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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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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택
金春澤
이름
백우(伯雨)
북헌(北軒)
시호 충문(忠文)
신상정보
출생일 1670년 2월 4일
출생지 조선 경기도 광주군 북방면 속달리
(현,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
사망일 1717년 4월 23일
사망지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산
국적 조선
성별 남성
본관 광산
부친 김진구
모친 한산이씨
형제자매 김조택
배우자 완산이씨
친인척 사돈 이이명
묘소 경기도 군포시 대야미동
학문 활동
스승 김만중
주요 저작 《주자시설(朱子是說)》,《설학강리(說學講理)》저술

김춘택(金春澤, 1670년 2월 4일 ~ 1717년 4월 23일)은 조선후기의 문신, 외척, 작가, 시인이다. 자(字)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본관은 광산이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이며, 종조부인 김만중의 문하생이다.[1]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인경왕후의 친정 조카로, 당색은 서인(西人)이었다가 노론이 되었다.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에 공을 세웠으나,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뒤 그로부터 정보를 빼돌렸고 이때문에 소론남인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장희재를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세자에게 위협을 가하려 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된다. 고종 때 복권 되어 증(贈)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로 추증되고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문이다.

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장희재의 처를 통해 남인 내부의 중요 정보를 획득하여 결국 환국에는 성공[2]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3] 훈신의 자손으로서 건공장군 충좌위대호군과 사직을 역임했고, 만년에는 양평군 노산에 은거했다. 종조부 김만중의 문집을 한자로 번역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경기도 광주 북방면(현 군포시) 출신.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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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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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군(廣州郡) 북방면(北方面) 속달리(速達里, 후일의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에서 태어났으며[4], 증조부는 김익겸이고, 할아버지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이며, 아버지는 인경왕후의 친정 오빠인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 이씨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는 그의 고모였다.

그가 태어날 당시 속달리는 경기도 광주군 북방면이었으나, 후일 시흥군 반월면에 편입됐다가 다시 군포시로 편입되어 속달동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종조부인 서포 김만중에게 문장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김수항의 탄복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과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일찍이 음서로 출사하여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3]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3] 김춘택은 인현왕후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소론김일경의 옥사 당시 영조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1689년 한중혁 (韓重爀) 등과 함께 인현왕후의 복위를 모의했다가 실패, 체포되었다.

남인 제거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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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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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기사환국으로 종조부 김만중과 가문의 당파인 서인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갑술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남인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갑술옥사 이후 1701년의 무고의 옥으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이 환국(換局)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이 주도했다. 서인들은 ‘장다리(장씨)는 한철이고 미나리(민씨)는 사철이다’ 같은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3] 노론 김만중(金萬重)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의 유현(劉炫)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喬氏)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정실로 맞이하고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사씨가 폐비 민씨, 교씨가 왕비 장씨를 뜻하는 것인데 훗날 실제로 이 소설의 내용대로 전개된다.[3]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서인들의 염원이었다.[3]

1695년(숙종 20년)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咸以完)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3]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숙종 20년 3월 29일에는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幼學) 김인(金寅)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 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金海成)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3]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3]

1695년 7월 집의 이삼석(李三碩)이 그의 행실이 불경하다는 이유로 아버지 김진구(金鎭龜)에 대한 처우를 달리하도록 상소하니, 그는 부친 대신 상소를 지어 변론하다.

1695년 정온(鄭蘊)이 그를 관직에 천거했으나, 남구만, 윤지완 등의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바로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첩보와 투옥, 정권탈환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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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재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남인에서 이를 일부 눈치챘다. 김춘택은 수감되어 형문을 당했고, 남인은 이 기회에 김춘택을 물고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 20년 4월 1일 밤 2고(二鼓:밤 9~11시)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備忘記)가 전세를 뒤집었다.[3]

“군부(君父)를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門外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覆逆) 장계(狀啓)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覆逆)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3]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更鼓)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傳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覆逆)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三司)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승지 전원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3] 또한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五衛將) 황재명(黃再命)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박세채를 좌의정으로, 윤지완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 목창명과 훈련대장 이의징을 각각 서인 서문중(徐文重)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 그 외에 호조판서 오시복도 이세화로 갈아치우면서 재정권과 경제권도 서인에게 주었으며 예조판서 권유도 윤지선으로 갈아치우면서 외교권·교육권·문화권·체육권·관광권·의료권·복지권·여성권도 서인에게 주었으며 형조판서 민취도도 윤지선으로 갈아치웠다가 박태상에게 다시 제수하면서 사법권과 법률권도 서인에게 주었다.[3] 서인이 정권을 장학하면서 의금부에 감금되었던 그는 석방된다.

이때 그는 장희재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환국 유도 과정에서 그의 내연관계 역시 의금부사헌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시중에 유포되었다. 무고의 옥 직후 그는 노론으로부터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지만, 노론 일부와 소론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인 정치활동을 행하였다, 부도덕한 계략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유배된 장희재남인 인사에게 편지를 써 김춘택이 자근아지(장희재의 처)를 간통하여 우리들을 죽일 꾀를 쓰는데, 만약 나를 죽이면 세자에게도 해로울 것이라 했는데, 편지 내용이 유출됐다.

비판과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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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론남인은 그가 장희재의 처첩과 간통한 것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졌고, 노론에서도 그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며 비난 여론이 일부 나타났고, 탄핵이 계속되었다. 1697년 7월 장령 이동암(李東馣), 양성규(梁聖揆), 정언 김홍정(金弘楨( 등이 그를 정배하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이 거절했다. 윤허하지 않다. 그해 8월, 대간들이 변지 정배(邊地 定配)를 청하였으나 숙종이 거절했다. 그해 10월 장령 윤홍리(尹弘离)가 참작하여 다시 정배할 것을 청했다. 결국 노론의 절대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탄핵을 받다가 1697년 10월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이에 지평 이사상(李師尙)이 더 먼곳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나 숙종이 거절했다. 1699년 석방되어 귀환했다.

1701년 무고의 옥에 대한 수사 중에 갑술환국 전에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간자로 삼았었다는 증언이 발고되어 다시 소론의 공격을 받고 전라북도 부안(扶安)으로 정배되었다가, 도로 한성부로 소환되어 심문받았다.

1701년 그는 김창집의 발언에 불만을 품고, 쪽지에 욕을 써서 보냈다 한다. 그가 적은 욕설 쪽지는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이에 김창협은 그의 숙부 김진규에게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5] 김창협이 김진규에게 보낸 편지는 김창협의 문집 농암집 18권에 수록됐다.

1706년(숙종 32) 4월 매부 송무원(宋婺源)이 최석정(崔錫鼎)을 대보단(大報壇) 제관(祭官)으로 차임하지 말도록 상소했다가 수찬 조태일(趙泰一)의 반론상소를 받고 유배되자, 그는 상소하여 대죄했으나, 곧 해남으로 유배됐다. 그해 7월, 자신에게 화(禍)가 닥칠 것이라 예상하고 모친(母親)의 행록(行錄)을 지어두었다. 그해 9월 17일 남인(南人)인 이잠이 상소를 올려 김춘택을 죽이지 않고 이이명을 귀양보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런지 알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 곧 친국이 벌어졌고 4일 만에 이잠은 형신을 받다가 고문치사로 죽었다.

1706년 8월 경상도 유생 임부(林溥)가 그를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임보는 윤순명(尹順命)으로부터 들었다며 그가 세자를 모해하려 했다고 상소, 체포되어 신문당했는데, 김춘택은 이에 대해 무고(誣告)라고 해명하였다. 임부는 곧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됐다.

이후 그가 장희재의 처와 내통한 것은 장희재를 죽이려는 목적때문만이 아니라 장차 세자(뒷날의 경종)를 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상소가 빗발쳤는데, 우의정 김창집의 강력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춘택은 제주도(濟州道) 제주목으로 무기 유배되었다. 1710년 제조 민진후숙종에게 감률 품지를 올려 육지로 이배되었다가 1711년 7월 무기한 정배명령을 받았다. 1712년에 방송되었다[6]. 한편 그의 일가는 정의현(旌義縣) 등에 정배되었다. 그러나 탄핵은 계속되었고 1711년 그는 재정배의 명을 받고 임피현(臨陂縣) 소안역(蘇安驛) 근처로 이배되고 3년형을 받았으며 곧 풀려났다. 1712년 숙종의 명으로 석방 명령이 내려지자 대간에서 여러번 반대하였다.

석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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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4년 10월 9일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고, 그해 12월 1일 석방되었다. 5대손 김영수(金永壽)가 쓴 그의 묘표에 의하면 그의 직책은 건공장군 충좌위대호군(建功將軍 忠佐衛大護軍)이라 한다. 그해 12월 21일] 사직(司直)에 임명되었으나 사직 임명만 나오고 오위도총부의 어느 위(衛)의 사직에 임명됐는지는 승정원일기 등에 기록이 없다. 경종대에 이르러 세자(경종)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다는 이유로 여러 번 탄핵을 당했고, 그의 형제, 조카는 여러 차례 논핵 끝에 전라도의 섬으로 분산, 유배당했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한다. 일설에는 숙빈 최씨와도 내연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이인좌의 난소론남인 인사들에게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무수리인 숙빈 최씨와 사통한 뒤 숙종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111 숙종때부터 영조 때까지도 그가 숙빈 최씨와 사통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악형을 금지한 영조였지만 영조 때 이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예외로 심한 형문을 가하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활동 등으로 정적은 물론 노론내부에서도 비난 받았지만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종조부 김만중의 언문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저서로 <북헌집>과 글씨 <호판 김진귀 표>가 있다. 만년에는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의 노산(蘆山)에 은거하여 저술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고종시대에 증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를 추증받았으며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1717년 4월 23일 병으로 사망했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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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이 전한다.《별사미인곡》은 작자가 제주도로 귀양 가 있을 때 지은 가사인데, 79행의 가사 작품으로 대화체이다. 그 시대에 한문 숙어가 거의 없는 순한글체로 언어 구사의 평이성을 살린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글씨로는 《호판김진귀표(戶判金鎭龜表)》가 있다.

그밖에 《주자시설(朱子是說)》, 《설학강리(說學講理)》 등을 남겼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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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그해 7월 27일 경기도 광주군 북부면 속달리(현 군포시 대야미동), 김진구 묘 아래 자좌(子坐) 언덕에 매장되었다가, 1753년 9월 3일 경기도 시흥군 반월면 대야미리(현 군포시 대야미동 산1-12), 김만기 묘소 근처 서쪽 언덕으로 이장되었다. 1725년(영조 1) 동생 병조좌랑 김조택(金祖澤)이 그와 형제 3명의 신원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대신에게 묻고 해결하겠다며 돌려보냈다. 그밖에 임인옥사에 연루된 김용택(金龍澤)은 서포 김만중(金萬重)의 손자로 그의 6촌이며 이이명(李頤命)의 사위이다. 또한 임인옥사 연루자 이천기(李天紀)는 그의 처남이었다.

1886년(고종 23) 12월 3일 의정부영의정 심순택(沈舜澤)의 상소하여 복권을 청하였다.

고 사인(故 士人) 김춘택(金春澤)은 선정(先正)의 후손으로서 경서(經書)에 대한 학문을 환히 꿰뚫고 있었으며 조예가 정밀하고 깊었으니, 그가 저술한 《주자시설(朱子是說)》 및 《설학강리(說學講理)》를 보면 그 연원과 학문의 경로가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문장이 풍부하고 의론이 정직하여 가난한 선비로 있으면서도 재상의 후보에 올랐습니다. 융성하던 숙종(肅宗) 때 외척으로서 왕실과 연결되어 의리를 주장하고 풍속과 교화를 수립했는데, 여러 간사한 자들의 모함에 빠져 세 번 옥에 갇히고 다섯 번 경상도의 바닷가에 귀양 갔습니다. 갑술년(1874)에 중전께서 다시 회복되실 때 남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몰래 도와주었고, 그 뛰어난 충성심과 바른 의리로 윤리와 기강을 부지하였으니, 백 대에 걸쳐 영원히 말할 만합니다.

그러한 학문이 있고 지조를 지니고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높이고 표창하는 데 빠진 것은 실로 조정의 흠사(欠事)이니, 특별히 정경(正卿) 벼슬을 추증(追贈)하는 동시에 시호(諡號)를 주고 체천(遞遷)하지 않는 은전을 베풀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故士人金春澤, 以先正肖孫, 經學淹貫, 造詣精深, 觀於其所著《朱子是說》及《說學講理》, 可知其淵源、門路之正矣。

且其文章贍茂, 議論正直, 處韋布而負宰輔望。 在肅廟盛際, 戚聯王室, 主張義理, 樹立風敎, 爲群壬擠陷, 三入牢狴, 五遷嶺海。 當甲戌坤維之復正也, 密贊於人所不知之中, 其卓忠、正義, 扶植倫綱, 足以永有辭於百世。 以若學問, 以若秉執, 尙闕崇奬, 誠朝家之欠典, 特贈正卿, 仍施節惠不祧之典, 恐好

- 고종실록23권, 1886년 고종 23년 조선 개국(開國) 495년 12월 4일 임술 1번째기사, " 영의정 심순택이 나주 등 고을의 조세를 감면할 것을 아뢰다"

고종이 이를 들어주어 복권되고 바로 1886년 12월 10일 증(贈) 이조판서성균관좨주(祭酒)에 추증되고 광녕군(光寧君)에 추봉되었으며, 부조추증지전을 받았다. 공신의 적장자의 예에 따라 2품직에 추증된 것이다. 1888년 11월 7일 충문(忠文)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묘표는 5대손 하정(荷亭) 김영수(金永壽)가 썼으며, 대한민국 시대에 새로 비석을 세웠으며 이종선의 글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2007년 기존 묘소에서 약 30m 옆으로 다시 이장하였으며, 근처에는 조부 김만기 등 일가의 묘역이 있다.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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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헌집》20권 7책
  •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
  • 《만필 (漫筆)》1권
  • 《주자시설 (朱子是說)》
  • 《설학강리 (說學講理)》

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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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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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 김진구(金鎭龜)
  • 어머니 : 한산 이씨
    • 동생 : 김보택(金普澤)
    • 동생 : 김운택(金雲澤)
    • 동생 : 김민택(金民澤)
    • 동생 : 김조택(金祖澤)
    • 매부 : 임징하(任徵夏)
    • 매부 : 송무원(宋婺源)
      • 외조카 : 송술상
      • 외조카 : 송학상
      • 외조카 : 송덕상
  • 서모 : 이름 미상
    • 서제 : 김제택(金濟澤)
  • 부인 : 완산 이씨(完山李氏), 참판 이사영(李思永)의 딸
    • 장남 : 김덕재(金德材, 1694년 ~ 1724년 4월)
      • 손자 : 김두추(金斗秋)
      • 손녀 : 이극광에 출가
      • 손녀 : 이홍지에 출가
    • 장녀 : 송정상에게 출가
    • 차녀 : 허우에게 출가
    • 삼녀 : 송진상에게 출가
    • 차남 : 김미재(金美材, ? ~ 1707년 5월)
  • 장인 : 이사영(李思永)
    • 처남 : 이천기(李天紀)

영조 김춘택 아들설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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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야사에서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근거는 영조의 외모가 숙종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7] 18세기 조선에서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소론남인 강경파 중에는 영조 김춘택의 아들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이인좌의 난 당시 형장에 끌려간 소론 인사들이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조의 면전에서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가 소론계 인사들을 심문할 때의 내용을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된다.

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시키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소문이었다.[8]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다"라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1728년 3월 15일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이인좌의 난은 보름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내 190여차례 괘서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다.[8] 숙빈 최씨의 영조를 낳기 전에 숙종과 숙빈 최씨와 첫째 아들을 낳은 영수는 생후 2개월 만에 요절하였다. 김춘택의 아들이 첫째 아들인 영수여야 하는데 차남인 영조는 김춘택의 아들일 가능성은 없다.

김춘택이 등장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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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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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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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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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헌집
  • 시문 10 책
  • 만필(漫筆) 1책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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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사미인곡 (別思美人曲)》
  • 《호판김진귀표 (戶判金鎭龜表)》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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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포만필과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자이다.
  2. 인현왕후의 복위와 노론의 집권 확정에 결정적인 공을 세움
  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미인계로 떴다 미인계로 하루아침에 떼죽음 보관됨 2009-09-13 - 웨이백 머신 중앙일보 2009년 9월 9일자
  4. 국역 승정원일기 고종 26년 기축(1889) 8월 23일(병신) 맑음 11번째 기사, "충문공 김춘택의 연시를 9월 1일로 정하여 거행한다는 이조의 계"
  5. 농암문집 제18권, 서(書), 김달보(金達甫)에게 보냄
  6. 미인계로 떴다 미인계로 하루아침에 떼죽음 보관됨 2009-09-13 - 웨이백 머신 중앙일보 2009년 9월 9일자
  7. <동이>는 진짜 숙종의 아이를 낳았을까? 프레시안 2010.05.05
  8. 1 2 동이 비밀병기 심운택, 숙빈최씨의 애인? 미디어스 201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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