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흥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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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민씨(驪興 閔氏)
관향 경기도 여주시 여흥동
시조 민칭도(閔稱道)
주요 중시조 민영모(閔令謨)
주요 집성촌 경기도 여주시
강원도 삼척시
충청북도 충주시
경상남도 산청군
전라남도 해남군
황해도 벽성군
함경남도 단천시
주요 인물 민종유, 민지,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민여익, 민개, 원경왕후, 민무구, 민무질, 민무회, 민무휼, 민신, 민기, 민몽룡, 민광훈, 민희, 민정중, 민유중, 민주면, 민암, 민진장, 민진원, 민진후, 인현왕후, 민응수, 민백상, 민종현, 민기현, 민치구, 민치상, 민치록, 민승호, 민규호, 민겸호, 민상호, 민영규, 명성황후, 민영휘, 민영소, 민병기, 민병석, 민형식, 민영환, 순명효황후, 민영린, 민영찬, 민영은, 민충식, 민홍기, 민원식, 민규식, 민병성, 민병덕, 민필호, 민병삼, 민복기, 민관식, 민병두, 민병주, 민병렬, 민홍철, 민경욱, 민규동, 민경훈, 민병헌
인구(2015년) 159,522명

여흥 민씨(驪興 閔氏)는 경기도 여주시를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인종조에 동중서시랑평장사(同中書侍郞平章事)를 역임한 민영모(閔令謨)의 증조부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한다.

역사[편집]

민영모(閔令謨)가 1138년(인종 16) 문과에 급제하여 동중서시랑평장사(同中書侍郞平章事) 판리부사(判吏部事)와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하자 그의 증조부인 민칭도(閔稱道)를 시조로 한다.

민칭도(閔稱道)는 공자의 10제자 가운데 하나이자 노나라의 학자인 민자건(閔子騫)의 후손이며,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 외로 경기도 여주 향리에 있는 영월루 민굴(閔窟 마암굴)에서 나온 것이 시초라는 설도 있다. 역사 기록에 시조 민칭도(閔稱道) 이전에도 민씨가 등장하지만, 지금의 여흥 민씨와 같은 민씨인지는 불확실하며, 단지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한 민영모로부터 보첩이 상세하여 그의 증조부인 민칭도를 시조로 추대하여 삼은 것이다.

4세조 민영모(閔令謨)까지는 아들 하나씩만 전해며, 민영모로부터는 보첩이 자세하다. 민영모고려 인종 16년(113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태자태사에 올랐고, 민영모의 장남 민식(閔湜)은 고려 명종 때 과거 급제 후 형부상서를 지냈으며, 차남 민공규(閔公珪)는 판병부사와 태자소보에 지내며, 그 둘의 후손들이 다수의 고위 관료를 지속적으로 배출함으로써 고려 후기에 본격적으로 명문세족으로 성장하였다. 대체로 문반직을 역임하며 문반 사대부 가문으로서 위상을 갖추었으며, 왕실과 혼인이 가능한 재상지종 가문 중 하나로 꼽혔다.

가계별로는 민식의 가계가 민공규의 가계보다 관료배출수나 고위직 역임자의 수에서 우세했다. 조선 전기에는 각 가문의 분파가 확대되며 내부에서 가계가 번성하는 파와 그렇지 못한 파로 확연히 구별되었고, 일반적으로 여흥민씨를 거족이라고 칭할 때 정말로 거족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가문은 적어도 조선 전기에 한정해서 보면 구체적으로 민식의 계열에서는 증손 민지의 장자 민상정 가계와 차자 민상백 가계가, 민공규 계열에서는 증손 민종유의 장자 민적의 가계가 이에 해당된다. 특히 민적의 3자 민변-민제(문도공파)로 이어지는 가계는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조선 전기에서 여흥민씨 가문 가운데 가장 명문으로 여겨진다. 조선 전기 여흥민씨 가문은 이들 가계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과거급제자와 고위관료의 배출, 공신책봉, 왕실과의 통혼으로 외척으로서의 위상 등 권력의 핵심에 근접하는 요인이나 자손의 번성 등의 요건을 두루 갖춤으로서,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고려 후기 이래의 명문 거족가문으로서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왔다.

계열별로 보면, 과거급제자수는 민지의 계열이 민종유의 계열보다 압도적 다수를 배출하였으나, 3품 이상의 고위직자의 배출은 오히려 민종유 계열이 월등히 우세하였다. 이는 민종유 계열 인물들의 고위직 진출 요인은 과거 외의 요인들이 더 크게 작용하였음을 의미하고, 이 계열에서 배출된 공신책봉과 왕실혼의 핵심인 왕비배출과 관련된다. 통혼권에서도 조선 건국 이후 여흥민씨 가문 민지 계열은 왕실과 연결되며, 왕비의 외조부가로서 가문의 위상을 높여 갔고, 민종유 계열 또한 태종의 즉위로 인해 왕실의 외척가문으로서 가문의 위상이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왕비로 간택된 민지 계열 출신 외손녀들의 불운이 이어지면서, 또한 태종의 왕권강화책과 정치운영방식에 따른 외척세력 제거에 의해 여흥민씨 가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제의 네 아들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면서 조선 전기 여흥민씨 가문의 위세는 잠시 추락하였으나, 세종 중반 이후 완전히 복권되어 그후로도 지속적으로 왕비를 배출했다.[1]

민식(閔湜)의 증손 민지(閔漬)가 고려 원종 7년(1266년)에 문과에 올라 추성수정성보리공신이 되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관향을 여흥(驪興)으로 삼았다. 그 이전에는 황려 민씨(黃驪閔氏)라고 불리었는데, 황려(黃驪)는 여흥(驪興)의 옛 이름이다.

문과 급제자 242명, 2명의 왕비, 2명의 황후, 12명의 상신(相信), 종묘 배향 공신 6명을 배출하였다.

인물[편집]

역사적인 인물로는 민제, 민여익, 민신, 민유중, 원경왕후, 인현왕후, 명성황후, 순명효황후, 민영환, 민종식, 민긍호 등이 있다.

항렬자[편집]

대동 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