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군 (왕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Picto infobox prétendant à un trône.png
영산군
寧山君
지위
조선 성종의 왕자
이름
이전(李恮), 복숭(福崇 · 아명)
시호 충희(忠僖)
신상정보
출생일 1490년 윤9월 22일 (음력)
사망일 1538년 6월 11일(1538-06-11) (47세) (음력)
능묘 영산군 묘역(寧山君墓域)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39, 산103-1
부친 성종
모친 숙용 심씨
배우자 금릉군부인 심씨 · 교성군부인 정씨

영산군 이전(寧山君 李恮, 1490년 윤9월 24일 ~ 1538년 6월 11일)은 조선의 왕족으로, 성종의 열넷째 아들이자 서13남이다. 자(字)는 공근(公謹)으로, 시호는 충희(忠僖)다.

영산군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사냥을 좋아하였다.[1] 성종의 왕자들 중 영명하다고 여겨져 중종대에 여러 차례 역모에 연루되었다. 이때마다 대신들이 처벌할 것을 청했으나, 중종은 과거 견성군을 죽인 일을 후회하였기 때문에 영산군을 비호하였다.

생애[편집]

1490년(성종 21년) 윤9월 24일, 성종(成宗)과 숙용 심씨(淑容 沈氏)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恮)이며 아명은 복숭(福崇)이다.[2]

1508년(중종 3년), 신복의, 동청례 등의 역모혐의에 거론되었으나 영산군은 이를 부인하였다.

1513년(중종 8년), 반역을 모의한 박영무와 신윤무를 국문할 때도 영산군은 또다시 역모의 추대자로 언급되었다. 이에 영산군은 대죄를 청하였으나 중종이 비호하여 처벌받지 않았다.[3] 대신들과 사헌부에서 두번이나 역모에 연루된 영산군을 외방에 부처할 것을 청하였고[4], 왕실의 종친들 또한 영산군에게 죄줄것을 청했으나 중종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5]

1519년(중종 14년), 이복형인 경명군(景明君)과 함께 부도덕한 행동으로 물의를 빚었는데, 경명군은 외지부의 사람을 끌어다가 송사(訟事)를 즐기고, 영산군은 미복 차림으로 종 10명을 데리고 남의 기첩을 빼앗아 집에 데리고 왔다. 박수문은 중종에게 왕자들의 행실을 타이를 것을 청했다.

1521년(중종 16년), 영산군은 안처겸의 모반에 경명군과 함께 거론되었다. 세번째 역모에 연루된 것이다. 대신들은 중종에게 은정(恩情)을 끊고 경명군과 영산군을 처벌할 것을 청했으나 이번에도 중종은 이복 동생인 경명군과 영산군을 비호하였다.[6] 영산군과 경명군은 종부시와 헌부의 감시하에 일체의 사적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제 아뢴 경명군(景明君)과 영산군(寧山君)의 일은
 아래서 아뢰지 않을 수도 없고 중지할 수도 없는 일이니,
 빨리 은정(恩情)을 끊고 시급하게 처치하심이 어떠하리까?"
하니, 답하기를,
"내가 듣건대, 조종조(祖宗朝)에는 반역이 적었는데,
 내가 즉위한 뒤부터는 서로 잇달아 일어나니 이는 내가 부덕한 소치다.
 더구나 선왕(성종)의 아들이 자주 간사한 사람의 구설에 오르게 되니 더욱 미안스럽다.
 지난날의 견성군(甄城君) 일은 비록 부득이 하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내가 매우 후회스러워 뒤에는 비록 간사한 자가 왕자를 빙자하더라도
 동요하지 않기로 맹세했으니, 이는 특히 한 때의 일만이 아니라 만세를 염려한 것이다.
 옛말이 ‘한 자의 베도 나누어 꿰맬 수 있고 한 말의 조도 나누어 찧을 수 있는 법인데,
 형제간에 서로 용납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는데,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마땅히 본받아야 할 말이다.
(중략)
 당초 역적들의 죄를 정할 적에 왕자들에게까지 파급되어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는 않으나,
 막중한 천륜에는 지극한 정이 따르는 법이니 경 등의 감동했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경명과 영산은 죄줄 수 없다."
— 《중종실록》 43권,
중종 16년(1521년 명 정덕(正德) 16년) 10월 28일 (병오)


1523년(중종 18년), 진세호 등을 국문할 때 또다시 영산군이 거론되자 남곤 등이 영산군을 죄줄것을 다섯번이나 청하고, 대사헌과 대사간이 합사하여 영산군의 일을 계하자 중종은 마침내 영산군을 황해도 배천에 부처[주 1]하였다. 이후 영산군이 병이 들자 중종은 병구완을 하게 하였고 곡식을 보냈다.

1527년(중종 22년), 외방 부처된 곳에서 방환되어 서울에 머물게 되었다.

1534년(중종 29년), 영산군의 아내인 교성군부인 정씨의 4남매의 패륜과 불효를 의금부로 하여금 추국하게 하였는데, 정씨와 올케 양씨, 올케 이씨, 정씨의 언니 등 4남매가 모친의 상중에 서로 재물을 가지고 싸우고, 영산군의 처 정씨는 올케 양씨와 서로 말싸움하며 구타하였기 때문이었다.

1538년(중종 33년) 6월 11일 졸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정부인으로는 금릉군부인(金陵郡夫人) 청송 심씨(靑松 沈氏)와 1계부인으로 교성군부인(交城郡夫人) 경주 정씨(慶州 鄭氏), 2계부인 함흥군부인 황씨(咸興郡夫人 黃氏)과 첩부인 3명이 있다. 자녀로는 정부인 심씨가 2녀, 함흥군부인이 낳은 4남 3녀와 3명의 첩부인에게서 얻은 5명의 딸이 있다.

각주[편집]

  1. 중종실록》 19권, 중종 8년(1513년 명 정덕(正德) 8년) 10월 22일 (병진)
  2. 《영산군 태지석》
    황명 홍치 3년(1490년) 윤9월 24일 해시(亥時)생인 왕자 복숭(福崇) 아기씨의 태(胎)를 홍치 7년(1494년) 8월 25일 인시(寅時)에 묻다.
  3. 중종실록》 19권, 중종 8년(1513년 명 정덕(正德) 8년) 10월 24일 (무오)
    반역에 연루된 영산군이 대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4. 중종실록》 19권, 중종 8년(1513년 명 정덕(正德) 8년) 10월 26일 (경신)
    대신들이 영산군의 외방 부처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5. 중종실록》 19권, 중종 8년(1513년 명 정덕(正德) 8년) 10월 27일 (신유)
    여러 종친들이 영산군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팔계군(八溪君) 이정(李淨),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 연성군(蓮城君) 이적(李𤁰), 덕진군(德津君) 이활(李𤂾), 고성군(固城君) 이강(李鋼), 취성군(鷲城君) 이영(李穎), 완성군(莞城君) 이귀정(李貴丁), 상산군(常山君) 이말손(李末孫) 등이 영산군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 중종실록》 43권, 중종 16년(1521년 명 정덕(正德) 16년) 10월 28일 (병오)
    정광필 등이 나아가 영산군과 경명군의 처벌을 재촉하니 죄줄 수 없다고 답하다
  7. 광산 김씨(光山 金氏) 현감(縣監) 증(贈) 참판(參判) 김종(金綜)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8. 경주 정씨(慶州 鄭氏) 군수(郡守) 정충인(鄭忠仁)에게 출가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9. 별좌(別坐) 증(贈) 찬성(贊成) 정홍선(鄭弘先)의 딸로 기일은 5월 8일이다.
  10.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서출로, 4남 3녀를 두었다.
  11. 군수(郡守) 류현조(柳顯祖)에게 출가
  12. 자녀는 2남 6녀를 두었다.
  13.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14. 자녀는 2남 2녀를 두고, 서출로, 4남 2녀를 두었다.
  15. 현감(縣監) 최진양(崔震陽)에게 출가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16. 현감(縣監) 허광우(許光祐)에게 출가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주해[편집]

  1. 귀양보다 낮은 형벌로, 그 지역에 거주하되 지역 밖으로 벗어날 수 없으며 가족과 모여살 수 없다.