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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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崔演, 1503년[1] ~ 1549년 2월 4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연지(演之), 호는 간재(艮齋)이다.

생애[편집]

1525년(중종 20)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식년문과에 모두 급제했다.[2][3]

검열(檢閱) 등을 거쳐, 1531년(중종 26) 두 차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있을 때 세 번이나 서경(署經)을 받지 못했으므로 체직되었다.

이후 다시 여러 관직을 거쳐, 1538년(중종 33) 필선(弼善)에서 장령(掌令)으로 옮겼고, 이듬해 농사가 잘 안 된 곳을 알아보기 위해, 왕명으로 충청도(忠淸道)에 파견되었다.

이후 다시 병조참지(兵曹參知)와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1544년(중종 39)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차례로 임명되었고, 중종(中宗)이 인종(仁宗)에게 선위한 다음날 승하하자[4], 이듬해 최연이 중종의 애책(哀冊)을 지어 바쳤다.

같은 해 좌부승지(左副承旨)와 좌승지(左承旨)를 거쳤고[5],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보익공신(保翼功臣)의 교서(敎書)를 지었는데, 다음 날 본인도 추성보익공신(推誠保翼功臣)에 책록되었다가 다시 며칠 뒤 추성위사보익공신(推誠衛社保翼功臣)으로 공신호가 고쳐짐과 함께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했다.

1546년(명종 원년) 다시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으로 공신호가 고쳐짐과 함께 동원군(東原君)에 봉해졌다. 이 때 도승지 관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같은 해 노친을 봉양하기 위해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는데, 의정부(議政府)에서 계(啓)를 올려 그의 체직을 청하자 그대로 되었고, 특진관(特進官)을 거쳐 좌윤(左尹)으로 옮겼다.

이듬해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동원군에 봉해졌고, 한 달여 만에 판윤(判尹)에 임명되었다.

1548년(명종 3)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했다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고, 상호군(上護軍) 변명윤(邊明胤)과 함께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에 갔는데, 이듬해 돌아오는 길에 평양부(平壤府)에서 졸했다.[6]

사후에 관청에서 그의 장례를 치러 주었으며, 좌찬성(左贊成)·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으나, 1577년(선조 10) 봉작이 회수되고 증직이 삭제되었다.[1]

시호는 문양(文襄)이다.[7]

가족 관계[편집]

  • 증조 - 최연(崔沇)[7] : 사포(司圃), 증(贈) 좌승지(左承旨)
    • 조부 - 최자점(崔自霑, 1434년 ~ 1508년)[7] : 교리(校理), 증 예조참판(禮曹參判)·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 아버지 - 최세건(崔世楗)[3] : 비안현감(比安縣監), 증 이조판서(吏曹判書)·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강성군(江城君)
      • 어머니 - 김세량(金世良)의 딸[8]
        • 형 - 최형(崔浻)[7] : 진사(進士)
        • 동생 - 최담(崔澹)[7] : 교수(敎授)
        • 동생 - 최옥(崔沃)[7] : 부정(副正)
        • 동생 - 최호(崔浩, 1516년 ~ ?)[7] : 진사
        • 동생 - 최순(崔洵)[7] : 증 형조참판(刑曹參判)
        • 부인 - 진사 이흡(李翕)의 딸[8]
          • 장남 - 최운경(崔雲慶)[8]
          • 차남 - 최운광(崔雲廣)[8] : 주부(主簿)

각주[편집]

  1. 『최연 신도비명』
  2. 『가정 4년 을유 2월 21일 생원시방목』
  3. 『국조방목』
  4. 『중종실록』
  5. 『인종실록』
  6. 『명종실록』
  7. 『최자점 묘비』
  8. 『최연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