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노론
老論
종교 유교(성리학)
당직자
영수 우암 송시열
문곡 김수항
수암 권상하
노론사대신(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
청사 김재로
역사
창당 1680년(경신환국)
해산 1727년(정미환국)
분당 이전
소속 정당
산당, 한당
후계정당 * 청명당

노론(老論)은 서인과 같이 성리학적 명분론을 신봉하였지만 숙종 때 서인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붕당으로 알려져 있다. 서인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노론,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소론이 되었으며 숙종 이후 조선의 주요 집권 세력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하여 소론과는 대립하는 파벌이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당파를 이루었다. 1694년 남인을 제거하고, 1728년 소론을 제거한 후, 김조순, 조만영 일가의 세도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72년간 정권의 중심을 형성하였다.[1]

형성[편집]

노론의 초대 영수 송시열

경신환국에서 남인은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 왕실 사용의 기름칠한 천막)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柳赫然)에서 서인계의 김만기(金萬基)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申汝哲), 수어사에는 김익훈(金益勳)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을 그대로 고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을 멀리하는 숙종의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뒤,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있게 되었다. 즉, 허적의 서자 견(堅)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근자에는 그들에 의하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2]

김조순
(시파 계통의 노론)

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면서 싹텄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1680년(숙종 6년)의 경신환국 때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도 적소(謫所)에서 돌아와, 영중추부사로 입조하게 되었는데 서인 중 소장 측에서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는 자가 모여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을 놓고 소장파가 그의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김익훈을 신구(伸救)하려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자, 그의 문인 윤증과의 불화까지 겹쳐 소장파는 소론을, 또한 노장파는 노론을 형성하였다.

숙종 대에는 본래 서인과 남인이 정쟁의 양대 축이었으나, 장희빈의 몰락을 계기로 남인은 몰락했다. 이후 정국은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면서 이같은 대립이 격화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여 노론 4대신이 처형되었으나, 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이번에는 소론 4대신이 제거되었다. 이에 소론은 남인과 손을 잡고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밀려나게 되었다.

노론의 우위 속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소론 일부도 등용했고,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완화되면서 노론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차차 퇴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을 하고,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3]

그러나 학자에 따라 노론 벽파가 이후 개화파를 형성하고, 남인, 노론 시파 등은 위정척사파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붕당의 발단[편집]

조선 후기에 서인으로부터 나누어진 당파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80년(숙종 6) 남인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 경신환국이라고도 함)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이 강·온 양 파로 분리되면서 발생했다. 즉, 1683년 노장파인 김익훈(金益勳) 등이 남인을 강력히 탄압하자 소장층인 한태동(韓泰東)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었다.

소론이 남인의 탄압에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은 만약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면 보복이 있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한때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절교하고 난 이후 양자 사이의 개인적 감정과 정치적·학문적 갈등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초기 노론의 영도자는 김익훈 · 송시열 등이었으며, 소론의 영도자는 조지겸(趙持謙) · 윤증 등이었다. 이후 당쟁은 주로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4]

노론의 유래[편집]

조선 숙종 6년(1680)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이후 남인(南人)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西人)이 강, 온 양파로 분리되면서, 강경 입장을 취한 노장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파였기에 세상에서는 조선 붕당정치의 한 당파로 이들을 가리켜 강경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주로 노장층이었으므로 노론, 온건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소장층이었으므로 소론이라고 하였다.

사상적 기반[편집]

유교와 특히 성리학적 대의사상을 당의 강령으로 삼았다. 이는 송시열, 김창집, 김종수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노론 내 벽파와 시파에게도 공통적으로 전하는 전승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조선최대의 당쟁가로 알려진 송시열은 83세의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의 사약단죄가 되었으나, 죽은 후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고, 공자 맹자 주자처럼 송자로 불리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학자들은 근본적인 사회변화가 요구됐던 당시 시대 상황을 무시한채 소중화(小中華)라는 명분론을 내세우고,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서인·노론이라는 당의 이익만을 중시했던 인물이라는 것이고 결국 명분과 당익만을 내세워 '그들의 나라'를 지키는 데 급급했던 송시열과 집권 노론세력이 이후 조선 전체의 비극을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던 한 인물과 송시열에 얽힌 당시 정치 상황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하나의 역사적 반성에서 사상적 기반이 된 송시열에 대한 평가와 붕당정치의 폐해를 점검하고 시대 변화를 거부했던, 보수적인 정치가의 모습의 송시열에 대한 후한 편견으로 조선 후기에 이미 그 기능을 다한 주자학을 정치에 잘못 적용한 시대착오였다고 반추한다.[5]

몰락[편집]

세도 정치 이후 노론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다. 순조 때 외할아버지 김조순이 사실상 대리청정을 하자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은 한편, 반면 노론은 안동 김씨를 당할 만큼의 힘이 없었다. 결국 세도 정치가 시행되어 노론은 몰락하였다.

계보[편집]

  • 서인
    • 노론
      • 시파 -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
      • 벽파 - 사도세자의 죽음을 옹호
    • 소론

기타[편집]

1930년대 까지만 해도 노론계 인사들의 후손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고, 윤치호등은 노론계 인사들은 정약용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어젯밤 추도식을 지낸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이다. ...(이하 중략)...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상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윤치호일기, 1935년 7월 17일자 [5]

노론은 정약용이 죽은지 130년이 지난 뒤인 1930년대 까지도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1945년 8월 광복과 동시에 남아있던 노론들이 해체될때까지 그 적개심은 계속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김조순, 조만영 일가 역시 노론 내 시파로, 다른 노론들을 제거하고 일인 집권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신환국(庚申換局),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종탁 기자 (2009년 7월 7일). “동북아재단이 왜 동북공정 논리를 옹호하나?”. 위클리경향. 
  4. 《한국고중세사사전》, 노론·소론, 가람기획(2007년)
  5.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 (시공사, 2009) 318페이지

참고 서적[편집]

  • 이주한 (2011년 9월 30일).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서울: 역사의아침. ISBN 9788993119343. 
  • 이덕일 (2000년 9월 5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서울: 김영사. ISBN 9788934905028. 
  •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이덕일 저, (석필, 1997년)
  • 《한권으로 읽는 매천야록》, 황현 저, 나중헌 역, 북랩(2012년)
  • 《조선시대 당쟁사》, 이성무(학술기관단체인) 저, 아름다운날(2007년)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