 반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부모 병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이후 그가 가르치던 세자가 인종으로 등극하여 처음으로 성리학 숭상과 현량과를 복원하고, 기묘사화에 희생된 선비들의 명예 회복에 힘을 기울여 조광조김정기준 등의 신원 복원하고, 선정을 펼치려 하였으나 병약한 탓에 8개월만에 승하하였다. 이는 1543년 6월 그가 중종에게 기묘년에 희생된 선비들의 신원 복원을 요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와 인종과의 묵계를 알만하다 하겠다.

사직과 은거[편집]

1545년 (인종 원년) 가을 7월에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은 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매우 깊은 심장 병이 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대윤과 소윤간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면서 을사사화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술과 시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7]

1546년(명종 원년)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의 연구와 후학 양성 뿐이었다. 4월에 ≪효경간오(孝經刊誤)≫ 발문을 지었는데, 이는 옥과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유희춘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 읍에 들러 주자의 「효경간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하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러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1548년 (명종 3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鮎巖村)에 우거하며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 점암은 나무와 돌이 빼어나게 좋으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고암 양자징을 비롯한 제자들과 더불어 바위에서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이라 일컬으며, 또 상류에 낙덕암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과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인종에 대한 절의[편집]

이후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남쪽의 「난산」속에 들어가서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와 「조신생사」의 시를 지었다.

1547년 (명종 2년) 봄에 성균관 전적에, 가을에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또 가을 9월에 전라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사헌부 반대로 체직되었다. 체직 다음날 18일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 사림계 인사들이 극형에 처해지고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사상적 동지요 절친한 벗들로 그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8]

1549년(명종 4년) 여름·가을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12월에 장성 맥동 본가 서쪽 원당산에 장사하였다. 묘지명은 송순이 썼다. 1550년(명조 5년) 가을에 장성 본가로 돌아왔다. 묘사 거실의 편액을 ‘담재’라 하고, 이를 자호로 하였다. 1551년(명종 6년) 6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참봉공 묘 왼편에 장례 하였다.

1553년(명종 8년) 7월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는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에 임명되어, 부름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글을 올려 병으로 사직을 청하고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54년(명종 9년) 늦가을 9월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셨다. 10월에 명종은 감사에게 특명을 내려 「식물을 제급케 하고, 병이 낫거든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그는 글을 올려 사양했다.

1555년(명종 10년)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는 처지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생애 후반은 을사사화 이후의 시기로, 하나는 성리학 연구이고, 그 다음은 시문학 활동과 후학 양성이다.

성리학 연구[편집]

을사사화 이후 은둔한 그는 몸을 추스린 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학문의 경지가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깊었다. 또 그의 학문 기조는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49년(명종 4년) 봄 2월에 ≪주자대전≫ 중에서 ≪대학 강의(大學 講義)≫를 얻어 보고 발문을 지었다.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추만 정지운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여 ≪천명도≫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받아 본 그는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하여 주었다. 이는 뒷날 이황기대승 간의 「사칠 논변」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으며, 일찍이 이황도 역시 그의 도학 문자를 보고 의견과 해설의 정밀함에 대해 깊이 공경하였다.

1552년(명종 7년) 양산보가 ≪효부≫의 장편을 지어서, 그가 일찍이 시운을 따라 글을 지었는데, 송순이 직접 생각을 정리하여 원글의 뒤에 품평하였다. 문집에 실려 있다.

1556년 (명종 11년) 화담 서경덕은 '심학'으로써 당시 숭상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는 일찍이 「독주역시」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이니 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차운하였다. 이는 서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단번에 깨달음을 얻으려는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그의 시에 화답을 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1556년 여름 5월에 무장 고을 유생 안서순이 상소하여 을사년에 무고함을 입은 명현의 원통한 상황을 진술하여 아뢰는데, 윤원형 등이 안서순을 역적을 두둔한 죄로 처 죽이고 집안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나주출신 정륜도 함께 모의한 죄로 참형하고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진사 김응정에게는 소장을 썼다하여 멀리 귀양을 보냈다. 또 윤원형이 기필코 그를 연루시켜 사림에 화를 씌우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1557년(명종 12년) ≪태극도설≫ ≪서명≫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서 읽기를 천 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 관상편(周易 觀象篇)≫와 ≪서명 사천도(西銘 事天圖)≫를 저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서 보이기를 「염계의 도설은 도리가 정미하여 글월은 간략하되 뜻은 만족하고, 장자의 명은 규모가 광활하여 뜨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니 만약 천자가 고명하면 먼저 태극에서부터 공력을 써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서명을 이해하고서 태극에 미처 가야 한다.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법도이니 요컨대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아니 된다.」라 하였다. ≪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 은 잃어버려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1558년(명종 13년) 겨울 당시 기대승이항에게 들러 ≪태극도설≫을 강론하는데, 이항이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삼으므로」 기대승은 그르게 여기어 종일토록 토론하였으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기대승은 그를 찾아뵙고 분별하기 어려움 들어 질문하니, 그는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 하며 고봉더러 옳다 하고 하루 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노수신이 ≪숙흥야매잠≫의 주해를 저술하여 이황 및 그에게 강의하고 질문한 것이 왕복으로 묶어 수백언 이었는데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그의 설을 많이 따랐다.

여기서 노수신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채침의 ≪홍범설시도설≫은 밝고 또 차비한데도 뒷사람이 오히려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그는 채구봉의 설로 근본을 삼고 자기의 설을 부가하고 진술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새로 만들어 이름을 ≪홍범설시작괘도≫라 하고, 제자 양자징에게 전수하니 이에 '주·채(주자와 채침)'가 전수한 깊은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1559년(명종 14년) 일재가 "태극과 음양이 일물이라"는 뜻을 철저하게 논하여 고봉을 통해 글을 보내자, 그는 일재에게 편지를 보내, "기군에게 보낸 편지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은 아니나, 대개 이와 기는 혼합하여,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다 그 속으로부터 나와서 각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일러서는 아니 되겠지만, 그러나 도기의 나눠짐이 한계가 없지 못할진대 태극과 음양은 아무래도 일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며, 주자는 말하되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을 탄 것과 같은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고봉퇴계에게 질문하자 퇴계는 『담옹(하서의 별호)이 비록 적적하게 두어 마디 말을 했으나, 역시 이미 그 말의 본 뜻이나 내용을 보았다 하겠다.』고 하였다.

그해 겨울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던 [[기대승|고봉]이 매양 그에게 나아가 의리를 토론하였다. 고봉퇴계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 에 대해 깊이 의심하여 그에게 질문하니, 그는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이에 고봉은 그에게 이와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퇴계에게 받들어 드렸던 것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고봉퇴계와 더불어 사칠 호발의 시비에 대해 왕복 변론한 것이 자못 수 만언이었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구별한 것이었다. 이후 고봉은 그 동안의 설을 다 버리고 1566년 병인년에 도리어 퇴계의 설을 따랐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고봉'의 「사칠왕복서」이다.

또 명나라 유학자 나흠순은 ≪곤지기≫를 저술하여 이르기를 『도심은 성이요 인심은 정이다. 그 체는 지극히 고요하여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라 이르고 그 용은 지극히 변하여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위라 이른 것이다.』라 하였는데, 노수신이 이 설을 강력 주장하며 말하기를 『도심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인심은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그는 심히 그르게 여기며 말하기를 『성인의 인심 도심은 대개 모두 동처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라』라 하였다. 사후 퇴계고봉은 그의 설을 존중하고, 노소재의 설을 적극 공격하였는데, 그의 전론은 잃어버려 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의 성리학 연구는 『이기 이원론』으로 「주리론」적 입장이었으며, 수행론 방면으로는 ‘경(敬)’을 강조하였다.

시문학 활동[편집]

성장하여 시문을 지으면 맑고 화려하고, 고상하고 빼어나 당시에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으며,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가 뜻하는바는 예의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감히 태만하지 않았다.

일찍이 화순 동복의 최산두 문하를 출입하면서부터 시문학 방면에도 이름을 얻었는데, 이후 그는 서울에서 글을 잘 짓기로 이미 이름이 들어났으며, 낙향해서는 당시 전라도 일대에 덕망 있는 사림계 인사들과 교유를 하였는데, 특히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는 도의 지교를 맺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대 유명한 인사들인 송순임억령김윤재ㆍ김성원ㆍ기대승정철 등의 문사들과 담양의 소쇄원면앙정식영정과 광주의 환벽당 등 누정을 중심으로 호남 시단을 형성하여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당시 그가 쓴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 및 그 밖의 여러 율시 등은 누정 문학의 최고봉으로 널리 칭송 받았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후학 양성[편집]

제자로는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인 변성온·기효간·조희문·정철·오건·양자징·남언기·노적·윤기·신각·서태수·김종호·안증·김제안·양산해·박원순 등이 있다.

저서와 작품[편집]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도수에도 정통하였다. 태극에 관한 이론도 깊어 『천명도』를 완성하였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잃어버려 많지 않다.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하며,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저서로는 아래와 같다.

  • 《하서집》
  • 《주역관상편》
  • 《서명사천도》
  • 《홍범설시작괘도》
  • 《가례고오》
  • 《천명도》
  • 《백련초해》

최후[편집]

고향 장성으로 은거한 지 15년여 만인 1560년 (명종 15년) 정월 16일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 하더니 51세의 나이로 여유롭게 세상을 떠났다. 사흘 전 14일에 기운이 평화롭지 못하여 약물을 들면서 집안사람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주를 갖추어, 자녀들로 하여금 사당에 제물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15일에는 병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며 꿇고 앉아 제사의 시각을 기다렸다. 그리고 명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하는 선비다운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던 것이다.

조정에 부음을 아뢰자 명종이 부의를 보내도록 특명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3월에 장성 대맥동 원당산 부모 산소 아래 자좌 오향 벌 안에 장사하였다. 자제를 가르칠 적에는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학문을 뒤에 했다. 또 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 『뿌리와 가지는 한 기운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얼마나 많은 근면과 고생으로 가풍을 세웠던가. 학문에 나아가고 일신을 수신하여 이를 반드시 이어가야 하는 거니, 장인(匠人)들도 기술을 가업으로 삼느니라.』 하였다.

시대적 상황[편집]

그는 중종 5년에 태어나 명종 1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기는 연산군의 혼란된 조정을, 중종반정으로 바로 잡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중종 초기 문치의 기운을 열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중종의 등극과 함께 '신비'를 폐출하면서부터 내부적으로는 외척 세력 간 다툼이 치열하고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노골화되었던 시대였다. 이 때에 일어난 기묘사화을사사화는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잘 대변하여주고 있다 하겠다.

기묘사화는 반정 후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고자한 사림의 이상과 훈구 대신들의 현실적 욕구가 서로 부딪치게 되어 사림이 화를 입게 된 사건이고, 을사사화윤원형을 비롯한 명종의 외척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인종의 근신들을 해친 사건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사림 사상을 계승한 도학자로서, 복재의 사랑을 받고, 모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신재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인종의 신하였기에, 윤임이나 윤원형 어느 편에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러한 집권 세력들과 같은 조정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들과 연속된 싸움이었다.

그러나 인종과는 남다른 깊은 정을 나누며, 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같아서, 세자와 신하로서 뿐 아니라 세자의 보호자로서 유일한 벗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입지를 펼칠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이니, 그로서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그 높고 깊은 경륜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높은 인격과 학문적 경륜과 치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 이상을 펼쳐보지 못한 채 시와 술을 벗 삼고 세월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불우한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업적[편집]

도학[편집]

하서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도학이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는 중종의 등장과 함께 조정에 참여하게 된 신진 사림들이 내세웠던 학풍이었다. 그 정신은 요·순 임금이 행하였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인데,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유학의 근본 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은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회하게 된 계기는 기묘사화인데, 호남에 있어서도 기묘사화는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것은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 능주로 귀양 오게 됨으로써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었으며, 또한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서는 기묘 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호남 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게 되었다. 하서를 가리켜 도학·문장·절의가 남다르다고 하는 것은 하서 자신의 학문이나 정신이 그와 같았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하서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서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면 도학 사상은 기묘 사림 의식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학문적 특징은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데 있다. 그와 같은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 바로 그가 만든 「천명도」였다.[9]

절의[편집]

그의 절의 정신은 절개와 의리를 말하는데 의리란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인의 구체적 실체이다. 그의 의리는 자신의 올바름을 지키려는 어진 본성에서 나왔기에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에는 의를 실천 할 수 있는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불의에 맞선 절의 정신은 실천적 도학으로 계승되어 호남 사림들로 하여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여 임란 의병구한말 의병광주학생독립운동5·18 광주 민주화 운동등으로 나타났다.[10]

문장[편집]

그의 문장(文章)은 도(道)를 싣는다. 도(道)는 하늘의 마땅히 그러한 바를 따르는 것으로, 문(文)은 그와 같은 도(道)를 실현하는 실체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장(文章)이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도가 그만큼 깊었음을 말한다. 그의 문장은 이와 같이 도가 나타난 것이었기에 도를 높이려는 선비들은 자연히 그의 문장을 따르게 되었다.[11]

사후[편집]

  • 1561년 (명종 16년) 「가장(家狀)」을 문인 양자징이 지었다.
  • 1564년 (명종 19년) 「영귀정사」를 옥과 선비들이 건립 제향하였다.
  • 1568년 (선조 원년) 『하서집』 초고본을 간행하였다.(서문은 문인 조희문이 찬하였다.)
  • 1570년 (선조 3년) 「화산사」를 순창고을 선비들이 건립 제향하고, 뒤에 「어암사」도 건립 하였다.
  • 1590년 (선조 23년) 서원을 호남 선비들이 그의 고향 인근 장성 기산리에 건립 하였다.
  • 1597년 (선조 30년) 서원정유재란때 소실되었다.
  • 1624년 (인조 2년) 서원을 추담 김우급(金友伋)등 지방 사림들의 노력으로 병란을 지나 기산리(岐山里)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복설하였다.
  • 1659년 (효종 10년)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이 내려졌다.
  • 1662년 (현종 3년) 필암서원 사액판을 하사하고, 예관을 보내어 사제하였다. (예조정랑 윤형계 치제, 사제문 신형 찬)
  • 1668년 (현종 9년) 여름 4월에 이단하(李端夏)가 소를 올려 선생의 도학, 절의를 진술하고 포증(褒贈)할 것을 청하여 이조판서 및 양관 대제학에 증직되었다.
  • 1669년 (현종 10년) 가을 8월에 '문정'(文靖)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도덕박문을 일러 문(文)이요, 관락영종을 일러 정(靖)이라 한 것이다."
  • 1672년 (현종 13년) 봄 3월에 필암서원의 면모를 일신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마침내 현재의 위치인 해타리(海打里)로 옮겼으며, 마을 이름도 필암리(筆岩里)로 바뀌었다. 이건(移建)은 원장 송준길(宋浚吉)의 협조하에 남계 이실지(李實之. 1624~1702), 기정연(奇挺然. 1627~?), 박승화(朴升華. 백우당 증손)등의 노력으로 완료되었다.
  • 1672년 (현종 13년) 「행장」을 박세채가 완성하였다.
  • 1675년 (숙종 원년) 「묘표」를 김수항이 완성하였다.
  • 1682년 (숙종 8년) 「신도비명」을 송시열이 완성하였다.
  • 1686년 『하서집』 중간본을 간행하였다.(서문은 송시열, 발문은 박세채가 찬하였다.)
  • 1742년 (영조 18년) 신도비를 세웠다.(비문은 이재, 전서는 김진상이 찬하였다.)
  • 1771년 (영조 47년)에 전라도 유생 양학연 등이 문묘에 배향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불허하였다.
  • 1777년 (정조 원년) 「묘지명」을 본암 김종후가 완성하였다.
  • 1786년 (정조 10년) 2월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필암서원에 추가 배향하였다.
  • 1786년 (정조 10년) 가을 8월 팔도 유생 박영원이 문묘에 종향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 1796년 (정조 20년) 9월 문묘에 배향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 및 부조묘를 허락하였다.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도덕박문을 문(文)이라 하고, 이정복인을 정(正)이라" 하였다. 『하서집』 3차 중간을 하교하였다.(문묘배향시 유집)
  • 1802년 (순조 2년) 5월 『하서집』 3차를 간행하였다.(발문은 돈암 이직보가 찬하였다.)

평가[편집]

  • 그의 평생에 걸쳐 인종에 대한 절의와 출처의 올바름은 후대 사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 조선 중기 도학자로 「호남 남쪽에는 김인후, 북쪽에는 이항,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는 역사적 평가에서 보여주듯 그의 학덕은 크고 넓었다.
  • 이이는 그 출처의 올바름은 해동에서 더불어 비교할 이가 없다 일컬으며, 『청수부용, 광풍제월』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달)이라 칭송하였다.
  • 송천 양응정은 「후지( 김인후 字)는 오늘날의 안자(공자의 제자)이다.」라고 하였다.
  • 송시열은 『우리 나라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하여 탁월한 이를 그다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세가지 중 한 두 가지에 뛰어나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되었다.』고 칭송하였다.[12]
  • 학자 군주인 정조는 「학문의 조예가 초절하고 기상이 호매하였으며, 《대학》과 《서명》의 은미하고도 깊은 뜻을 처음으로 밝혀내었고, 경을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와 도학 연원의 정통을 이어받아 실로 유학의 종장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정조문묘 배향 교서에서 『조선 개국 이래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며, 『하서는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이다.』고 극찬하였다.
  • 조선 중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화 되어 사림 정치가 뿌리 내려가던 시기에 조선 사회 발전의 사상적 초석을 마련한 도학자로, 실천적 지성의 대표 인물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13]

봉행[편집]

  • 그의 학덕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와 추향제(秋享祭)가 필암서원에서 매년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각 기관ㆍ사회 단체장ㆍ유림ㆍ주민들의 참석 하에 열리고 있다.

일화 (전설)[편집]

  • 어릴 적에 눌재 박상이 그를 보고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고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아이는 좋게 마치는 자가 없는데, 오직 이 아이는 당연히 좋게 마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증험되었다.
  • 8살 때 전라 관찰사 조원기가 그가 신동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전주 감영으로 불러 함께 시구(詩句)를 주고받으며 연구를 지었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 신동, 천하문장』이라 칭찬했다.
  • 9살 때 기준이 그의 인물됨을 칭찬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서, '내사필'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여 보배로 삼았다. 이때 복재가 말한 세자는 인종으로 훗날 그는 인종의 스승과 신하가 되었다.
  • 10살 때 전라감사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보고서 『이는 나의 어린 벗이다』라 하며, 그 뒤로도 늘 중국 고대 하은주 시대의 『삼대의 인물』이라 극찬하였다.[14]
  • 신흠의 문집 『상촌집』에 그가 죽은 후 몇 년 지나 이웃에 사는 '김세억'이라는 사람이 병으로 죽었는데, 어느 날 다시 살아나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 천제가 있는 자미궁이란 곳에 갔더니, 그곳의 자미선으로 있는 그(하서)가 명부를 보며, 『올해는 네 수명이 다하지 않았는데 네가 잘못 왔구나. 나는 네 이웃에 살던 김 아무개다”.』 라고 말하고는 종이에 글을 써 주었는데 그 글은 이랬다. “이름은 세억이요, 자는 대년인데, 구름 헤치고 천상에 와 자미선을 찾았네. 훗날 77세 되면 또다시 만나리니, 세상에 돌아가 이 말 함부로 전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억이라는 사람은 한자를 몰랐지만, 능히 이 글을 세상에 전했다.[15] [16]
  • 붓바위(필암) 전설[17]

가족 관계[편집]

  • 고조부 : 김달원(金達源), 충좌위(忠佐衛) 중령사정(中領司正)
  • 고조모 : 서흥 이씨(瑞興 李氏),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춘경(春景)의 딸
  • 증조부 : 김의강(金義剛), 사온서(司醞署) 직장(直長)
  • 증조모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조부 : 김환(金丸), 금구훈도(金溝訓導)
  • 조모 : 직산 김씨(稷山 金氏), 석숭(石崇)의 딸, 세자좌사경(世子左司經) 지효(知孝)의 손녀
    • 부 : 김영(金齡), 의릉참봉(義陵參奉)
    • 모 : 옥천 조씨(玉川 趙氏), 훈도 조적(趙勣)의 딸
      • 부인 : 여흥 윤씨(驪興 尹氏), 현감 윤임형(尹任衡)의 딸
        • 장자 : 김종룡(金從龍), 자부(子婦) 성산 이씨(星山 李氏) - 일재 이항(李恒)의 딸
          • 손자 : 김중총(金仲聰), 손부(孫婦) 태인 박씨(泰仁 朴氏)
        • 계자 : 김종호(金從虎), 자여찰방(自如察訪), 자부(子婦) 남원 진씨(南原 晉氏) - 승지 진벽(晉璧)의 딸
        • 녀 : 조희문(趙希文), 홍문관 교리
        • 녀 : 양자징(梁子澂), 현감
        • 녀 : 유경렴(柳景濂), 찰방
        • 녀 : 여(女), 요사(夭死)

후손[편집]

근대사의 거목으로 고려대학교 설립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와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로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삼양사를 설립한 기업인 수당 김연수, 한국 지성의 거목으로 고려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남재 김상협등이 후손이다.

관련 문화재[편집]

관련 시설[편집]

  •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어린이대공원 (광주)내에 그의 동상과 인종이 그린 그림에 시를 지은 「묵죽도」와 도학 사상을 집약 도해한 「천명도」및 한시 「자연가」를 비롯한 작품 아홉점이 새겨져 있다.

같이 보기[편집]

미디어에서[편집]

각주[편집]

  1. 참찬 송순이 일찍이 현감 오겸과 더불어 말하기를 신묘년의 사마 방목에 미치자 대곡 성운, 화담 서경덕, 하서 김인후,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을 내리 세니, 오겸이 크게 놀래며 「한 명단 안에 어진 자가 어찌 그리 많은가.」라고 하였다.
  2. ≪퇴계언행록≫에 이르기를 퇴계가 돌아 갈 때 ‘증별시’를 써 주었는데, 「선생은 영남의 수재로다. 문장은 이백·두보요. 글씨는 왕희지·조맹부로 구료」 하였다. 후일 퇴계가 「기묘의 변을 겪은 뒤라서 사람들이 다 학문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며 날마다 희학으로 일 삼는데, 선생은 씻은 듯이 스스로 새롭게 나가 동정과 언행을 하나같이 법도에 따르니 보는 자가 서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는데,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하서' 한 사람일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3. 「호당수계록」 : 함께 뽑힌 열세 사람 명단은 『간재 최연, 십성당 엄흔, 추파 송기수, 송재 나세찬, 국간 윤현, 죽계 임열, 지산 이황, 금호 임형수, 우암 김수, 상덕재 정유길, 급고재 이홍남, 호학재 민기, 하서 김인후』이다.
  4. 매경이코노믹(2017.07.24.)[신병주의 ‘조선의 참모로 산다는 것’] (13) 준비된 왕 인종의 참모, 김인후 호남 사림 자존심이자 仁宗의 학문적 스승[[1]]
  5. 1519년 (중종 14년) 기묘 명현 : 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은은 귀양 같다가 사형 당하고, 김구·박세희·박훈·홍언필·이자·최산두·유인숙는 유배를 당하고, 안당·이장곤·김안국·김정국·김세필·정광필·신명인 등은 사림을 두둔하다 파면을 당했다.
  6.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2012. 08. 20) [2].
  7.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9] 어두운 시대, 영화 거부하며 술과 공부…조선일보(2012. 09. 3) [3].
  8. 정미사화 라고도 한다. 이때 송인수 · 임형수 등은 사사되고, 이언적, 노수신 · 유희춘 · 백인걸 등 20여 명이 유배되었다. 특히 임형수와는 사가독서 계원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도임사수 원사 작단가>란 시조를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
  9. 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4]].
  10. 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5]].
  11. 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6]].
  12. 《우암 송시열 찬》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
  13. weekly 공감 대한민국 정책정보지(2017.02.24.)[이대현|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우리의 정신문화, ‘동국 18현’
  14. 문화 일보(2016년 7월 16일) 『6세 때 즉석 시 짓던 신동… 각별했던 인종 죽자 벼슬도 거부』[7]
  15. 허균의 《학산초당》·《성수시화》 및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오세억'(吳世億)이라 기록되어 있다. 세억이 깨어나서 소재상공(蘇齋相公) 노수신(盧守愼)에게 그 이야기 하였으며, 그 뒤 오세억은 과연 일흔 일곱에 삶을 마쳤다.
  16. 서울신문(2017.04.09) [백승종의 역사 산책] 저승길에서 만난 하서 김인후[[8]]
  17. 장성군 『전설과 설화』[[9]]
  18. 한국관광공사[[10]]
  19. 문화재청[[11]]
  20. 문화재청[[12]]
  21. 한국관광공사[[13]]
  22. 문화재청[[14]]
  23. 문화재청[[15]]
  24. 광주 북구 운암동328-16 문화예술회관 사거리 ↔ 북구 태령동1 (11km)
  25. 장성군 남면 삼태리 442-22 (광주광산 경계) ↔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산1-2 (37km)
  26. 데일리안(2007.09.18)[광주]호남 선비정신, 하서 김인후와 필암서원 특별전[[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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