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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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
臨海君
군(君)
별칭
이진
李珒
별호 아명 이진국(李鎭國)
신상정보
출생일 1572년 9월 20일(1572-09-20)
출생지 조선의 기 조선 한성부 경복궁
사망일 1609년 6월 3일 (36세)
사망지 조선의 기 조선 경기도 교동군
왕조 전주 이씨
배우자 군부인 양천 허씨
자녀 슬하 3남 1녀
장남 이태웅(일연 선사로 출가)
차남(양자) 창원군(경창군의 아들)
삼남(양자) 양녕군(경창군의 아들)
종교 유교(성리학)

임해군(臨海君, 본명이진, 李珒, 1572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 1609년 6월 3일(음력 5월 2일))은 조선 중기의 왕자, 공신이다. 선조의 장자이며 광해군의 친형, 정원군의 이복 형이다.

공빈 김씨 소생이며 (李), 이름은 진(珒)이고 초명은 이진국(李鎭國)이며, 본관전주(全州)이다.

임진왜란 당시 순화군과 함께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갔으나 왜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풀려났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후일 광해군의 즉위 후 유배지 교동에서 사망했다.

생애[편집]

초기[편집]

선조의 서장자이며, 공빈 김씨의 소생으로 1572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임해군이 6세 때에 어머니 공빈을 잃었다. 1585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선조는 서자들 중에서 세자를 책봉해야 했는데, 장남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을 책봉하였다. 1591년(선조 24) 광해군, 이복동생 신성군, 정원군, 순화군 등과 함께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책록되었다.

임진왜란[편집]

임진왜란 때에는 동생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1] , 결국 1592년 7월 23일,[2]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 국경인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회령의 변고)[3]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 끝에 풀려났으나, 방탕하고 포악함과 난폭함 등 성격에도 문제가 있어,[4] 결국 임해군은 선조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5]

그의 유일한 후견인이었던 외조부 김희철도 임진년에 전사했다.[6]

또한 양사는 임해군이 임란 이후에도 민가를 약탈하거나 공물을 횡령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이유로 파직시켜야 된다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7]

역모 혐의[편집]

임해군은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된다는 상소[8] 에 따라 진도에 안치됐다가 교동으로 이배됐다.[9] 이후 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으며, 양사는 임해군을 비롯한 기자헌, 이흥로(李弘老) 등을 처단해야 한다고 9번이나 재차 진언했다.[10] 또한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진언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11] 그 후, 임해군은 교동으로 다시 유배 되었다.[12]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교동으로 유배된 이듬해에 그를 지키던 수장 이정표가 강제로 독약을 마시게 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임해군의 노비가 증언함으로써 임해군이 목 졸라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후[편집]

임해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임해군의 죽음을 병사[13][14][15] 라고 보고했으나, 1623년 인조 반정 후 재조사에 들어간 결과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출처 필요] 이후 임해군은 인조의 명으로 복권되었다.[16]

자녀 억류설[편집]

임해군의 자녀들은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억류돼 승려가 되거나 일본 장수의 부인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억류된 왕족은 임해군과 순화군[17] 이며 사료에 왕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으므로 자녀 억류설은 사실성이 없다.[18]

가족관계[편집]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23번째기사
  2. 선조 31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9일(을사) 5번째기사, 경성판관 이홍업이 가져온 가토의 편지. 왕자들이 보낸 편지엔 7월 24일로 되어있다.
  3.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무오) 16번째기사
  4.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21번째기사
  5.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17번째기사
  6.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무자) 11번째기사
  7. 선조 202권, 39년(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8월 24일(경신) 2번째기사
  8. 광해 1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2월 14일(신미) 8번째기사
  9. 광해 2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3월 2일(기축) 8번째기사
  10. 광해 4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5월 16일(신축) 2번째기사
  11. 광해 5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6월 1일(병진) 1번째기사, 정말로 광해군이 임해군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여론의 지지를 받고 사형시켜도 무리는 없었을 상황이였다.
  12. 광해 5권, 즉위년(1608 무신 / 명 만력(萬曆) 36년) 6월 20일(을해) 3번째기사
  13. 광해 15권, 1년(1609 기유 / 명 만력(萬曆) 37년) 4월 29일(경진) 5번째기사, 당시 임해군은 중풍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교동별장 이정표(李廷彪)가 관비를 통해 독살시키려 했으나, 관비는 거부하였고, 1609년 6월 4일(음력 5월 3일) 결국 직접 목을 졸라 죽였다고 되어 있다.
  14. 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15일(을사) 5번째기사, 교동의 현감이었던 이직(李稷)도 연류되어 있다.
  15. 광해군은 임해군의 사사를 계속 미루던 입장이었는데, '광해군의 지시에 의한 독살설'은 반정파가 광해군을 모멸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라고 본다.
  16. 인조 1권, 1년(1623 계해 / 명 천계(天啓) 3년) 3월 15일(을사) 5번째기사
  17. 선조 31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9일(을사) 5번째기사, 경성판관 이홍업이 가져온 가토의 편지에서도 두 왕자와 관원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왕손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왕손을 잡았다면, 편지의 목적상 왕손도 볼모로 잡았다고 언급할만한도 한데, 서신에는 두 왕자와 관원들의 기술만 존재한다. 또한 가토의 편지 외에도, 두 왕자를 비롯한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호군(護軍) 황혁(黃赫)등이 포로 상태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왕손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18. 이후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의 죄악상에 관련한 부분에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으므로 사실무근한 날조라고 본다. 이런 주장은 가토의 공적을 부풀리는 야사에 근거한다고 본다.
  19. 선원록(璿源錄)이나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에서는 양자로 들어간 부분은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