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안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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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안공주
지위
공주
신상정보
출생일 1636년
출생지 조선
사망일 1697년 음력 12월 22일
왕조 조선 왕조
부친 효종
모친 인선왕후 덕수 장씨
배우자 익평위 홍득기(洪得箕)
자녀 1남
홍치상(洪致祥)

숙안공주(淑安公主, 1636년 ~ 1697년 음력 12월 22일)는 조선의 공주로 제17대 왕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 사이의 차녀이다.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적, 언니인 숙신공주가 청나라로 가던 도중 3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사실상 장녀로서 여겨졌다. 18대 왕인 현종의 누나이다.

생애[편집]

학문[편집]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효경, 내훈, 소학(小學)에 능통하였다고 한다.[1]

혼인[편집]

인조 23년(1645년), 소현세자가 급서하여 이해 윤6월에 아버지 효종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다음 해인 인조 24년(1646년에 왕세자의 적녀에게 내려지는 작위인 군주(郡主)로 봉작되어 숙안군주(淑安郡主)가 되었다.[2] 1648년에 부마 간택령이 내려져[3] 다음 해인 1649년 4월에 현감 홍중보의 아들인 홍득기(洪得箕)가 부위(副尉: 군주의 남편에게 처음 내리는 작위)로 간택되었다.[4] 그러나 다음달인 5월 8일에 인조가 사망하여 혼례가 미루어졌다.

아버지 효종이 왕으로 즉위하여 효종 즉위년(1649년) 6월 9일에 왕의 적녀에게 내리는 작위인 공주로 책봉되어 숙안공주가 되었고, 앞서 익평부위로 책봉된 정혼자 홍득기는 익평위(益平尉)로 진봉되었다.[5] 인조의 삼년상을 마치기 전까지 혼례가 마땅히 미루어져야 했지만 효종 1년(1650년) 조선의 공주를 비(妃)로 맞이하겠다는 청의 섭정왕 도르곤의 구혼이 있자 혼기의 미혼인 공주가 없다고 거짓말을 한 효종1651년 1월에 간략한 절차로 숙안공주와 홍득기를 은밀히 혼례토록 했다.[6] 그녀를 대신해 종실 금림군의 딸이 효종의 양녀가 되어 의순공주의 작위를 받고 도르곤의 비(妃)가 되었다.[7]

현종14년(1673년) 6월 29일, 익평위였던 남편 홍득기가 특별히 봉군되어 익평군이 되었다.[8]

불행[편집]

1673년 11월 27일에는 남편 홍득기가 39세의 나이로 급작스레 사망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1689년에 발발한 기사환국 후 선왕의 딸이자 현왕의 고모인 어머니의 뒷배를 믿고 악행[9] 을 거듭해온 아들 홍치상(洪致祥)이 교형(絞刑)에 처해졌다.[10]

죽음[편집]

1697년 음력 12월 22일에 훙서하였다.[11] 조카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그 상제를 동생인 숙휘공주의 것을 따르게 하였고 다음날인 음력 12월 23일 선왕대의 관례에 따라 친히 숙안공주의 초상에 나아가 임곡하였다.[12] 숙안공주의 시신은 앞서 사망한 남편 홍득기의 무덤에 같이 안장되었다. 두 사람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전리 산 24에 위치하고 있다.

행적[편집]

효종의 딸, 현종의 큰누나, 숙종의 고모라는 입장을 앞세워 횡포를 부리고 백성의 땅과 세금을 갈취하여 세 왕의 노골적인 비호에도 불구하고 탄핵과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정사에 간여하여 조카인 숙종에게 정승 임명에 대한 불만[13] 을 토로했고, 기사환국 후엔 아들 홍치상을 잃은 원한을 갚기 위해 서인에게 자금을 대어주고 환국과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1694년 3월 26일 체포된 한중혁, 이시도 등의 자백으로 발각되어 극형[14] 을 피하기 어려웠지만 다음날 숙종이 일으킨 갑술환국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15]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궁노(宮奴)가 우금(牛禁) 을 범해 놓고도 이를 단속한 관리를 마구 때렸는가 하면, 또 궁노를 이끌고 본조 참의 이척연(李惕然)의 집에 가서 난동을 부렸으니, 이는 예나 지금이나 없던 변고입니다. 궁노를 엄하게 다스려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풍조를 징계하소서.”

— 효종실록 8권, 3년(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월 12일(을유) 4번째기사

익평(益平)[16] 의 궁노(宮奴)는 완산(完山) 등에 전장(田庄)을 설치하고 청평(靑平)[17] 의 궁노는 호내(湖內) 등에 전장을 설치하였다 합니다. 나라안의 작은 전지라도 어찌 임금의 땅이 아니겠습니까. 산택(山澤)이 개간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으나, 개간되었다면 백성이 그 가운데에서 대대로 갈아먹되 공전(公田) 사전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입안(立案)하여 준 내수사 소속의 기름진 전토가 분명히 부족한 것이 아닌데, 무슨 까닭으로 불분명한 민전을 침탈하여 그 근방에 사는 신구(新舊) 백성이 집을 헐고 유리(流離:거처를 찾아 떠돌아다님)하게 합니까.

—  효종실록 9권, 3년(1652 임진 / 청 순치(順治) 9년) 11월 13일(신사) 2번째기사

숙정(淑靜)·숙안(淑安) 두 공주가 계하(啓下)된 공사(公事)라는 핑계를 대고 신천(信川)·재령(載寧)·평산(平山) 등지의 민전(民田)을 불법으로 탈취했는데, 평산 부사 윤겸(尹㻩)이 공갈 협박하는 말에 겁먹은 나머지 아첨할 목적으로 꾀를 내어 허다한 민전을 모조리 궁가의 소속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  현종실록 5권, 3년(1662 임인 / 청 강희(康熙) 1년) 7월 13일(갑신) 2번째기사

숙안 공주(淑安公主)의 집을 지금 바야흐로 수선을 하고 있는데, 1백 명에 가까운 공장(工匠)들과 들어가는 많은 물건들이 이미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 현종개수실록 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0월 18일(임인) 1번째기사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숙안 공주방(淑安公主房)의 김해(金海) 땅 언답(堰畓)은 절수(折受)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본 고을이 간사한 백성들의 무소(誣訴)함을 듣고 믿어서 면세(免稅)된 전답(田畓)을 마음대로 빼앗아 주는데 매우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수본(手本)을 인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상언(上言)을 인하기도 하지만, 그들 다 시행하지 말고 그대로 해궁(該宮)에 소속되게 한 것은 두 차례나 결정하여 준 것인데, 본읍(本邑)의 수령(守令)은 전후(前後)의 판부(判付)를 무시하고 끝내 이를 빼앗아 김연상(金連上) 등에게 주었다 하니, 이 일은 매우 놀랍다. 당해(當該)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먼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하였다.

— 숙종실록 16권, 11년(1685 을축 / 청 강희(康熙) 24년) 8월 21일(기유) 2번째기사

“김해(金海)는 비안 공주방(比安公主房:숙안공주)에서 절수(折受)한 곳인데 궁차(宮差)가 세력을 빙자하여 민전(民田)을 침탈(侵奪)하고 있습니다. 이를 본도(本道)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고 궁차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대관(臺官)들이 들은 것은 간사한 백성들의 무소(誣訴)에서 나온 것 같다.”하고는 윤허하지 않았다.

— 숙종 16권, 11년(1685 을축 / 청 강희(康熙) 24년) 12월 18일(갑진) 2번째기사

전교(傳敎)하기를,“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니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궁인(宮人)[18] 들은 왕족(王族)들과 체결(締結)하고, 왕족들은 사대부(士大夫)들과 결탁하여 갖가지로 아첨하고 없는 사실을 날조(捏造)하며 음흉한 소문을 지어내어 군주를 모함하는 습관은 진실로 매우 통탄할 일이다. 지금부터 이와 같은 일은 드러나는 대로 효시(梟示)하는 것을 영갑(令甲: 법)으로 삼도록 하라.”하였다.【임금의 전교 가운데 왕족(王族)은 대체로 제공주(諸公主)들을 가리킨 것으로서, 익평 공주(益平公主: 숙안공주)의 집이 더욱 의심을 받았다. 나중에 대신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환수(還收)하였다.】

— 숙종실록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4일(갑자) 4번째기사

처음에 숙안 공주(淑安公主) 궁방(宮房)의 차인(差人) 허무일(許武一)이 유숙원(劉淑媛)[19] 궁방의 도장(導掌) 박세시(朴世始)와 부동(符同)하여 단양(丹陽)으로 내려가서 전장(田庄)의 세금을 거둔다고 일컬으며, 곤궁한 백성들을 침학하여 자신들의 사욕을 충족시켰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김성적(金成迪)이 이런 상황을 갖추어 아뢰자, 묘당(廟堂)에서 다시 이들을 통렬히 징계하도록 복계(覆啓)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이 일이 잡범(雜犯)도 아울러 사유(赦宥)한다는 속에 들어 있다는 것으로써 특별히 사면시켰다. 이때 궁장(宮庄)에 관계된 모든 일에 대해 임금이 한결같이 감싸 주었으므로, 미세한 차인들까지도 비호를 받기에 이르니, 식자(識者)들이 우려하여 마지 않았다.

— 숙종 33권, 25년(1699 기묘 / 청 강희(康熙) 38년) 3월 16일(을유) 4번째기사

“김해(金海) 경내에 숙안 공주방(淑安公主房)과 왕자궁(王子宮)[20] 의 전지(田地)가 있어 예부터 다른 예(例)에 의하여 세(稅)를 거두었는데, 임신년 부터 도장(導掌) 인 자가 매년 추수 때면 반 이상 그 소출(所出)을 타취(打取)하고 왕자궁의 도장은 더 심합니다. 작년에 더 징수하였고 금년에 또 더 징수하여 그 수량이 거의 갑절이 되는데, 바다 구석의 빈궁한 백성이 호소할 곳이 없어서 서울에 와서 길에서 슬피 부르짖고 있으니, 청컨대, 본도(本道)로 하여금 각별히 분명하게 조사하여 전례에 의해 세(稅)를 거두게 하여, 먼 지방 쇠잔한 백성을 보호하여 직업을 버리고 이산(離散)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 숙종실록 38권, 29년(1703 계미 / 청 강희(康熙) 42년) 2월 19일(갑오) 2번째기사

가족 관계[편집]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조부 : 제16대 인조대왕(仁祖大王, 1595~1649, 재위 1623~1649)
  • 조모 : 인렬왕후 청주 한씨(仁烈王后 淸州 韓氏, 1594~1636)
    • 아버지 : 제17대 효종대왕(孝宗大王, 1619~1659, 재위 : 1649~1659)
  • 외조부 : 우의정 신풍부원군 문충공 장유(右議政 新豊府院君 文忠公 張維, 1587∼1638)
  • 외조모 : 영가부부인 안동 김씨(永嘉府夫人 安東 金氏)

시가 남양 홍씨(南陽 洪氏)

숙안공주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각주[편집]

  1. 숙안공주묘 안내판 참조
  2. 인조실록 24년(1646 병술 / 청 순치(順治) 3년) 12월 25일(정유) 3번째기사
  3. 인조실록 26년(1648 무자 / 청 순치(順治) 5년) 9월 20일(신사) 1번째기사
  4. 인조실록 27년(1649 기축 / 청 순치(順治) 6년) 4월 9일(정유) 3번째기사
  5. 효종실록 즉위년(1649 기축 / 청 순치(順治) 6년) 6월 9일(정유) 4번째기사
  6. 효종실록 1년(1650 경인 / 청 순치(順治) 7년) 11월 5일(을묘) 2번째기사
  7. 효종실록 1년(1650 경인 / 청 순치(順治) 7년) 3월 25일(무인) 2번째기사
  8. 승정원일기 현종 14년 6월 29일 (정묘) 원본234책/탈초본12책 (14/19)
  9. 노소론을 번갈아 자칭해 분란을 일으킨 것, 처족 이사명과 뜻을 함께하여 내분을 일으키고 숙종의 신임을 받던 종실 동평군숙종의 시역을 꾀하는 대역범으로 무고하려고 계획한 것, 무고죄가 드러나자 벌을 피하기 위해 아무 것도 모르는 김석연(숙종의 외숙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한 것, 대왕대비(장렬왕후)에게 한자 서신으로 정치를 논하며 조롱한 것, 1687년 처질녀인 영빈 김씨(당시 귀인)과 내통하여 조사석우의정으로 발탁된 것이 숙종의 총애를 받던 희빈 장씨(당시 소의)의 어머니과 친밀한 관계라 청탁을 넣은 덕분이란 유언비어를 만들어 유포한 것,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죄가 드러나자 숙명공주에게 뒤집어 씌우려고 한 것 등을 말한다. 갑술환국숙종은 공주를 위로해야 한다는 노론의 주청으로 홍치상을 특별히 복관해주었는데, 무고의 옥이 발생한 후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감정이 나쁜 것을 기회삼아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가 격쟁을 울려 아비의 무죄와 억울함 죽음을 공표해달라고 하자 숙종이 격분하여 홍치상의 복관을 취소해 다시 폐서인으로 강등하고 이후에도 거듭해 홍치상을 영구히 복관치 말라는 명을 내렸다. 홍치상영조 시대에 복관되었지만, 정조는 왕실 내척의 폐단으로 홍치상을 예로 삼기도 했다.-출처:조선왕조실록(숙종,숙보,영조,정조)
  10. 숙종실록 20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4월 22일(무자) 1번째기사
  11. 숙종실록 31권, 23년(1697 정축 / 청 강희(康熙) 36년) 12월 22일(무진) 4번째기사
  12. 숙종실록 31권, 23년(1697 정축 / 청 강희(康熙) 36년) 12월 23일(기사) 1번째기사
  13. 숙종이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이단하가 추천한 후보 중에서 우의정을 뽑지 않고 이조판서 조사석우의정으로 임명한 사건을 말한다. 김수항이단하가 추천한 후보들은 숙안공주 자매, 여양부원군 민유중(인현왕후의 아버지), 김수항(영빈 김씨의 종조부), 김만중(인경왕후의 숙부)의 친인척이었다. 또한,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숙명공주의 아들 심정보영빈 김씨의 이모부이기도 하기에 숙종실록과 인현왕후전에 언급된 대로 숙안공주와 숙명공주기사환국이 발발하기 전부터 희빈 장씨를 욕하고 궁에서 쫓아낼 것을 종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4. 갑술환국 발발 후 숙종민암 등의 죄를 논하며 당시 남인이 세 공주(숙안, 숙명, 숙휘)를 반드시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 승정원일기 숙종 20년 윤5월 29일 (을미) 원본358책/탈초본19책 (17/17)
  15. 숙종실록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2번째기사
  16. 익평은 숙안공주의 남편 익평위 홍득기의 작호이다. 출가한 왕녀의 죄를 논할 때 왕녀의 작호로 거론할 때도 있지만 친 혈육인 왕의 입장을 고려해 남편의 작호로 대신하거나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이나 궁호(혹은 당호)로 대신하기도 했고, 주가(主家)나 궁가(宮家)를 쓰기도 했다.
  17. 숙명공주의 남편 청평위 심익현의 작호이다.
  18. 인현왕후영빈 김씨를 가리킨다. 이날 이 전교가 있기 직전에 인현왕후의 인척인 한성우김창협·김만길·송주석 등에 이어 이징명의 상소를 각색하고 '과거 송 인종이 새로이 여인을 얻고 기뻐하였다가, 현명한 대신의 충언을 받고 부끄러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회개하며 즉시 여인을 내쳤던 것을 본으로 삼아 나흘 전 후궁으로 삼은 희빈 장씨의 숙원 교지를 취소하고 당장 폐출할 것'을 상소했다. 이에 이제껏 장씨에 관한 모든 공격을 무시로만 일관했던 숙종이 기어이 분노를 터트리며 한성우에게 벌을 내린 것을 비롯, 앞서 이징명의 상소를 각색하여 희빈 장씨의 출궁을 종용한 대신들(전원 인현왕후영빈 김씨의 일족들)에게 엄중히 경고를 함과 동시에 그간 입궁하여 장씨의 출궁을 종용해왔던 숙안공주(영빈 김씨의 이모부인 홍치상의 어머니)·숙명공주(영빈 김씨의 이모부인 심정보의 어머니)·숙휘공주(인현왕후영빈 김씨의 인척)·명안공주(인현왕후영빈 김씨의 인척)에게도 경고를 내린 것이다.
  19. 숙종의 후궁인 소의 유씨를 말한다.
  20.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를 말한다.
  21. 이정영의 차녀가 영빈 김씨의 어머니(김창국의 처)이다. 이정영의 오녀는 숙명공주의 아들인 심정보와 혼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