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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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6년? ~ 기원전 104년)는 중국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 현재의 허베이 성에 속하는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현재는 허베이 성 징 현)출신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 독립의 터전을 굳혔다. 무제(武帝)를 섬겨 총애를 받아 유교를 채용하고 교육 행정으로 공헌하였다. 이로써 뒷날 중국의 정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 동중서의 사상에 최대한 특징이 있는데 바로 재이설(災異說)이 있다.

생애[편집]

동중서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우고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賢良)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서 시무를 논하였는데 동중서도 현량의 자격으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는 그때 성인(聖人)은 천명(天命)을 받아서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敎化)에 의하여 백성의 본성(本性)을 갖게 하고, 제도에 의하여 백성의 정욕을 절제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에 있어서는 유학만을 정통적 학문으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으로 한나라의 정부는 법가종횡가의 말을 물리쳐 채택하지 않고 오경박사를 설치하는 등 유학의 정신이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 그는 무제에 대한 상주 후에 강도왕(江都王)의 상(相) 대신으로 전출되었는데 《춘추(春秋)》의 재이(災異)의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동의 고조묘(高祖廟)의 화재 등에 대한 말 때문에 일단 사형까지 선고받았으나, 조칙에 의하여 용서되고 이후는 재이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은 같이 《춘추》를 익히고 있었으나 학력이 동중서에 미치지 못함을 시기하여 다시 그를 교만하기로 이름나 있는 교서왕(膠西王) 유단의 국상(國相)으로 전출시켰다. 그는 얼마 후에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후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면, 정위(廷尉:사법장관)인 장탕(張湯)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해결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잔혹한 법률의 집행으로 유명한 장탕과 순수한 유학자인 동중서와의 결부는 일견 기묘하지만, 한대의 정치는 그와 같이 유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행해졌던 것이다.

저서[편집]

동중서의 최초로 집필한 저서는 기록에 따르면 동중서백이십삼편(董仲舒百二十三篇), 문거(聞舉),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清明), 죽림(竹林)등 여러 저서가 있고, 그리고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公羊董仲舒治獄十六篇)등이 있다.(동중서백이십삼편은 동중서가 상소등 여러 문서를 모은 것이다. 한서 동중서전에 수록된 현랑대책(賢良對策)은 아마도 동중서백이십삼편의 일부로 보인다.) 문거(聞舉), 옥배(玉杯), 번로(蕃露), 청명(清明), 죽림(竹林)등 여러 저서는 주로 춘추의 득과 실을 저술한 것이다.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은 춘추공양전의 글의 신념을 믿다가,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단죄를 하였던 재판기록 모음집이다.

《춘추번로》[편집]

현재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 책인 춘추 번로(春秋繁露)는 동중서의 저작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현존 춘추번로는 한나라 시대와 동시에 흩어졌던 동중서의 저술서를 남북조 시대에 누군가가 재편집한 설이 있다. 그 중에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 만은 춘추번로에는 수록되지 않았고. 공양동중서치옥십육편은 다른 학자들의 책 속에 인용과 주석으로 전해지고 있어서 나타난 설이다.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1. 이성무. 동중서(董仲舒)의 인의(仁義). 한국일보. 2011년 3월 6일.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