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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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산두(崔山斗, 1482년 ~ 1536년)는 조선문신이다.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경앙(景仰), 는 신재(新齋)이다. 태어날 때 북두칠성의 광채가 내린 까닭으로 산두라고 이름을 지었다.

생애[편집]

전라도 광양(光陽)에서 아버지 한성판윤 최한영(崔漢榮)과 어머니 교리 한경회(韓敬澮)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이한 자질을 갖고 있었다.

8세 때에 시문을 지어 보이는 등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소양을 보였다. 18세에 상경하여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 등과도 교유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31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홍문관 저작· 박사, 홍문관 수찬·홍문관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8년 보은 현감이 되었으며, 승정원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론할 사람 26명을 선발하였는데 그가 첫째로 뽑혀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개혁과 반격[편집]

그는 당시 조광조 등이 주창한 도덕정치, 혁신정치에 뜻을 같이 하여 기존의 권력세력으로 부패한 훈구파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가 속한 신진 개혁세력은 지나치게 도학적인 언행과 급격한 개혁으로 왕의 신임을 잃고 보수세력인 훈구파의 반격을 받았다.

유배 생활[편집]

1519년(중종 14)에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으나 [[기묘사화]를 맞아 전라도 화순 동복의 나복산(蘿葍山) 아래에 유배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유성춘(柳成春)·윤구(尹衢)와 함께 ‘호남 삼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유배지에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교유하며 사사를 받았는데, 뛰어난 제자로는 인종 때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柳希春)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유배생활 중에 화순 적벽(和順 赤壁)을 오가며 많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1533년에 해배된 뒤에도 그는 계속 그곳에서 살았는데, 그에 의해서 화순 적벽(和順 赤壁)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재는 유명 관광명소로 탈바꿈 하였다.

최후[편집]

그는 유배된지 15년 만인 1533년 자유이 되었으나, 3년 후인 1536년에 53세를 일기로 을 감았다. 묘는 전남 광양시 봉강면 부저리에 모셨다. 사후 1578년 광야시 광양읍 우산리 교촌마을에 봉양사(鳳陽祠)를 세워 위패를 모셨으며, 1670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도원 서원(道源 書院)에 제향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최한영(崔漢榮)
  • 어머니 : 한경회(韓敬澮)의 딸

관련 문화재[편집]

  • 옥홀(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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