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김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광산 김씨(光山 金氏)
광산 김씨의 종문
광산 김씨의 종문
관향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시조 김흥광(金興光)
주요 집성촌 광주광역시 북구
전라남도 영암군·보성군·나주시·영광군
전라북도 남원시·군산시·고창군·무주군
주요 인물 김태현, 김한로, 김국광, 김겸광, 김구, 김계휘, 김덕령, 김장생, 김집, 인경왕후, 김익희, 김익겸, 김익훈, 김익경, 김만기, 김만중, 김일경, 김춘택, 김상복, 김영철, 김동한, 김수환, 김춘수, 김우중, 김용준, 김대중, 김완주, 김하중, 김희중, 김장수, 김용옥, 김황식, 김효석, 김병조, 김용익, 김재균, 김우남, 김선동, 김태년, 김용태, 김택수, 김석진, 김태형
인구(2015년) 926,316명

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광주광역시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편집]

《광산김씨 정유대동보(光山金氏丁酉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 셋째 아들이라고 하나,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어 선계(先系)를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다.[1]

일설에는 전라도 지역에 기반을 두었던 김씨 세력들이 연합한 본관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신라김씨선원보(新羅金氏璿源譜)》, 《계림대보(鷄林大譜)》, 《경주김씨보(慶州金氏譜)》 등에서 신무왕의 셋째 아들을 김흥광으로 기술한 것을 미루어 볼 때, 신무왕의 셋째 아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의 왕자로써 고려로 통일의 대세가 기울자 신라의 비운을 알고 경주를 떠나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 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흥광의 손자 김길(金吉)이 고려 개국공신이 되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면서, 김길(金吉)의 조부인 김흥광도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고 한다.

이후 조부 김흥광의 작호(爵號)이자 세거지(世居地)인 광산(光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후손들 중 평장사(平章事)가 8명이나 배출되자 사람들이 서일동(西一洞)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명칭이 지금까지도 남아 평장리(平章里)로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석학·거유(巨儒)등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文廟) 종사 현인을 2명이나 배출하였다. 그들이 양간공파(良簡公派) 대사간 김극뉴(金克忸) 후손들인 김장생·김집 부자이다. 김집은 효종 묘정(廟庭)에도 배향되었다. 이때부터 광산 김씨가 명족(名族)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전성기를 누렸으며, 김장생 후손 중에 대제학이 7명이나 배출되었다.

예로부터 충청도를 양반 고장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가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후손의 은진 송씨(恩津 宋氏) 집안과 더불어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후손의 연산 광산 김씨(光山 金氏) 집안이 예를 실천하고 법도를 지키며, 문묘(文廟) 종사 현인을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충청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집안을 명족인 국반(國班)으로 예우하며 「광김」(光金)이라 부른다.

이 밖에도 광산 김씨는 조선시대에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하고, 문과 급제자 263명을 배출하였다.[2]

분파[편집]

광산 김씨는 크게 '문정공파', '문숙공파', '양간공파', '낭장공파', '사온서직장공파' 5개파로 분류하며, 그 중 양간공파(良簡公派) 후손들이 70%로 제일 많고 그 후손들 중에서 많은 명현들이 배출되었다.

  • 문정공파(文正公派) - 15세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
  • 문숙공파(文肅公派) - 14세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
  • 양간공파(良簡公派) - 14세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
  • 낭장공파(郎將公派) - 14세 낭장공(郎將公) 김규(金珪)
  • 사온직장공파(司醞直長公派) - 17세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김영(金英)

집성촌[편집]

항렬자[편집]

  • 대동항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