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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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景宗
지위
조선의 왕세자
재위 1690년 6월 16일 ~ 1720년 6월 12일 (음력)
전임 왕세자 순 (숙종)
후임 왕세자 선 (사도세자)
조선의 제20대 국왕
재위 1720년 6월 13일 ~ 1724년 8월 25일 (음력)
즉위식 경희궁 숭정문
전임 숙종
후임 영조
이름
이윤(李昀)
묘호 경종(景宗)
시호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능호 의릉(懿陵)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32길 146-20
신상정보
출생일 1688년 10월 28일(1688-10-28) (음력)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취선당
사망일 1724년 8월 25일(1724-08-25)(35세) (음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취전
부친 숙종
모친 희빈 장씨
배우자 단의왕후 심씨 · 선의왕후 어씨
자녀 없음

경종(景宗, 1688년 11월 20일(음력 10월 28일) ~ 1724년 10월 11일(음력 8월 25일))은 조선의 제20대 국왕(재위: 1720년 7월 17일(음력 6월 13일) ~ 1724년 10월 11일(음력 8월 25일))이다.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이며 영조의 이복형이다.

생애[편집]

탄생과 세자 책봉[편집]

1688년(숙종 14년) 10월 28일, 창경궁 취선당에서 숙종(肅宗)과 당시 정2품 소의(昭儀)였던 희빈 장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숙종은 총애하던 장씨에게서 아들을 얻자, 후사를 근심하던 차에 매우 기뻐하였다.[1]

1689년(숙종 15년), 숙종은 태어난지 100일도 안된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하고 명호를 내리면서, 생모인 소의 장씨도 내명부 정1품 희빈(禧嬪)에 봉하였다.

기사환국[편집]

이때 원자의 명호를 내리는 일과 희빈 장씨의 처우를 두고 정쟁이 발생하였는데, 서인인현왕후가 아직 젊고 왕자를 생산할 수 있는데 태어난지 얼마 안된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는 일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하였다.

이에 숙종은 환국을 일으켜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서인을 대거 실각시키고 남인을 기용하였다. 서인 산림의 영수이자 효종, 현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비롯해 김수항 등이 사사되고 서인 정권이 붕괴하였다. 또한 당시 왕비였던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가 폐위되고[2], 어머니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3]

1690년(숙종 17년) 6월 16일, 왕세자에 책봉되었다.[4] 1696년(숙종 23년), 심호(沈浩)의 딸 심씨(단의왕후)와 혼인하였다.[5]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편집]

1694년(숙종 20년), 우의정 민암숙종에게 서인(노론소론)이 거짓 풍문을 지어내 인심을 흉흉하게 하고 간악한 짓을 꾸미려 한다는 함이완의 밀고를 받았음을 전하며 서인의 처벌을 청하였다. 서인에서는 인현왕후의 복위 운동을 꾀하며 민암과 장희재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역고변을 하였는데, 숙종은 갑작스럽게 환국을 일으켜 남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서인을 재등용하면서 남인은 이후 정계에서 소멸하였다.

이 과정에서 폐위된 인현왕후가 복위하고 희빈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서 내려와 빈(嬪)으로 강등되었는데, 희빈의 처우를 두고 서인 내의 노론과 소론이 갈등하였다. 희빈 장씨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론은 이후 왕세자(경종)를 지지하였고, 인현왕후의 복위를 지지하는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영조)을 지지하게 된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1701년(숙종 27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희빈 장씨와 그 측근들이 인현왕후를 저주하고 모해하였다는 노론숙빈 최씨의 고변이 있었고, 숙종은 관련자들을 국문하여 대대적으로 처벌하였으며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여 사사하였다.[6]

험난한 즉위 과정[편집]

노론의 영수인 이이명의 초상화로, 이이명은 신임사화 때 처형되었다.

어머니 희빈 장씨노론 세력에 의해 사사되면서, 경종은 희빈 장씨의 정적인 노론의 압박속에 불안정한 세자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또한 후사도 두지 못했으므로 말년의 숙종은 노론의 영수인 좌의정 이이명과 독대(獨對, 왕이 사관을 물리고 신하와 단둘이서 만남)하여 세자의 후사에 대한 언급을 하였으나, 사관이 입시하지 못하게 한 채 이루어졌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7] (정유독대)

숙종이이명의 독대를 두고 사관은 물론 유생들이 비판하였고 세자의 지지세력인 소론 또한 이이명과 숙종의 처사를 비판하였다. 와병 중이던 소론의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은 82세의 노구였으나 관을 들고 상경해 군신간의 독대를 격렬하게 비판했다.[8]

독대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국(相國)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대신(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지위로서
임금의 사신(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

숙종이이명과의 독대를 비난하는 대신들에게 변명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 자신의 병이 심해짐을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다.[9] 숙종 말년의 정쟁은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세력으로 양분되어 대립하였는데, 숙종이 죽고 경종이 즉위하면서 노론과 연잉군은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1718년(숙종 44년), 세자빈 심씨가 죽자 단의빈(端懿嬪)의 시호를 내리고 즉위 후에 단의왕후(端懿王后)로 추존하였다. 같은 해 어유구(魚有龜)의 딸 어씨(魚氏, 선의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10]

치세[편집]

1720년(경종 즉위년) 6월 13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숙종의 병신처분 이후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이 정국을 장악한 가운데 경종이 즉위하였고, 왕권은 불안정하고 미약하였다.

평소 말수가 적고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지 못하던 경종에게 노론은 노골적으로 불충(不忠)한 모습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사례들이 희빈 장씨의 추숭 문제와,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 및 대리청정 주청, 경종이 후사를 두지 못함을 운운한 '위약' 언급 사건이다.

소론 강경파는 이런 노론에 맞서며 옥사를 일으켜 신임사화가 발생하였고, 이이명을 비롯한 노론의 4대신이 처형당하고 노론이 실각하였으나 경종이 급서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은 복권하였다.

희빈 장씨 추숭문제[편집]

1720년(경종 즉위년) 7월, 소론을 중심으로 희빈 장씨의 추숭 문제가 논의되었는데, 유학 조중우가 상소를 올려 희빈 장씨의 명호를 정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11]

 

유학(幼學) 조중우(趙重遇)가 상소하기를,  

"제왕(帝王)의 덕의(德義)는 효행에 지나침이 없고, 추보(追報)의 도리는 예경(禮經)의 밝은 훈계이며,
어미가 아들로써 존귀하게 되는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종사(宗社)와 신인(神人)의 주(主)가 되었는데,
낳아 주신 어버이는 오히려 명호(名號)가 없이 적막한 마을에 사우(祠宇)는 소조(蕭條)하고
한 줌의 무덤에는 풀만 황량합니다.
문무 조신(文武朝臣)의 2품관도 오히려 증직(贈職)의 영전(榮典)이 있는데,
전하께서는 당당한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써 유독 낳아서 길러 준 어버이에게는 작호를 더함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높이고 지극한 정리(情理)를 펴겠습니까?
신이 기억하기로는 지난날 선대왕(숙종)께서 전하의 정리를 통촉하여 특히 천장(遷葬)을 허락하셨고,
전하의 뜻을 살피셔서 다시 망곡(望哭)하게 했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선대왕의 척강(陟降)하는 영혼이 오늘날의 거조에 대하여 반드시 어긋났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선원보략(璿源譜略)》 1책을 보니, 전후의 찬집에 있어 모두 품의하여 예재(睿裁)하였는데,
희빈(禧嬪)’ 두 글자를 일찍이 삭제하지 않았으니, 선대왕의 은밀한 뜻이 어찌 그 사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특히 예관에게 명을 내려 빨리 명호(名號)를 정하여
지극한 정리를 펴고 나라의 체통을 높이소서."
— 《경종실록》 1권,
경종 즉위년(1720년 7월 21일) (병술)

숙종희빈 장씨의 작호를 거두지 않고 천장과 망곡례를 허가했던 것은 경종이 즉위한 후에 희빈을 추존할 수 있도록 한 숙종의 은밀한 뜻이었으니 희빈 장씨에게 마땅히 명호를 올려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쳐 올라왔다.

이에 희빈 장씨를 사사하는데 일조하였던 노론이 대대적으로 반대하자, 노론의 기세에 눌린 경종은 선왕의 국상 중에 논할 일이 아니라며 상소를 올린 유학 조중우를 변방에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하려 했으나, 노론의 대신들은 조중우를 국문할 것을 요구하였고, 경종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노론은 조중우와 그 무리들을 압송해 국문하였고 조중우는 유배 가는 길에 사망하였다.[12]

얼마 후, 성균관 장의(성균관 유생 대표) 윤지술[13]이 장의의 권한으로 권당(성균관 유생들의 동맹휴학)을 선언하며 숙종대왕 지문(誌文)에 숙종희빈 장씨를 사사한 신사년의 일(무고의 옥)을 누락한 것을 비난하며 다시 기록할 것을 청하였다.[14]

(숙종이 희빈을 사사한) 신사년의 처분은 선왕(숙종)께서 국가 만세(萬世)를 염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전후 장주(章奏, 상소)의 비답에 성의(聖意)를 보이신 것이 해와 별같이 밝으니
전하께서 감히 다시 마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도리에도 당연한 일입니다
 
— 윤지술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을 주축으로 한 노론은 윤지술의 의기를 칭찬하며 그를 비호하였으나, 윤지술은 국왕의 생모를 망령되이 비난한 죄로 처형되었다.

조중우와 윤지술은 소론과 노론의 입장을 대표하여 각기 다른 생각으로 소를 올린 것이었는데, 조중우는 망령되게 숙종의 뜻을 억측하며 은혜를 빙자하고 대의(大義)에 어긋난 죄로, 윤지술은 어머니와 아들의 끊어질 수 없는 의(義)를 비하하며 군부를 욕보인 죄로 처형된 것이다.[15]

1722년(경종 2년) 신임옥사민진원과 노론을 축출한 경종은 비로소 어머니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증하였다.[16]

위약 언급 사건[편집]

보물 제1491호 연잉군 초상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의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로, 21세때의 모습이다.

경종은 어려서부터 비만이었으며 잔병 치레를 하였는데,[17] 즉위 후에도 후사가 없자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할 것을 청하였고,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18]

이에 청나라에 주청사를 보내어 세제 책봉을 승인받고자 하였는데, 이때 경종이 위약(痿弱)하여 후사를 이을 수 없고, 좌우의 잉첩(후비)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했다는 부분이 왕을 모욕하였다 하여 주청 부사 윤양래와 서장관 유척기가 변방에 위리안치 되었다.

 
"국본(國本)을 미리 세우는 것은 종묘(宗廟)를 중하게 여긴 까닭입니다.
따라서 사신(使臣)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은 사리에 의거해서
진주(陳奏)하여 기어이 준허(準許)를 받는 것이 사리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자문(咨文)을 찬술하여 들여올 적에
감히 '위약(痿弱)'하다는 두 글자를 성궁(聖躬, 임금)에게 방자하게 덧붙였다가,
그들과 묻고 답할 때에는 다시 위질(痿疾)이라는 말로 진술했습니다.
그리고 '좌우의 잉첩(媵妾)' 등이라는 말을 날조하여 꾸며서 임금을 마구 무함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먹을 수 있는 것이며 입에서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중략)
아! 너무도 통분합니다.
설사 우리 성상(聖上)께서 과연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은 질환이 참으로 있다 하더라도
신하된 자의 도리에 있어 진실로 외인(外人)에게 말하여 누설시키는 것은 부당한 짓인데,
더구나 없는 것을 있다고 날조하여 우리 임금을 무함하는 말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 가서 드러내면서 돌아보고 꺼리는 마음이 없었으니,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임금을 무시한 부도(不道)한 언행으로 국가를 욕보인 무례한 짓을 한 죄를
엄중히 징토(懲討)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돌아온 주청 부사(奏請副使) 윤양래(尹陽來)와 서장관(書狀官) 유척기(兪拓基)를
아주 먼 변방에 위리 안치 시키소서."
— 《경종수정실록》 3권,
경종 2년(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6월 19일 (임신)

신임옥사[편집]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종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여 후사를 도모하라는 노론의 주청속에 1721년(경종 1년) 음력 8월, 이복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18]

이후 한발 더 나아가 노론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였고, 소론측에서는 노론의 불순한 의도를 지적하였다. 경종은 별다른 입장 표명을 하지 않다가 목호룡의 고변이 터지면서 공론을 모아 환국을 시도하여 노론 세력을 불충(不忠)과 반역으로 몰았다.

연잉군을 지지하던 노론의 4대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와 50여명의 고관들이 사형당하고 그 일족이 유배, 투옥되는 등 연잉군은 커다란 지지 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경종 2년)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朴尙儉)과 문유도(文有道)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신임사화소론 강경파가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경종은 병약했고, 경종 비 선의왕후는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다른 종친의 아들 중에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으려고 하였다. 소론의 위협 속에서, 노론과 완론파 소론은 연잉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경종의 비호 아래 연잉군은 불안정하지만 왕세제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경종의 재위 기간 4년은 노론소론의 정권 다툼으로 정치가 잠잠할 날이 없던 시기였으므로 특별한 업적 또한 남기지 못했다. 이 시기에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발간되었고,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최후[편집]

사망[편집]

경종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고, 비만한 몸집[17]에 몸에 열과 화가 많고 형용할 수 없는 병을 앓거나 다시 회복되는 일이 반복되었다.[19]

予有奇疾, 十餘年來, 差復無期, 乃先朝之軫念。

내게 십여 년 전부터 이상한 병이 있는데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으니
이는 곧 선왕(숙종)께서 근심하던 바였다.

 
— 《경종실록》 5권, 경종 1년(1721년 10월 10일)

1724년(경종 4년) 8월 25일, 경종은 갑작스레 병을 앓고 복통과 설사를 반복하다가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였다.[20] 경종이 승하하기 전, 게장, , 인삼차 등을 수라로 든 일이 있어[21], 경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영조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이 유포되었다. 이는 이인좌의 난나주 괘서 사건 때도 언급되면서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정통성과 관련한 아킬레스건으로 남게 되었다.

경종과 선의왕후가 묻힌 의릉

묘호와 시호[편집]

묘호경종(景宗)이며, '경(景)'은 사색(思索)을 좋아하고 크게 국사를 염려함을 일컫는다. 시호는 덕문익무순인선효(德文翼武純仁宣孝)이다.

능묘[편집]

능은 의릉(懿陵)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하며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태이다. 위쪽에는 경종이, 아래쪽에는 선의왕후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경종 독살설[편집]

경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병사가 아닌 독살 당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단의왕후의 남동생 심유현 등 소론 과격파를 통해 돌기 시작했다. 소론 과격파는 연잉군이 어의의 경고를 무시하고 올린 인삼, 부자를 먹은 뒤 경종이 사망한 점[22]을 주목해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경종 사후 이 독살설은 소론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김일경의 모의 사건을 시작으로 이천해의 난동, 청주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사건 등 오랜 시간 영조의 정통성 시비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중 나주괘서사건의 주모자 신치운(申致雲)은 영조가 자신을 친국할 때 '신은 갑진년(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습니다.' 라며 경종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운운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는 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23]

1754년(영조 30년), 영조는 본인은 경종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천의소감》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조선 제20대 국왕       경종 景宗    출생 사망
1688년 11월 20일 (음력 10월 28일)
조선 조선 한성부 창경궁 취선당
1724년 10월 11일 (음력 8월 25일) (35세)
조선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취정

부모[편집]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숙종대왕 肅宗大王 전주 1661년 - 1720년 현종대왕 顯宗大王
명성왕후 김씨 明聖王后 金氏
제19대 국왕
법모 인현왕후 민씨 仁顯王后 閔氏 여흥 1667년 - 1701년 여양부원군 민유중
驪陽府院君 閔維重
은성부부인 은진 송씨
恩城府夫人 恩津 宋氏
  • 1689년(숙종 15년) 폐위
  • 1694년(숙종 21년) 복위
인원왕후 김씨 仁元王后 金氏
혜순대왕대비 惠順大王大妃
혜순왕대비 惠順王大妃
경주 1687년 - 1757년 경은부원군 김주신
慶恩府院君 金柱臣
가림부부인 임천 조씨
嘉林府夫人 林川 趙氏
희빈 장씨 禧嬪 張氏
옥산부대빈 玉山府大嬪
인동 1659년 - 1701년 장형 張炯
파평 윤씨 坡平 尹氏


왕비[편집]

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정비    단의왕후 심씨 端懿王后 沈氏    청송 1686년 - 1718년 청은부원군 심호 靑恩府院君 沈浩
영원부부인 고령 박씨 靈原府夫人 高靈 朴氏
계비 선의왕후 어씨 宣懿王后 魚氏
경순왕대비 敬純王大妃
함종 1705년 - 1730년 함원부원군 어유구 咸原府院君 魚有龜
  완릉부부인 전주 이씨[24] 完陵府夫人 全州 李氏


경종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각주[편집]

  1. 숙종실록》 19권, 숙종 14년 10월 27일 (병인)
    왕자가 탄생하다
    왕자가 탄생하였으니 소의 장씨(昭儀 張氏)가 낳았다.
  2.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5월 4일 (기해)
    왕비 민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는 교서를 반포하다
  3.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10월 22일 (기묘)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다
  4. 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6월 16일 (을해)
    원자를 왕세자로 봉하다
  5. 숙종실록》 30권, 숙종 22년(1696년 청 강희(康熙) 35년) 5월 20일 (을해)
  6. 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10일 (계해)
    예조로 하여금 자진한 장희빈의 상장의 제수를 참작하여 거행하라고 하교하다
  7. 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7월 19일 (신미)
    대신 독대시 승지와 사관이 입시하다
    미시(未時)에 임금이 다시 희정당(熙政黨)으로 나가서 좌의정(左議政) 이이명(李頤命)에게 다시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이이명이 승지(承旨) 남도규(南道揆)·가주서(假注書) 이의천(李倚天)·기주관(記注官) 김홍적(金弘迪)·기사관(記事官) 권적(權𥛚)과 함께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갔다.

    조금 있다가 사알(司謁)이 와서 임금의 분부를 전하면서 이이명 혼자만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중략)

    승전색에게 청하여 승지와 사관이 지금 바야흐로 바로 들어가려 한다는 내용으로 은밀히 품(稟)하게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남도규 등이 또 승전색을 시켜 승지와 사관이 결국 바로 들어가겠다는 뜻을 급히 주달하게 하고 걸음을 옮겨 나아가려 할 즈음에 임금이 비로소 입시하라고 허락하였으므로, 마침내 차례대로 나아가 부복(俯伏)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는 누구인가?"

    하니, 이이명이 아뢰기를,

    "남도규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이 독대(獨對)한 경우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승지와 사관이 극력 쟁론하면서 함께 입시(入侍)한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하였다.

    이때 이이명(李頤命)은 이미 물러나와 자기의 자리에 부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날 임금 앞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드디어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임금이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만 부르게 하였다.

  8. 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7월 28일 (경진)
  9. 숙종실록》 60권, 숙종 43년(1717년 청 강희(康熙) 56년) 7월 19일 (신미)
    안질로 국사를 세자에게 청정케 하다
  10. 숙종실록》 62권, 숙종 44년(1718년 청 강희(康熙) 57년) 9월 13일 (무자)
  11. 경종실록》 1권, 경종 즉위년(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7월 21일 (병술)
    장씨의 명호를 정하여 줄 것을 청하는 유학 조중우의 상소
  12. 경종실록》 1권, 경종 즉위년(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7월 24일 (기축)
  13. 인현왕후의 조카 민우수의 처남
  14. 경종실록》 2권, 경종 즉위년 9월 7일(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신미)
    장의 윤지술이 지문에 신사년·병신년의 일을 기록할 것을 청하다
  15. 경종실록》 2권, 경종 즉위년(1720년 청 강희(康熙) 59년) 12월 28일 (경신)
  16. 경종실록》 10권, 경종 2년(1722년 청 강희(康熙) 61년) 10월 10일 (임술)
    장씨를 추존하여 옥산부대빈으로 삼다
  17. 승정원일기》 477책 (탈초본 25책) 숙종 39년(1713년 청 강희(康熙) 52년) 4월 9일 (병진)
    이이명이 말하기를,

    "왕세자의 건강은 전보다 나아졌으며, 춘추가 한창 젊을 때이나 일찍이 비만이므로 이것이 염려되며, 다리의 통증은 실로 우려하는 바입니다."

  18. 경종실록》 4권, 경종 1년(1721년 청 강희(康熙) 60년) 8월 20일 (무인)
    영의정 김창집 · 좌의정 이건명 · 판중추 부사 조태채 등의 청에 따라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다
  19.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8월 2일 (임신)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병을 이루었고, 해를 지낼수록 깊은 고질이 되었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昏迷)한 증상도 있었다.
  20.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8월 25일 (을미)
  21.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8월 21일 (신묘)
    약방에서 두시탕 및 곽향정기산을 진어할 것을 청하다
    약방에서 입진(入診)하고 여러 의원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蟹醬]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生柿]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豉湯) 및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을 진어하도록 청하였다.
  22. 경종실록》 15권, 경종 4년(1724년 청 옹정(雍正) 2년) 8월 24일 (갑오)
    의식을 잃자 인삼차를 올리다
    비와 눈이 내렸다. 임금의 환후(患候)가 피곤하고 위태함이 더욱 심하고 맥(脈)이 낮아져서 힘이 없었다.
    (중략)

    이광좌가 문후(問候)를 하였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자, 세제(世弟, 영조)가 울면서 말하기를,

    "인삼(人蔘)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

    하였고, 이광좌가 삼다(參茶)를 올려 임금이 두 번 복용하였다.

    이공윤(李公胤)이 이광좌에게 이르기를,

    "삼다를 많이 쓰지 말라. 내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게 되면 기(氣)를 능히 움직여 돌리지 못할 것이다."

    하니, 세제(世弟, 영조)가 말하기를,

    "사람이란 본시 자기의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긴 하나, 지금이 어떤 때인데 꼭 자기의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 약제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하였다.

    조금 지나자 임금의 안시(眼視)가 다소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하여졌다.

    세제가 또 말하기를,

    "내가 의약(醫藥)의 이치를 알지 못하나, 그래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陽氣)를 능히 회복[回陽]시키는 것만은 안다."

    하였다.

    (중략)
  23. 영조실록》 84권, 영조 31년(1755년 청 건륭(乾隆) 20년) 5월 20일 (계사)
    신치운을 신문하다
    신치운(申致雲)을 신문하였다.
    (중략)

    신치운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이처럼 의심하시니, 신은 자복을 청합니다.

    신은 갑진년(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逆心)이며, 심정연의 흉서 역시 신이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분통하여 눈물을 흘리고,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통분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중략)
  24. 중종의 6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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